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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소돔을 위해 비는 아브라함/아브라함/성조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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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2-17 조회수285 추천수1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1. 소돔을 위해 비는 아브라함

 

그 사람들은 그곳을 떠나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배웅하려고 함께 걸어갔다.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앞으로 하려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 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민족이 되고,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식들과 뒤에 올 자기 집안에 명령을 내려 그들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하고, 그렇게 하여 이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그대로 이루려고 한 것이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그분 가르침을 지키는 신앙인의 길로 접어든 이유는 과연 무얼까?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걸으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영생을 얻으려는 것일 게다. 어쩌면 영생까지는 지금은 몰라도 좋다, 그건 어쩌면 덤으로 오는 복일 테니까. 문제는 지금의 마음의 위안으로 행복을 얻으려는 것이리라. 이것이 믿는 이의 이유일 게다.

 

그러면 과연 정의와 공정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도자가 실천에 옮겨야 할 기본적인 두 덕목이다. 고대 근동에서는 누구보다도 임금이 사회 통치의 두 기둥인 이것을 존중해야 했으며, 나아가 모든 지도자들이 그러해야 했다. 아브라함은 여기서 그 본보기로 등장한다. 어쩌면 그는 신앙인의 아버지, 믿음의 선조보다는 정의와 공정의 아버지로 불릴지도 모르겠다.

 

사실 정의와 공정은 아브라함 이후 계속 이어져 다윗 왕조가 왕국의 기초로 삼는 기본적인 두 덕목이기도 했다(2사무 8,15; 이사 9,6 ).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뽑으시면서 이 두 덕목을 당신의 지침인, ‘주님의 길로 주셨다. 우리 역시 신앙인으로 자부심을 가지려면 이 두 덕목을 믿음의 신조로 삼아야만 하리라.

 

이어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원성이 너무나 크고, 그들의 죄악이 너무나 무겁구나. 이제 내가 내려가서, 저들 모두가 저지른 짓이 나에게 들려온 그 원성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아야겠다.”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몸을 돌려 소돔으로 갔다. 이는 증거 없이 판단하지 말라는 거다. 죄가 엄청나게 크고 설사 본인들이 그렇다고 시인내지는 자백을 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증거가 명백하기 전에는 판결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려는 것일 게다. 다시 말해 아무리 죄질이 나쁜 죄인들을 다룰 때에도 정말 신중해야 한다는 것일 게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주님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결정되어 멸망으로 이끌어야 하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에도 아브라함에게 중재할 시간과 그 어떤 가능성을 보이신다. 주도권을 잡으신 분의 자비심이 막판까지도 드러내신다. 아브라함과의 이 대화는 정의와 공정을 드러내고 어떤 중대한 판단이나 결정을 삼는 데 참조가 되는 참으로 감동적이고 극적인 대화이다.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 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누가 뭐래도 절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정말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성경의 주요 관점은 하느님께서는 죄 있는 이만 벌하시며(신명 7,10; 24,16), 의인들의 경우그들은 자신만 구할 뿐(에제 14,16)이란다. 그러나 지금 소돔의 경우는 의인이나 악인이나 다(에제 21,8)‘ 벌하시겠다는 것은 정의와 공정의 관점에서 문제라는 거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주장은 정말 그럴 듯 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시면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그래 악인 단 몇 놈보다 의인 단 한 분이라도 찾아보라는 투다.

 

아브라함이 다시 말씀드렸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의인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명 때문에 온 성읍을 파멸시키시렵니까?” 그러자 그분께서 또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마흔다섯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파멸시키지 않겠다.” 그래 네가 기대하는 그 의인 단 한 분이라도 찾아 데려오라는 강력한 언질이다.

 

이런 흥정내지는 담판이 무려 여섯 번이나 연속으로 이어졌다. 하느님께서는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하시면서, 속으로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느냐는 식이었으리라. 아브라함은 오십, 사십오, 사십, 삼십, 이십, 열 명까지의 이 여섯 차례 끈질긴 과정에서 드디어 열 명까지 하느님의 이해를 얻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는 왜 이 열 명까지의 여섯 번 담판에서 멈추었을까? 왜 일곱 번의 흥정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참으로 좋은 묵상거리다. 거기에는 분명 조카 롯과 그의 처, 두 딸과 앞으로 사위가 될 이 등 최소 6명이, 삼촌 아브라함의 그 끈질긴 흥정을 그토록 계속 이어지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이는 이 흥정을 완전하지 않다는 것으로 남기려는 의도도 어쩌면 있었을 게다.

 

사실 하느님과의 담판에서 완전한 것은 없다. 불완전한 인간과 완전하신 하느님과의 결합은 불완전만 만들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불완전한 우리와 타협을 해달라고 해서는 결코 안 된다. 하느님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그 자체가 죄 중의 큰 죄이니까. 여기에는 우리의 순종밖에는 없다. 정의와 공정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 우리의 공정과 정의 잣대로 맞설 수가 없다. 다만 사랑과 용서를 청해야만 할게다. 이에 예수님께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라고 우리에게 그 답을 주셨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자리를 뜨셨다. 아브라함도 자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갔다. 여하튼 아브라함의 그 피나는 중재에도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했다. 이는 그의 중재가 과연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게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는 끝내 사랑과 용서를 거부하시면서 벌하시는 분으로만 각인되지도 않으셨으리라. 이어지는 묵상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 두 지역을 멸하면서도, 끝내 아브라함을 기억하시는 것을 목격하게 될게다.[계속]

 

[참조] : 이어서 '22. 소돔을 위해 비는 아브라함'이 소개될 예정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소돔과 고모라,정의와 공정,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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