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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5주일 나해]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4-03-17 조회수123 추천수3 반대(0) 신고

[사순 제5주일 나해] 요한 12,20-33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지식인층의 무지와 허영을 지적하며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이유로 미움을 샀고, 그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지요. 그럼에도 의연한 태도로 법정에 있던 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러 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 운명을 향해 가는지는 신 말고는 모릅니다.” 그의 사형이 집행되기 이틀 전, 죽마고우인 크리톤이 감옥으로 찾아가 그에게 탈옥하라고 권유했습니다. 그의 도피를 돕기 위해 뇌물로 많은 돈을 가지고 왔고, 친구들도 대기 중이며, 타국에서 받아줄 사람들도 많으니, 제발 어린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목숨만은 부지하라고 호소한 겁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첫째, ‘악을 악으로 갚으면 안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둘째, 그의 재판이 지극히 합법적 절차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니 선고결과를 어길 명분이 없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신들과 철학의 선현들을 만나는 행복한 여정이며, 철학으로 단련된 자신의 영혼은 저승에서 크게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랬기에 주저하지 않고 독약을 마셨고,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빚지고 있네. 잊지 말고 그분에게 빚진 것을 꼭 갚도록 하게.” 고대 그리스인들은 치료를 받아 병이 나으면 약과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에게 그 보답으로 닭을 한마리 바쳤는데, 독약의 ‘약빨’이 잘 받게, 그래서 오래 고생하지 않고 금방 죽을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예물을 대신 바쳐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 속 예수님에게서도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의연한 모습을 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따르겠다는 순명의 태도로, 당신의 희생과 죽음을 통해 많은 이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굳은 신념으로, 그 순명과 희생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고 당신 또한 그분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기꺼이 받아들이신 겁니다. 그런 당신 희생의 의미를 밀알에 비유해서 이렇게 설명하시지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씨앗은 그 안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생명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한 몸 보전하겠다고 주변을 돌보지 않고 제 것만 챙기다보면, 그러는 사이 그 안에 품은 생명의 샘이 다 마르고 굳어 버립니다. 그렇게 생명의 싹을 틔울 가능성을 잃어버리면 모래알이나 돌조각과 다를 바 없는 ‘무생물’이 되고 말지요. 나만 챙기다가 우리 모두가 다 죽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밀알은 세상이라는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 남들보다 많이 가지려는 욕심이 죽어야 합니다.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잘 되면 된다는 이기심이 죽어야 합니다. 남들 위에 군림하려 드는 교만이 죽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심지어 하느님까지 내 뜻대로 쥐고 흔들려는 고집이 죽어야 합니다. 나만 옳고 넌 틀리다는 독선이 죽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내 틀에 억지로 끼워맞추려는 편견이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라는 토양에 은총의 씨앗을 심고 가꾸어 ‘회개’라는, 하느님 자녀다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겁니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의 감옥에 갇히지 않고 ‘우리’라는 관계를 생각하는 것, 그것이 나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그 방법에 대해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여기서 ‘자기 목숨’이란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하시면서 불어 넣어주신 ‘생명의 숨’을 뜻합니다. 인간 존재는 유한하기에 내 목에 붙어있는 숨도 내 생명이 다하는 순간 사라지지요. 그 중요한 사실을 간과한 채 내 목에 붙어있는 그 숨을 더 오래 붙잡아 두는데에만, 세상에서 더 오래 ‘생존’하며 그것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는데에만 신경 쓴다면, 정작 그보다 더 중요한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목숨이란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룬 사람이 그분 덕분에, 그분과 더불어 쉬는 숨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니 그분과 함께 쉬는 숨은 언제까지나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지요.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참된 목숨, 즉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내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더 나아가 내 목숨 자체를 주님과 그분 뜻을 위해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제 목숨을 포기하는 것, 즉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죽음을 두려워하셨습니다. 피할 수만 있다면 죽음에 이르는 고난의 길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길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절대 포기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담담히 그 길을 걸어갈 소명을 받아들이십니다. 다음의 말씀 안에서 그런 예수님의 굳은 의지가 드러나지요.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예수님 앞에 성큼 다가온 수난과 죽음의 길은 굳건한 믿음을 지니신 그분의 마음을 산란하게 만들만큼 힘들고 괴로운 과정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즉 세상에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가 온전히 실현되게 만들기 위해 당신이 하셔야 할 일을 잘 알고 계시고, 피하지도 않으시지요. 한 알의 밀알처럼 죽고 썩어서 수많은 새 생명을 싹틔울 당신의 소명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이비 교주들이나 이단자들이 항상 강조하는 것이 바로 고통 없는 행복, 노력 없는 성공, 십자가 없는 영광, 죽음 없는 부활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절대 불가능하다는걸 우리는 이미 수많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수난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이 버겁게 느껴질 때마다 하느님 아버지를 생각하고, 그분께 나 자신을 의탁하며, 내가 겪는 이 고통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더 큰 영광이 드러나기를 간절히 바라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런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누리시는 영광과 기쁨을 우리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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