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에덴동산에 담겨 있는 복된 소식 (창세2:8 -1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09-06 조회수1,176 추천수0 반대(0) 신고

에덴동산에 담겨 있는 복된 소식

(창세2:817) 공동번역성서

8 야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마련하시고 당신께서 빚어 만드신 사람을 그리로 데려다가 살게 하셨다. 9 야훼 하느님께서는 보기 좋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그 땅에서 돋아나게 하셨다. 또 그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돋아나게 하셨다. 10 에덴에서 강 하나가 흘러 나와 그 동산을 적신 다음 네 줄기로 갈라졌다. 11 첫째 강줄기의 이름은 비손이라 하는데, 은과 금이 나는 하윌라 땅을 돌아 흐르고 있었다. 12 그 땅은 좋은 금뿐 아니라 브돌라라는 향료와 홍옥수 같은 보석이 나는 곳이었다. 13 둘째 강줄기의 이름은 기혼이라 하는데, 구스 온 땅을 돌아 흐르고 있었다. 14 셋째 강줄기의 이름은 티그리스라 하는데, 아시리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고, 넷째 강줄기의 이름은 유프라테스라 하였다. 15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이 동산을 돌보게하시며 16 이렇게 이르셨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는 죽음 속에 꽃 피는 생명이라는 복음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를 가지고 십자가를 만드시고 그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십자가 안에는 선악과를 따먹고 죽어야 할 죄인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혈로 말미암아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된 산 자들이 함께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은 타락한 죄인들은 반드시 그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은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 선악과와 생명나무 열매 속에서 우리 하느님의 백성들이 지향해야 하고 추구해야 할 삶의 내용과 원리를 찾아 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명령을 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선악과를 먹게 되면 인간이 선악을 알게 되어 죽게 된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인간은 선악에 관한 지식이 없을 때 참 인간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지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적어도 인간이라면 선악을 분별하여 선은 행하고 악을 멀리하는 것이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느님은 인간이 선악을 모를 때에 참 인간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무엇이고 이 무엇인지를 먼저 정의를 내려야 하겠지요? 성경에서 ’ ‘토브라는 말이 가장 처음 쓰인 곳이 보시기에 좋더라입니다. 하느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 피조물들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잘 지어지고 나면 그 때마다 참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쓰인 단어가 토브’ ‘입니다. ‘참 선하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의 목적대로 완성되어 존재하는 상태이라 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이 추구해야 하는 성경이 말하는 은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나무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 낸 倫理道德이나 도리(道理)가 아닌 하느님의 뜻과 목적에 맞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주장과 고집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것을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께서 100세에 난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그 아들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이 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칭찬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윤리관하고는 안 맞지요? 그 때 만일 인간의 윤리를 따라 어떻게 어린아이의 몸에, 그 것도 친자식의 몸에 칼을 꽂을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할 짓이 못돼하고 그 명령을 어기게 되면 비 록 그것이 윤리적으로 옳은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것을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여자는 물론 어린아이를 비롯해서 가축까지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을 하셨다면 그렇게 하는 것 이 입니다. 만일 도의적인 차원에서 아이들과 여자들과 살진 가축을 살려두면 그 것이 입니다. 하느님이 죽이라면 죽이 는 것이 입니다.

기생 라합처럼 비록 거짓말을 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한이 있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데에 관심을 두고 행하는 것을 이라고 하는 것이고 윤리를 따라 국가에 충성하겠다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을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을 행하게 되는 것이고 그때 비로소 참 인간 일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내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절대 순종의 상태, 그 상태가 바로 선악을 모르는 상태인 것입니다. 내가 선과 악을 판단하지 않고 하느님이 선이라고 하는 것을 선으로 여기고 하느님이 악이라고 하는 것을 악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은 오직 하느님만이 판별하여 결정하실 수 있는 영역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을 알게 되자 선과 악의 기준을 자기들 스스로 결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가 선악의 판별 자가 된 것입니다.

(창세3:22) 22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제 이 사람이 우리들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끝없이 살게되어서는 안 되겠다' 고 생각하시고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는 말은 선과 악이라는 것은 하느님만이 판별을 하시고 구분을 하시는 것임에도 인간들이 선악과 열매를 먹게 되자 인간이 하느님처럼 스스로 선과 악을 구분하고 판단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선과 악을 스스로 판별하고 판단해서는 안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은 하느님의 말만 잘 듣고 순종하며 살면 되는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였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때에 인간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티끌입니다. 하느님의 은혜가 부어지지 않을 때의 인간은 그야말로 똥 더미에 불과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는 절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선악과를 통해 그 사실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참 인간이 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느님의 은혜 아래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에덴동산에서부터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선악과나무를 통해 인간의 불가능함을 지적하시고 그 선악과나무에서의 실패를 통해 은혜로 주어지게 되는 생명나무 열매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 원리가 그대로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로 확대되어 보여 지는 것입니다.

 

성경이 율법을 蒙學 선생이라고 하지요? 蒙學 선생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리스와 유대 사회에서 어린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도덕과 윤리와 기초적인 학습 교육을 담당하던 가정교사 노예를 말합니다. 그 몽학 선생은 아이가 성숙해서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그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역할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던 것 이었습니다. 마치 인간이 선악과에서의 실패를 통해 은혜로 주어질 수밖에 없는 생명나무 열매를 인식하게 되듯이 율법에서의 실패가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은혜의 나무로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몽학 선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선악과와 생명나무 열매, 그리고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를 잘 비교해 보세요.

인간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도저히 지켜낼 수 없었던 존재였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게 되면 반드시 죽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 생명나무에 도달할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그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생명나무에 이르는 다리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백성들은 은혜로 생명나무 열매를 먹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를 먹은 것입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먹고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같은 이치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티끌인지라 도저히 그 율법을 지켜 낼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그 율법을 통해 하느님의 은혜가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 의 허망함과 보잘 것 없음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선악과 이지요

이렇게 인간은 스스로 하느님이 되려는 교만을 버리고 하느님의 보호 아래 있으면서 하느님께 순종할 때에 비로소 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느님의 창조 목적이며 하느님은 이제 새롭게 창조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느님께만 순종하며 그 분께 모든 삶을 의탁하는 자들로 그 분의 백성을 삼으시고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처음부터 에덴과 아담과 하와가 목적이셨던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과 아담과 하와를 통해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을 힌트 하시고 만일 그들이 불순종하면 어떠한 결과가 초래되며 그 나라는 어떠한 원리로 완성이 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성경이며 역사인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이 하느님께만 의존하며 그 분께 꼭 붙어 있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 신약에 잘 설명이 되어 있지요?

(요한15:5)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6 나를 떠난 사람은 잘려 나간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가지를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한 마디로 뭡니까?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절대 존재할 수 없다하느님은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 이렇게 창조부터 시작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하고 의존하여 그 분께 붙어있을 때에만 비로소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했으면 하느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었는데 타락을 하는 바람에 하느님의 은혜를 구해야만 하는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처음부터 은혜로만 존재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는 것을 타락과 심판과 구원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통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하느님의 백성들은 하느님의 말씀, 즉 계명을 잘 지키고 순종할 때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하느님께 꼭 붙어 있는 자들이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15:910)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계명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지켜내야 할 도덕법이나 제사법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된 자는 계명을 지킨 자가 되었다라는 선포인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상태로 회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일2:36) 3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때에 비로소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집니다. 4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자는 거짓말장이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자입니다. 5 그러나 누구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은 진실로 하느님을 완전히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6 자기가 하느님 안에서 산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 구절도 역시 하느님의 율법을 모두 지키는 자라야 구원받은 자들이라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이 구절들도 하느님의 은혜를 받고 그 분 안에 머물게 된 자들은 이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지켜낸 하느님의 백성으로 회복된 자, 계명을 지킨 자가 된 것이라는 복된 소식을 선포하는 구절인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입은 자들이 실제로 계명을 지키는 삶을 추구하게 되고 성숙하게 되며 결국에는 그렇게 완성이 될 것이라는 복된 선포인 것입니다.

만약에 이 구절들이 문자 그대로 율법을 다 지켜내는 자가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 단 한사람도 자신의 구원을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계명을 지킨 자로 회복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렇게 하느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그 분께 맡기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생명나무 열매를 먹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되었는데도 왜 이렇게 여전히 더럽고 추한 모습을 보이며 살까요?

 

우리는 복음을 알면 알수록 우리 속에서 나올 것은 쓰레기밖에 없다는 것을 더욱 더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영안이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라는 존재가 점점 명확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지옥까지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 삶에 은혜가 없으면 난 도저히 불가능한 존재라는 깊은 자각을 하게 되는 것이고(선악과) 그 절망은 우리를 생명나무의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자주 절망하도록 놔두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 속에서 아담이 되는 것이고 카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가 주는 참담함을 맛보시는 것 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아브라함이 되고 바오로가 되어 하느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의 행복 또한 경험하시게 되지요 선악과와 생명나무 열매를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여러분의 삶으로 직접 맛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를 삶으로 살다 가신 분이 계시지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주님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리와 연합되셨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의 죄가 되셔서 선악과를 따먹은 자가 겪는 암흑 속에 던져지셨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야훼의 동산인 에덴에서 쫓겨나 세상이라는 땅에 갇혀 버렸던 것처럼 (地獄) 주님은 죽음이라는 감옥에 갇히셨다가 하느님의 은혜로 그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 분의 삶 자체가 선악과와 생명 나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이 무덤 속에 들어 가셨을 때에 성부 하느님께서 은혜로 다시 살려내시지 않으셨으면 영원히 무덤속에 계셔야 하는 지경까지 자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삶을 그대로 살다 가신 것입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의 무덤을 천사가 열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너무 힘을 쏟으셔서 힘이 없으셔서 그런 것인가요? 아니면 예수님이 손수 그런 것을 하시는 것이 그 분의 명예에 흠이 되기 때문입니까?

(히브13:20) 20 영원한 계약의 피를 흘려 양들의 위해한 목자가 되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은 평화의 하느님이십니다.

여기서 이끌어 내다(다시 살리다)‘라고 번역이 된 아나고라는 단어는 재판정에서 쓰던 법정적 용어입니다. (시도16:3739) 37 그러자 바울로는 '치안관들이 로마 시민인 우리를 재판도 하지 않은 채 공중 앞에서 매질을 하고 가옥에 처넣었다가 이제 와서 슬그머니 내보내 주겠다니 될 말이오? 안 되오. 그들이 직접 와서 우리를 석방해야 하오' 하고 말하였다. 38 그 전령들이 치안관들에게 가서 이 말을 전하자 그들은 바울로와 실라가 로마 시민이라는 말에 겁을 집어 먹고 39 두 사람에게 가서 사과를 하였다. 그리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 그 도시에서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렇게 아나고는 법정에서 쓰던 법정적 용어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천사들을 시켜 예수님의 무덤 문을 열고 예수님을 이끌어 내시는 장면을 연출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고 지옥에 갇혀버린 아담처럼 그 분의 백성들과 함께 죄인의 자리인 죽음이라는 감옥에 들어가셨다가 간수에 의해 풀려나는 그 모습을 당시 히브리 사람들의 언어와 관습을 사용해서 그림으로 그리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죄인들이 겪어야 할 암흑을 겪으시고 하느님의 은혜로 생명의 부활을 육신을 입고 경험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예수의 삶을 그대로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 복음이 우리의 삶 속에서 깊이 경험되면 될수록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언제든지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는 티끌 같은 우리의 존재에 대해 깊이 인식하게 되는 것이고 그 때 우리가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가장 행복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주님이 지신 순종의 십자가를 달게 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순종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계명을 지키는 삶을 거룩한 삶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그 거룩한 삶이 사랑하는 삶이며 사랑하는 삶이 곧 하나 됨을 지키는 삶이 되는 것이고 하나 됨을 지키는 삶을 예배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 삶이 곧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곧 하느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삶인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보시면 하느님은 인간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들에게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스리며 지키라는 명령과 함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 함께 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것은 인간이 피조물을 다스리며 지키는 일의 내용이 바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만물의 제사장으로 세우시고 그들을 다스리고 지켜서 인간에게 떨어진 하느님께 순종하고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아 야 한다라는 에덴동산의 삶의 원리 안에서 그들이 떠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의 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된 우리는 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먼저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 하느님께 순종하고 의존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다른 피조물들이 하느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데에 기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내야 할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를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존재들을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다스리며 지켜 내야 하는 제사장의 삶을 살아야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에덴동산에 흐르는 네 강과 그 묘사에 등장하는 보석들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2:10) 10 에덴에서 강 하나가 흘러 나와 그 동산을 적신 다음 네 줄기로 갈라 졌다.

잘 보시면 에덴동산에서는 강물이 하나였는데 동산 밖을 벗어나서부터는 강이 네 줄기로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4라는 숫자는 네 방위를 나타냅니다. 온 세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에덴에서 발원한 강은 어떤 특정한 지역만을 적시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흐르는 강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그 강이 에덴동산 안에서는 이름이 없었는데 에덴동산 밖에서부터 이름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요?

하느님 나라에서 성자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냥 성자 하느님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비로소 이름을 가지십니다. 그 이름이 뭡니까? 예수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는 야훼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신다입니다. 이름이 없는 하느님 나라에 계시던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이름을 가지시고 그 이름이 담고 있는 내용을 순종하여 완성하시는 것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덴동산 안에서 이름이 없던 한 강이 사방으로 갈라져 이름을 갖게 되는 장면과는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에서 발원하여 넷으로 갈라진 그 강들이 에덴동산 밖에서 어떤 이름을 갖게 되는지 보겠습니다.

첫째 강의 이름은 비손입니다. 그 뜻은 풍성하다입니다.

두 번째 강의 이름은 기혼입니다. 그 이름의 의미는 터져 나가다입니다.

세 번째 강의 이름은 티그리스' 입니다. 그 의미는 화살처럼 빠르다입니다.

네 번째 강의 이름은 ‘’유프라테스입니다. 그 의미는 달콤하다입니다.

그러니까 그 네 강은 풍성하고 달콤한 것이 온 세상을 향해 화살처럼 터져 나가게 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강이 에제키엘서에는 이렇게 등장을 합니다.

(에제47:112) 1 나는 다시 그분에게 이끌리어 성전 정문으로 가 보았다. 그 성전 정면은 동쪽을 향해 나 있었는데, 그 성전 동쪽 문턱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 물은 제단 남쪽으로 해서 성전 오른쪽 벽에서 뻗은 선을 타고 흘러 내려 갔다. 2 나는 그분에게 이끌리어 북문을 나가 바깥 길로 해서 바깥 동문께로 돌아 가 보았다. 물이 그 대문 오른쪽에서 솟아나는 것이 보였다. 3 그분이 측량줄을 가지고 동쪽으로 재면서 가다가 천 척 되는 곳에 이르러 나더러 물을 건너라고 하기에 건너보니 물이 발목에 찼다. 4 그분이 또 재면서 가다가 천 척 되는 곳에 이르러 나더러 물을 건너라고 하기에 건너보니 물이 무릎에 찼다. 그분이 또 재면서 가다가 천 척 되는 곳에 이르러 나더러 건너라고 하기에 건너보니 물이 허리에 찼다. 5 그분이 또 재면서 가다가 천 척 되는 곳에 이르러 보니,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있었다. 물이 불어서 헤엄이나 치면 건널까, 걸어서는 건너지 못할 강이 되어 있었다. 6 '너 사람아, 보지 않았느냐?' 하고 말하며 그분은 나를 강가로 도로 데리고 갔다. 7 되돌아 와 보니 강을 끼고 양쪽에 나무가 무성한 것이 보였다. 8 그분이 말씀하셨다. '이 물은 동쪽으로 가다가 메마른 벌판으로 흘러 내려 사해로 들어 간다. 이 물이 짠 사해로 들어 가면 사해의 물마저 단물이 된다. 9 이 강이 흘러들어 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온갖 생물들이 번창하며 살 수 있다. 어디로 흘러들어 가든지 모든 물은 단물이 되기 때문에 고기가 득실거리게 된다. 이 강이 흘러 들어 가는 곳은 어디에서나 생명이 넘친다. 10 이 강의 물고기 종류는 지중해의 그것만큼이나 많아서 엔게디에서 에네글라임에 이르기까지 그 언덕에는 어부들이 그물을 쳐 놓고 늘어서 있으리라. 11 그러나 수렁이나 웅덩이에 있는 물은 단물이 되지 않고 여전히 짠물로 남아 있으리라. 12 이 강가 양쪽 언덕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며 잎이 시드는 일이 없다. 그 물이 성소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다달이 새 과일이 나와서 열매가 끊어지는 일이 없다. 그 열매는 양식이 되고 그 잎은 약이 된다.

어디서 많이 보았던 장면이지요? 에제케엘이 성령의 감동으로 강물을 봅니다. 그런데 그 강물은 성전의 성소에서부터 흘러나옵니다. 그 강물이 지나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나고 만물이 넘쳐나며 번성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는 에덴동산의 그 네 강물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를 조금 더 밝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요한묵시록에서 이와 비슷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묵시22:12) 1 그 천사는 또 수정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 양의 옥좌로부터 나와 2 그 도성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 두 가지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맺고 그 나뭇잎은 만국 백성을 치료하는 약이 됩니다.

(요한 413)13 예수께서는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하셨다.

예수님께서 그 분의 백성에게 영원토록 솟아나는 생수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요한7:3839) 38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39 이것은 예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그 때는 예수께서 영광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이 아직 사람들에게 와 계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에서 발원하여 사방으로 갈라져 흐르게 되는 그 강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다인들만이 아닌 온 세상에 퍼져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고 번성시키게 될 성령 하느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강물이 흐르는 곳에 금과 보돌라와 홍옥수 같은 보석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하느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보석과 같이 귀한 존재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것은 이미 대 제사장이 가슴에 열 두 보석을 달고 지성소로 들어가는 제사 의식에서 힌트 되었던 것이지요. 그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대 제사장께서 보석 같은 하느님의 백성들을 품고 하느님 나라로 입성하시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강이 흐르는 곳에 보석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에덴동산은 요한 묵시록 21장과 22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의 모형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반드시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어 내실 것임을 창조 때부터 만물과 역사속에 계약으로 담아 놓으신 것입니다. 그 원시적 에덴이 어떻게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이 되는지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티끌에 불과한 자들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보석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내시는가를 설명하는 책인 것입니다. 그 이 야기가 창세기부터 요한 묵시록까지 하느님의 계약으로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전편에는 내가 반드시 나의 은혜로 티끌인 너희들에게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하겠다는 하느님의 계약이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신약(新約)과 구약(舊約)이라 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느님의 크신 사랑 앞에서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엄청난 사랑 앞에서 무엇을 더 달라고 땡깡을 부리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에덴을 창조하셨지요?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 에덴을 창조하실 동안 아담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끌어내어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흙(마른 땅)에서 올라오게 하신 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고 들어가시는 모습과 아담이 흙에서 올라와 에덴동산에 놓이게 되는 모습을 비교해 보세요. 정확히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에서는 그 과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애19:4) 4 '너희는 내가 에집트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너희를 어떻게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로 데려 왔는지 보지 않았느냐?

(신명32:1012) 10 야곱을 만나신 것은 광야에서였다. 스산한 울음소리만이 들려오는 빈 들판에서 만나, 감싸 주시고 키워 주시며 당신의 눈동자 처럼 아껴 주셨다. 11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흔들어 놓고 파닥거리며 떨어지는 새끼를 향해 날아 내려 와 날개를 펼쳐 받아 올리고 그 죽지로 업어 나르듯 12 야훼 홀로 그를 인도해 주실 때, 어느 다른 신이 그와 함께 하였더냐?

이렇게 출애굽기와 신명기는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업어서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흙 에서 올라와 창조된 아담은 에덴이 만들어지는 동안 어디에 있었다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등에 업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티끌 만들어진 인간을 등에 업으시고 야훼의 동산인 에덴을 정성스럽게 만드셔서 그 티끌인 인간을 에덴으로 집어넣으시는 모습 속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이 어떠한 사랑으로 진행이 되고 완성이 될 것인가 를 미리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에덴동산에서도 요한 묵시록을 보는 것이고 그 크신 사랑으로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티끌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재창조된 우린 지금 하느님의 등에 업혀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하느님의 등에 업혀 하느님께서 재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떠한 상황 속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있는 곳은 하느님의 등인 것입니다. 내 상황만을 바라보면 여기가 정말 하느님의 등인가?’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느님께 얼마나 혼이 났는지 알지요? 그런데 하느님은 내가 광야에서 너희를 업어서 인도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우리가 당하는 어떤 모양의 환난과 고통도 모두 다 우리를 완성하고야 마시겠다는 하느님의 사랑과 배려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징계하시고 연단하실 때에도 우리를 업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며 잘 이겨내십시오. 거기가 바로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등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은혜입니까? 어느날 눈을 떠보니 나를 등에 업은 사랑의 하느님께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내 입에 물려주시며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간수들을 보내어 우리가 갇혀있던 그 죽음이라는 감옥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 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에덴동산에 숨어있는 복음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기뻐 어쩔 줄 모르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우리의 만족을 삼으려 하지 말고 그 은혜의 하느님과 은혜의 복음으로 행복해 하고 기뻐하십시오. 절대 우리의 상황에 무릎 꿇지 마세요. 그리고 우릴 괴롭히고 무시하고 안하무인으로 대하는 자들을 오히려 측은히 여기세요. 그들은 그렇게 우릴 연단하고 성숙시키는데 잠시 쓰이다가 지옥 불에 떨어 질 인간들인 것입니다.

그들을 미워하지 마십시오. 불쌍한 자들입니다. 우리를 위한 소품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소품들 때문에 우리의 거룩에 흠집을 내지 마세요. 허허 웃어주십시오. 우리가 보석이니까요. 주인공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