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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1-20 조회수1,010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든 생각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과 가치관 또는 관점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 제각기 성격과 외모가 다르듯이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양합니다. 그래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선행되지 않으면 다양한 사람이 어우러져 사는 사회에서는 자칫 잘못하면 외톨이 아닌 외톨이가 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바라보는 최대의 관전 포인트가 어디에 있을 것 같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도 정확한 답은 없을 것 같습니다. 바로 보는 관점을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다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이 율법에 어긋나는 일인지 아닌지에 대한 관점도 있지만 저는 좀 더 이걸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은 먼저 예수님께서 치유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과 바리사이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치밀한 심리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시간상으로 안식일이고 예수님께서 마침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는 한쪽 손이 오그라든 병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어떤 행동을 하실지 예상을 했을 거라고 보여집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간 예수님의 모습을 지켜봐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분명히 병자를 치유하실 거라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러면 이를 바탕으로 해서 안식일의 규정을 들어 율법을 어긴 것을 구실삼아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을 작정이었을 겁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마음을 이미 간파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후반부에 나오지만 이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두고 슬퍼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완고하다는 것은 융통성이 없고 자신의 주장을 잘 굽히지 않을 때의 성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융통성이 없다고 봐야하고 무조건 안식일 규정에 정해진 계명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야말로 정말 율법을 잘 준수하는 것이라고 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도 나오지만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일의 우선순위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마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사고를 미리 차단시키기 위해서 또 이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 병자를 미리 치유하시는 기적을 먼저 행하시지 않고 그 전에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고 말씀을 하시면서 논리적으로 그들이 빠져나갈 구실을 원천봉쇄를 시킨 후에 병자를 치유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고발의 구실 자체를 사전에 완전 차단시킨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예수님께서는 화가 난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시면서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에 대해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병자를 치유하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다우신 탁월한 신의 한 수였다고 보여집니다.

 

여기서 저는 기적도 기적이지만 예수님께서 이 상황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한번 헤아려봤으면 합니다. 어찌 그리도 고정된 생각에 사로잡혀서 마음에 융통성이라고는 손끔만큼도 없고 손이 오그라든 병자가 있으면 설령 예수님께서 안식일이라 치유의 기적을 베풀지 않으신다고 하시더라도 그들이 먼저 예수님께 다가가서 그 병자의 아픔을 보고 측은한 마음으로 예수님께서는 능히 그 병자를 치유하실 수 있는 분이니 그 병자를 측은히 여겨서 치유의 은혜를 청하여도 모자랄 판에 그건 고사하고 되려 안식일 규정을 들어서 고발할 구실만을 찾으려고 하니 얼마나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도 같은 사람이면서 그런 상황에서 조금의 연민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을 지켜보셨을 때 예수님의 그 마음이 슬퍼셨다는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한번 우리 자신을 생각해봐야 할 면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나에게도 바리사이의 이런 면이 없지 않는지 말입니다. 육체가 병든 사람은 약이나 어떤 방법을 통해서 나름 치유의 방법이 있을 수도 있지만 설령 치유의 길이 없다고 해도 육체의 병은 살아 있는 동안 힘들 뿐이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들은 한 인간으로서 인간이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연민의 정도 없다면 그건 영혼이 불행한 사람이고 그런 영혼이야말로 어쩌면 예수님의 마음에는 병든 영혼으로 보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어떤 틀에 구속되어 있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와 같은 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한번 묵상해보게 됩니다. 만약 자신에게도 그런 면이 있다면 그런 모습을 예수님께서 바라보신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을 바라보실 때 슬퍼하신 것처럼 우리의 모습도 그와 같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금이 저릴지도 모르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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