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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6주간 금요일 복음 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5-22 조회수1,465 추천수1 반대(0) 신고

 

석가가 하신 말씀 중에 인간은 태어난 것 자체가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해석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액면 그대로 해석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이런 걸 어릴 때 절에서 법문을 들을 때 부모님 따라 가긴 갔지만 사실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한 스님이 저와 같이 한 보름간 제 방에서 생활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스님한테서 불교 야사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데 한날은 이 말과 관련된 말씀을 하셔서 제가 여쭤봤습니다. 어릴 때 들은 이야기를 말입니다. 지금 제가 봤을 때 기독교와 불교가 바라보는 고통의 의미가 조금은 다르지만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가르침은 흡사한 게 아주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불교에 많은 지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아마추어적인 시각으로 말씀드리자면 불교는 인과법칙을 따릅니다. 흔히들 말하는 인연과보입니다. 저는 이게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런 우리의 복음말씀과 아주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런 개념에다가 그에 대한 상선벌악이라는 개념이 복합적으로 함께 작용한다고 하면 그게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과보의 개념과 비슷할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비유를 드신 게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을 이야기하십니다. 이 고통은 남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고통일 겁니다. 이런 말이 있더군요. 남자가 이 고통을 알려면 양 손으로 자기 입을 있는 힘껏 벌려보면 그나마 조금은 이해할 거라고 했습니다. 이런 고통을 한번 경험했다고 하면 아마 두 번째는 정말 그 고통이 두려워 생명을 가지는 게 두려움이 앞설 겁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그 두려움을 생각해 생명을 잉태하는 걸 포기하는 여인은 없을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 두려움은 아마 해산달이 가까워지면 생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도 한 생명을 얻는다는 경이로움 앞에서는 그렇게 큰 두려움으로 작용하지 못할 겁니다. 여인에게 닥친 진통의 시간 속에서 그 진통이 만약 영원한 시간이라면 그건 정말 상상하기 끔찍한 고통이겠지만 이 고통 너머에 탄생할 새로운 생명을 볼 것을 생각한다면 그 고통은 감수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다시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과정이 우리의 신앙여정일 겁니다.

 

이런 신앙여정에 산고와 같은 과정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마치 그렇게 진통을 겪은 연후에 새로운 영혼으로 탄생할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보통 보면 여성이 남자보다 신앙심이 좀 강한 편입니다. 그 이유가 여성은 이런 산고를 겪든 겪지 않았든 유전적인 DNA가 여성 속에 내재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성이 이런 면에서는 남자보다는 더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석가가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세상이 고해의 바다라고 한 말씀처럼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이 고통을 이기고 어쩌면 고통을 즐긴다는 건 좀 그렇지만 다음에 이런 복음이 나오면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즐기는 사람들의 삶을 제가 다른 사람들을 통해 본 것을 한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바라보는 법칙 중에서 하나 위로가 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이 현세의 고통이 연옥에서 고통보다 더 적은 고통이고 여기서의 고통으로 연옥에서 받게 될 고통보다 훨씬 작은 고통으로 그때의 고통을 이 세상에서 보속한다고 하면 조금은 이 세상에서의 고통을 참아 달게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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