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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바로보기 *혼인잔치의 비유 (마태22:1~1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6-20 조회수8,003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6. 20. 성경바로보기

혼인잔치의 비유

 

(마태22:1~14)

1 예수님께서는 또 여러 가지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제가 어렸을 적만 해도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저물어 갈 때쯤이면 저녁 식사 준비를 마친 어머니들이 하나 둘 씩 문 밖으로 나오셔서, 노는 데에 정신이 팔린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식사 자리로 불러들이시는 따뜻하고 다정한 모습들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아무개야 밥 먹어라는 어머니의 초청에 아이들 대부분이 반색을 하며 뛰어 들어갑니다.

그런데 간혹 안 먹어라는 대답으로 어머니의 식사초청을 거절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은 여지없이 딱지치기나 구슬치기 등에 푹 빠져서 배고픔을 애써 감추며 어머니의 식사 초청을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딱지나 구슬에 대한 집착이 어머니의 따뜻한 밥상에로의 초대를 거절할 만큼 가치 있어 보였던 어린 시절의 치기어린 어리석음이 우습기만 합니다만, 당시에는 그런 놀이가 왜 그렇게 가치가 있어 보였는지, 구슬과 딱지에 마치 사활을 건 사람처럼 집착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철이 들면서 결국 그러한 수고와 노력의 열매들이 전부 쓰레기 통으로 들어가 버렸지만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바로 그런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의 치기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항상 역사는 오물로 발각이 되고 묵시는 그 오물들과 충돌하는 형국으로 역사는 진행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파라오의 완고한 마음을 묵시가 삼켜서 출애굽을 성취하고,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아 버린 사건을 묵시가 품어 안고 선으로 낳아 버립니다. 역사는 그렇게 묵시에 의한 새 창조를 향해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역사와 현실에 집착하여 묵시의 세계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묵시와 역사의 충돌을 보여주고 있는 비유입니다.

오늘 본문을 올바로 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이 혼인잔치의 비유가 어디서부터 출발하여 서술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이 혼인잔치의 비유는 21장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부터 이어지고 있는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21장에는 드디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을 시작으로, 성전을 뒤집어엎으시고, 애꿎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는 주님의 모습과, 두 아들의 비유와 패역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리고 22장에서 이어지는 것이 오늘 본문의 혼인잔치의 비유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내러티브를 통해 마태가 그 일련의 사건들과 비유들을 통해 일관성 있는 한 가지 메시지를 던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혼인잔치의 비유를 좀 더 정확하게 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21장의 그 사건들과 비유들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먼저 간단하게 마태복음 21장의 여러 가지 사건들과 비유들을 개괄적으로 보고 오늘 본문의 비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1장을 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21:1~5)1 예수님께서는 또 여러 가지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을 하시는데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을 하십니다. 그것은 이미 스가랴서에 예언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즈가9:9)9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그런데 즈가랴서에는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라는 어구가 없습니다. 그 어구는 예수님께서 끼워 넣으신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의 유대인들이 나귀를 타고 들어오는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무언가를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느님의 메시아가 그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나귀를 타고 들어와 힘으로 세상을 제압하는 그런 메시아가 아니라 멍에를 매는 메시아로 오는 것임을 암시하셨던 것입니다. 는 짐나귀의 이야기는 이미 창세기 49장의 야곱의 유언에서 언급이 되었던 것입니다.

 

(창세49:9~11)9 유다는 어린 사자. 내 아들아, 너는 네가 잡은 짐승을 먹고 컸다. 유다가 사자처럼, 암사자처럼 웅크려 엎드리니 누가 감히 그를 건드리랴? 10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11 그는 제 어린 나귀를 포도 줄기에, 새끼 나귀를 좋은 포도나무에 매고 포도주로 제 옷을, 포도의 붉은 즙으로 제 겉옷을 빤다.

 

유다의 후손으로 실로, 즉 메시아가 오시는데 그 분은 나귀를 포도나무(게펜)에 매며 암나귀 새끼를 포도나무 가지(쏘레크)에 매신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자신의 옷을 포도주에 빠실 것이랍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이 겸손의 상징인 나귀에 자신을 매시고, 교회를 상징하는, 신부로서의 암나귀새끼를 포도나무 가지에, 예수님의 형국으로 묶어 버리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 그림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이 겸손의 나귀가 되시고(십자가), 신부인 교회, 암나귀 새끼가 포도나무 가지에 묶여서 포도나무가 맺는 열매를 맺게 되는 그런 그림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도 나귀의 등에 제자들의 옷이 얹혀 지고 그 위에 예수가 앉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예수가 함께 나귀와 묶이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묶임에서 나오는 열매는 하느님의 전쟁에 참여함으로 나오게 되는 열매를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매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아싸르전쟁에 참여하다, 전쟁에 함께 묶이다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전쟁에 암나귀새끼인 교회가 함께 묶여 포도나무 가지로 참여하게 되고, 그 전쟁의 결과로 열매가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전쟁은 물론 죄와 세상과의 전쟁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죄와 세상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을 가득 메우고 있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전쟁과 성도의 전쟁은 바로 자기부인의 전쟁인 것입니다. 그게 포도나무에 묶인 성도가 맺는 열매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포도나무 가지에 암나귀새끼가 묶여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선행이 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겸손의 나귀에 묶인 예수의 옷이 피로 물들어야 합니다. 그 나귀를 타신 자의 옷을 포도주에 빨 것이라고 했지요? 그 이야기가 이사야서에 나옵니다.

 

(이사63:1-6) 1 에돔에서 오시는 이분은 누구이신가? 진홍색으로 물든 옷을 입고 보츠라에서 오시는 이분은 누구이신가? 화려한 의복을 입고 위세 당당하게 걸어오시는 이분은 누구이신가? 나다. 의로움으로 말하는 이 구원의 큰 능력을 지닌 이다. 2 어찌하여 당신의 의복이 붉습니까? 어찌하여 포도 확을 밟는 사람의 옷 같습니까? 3 나는 혼자서 확을 밟았다.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와 함께 일한 자는 아무도 없다. 나는 분노로 그들을 밟았고 진노로 그들을 짓밟았다. 그래서 그 즙이 내 옷에 튀어 내 의상을 온통 물들게 한 것이다. 4 나는 마음속으로 복수의 날을 정하였다. 내 구원의 해가 온 것이다. 5 내가 살펴보았지만 도와주는 자 아무도 없었다. 놀랍게도 거들어 주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내 팔이 나에게 협력하고 나의 진노가 나를 거들어 주었다. 6 그래서 나는 분노로 민족들을 밟아 으깨고 진노로 그들을 부서뜨려 그들의 즙을 땅에 흘린 것이다.

 

실로(메시아)의 옷이 붉게 물든 이유가 뭡니까? 죄에 대한 분노로 원수를 밟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피가 자기를 붉게 물들입니다. 하느님이신 실로가 죄에 대한 분노를 누구에게 퍼 부은 것입니까? 자신에게 퍼 부은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느님의 자해 사건인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귀와 포도나무의 십자가가 암나귀새끼인 교회에게 그대로 遺傳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포도주에 자신의 옷을 빨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부인입니다.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땅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실재화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요한묵시록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묵시19:11-16) 11 나는 또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곳에 흰말이 있었는데, 그 말을 타신 분은 성실하시고 참되신 분이라고 불리십니다. 그분은 정의로 심판하시고 싸우시는 분이십니다. 12 그분의 눈은 불꽃 같았고 머리에는 작은 왕관을 많이 쓰고 계셨는데, 그분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이 그분 몸에 적혀 있었습니다. 13 그분께서는 또 피에 젖은 옷을 입고 계셨고,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14 그리고 하늘의 군대가 희고 깨끗한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서 흰말을 타고 그분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15 그분의 입에서는 날카로운 칼이 나오는데, 그 칼로 민족들을 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쇠 지팡이로 그들을 다스리시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격렬한 진노의 포도주를 짜는 확을 친히 밟으실 것입니다. 16 그분의 옷과 넓적다리에는, ‘임금들의 임금, 주님들의 주님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鐵杖을 들고 백마를 타고 전쟁을 하십니다. 그 뒤에 흰 옷을 입은 군대가 뒤 따르고 있지요? 그 전쟁에 교회가 함께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은 누구와의 전쟁이라고 했지요? 바로 우리 속에 들어 있는 마귀적 속성,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를 업수이 여기고 자신들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하여 세상적 행복과 만족을 채우겠다고 하는 모든 아담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쟁입니다.

그 전쟁에 맹렬한 포도주 틀을 짓밟는 실로의 분노가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은 이미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짓밟으신 하느님의 자해로 완결이 되었고, 역사 속에서는 성도의 삶 속에서 작은 그림들로 재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도 스스로의 죄를 폭로당하면서 스스로를 짓밟아 부인해 버리는 작은 십자가의 삶을 실재화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의 선택이나 동의를 전제하지 않고 폭력적으로 강요되는 삶입니다. 성도는 실로이시며 맏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귀 됨의 삶을 그대로 쫒아 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함께 묶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은 폭력적으로 우리를 침노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나귀와 포도나무의 이야기가 최초로 언급이 된 유다에 대한 유언이 유다의 삶 속에서 어떻게 성취가 됩니까? 유다에게 주어진 유언이 메시아에 관한 내용이었으니 그의 삶에서 메시아와 그 분의 하실 일이 그림자로 나타나야 하잖아요? 나귀와 포도주의 이야기가 그의 삶에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유다의 장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지요? 그 장자는 아버지의 기업을 유산으로 받을 자입니다. 아버지의 유산이란, 아버지의 언약, 아버지의 뜻과 약속의 성취를 말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언약이 장자의 죽음으로 끊어질 판입니다. 그 때 이미 형사취수, 시형제결혼법, 고엘이 시행됩니다. 그 속에 하느님의 언약 성취의 필연성과 확실성, 장자 됨의 유전법칙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장자가 후사가 없이 죽으면 차자가 그 자리를 접수합니다. 그 차자도 후사를 내지 못하면 셋째가 그 자리를 접수해야 합니다. 그러니 동생들은 아버지의 유업, 즉 아버지의 언약을 성취해 내기 위해 반드시 장자의 궤적을 그대로 쫒아 살며, 장자의 역할로 편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아버지의 유업을, 언약의 후손을 생산해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성취를 위해, 완결을 위해 동생들이 계속해서 장자의 자리에서 장자 됨을 물려받는 것입니다. 그게 시형제결혼법이 담고 있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그 언약의 흐름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장자의 아내인 다말에게 동생을 주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유다는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가 왕의 자리에 앉아, 하느님의 언약과 뜻을 무시하는 율법주의 속의 전체 아담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내가 내 것을 손해 보며 하느님의 언약을 성취해 내야 하느냐는 것이지요. 그게 하느님의 은혜의 자리를 떠나 스스로 하느님처럼 되겠다고 나선 아담의 모습 아닙니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자가 자기의 영광을 위해 모든 걸 올인 해 버리는 자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아담 속의 유다를 구원하고 하느님의 언약을 성취시키기 위해 다말이 창녀가 되는 수모를 겪는 것입니다. 그 다말이 바로 자신을 짓밟아 원수를 살려내는 예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걸 겸손이라고 합니다. 상대방의 짐을 대신 지고 묵묵히 그 상대방을 위해 멍에를 감수하는 것, 그걸 성경이 겸손이라 합니다. 그래서 겸손의 나귀인 것입니다.

그렇게 장자의 동생들은 아버지의 언약과 뜻을 성취하기 위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장자의 자리로 정확하게 연합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 사건으로 그것이 깨졌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맏아들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부정한 인간의 몸에 당신의 신성을 담으셨습니다.

스스로 창녀의 자리를 자처하신 것입니다. 다말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유다처럼 하느님의 뜻을 막고 있던 죄인들 대신에 스스로를 짓밟아 교회라는 후사를 기어코 만들어 내고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영적으로는 완결이 되고 완성이 되었는데 가시적 역사 속에서는 계속 진행 중에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 그 예수님의 동생들은 이 역사 속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 장자의 자리에 하느님의 맏아들이 앉으셨습니다. 그 하느님의 아들은 자신의 짐이 아닌 이웃의 짐, 아니 원수의 짐을 져내는 나귀의 삶을 삶의 원리와 속성으로 갖고 계신 분입니다.

유다의 장자의 자리에 다말이 창녀가 되어 들어가 하느님의 언약을 성취해 낸 것처럼, 예수님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장자들이 되어 버린 우리 아담들의 자리에 창녀처럼 자신을 짓밟아 우리 타락한 장자들을 살려 낸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 교회가 장자들의 총회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그게 진노의 포도즙 틀을 밟는 실로의 모습인 것입니다. 원수를 위해 자신을 밟아 죽여 버린 그 장자의 자리에 그 장자의 동생들인 교회가 암나귀 새끼들로 편입이 되는 것입니다. 묶여 버리는 것입니다. 역시 그들도 아버지의 언약을 성취시키기 위해 아버지의 뜻을 쫒아 장자처럼 죽어야 합니다. 그게 자기부인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시적으로 완성이 되는 그날까지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하느님의 장자들, 그 장자들의 총회인 교회는 계속해서 맏아들의 자리로 편입이 되어 자신의 죄인 됨과 전쟁을 하며, 결국에는 자신을 부인하고 죽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역사 속에서 가시적 구원의 완결 지점을 향해 자기부인의 전쟁을 하며 가는 것입니다. 그걸 구원의 현재시제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그렇게 피가 튀는 것이고, 그 피 튀김의 자리에, 그 고통스러운 생채기의 자리에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걸 부활이라 합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장자의 자리로 편입이 되어 예수처럼 나귀가 되어 죽는 자들을 산 자라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아래에 보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시형제결혼법을 예로 들어 예수님을 시험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일곱 형제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다 죽었을 때 그 일곱 형제와 결혼을 한 장남의 아내가 부활 후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이냐는 엉뚱한 질문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이런 대답을 하십니다.

 

(마태22:31~33) 31 그리고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해서는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읽어 보지 않았느냐?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33 군중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하였다.

 

우문에 현답을 하신 것이지요. 부활이라는 것은 죽은 장자를 대신하여 후사를 세우기 위해 그 장자의 자리에 편입이 되었다가 장자처럼 죽게 되는 그 삶 자체가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시형제결혼법 하에서 일곱 형제가 다 죽었다는 예를 들고 나온 사두개인들에게 이미 그렇게 하느님의 장자의 자리에서 죽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을 가리켜 산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출애굽기 3장과 4장에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다 죽었는데 그들이 살아있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산자의 하느님이시랍니다.

그 말씀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장자들이 영원 속에 완성이 되어 있는 하느님 나라에서 살아있다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모세라는 장자가 하느님 아버지의 장자들의 계보를 잇고 있다는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세 중 살아있는 자는 모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 산 자의 하느님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모세 속에서 살아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나귀가 되어 죽은 장자의 삶이 다른 장자에게 전이되고, 유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 한 몸, 한 유기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장자 예수는 지금 우리 안에서 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의 삶 속에 하느님의 보편적 교회 전체가 다 유기체로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의 한 몸 사상입니다.

따라서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죄와 허물에서 건져진 하느님의 교회는 이 땅에서 부활의 삶을 살게 되는데, 그 부활의 삶이 바로 장자이신 예수와 함께 옛 사람을 죽여 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은 완전한 부활이 성취되는 날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성경은 시형제결혼법의 최종 목적지를 부활로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언약의 완결은 성도와 하느님 나라의 온전한 부활로 종결되어 지는 것입니다.

 

(마태22:23~24) 23 그날,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4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이 자식 없이 죽으면, 그의 형제가 죽은 이의 아내와 혼인하여 그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시형제결혼법의 목적은 아버지의 기업을 받을, 다른 말로 아버지의 언약이 흐를 후사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 후사가 온전하게 낳아지는 날이 하느님 언약의 가시적 성취의 날이며 역사의 종결지점입니다. 그런데 후사를 세우다에서 세우다라고 번역이 된 아니스테미라는 단어는 바로 윗 절의 부활, 아나스타시스와 같은 어근을 가진, 같은 뿌리의 단어입니다. 즉 후사를 세우는 일이 부활의 완결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언약이 가시적으로 성취가 되는 그 날까지 계속해서 장자들이 처음 장자의 자리로 들어가 그 장자의 삶에 편입이 되어 그 장자처럼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완전히 죽는 날 완전한 부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자신감이, 우리의 야망이, 우리의 세상적 소원이, 우리들 속의 마귀적 성품과 욕구가 점점 죽어 가면 갈수록 우리들은 부활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세상은 그런 삶을 가리켜 가치 없고, 바보 같고, 유약하고, 가난한 삶이라고 손가락질을 해 대지만 그게 하느님의 백성들의 부활의 삶인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장자와 묶여 그 장자의 삶에 연합이 되어 버립니다. 그 장자의 삶이 우리의 삶 속에 열매로 맺힙니다. 그게 요한복음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그 어떤 열매도 다 장자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치르는 전쟁도 장자의 전쟁입니다. 우리는 그 뒤에서 그 분의 은혜와 자비를 얻어먹으며 한발 한 발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죽이고 은혜와 자비 앞에 납작 엎드려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공로를 의지해야 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 백성들의 삶인데, 유대인들은 되먹지 못한 선민사상으로 자신들의 구원은 이미 떼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자격 있는 자신들이 하느님 앞에 업적과 공로로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율법과 제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닙니다. 성도가 하느님 앞에 내어 놓을 수 있는 열매는 자기부인으로 말미암는 옛 사람의 죽음이며, 그로 말미암는 새사람으로의 부활인 것입니다. 그것은 나귀의 겸손으로 당신의 몸인, 진노의 포도즙 틀을 밟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십자가만을 붙드는 면목 없음이며, 뻔뻔스러움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업적이나 성취나 조건이나 자격, 열심이나 노력 등에 의해 복과 저주를 가르지 않으십니다. 나귀를 타시고 포도주 틀을 밟으시는 예수님의 은혜로만 복과 저주가 갈립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꾸 하느님을 감격시켜서 구원에 도달하려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설명이 무화과나무의 저주사건인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유대주의를 상징하는 성전을 기각하고 무시해 버리십니다. 그게 예수님의 성전 청소입니다. 율법과 제사의 상징인 성전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를 대척점에서 퇴색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나귀로, 그리고 밟히는 포도나무로 내어주심으로, 은혜에 의해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려 하는데, 그들이 그 은혜를 무시하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을 쟁취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힘의 원리 속의 세상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노력과 열심을 다 뒤집어엎으시고는, 그들이 바로 저주받을 무화과나무인 것을 제자들과 성경의 독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 애꿎은 무화과나무 앞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분명 성경은 그 때가 무화과나무의 때가 아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마르11:13) 그런데 때도 안 됐는데 거기에 가서 무화과 열매를 찾는게 정상인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해서 바짝 말려 버립니다. 심지어 영원, 아이온이라는 단어를 쓰셔서 완전한 저주를 퍼부으십니다.

 

(마태21:19) 19 마침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보시고 가까이 가셨다. 그러나 잎사귀밖에는 달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 나무를 향하여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 맺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자 나무가 즉시 말라 버렸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맺기를 원하시는 열매가 무엇이라 했습니까? 자기부인의 열매, 은혜 자각의 열매, 항복의 열매, 순종의 열매, 하느님에 대한 앎의 열매입니다. 그 비워진 그릇에 하느님 자신이 채우고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 때 완벽한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허다한 행위들을 내어 놓기는 하는데 그게 전부 자기 자신의 가치 향상과 자아성취와 자아긍정과 자아실현의 행위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것을 열매로 쳐 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건 그냥 무성한 잎사귀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율법주의, 유대주의, 물질주의, 성공주의의 잎사귀들은 하느님에 의해 저주를 받을 대상이지 칭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뭘 그렇게 잘못을 했습니까? 그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 수년간을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지 않아서 그렇지 때가 되었을 때에는 멋진 열매도 맺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때도 안 됐는데 찾아와서 열매를 찾더니 넌 영원히 열매를 못 맺을 것이다라는 영원한 저주를 해 버리는 게 어디 있습니까? 그게 은혜의 폭력성, 편애의 폭력성, 예정의 폭력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무화과나무들의 노력과 열심을 근거로 그 나무들의 축복과 저주를 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편애에 의해 축복과 저주를 결정하시고 나누신단 말입니다. 거기에 절대 인간들의 노력과 열심을 개입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아담 속의 인간들은 그걸 불공평하다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에게도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직 때가 안 되어서 그렇지 때만 되면 얼마든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중립지역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중립지역에서 자신들의 노력과 열심에 의해 위로 혹은 아래로 갈린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인본주의입니다.

 

(시편1:5-6) 5 그러므로 악인들이 심판 때에,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감히 서지 못하리라. 6 의인들의 길은 주님께서 알고 계시고 악인들의 길은 멸망에 이르기 때문일세.

 

보세요. 인간들은 딱 두 종류로 갈립니다. 의인과 악인입니다. 중립지역, 3의 영역은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치 중립지역에 서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립지역에서 자기들이 열심을 보태면 의인의 길에 들어설 수도 있고, 게으르면 악인의 길로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의인과 악인은 창세전에 나뉩니다. 중립지역에 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의인의 길에 들어선 이들은 세상 속에서 죽여서 부활하게 만드시고, 악인의 길에 있는 자들은 세상 속에서 시퍼렇게 자아실현과 자아성취를 하도록 놔두셔서 결국 영원한 저주로 죽여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 편 가름의 칼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자아 숭배교에 빠진 세상은 절대 그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저주받을 악인입니다. 그러나 창세전에 택해진 하느님의 장자들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노력을 의지하지 않으며, 오직 하느님의 은혜와 긍휼만을 의지하여 십자가만을 꼭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열매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잎사귀만 풍성한 무화과나무, 세상 속 아담들을 어떤 방식으로 저주를 하셨습니까? 십자가에서 죽는 방식으로 편 가름을 하여 저주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장자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에 필연적으로 편입이 되는 성도는 어떻게 하여 잎사귀만 풍성한, 힘의 원리에 의한 자아성취와 자아실현의 세상을 분리해 낼 수 있을까요?

역시 십자가로 갈라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약함과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폭로 당하고, 죽은 흙 취급을 받을 때, 하느님 주신 믿음과 희망으로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 믿음이 있는 자는 내가 이 무화과나무에게 한 일을 할 수 있다, 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잎사귀만 풍성한 저주받을 무화과나무였음을 올바로 직시하고, 자기 대신에 그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되셔서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만을 꼭 붙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 때 우리 자신은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는 것이고(자기부인), 그렇게 살고 있는 세상도 저주받은 무화과나무로 폭로가 되며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음이 있으면 내가 이 무화과나무에게 한 일을 너희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때 그 인간 가능성의 산, 율법의 산, 유대주의의 산, 힘의 산, 시온 산이 저주의 바다로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21:21-22)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 무화과나무에 일어난 일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여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가 기도할 때에 믿고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

 

이 일이 어떻게 성취가 되었다고요? 예수님이 저주의 무화과나무가 되셔서 말라비틀어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산, 유대주의의 산, 힘의 산, 물질주의의 산, 저주의 산이 되셔서, 저주의 바다로 던져짐으로 성취가 되었단 말입니다.

그렇게 이 역사 속에서 성도는, 완전한 자기부인의 길을 가신 예수를 좇아 매일같이 저주의 바다로 던져지고, 말라비틀어지는 심판을 받는 자기부인의 삶과 십자가의 삶을 실재화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심판을 벗기시기 위해, 진짜 저주를 풀어내시기 위해 세상 속에서의 작은 심판들과 작은 저주들과 작은 죽음들을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폭력적으로, 강압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뚫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허락도 받지 않습니다. 동의도 구하지 않습니다. 상의도 하지 않아요. 그냥 뚫고 들어오십니다.

하느님 마음대로입니다. 따라서 실패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의 이야기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로 끝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이 구하는 부활의 완료는 하느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기에 반드시 이루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견디세요. 잘 이기세요. 어떠세요? 나귀의 이야기, 예루살렘 입성의 이야기, 옛 성전 기각의 이야기, 무화과나무의 저주이야기가 전부 무엇으로 꿰어지고 있습니까? 은혜의 부각과 행위의 기각으로 꿰어지고 있습니다.

 

그 은혜의 내러티브를 좀 더 강화시켜 보여주는 것이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아버지로부터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는 명령을 받은 맏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순종하겠다고 해 놓고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못 가겠다고 해 놓고 가지요? 당연히 자신들의 행위와 열심을 의지하여 율법과 제사를 잘 지킬 수 있다는 유대인들의 실패와 그와는 대조적으로 세리와 창녀, 나그네, 이방인 등의 죄인들이 하느님의 은혜로 하느님 나라에 입성을 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둘 다 하고 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둘 다 실패 했는데, 한 쪽은 하느님의 간섭과 개입으로 순종의 자리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명령에 절대로 순종할 수 없는 죽은 흙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다고 나선 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들은 절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음이 역사적으로도 증명이 되었지요? 그게 십자가 사건 아닙니까?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그들이 정작 하느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에서 맏이라고 자처하는 힘을 가진 자들은, 전부 부재성과 은닉성과 연약함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감추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리와 창기들처럼 자타에게 공인된 둘째들이, 연약한 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부인되고 부정된 자들이 하느님의 은혜로 순종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전적인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순종의 자리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자신들의 힘과 위치와 지혜를 의지하는 자들은 은혜를 수용하지 못합니다. 그게 타락한 첫째 아담 속에 들어 있던 마귀적 속성인 것입니다. 그들에게 은혜가 찾아가면 그들이 어떻게 할까요? 당연히 죽여 버리겠지요? 왜 내가 내어놓을 수 있는 최상의 열매가 있는데 다른 열매, 자기부인의 열매, 십자가의 열매를 맺으라고 하냐는 것이지요. 그건 자존심 상하는 요구라는 것입니다. 그게 이어지는 패역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인 것입니다.

 

(마태21:33-41)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잘 보면 이 비유의 청자(聽者)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45절에 나옵니다. 주님은 그들을 악한 농부로 비유하고 계신 것입니다. 악한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종들을 다 때려죽이고 아들마저 때려 죽였습니다. 포도 소산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사람들을 때리고 죽이면서까지 지키려 했을까요?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그까짓 포도 열매 좀 내 놓는 것이 더 쉽지 않아요? 그런데 왜 아들까지 죽이면서까지 열매를 내 놓지 못했을까요? 열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인이 요구하는 열매를 하나도 맺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철저한 율법준수로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사람들입니다. 일주일에 이틀을 금식을 했고, 그것으로 구제를 했으며,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거의 흠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그런 것들을 열매로 간주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건 세상이 추구하는 열매이지 하느님이 요구하는 열매가 아니란 말입니다.

저는 이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를 둘만 고르라면 41절의 이라는 단어와 33절과 41절의 라는 단어를 고르겠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인생은 하느님으로부터 세로 받은 것에 불과한데, 우리는 마치 우리의 인생이 우리 것인 양 살고 있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이라는 것이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 규정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포도원으로 상징이 되고 있는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 악과 선이 갈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과 열심에 의해 악과 선이 갈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령이 악과 선을 가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열매를 맺으려고 하고, 그 열매를 자신의 소유로 삼으며 그 소유는 곧 인격화되어 자신의 가치향상의 도구로 쓰이게 됩니다. 그게 인간 세상입니다.

하느님은 그걸 열매를 내놓지 못하는 악한 세상이라고 하시고, 마치 무화과나무처럼 그들을 저주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주받은 포도원 농부들은 착한일, 선한 일을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반대로 착한일, 선한 일로 자신들의 의를 삼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순종의 열매, 자기부인의 열매를 원하고 계신데 죄인들은 자기의의 열매만 주렁주렁 맺고 있다가, 자기부정과 자기부인의 열매를 요구하는, ‘그런 열매말고 회개를 하라고 외치는 예언자들과 종들을 무참하게 살해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언자들과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종들과 아들처럼 같은 운명으로 묶여 있다는 걸아십니까?

 

(히브1:1-2) 1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2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언자들과 아들은 이 세상에 같은 열매를 요구하러 오셨던 것입니다. 자기부인의 열매, 십자가라는 열매를 찾으러 오셨던 것입니다. 그걸 회개라 합니다. 난 율법과 제사와 행위에 의해서는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그 자기부인의 행위가 바로 회개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 그 자기부인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담 속의 모든 인간들은 다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편애는 거기서도 위력을 발휘합니다. 하느님은 포도원 울타리 밖으로 버려진 주님을 모퉁이 돌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편애를 입은 어떤 무리들 속의 그 단단한 인본주의의 그릇을 깨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퉁이 돌에 붙여서 성전을 지어가십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마태21:42-46)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44 그리고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부서지고, 그 돌에 맞는 자는 누구나 으스러질 것이다.” 45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46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44절을 보면 예수라는 돌 위에 떨어져 깨어지고 가루가 되는 이가 복이 있는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만이 살 수 있습니다. 그들만이, 이 세상이 하느님으로부터 세를 얻어 사는 나그네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주인이신 하느님이 원하시는 자기부인과 순종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태복음 21장 전체는 하느님의 은혜와 인간의 행위,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열매와, 인간이 업적과 공로로 내어놓는 가짜 열매를 극명하게 대조를 함으로 말미암아 참 성도의 삶에 대해 심도 있게 조명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어지는 비유가 바로 혼인잔치의 비유인 것입니다. 이 혼인잔치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 즉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종결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완결의 그림인 것입니다. 왕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상하지 않으세요? 고대시대는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하루에 두 끼밖에 못 먹었습니다. 그러한 때에 동네에 잔치가 벌어진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아마 그 잔치를 먹기 위해 며칠 전부터 굶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입니다. 왜 그 대단한 잔치에로의 초대에 아무도 응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들에게는 그 아들의 잔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병행구절인 루가복음 14장에 조금 더 자세하게 그 이유가 나옵니다.

 

(루가14:18~20) 18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19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20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뭐 하느라고 잔치에 못 온 것입니까? 일상을 챙기느라 잔치에 못 온 것입니다. 딱지치기하고 구슬치기 하느라 진짜 풍성한 잔치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초청을 받은 자들이 자신들의 일상을 얼마나 소중하게 챙겼는지가 오늘 본문 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22:6)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아니 안가면 되지 왜 종들은 죽여요?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자아 숭배교에 빠진 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의 대가로 주어진 일상이라는 소유에 목숨 바쳐 집착을 합니다. 인간의 소유는 곧 인격화되어 자기 자신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일상을 사랑하는 삶을 포기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아들 혼인잔치에 자신을 얹어버리는 것이 어찌 쉬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회개하라로 아들의 잔치에 초청을 하러 내려간 하느님의 종들이 전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내가 중요하지 남의 아들은 비록 그가 왕자라 할지라도 나와는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자신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이 세상입니다. 바로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예수님께서 노골적으로 이 세상을 향해 예언자 살해자로 일갈을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태23:34~35) 34 그러므로 이제 내가 예언자들과 현인들과 율법 학자들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면 너희는 그들을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또 이 고을 저 고을 쫓아다니며 박해할 것이다. 35 그리하여 의인 아벨의 피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베레크야의 아들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 쏟아진 무죄한 피의 값이 모두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자 보세요. 패역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와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왕과 주인의 명을 받고 말씀을 전달하러 갔던 종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지요? 그 이야기를 예언자들의 죽음으로 풀어내고 계시 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벨도 예언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아벨이 죽은 이유를 밝히면 세상이 왜 혼인잔치에 오지 않고 종들을 때려 죽였는지가 밝혀지겠지요? 카인이 아벨을 왜 죽였습니까? 자신의 제사를 지키기 위해 죽였습니다. 카인은 사실 제사를 통하여 신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신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정성이라는 이름으로 신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식으로 다가선 것입니다. 자신의 제사 행위로 신의 사랑을 얻어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면서 자신의 제사를 기뻐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당연히 질투가 나지요? 그 제사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제사의 주인이 하느님이셨다면 왜 하느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를 질투하겠습니까?

그러한 카인이 자신의 제사 행위를 지켜낼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제사를 드리며, 공로로서의 제사행위를 부정하는 예언자 아벨을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이 카인에게 맞아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가능성과 자신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영광과 가능성을 부인하라고, 믿음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아벨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게 예언자와 예수를 죽이는 세상의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잔치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초청을 하러 온 종들을 죽인 이유가 뭐라는 것입니까? 자신들의 일상, 인간의 가능성에서 촉발된 자신들의 행위를 모두 부인하고 아들의 혼인잔치에 가서 아들의 영광만을 찬양해야 하는 그 상황이 싫어서 그 혼인잔치에 초청을 하러 온 이들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쉬운 말로 자신의 일상으로 상징되는 자신의 힘과 행복과 가치와 인기를 포기할 수 없어서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를 걷어 차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왕이 아들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는 자들을 전부 도륙해 버립니다. 그게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율법주의이며, 유대주의인 것이고, 세속주의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른 이들을 혼인잔치에 불러들입니다. 루가복음 14장으로 가서 그들이 누구인지 보겠습니다.

 

(루가14:21~24)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22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23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데려왔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약한 자, 무력한 자, 즉 자신의 힘을 자랑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왕이 그들을 지명하여 데려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혼인잔치에 참석하게 되는 사람은 무슨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왕에 의해 택함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세상에서 약한 자, 부인된 자, 무력한 자의 삶을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자리가 남았다고 하자, 다른 사람들을 강권하여 채우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구원은 폭력적으로 강권되는 것입니다. 절대 자신의 노력과 열심과 자격과 조건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0절에는 그 잔치에 초대받은 자들이 이렇게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22:10)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악한 자, 선한 자가 모두 초청을 받습니다. 그건 이 세상에서의 선함과 악함이 혼인잔치의 참석 여부를 결정하지 못한단 말입니다. 오직 강권하여 초청을 받은, 왕의 편애를 받은 정해진 자들이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오직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있었습니다. 예복이라는 것은 잔치 집에서 손님들에게 무상으로 한 벌씩 입혀주는 것입니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은 자신의 옷을 벗고 주인이 마련한 그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게 자신을 초청한 주인에 대한 예의였습니다. 그 예복을 만드는 데에 손님은 그 어떤 기여도 못합니다. 그냥 주인이 만들어서 선물로 주는 것을 입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그런데 잔치 집에 와서도 여전히 주인의 은혜에 자신을 내 맡기지 못하고 자신의 옷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잔치 집에 들어와 있다고 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이나, 상태나, 의지나, 열심 등에 의해 자신의 구원을 가늠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구원의 확신이니 뭐니 하면서 마치 검문소의 헌병처럼 사람들을 판단하는 사람들 있지요?

 

구원의 확신은 내가 갖는 주관적인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내 행실이 성실하고 경건할 때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다가도, 가끔 실패하거나 실수할 때에는 구원을 잃은 사람처럼 낙담하고 하는, 그런 감정적인 것과, 자신의 행위의 다소로 구원을 가늠하면 안 됩니다.

그건 구원의 운전대를 내가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잔치 집에 들어와 예복을 입지 않고 자기 옷을 입고 있는 사람입니다. 잔치 집에 들어온 사람은 자기 행위의 옷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무상으로 주어진 은혜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구원은 역사적인 것이고 객관적인 사실로 우리를 침노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하신 일이 우리의 구원의 확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우리의 상태나 노력이나 행위가 구원의 확신을 쥐락펴락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우리를 위해 나귀를 타시고 당신 자신을 짓밟아 뭉개 버리신 우리의 실로 덕에 우리는 무상으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저는 자, 가난한 자, 소경들, 세리들, 창기들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 부인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인된 자들의 삶 속에 예수가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우리는 행위의 산, 율법의 산, 공로의 산인, 시온 산을 저주의 바다에 던져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옷, 긍휼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게 바로 요한 계시록에서 말하는 의의 옷이며, 그게 바로 요한이 말하는 착한 행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포도나무이신 예수에게 접붙여져서 자기부인과 순종의 열매를 맺고 있는 사람인 것이며, 모퉁이 돌이 되신 예수라는 반석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진 옛 사람의 죽음을 믿음으로 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종들을 때려 죽였고, 우리가 아들을 때려 죽였는데 왕이 우리를 강권하여 잔치 자리에 앉히시고, 우리에게 무상의 예복을 입혀 버린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자유하세요. 하느님의 은혜의 지평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십시오.

그 때 우리에게서 진짜 열심과 진짜 성실과 진짜 변화가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혼인잔치는 왕의 아들의 잔치입니다. 하느님만 믿어서는 그 잔치에 못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아들을 알아야 합니다. 아들은 하느님의 마음이요, 은혜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힘과 소유를 이용하기 위해 하느님을 믿었던 바리새인들이 아들의 혼인잔치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아들의 잔치는 은혜의 잔치입니다. 그리고 들어오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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