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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바로보기 /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 (마르7,14-23)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7-01 조회수7,629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7. 01. 성경바로보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 

 

(마르7,14-23) 

14 예수께서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고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희는 내 말을 새겨 들어라.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 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17 예수께서 군중을 떠나 집에 들어 가셨을 때에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묻자 18 예수께서는 '너희도 이렇게 알아 듣지를 못하느냐?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 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느냐? 19 모두 뱃속에 들어 갔다가 그대로 뒤로 나가 버리지 않느냐? 그것들은 마음 속으로 파고 들지는 못한다' 하시며 모든 음식은 다 깨끗하다고 하셨다. 20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21 안에서 나오는 것은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음행,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 23 이런 악한 것들은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죄밖에 없다는 것을 절절하게 재확인할 수 있었어요. 그 어떤 옳아 보이는 행위도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높이고 만족시키는 데에 사용하는 악당들임을 처절하게 깨닫게 해준 그런 말씀이었어요.

오늘 본문은 겐네사렛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 뒤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비유의 말씀이에요. 먼저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겐네사렛에서의 사건이 어떤 문맥 속에서 등장하는가를 살펴봐야 돼요.

마르코복음과 마태복음에는 공히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지방으로 옮겨오시기 전에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일을 네가지로 기록을 하고 있어요. 첫 번째가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냉대를 받으신 일이고요. 두 번째가 세례요한의 죽음에 관한 기사이고 세 번째가 오병이어의 기적이고 네 번째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이에요. 그리고는 게네사렛의 이야기가 그 뒤에 붙어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위의 네가지 사건이 어떤 일관성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알게되면 오늘 본문의 비유가 쉽게 이해가 가겠죠? 먼저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냉대를 받으신 사건은 외적 조건만을 중시하는 인간들의 무지를 지적하는 사건이었어요.

 

마태복음에 보면요,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냉대를 받으시는 사건 바로 앞에 천국 비유들이 쭉 나열되어 있죠. 거기에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사건이 붙어있단 말입니다. 왜 갑자기 천국 비유 다음에 예수님의 배척 사건이 거기에 붙어 있는가? 궁금하셨어야 돼요.

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세우시는 천국은 은닉되어 있다 그랬죠? 누룩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쭉 나와 있었잖아요. 천국의 은닉성 그 은닉되어 있는 이 세상에 세우시는 천국은 눈에 보이는 그런 생존 세계의 만족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천국이 배척을 받게 될 것이다! 경홀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이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천국 비유들 쭉 나열하고 거기에 그 천국을 세우시는 예수님이 그것도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시는 사건이 붙어있는 거라 말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비유 바로 다음에 그 천국을 세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주 초라하게 묘사가 되어있는 거고 그 초라한 배경에 예수가 배척을 당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신 이유가 오늘 본문 바로 앞장인 마르코복음 6장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마르6,2-3)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자 많은 사람이 그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3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야 듣도보도 못한 그런 지혜있는 말씀이다'라고 감탄했다 그래요. 그런데 갑자기 3절에서 예수님을 배척했다 그래요. 낭떠러지로 끌고가서 밀어버리려고 그랬습니다. 왜 그랬냐 말이에요? 지금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는, 그분이 지혜로운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외적 조건이 자기들의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이 말씀하신 그 지혜 자체가 신뢰할 수 없는게 되어 버리는 거예요. 이게 인간들입니다. 힘의 세계 속에 사는 인간들. 그런데 그러한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재미있는 말씀을 하세요.

 

(마르6,5-6) 5 예수께서는 거기서 병자 몇 사람에게만 손을 얹어 고쳐 주셨을 뿐, 다른 기적은 행하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이상하게 여기셨다. 그 뒤에 예수께서는 여러 촌락으로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고향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거기서는 아무런 권능을 행하실 수가 없었다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예수님의 권능은 능력은 사람들의 대상의 반응에 따라서 나오기도 하고 나오지 않기도 하는 그런 종류의 권능인가요? 그건 아닐거 아닙니까.

그리고 6절을 보면 그들의 반응을 보신 예수님께서 이상히 여기셨다 그러죠. 어 이상하다? 왜 내 말이 안 먹히지? 이런 투로 들리지 않으세요? 그건 하느님이 하실 말씀이 아니잖아요. 이러한 내러티브 속에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거예요.

여기서 쓰인 이상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다오마죠라는 단어에요. 그 말은 예수님도 기대하지 못한 반응 때문에 예수님도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라는 그런 말이 아니라, 그 단어 원래 칭찬하다 놀라다 찬양하다라는 뜻이에요. 맞아요 이렇게 되는게 맞지요라고 할 때 쓰는 말이 다오마죠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직역을 하면 은혜를 거부하고 당신을 믿지 않는 죄인들 앞에서 무력한 모습으로 드러나신 그런 상황을 놀라며 칭찬하며 당연히 여기셨다라는 뜻이에요. 이상하다가 아니라... 다른 말로 그러한 반응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시면서 그 상황을 찬양했다는 거예요.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찬양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의 은혜에 의해 완성이 되는 죄인들의 구원은 그들의 죄인 됨이 드러난 곳에 예수님께서 거기서 아무 일도 행하지 못하였다라는 것은 무력함이에요. 예수님이 무력한 자로 서는 거예요.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들 앞에 예수님이 무력한 자로 서는 게 뭡니까? 십자가잖아요. 십자가를 뽑아들고 거기에서 권능을 행한게 아니라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들 앞에 무력한 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로 서는게 십자가란 말입니다. 이게 구원이다를 설명해 주는 거예요. 고향 배척 사건은...

지금 예수님의 고향에서 일어나는 상황이 바로 십자가 앞에서 전적인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 불가능한 죄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는 거예요. 그들은 설득시켜서 교훈시켜서 훈련시켜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존재들이 안된다는 거예요. 십자가로 밖에 구원이 안된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천국이 무력하고 보잘것 없는 것으로 보이는게 당연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그렇게 경홀이 여기는 것입니다. 배척한 거예요. 그들이요. 그래서 그들 앞에서 아무 능력도 행하지 못하는 무력한 자로 예수님이 서시는 거예요.

그들의 반응에 반응을 하여 아무것도 못한게 아니라... 그러나 그러한 무력해 보이는 십자가가 결국 그들을 구원해 낼 것이다라는 그런 말이에요. 그래서 천국 비유 바로 다음에 고 그림이 그려 있는 거예요.

 

천국은 이렇게 은닉되어서 너희들에게 온다란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십자가 구원 계획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시며 칭찬했다라는 뜻이에요. 그게 이상히 여기다란 뜻이에요. 눈에 보이는 외적 조건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은혜의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불가능한 자들 앞에서 아무런 권능도 행할 수 없는 모습으로 구원이 임하게 되는 하느님의 그 십자가 은혜는 칭찬받고 찬양받아 마땅한 것이다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주님이 그들이 믿지 않음을 놀라며 칭찬했다라고 다오마죠라는 단어로 표현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에 나오는 예수님을 배척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바로 여러분과 접니다. 병행 구절이 있는 마태복음 13장으로 가면 좀 더 명확하게 그 고향 사람들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알 수 있어요.

 

(마태13,57) 57 예수를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도 제 고향과 제 집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언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에서는 존경 못 받지만 다른 곳에서는 다 존경을 받는다 아니죠. 그 어떤 예언자도 그 어떤 곳에서도 환영받은 일이 없어요. 그럼 이게 무슨 말이냐 말이에요. 예수님은 온 세상의 합의하에 온 세상이 힘을 합쳐 죽인 거예요.

그런데 어디서 예수님이 존경을 받았어요? 보세요. 그렇게 예수님을 합의하여 합세하여 죽인 세상 그 가운데서 누군가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기대하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던 어떤 무리들이 우발적 잉여를 선물 받은 거예요. 그냥 선물 받은 거예요. 우발적 잉여를 선물 받은 거예요. 그걸 구원이라 그래요. 다 배척했어요. 다 예수님을 합세하여 죽였는데 어떤 이들에게 우발적 잉여가 선물로 주어진 거예요. 그걸 구원이라 그래요. 구원의 우발성.

그러니까 예수님의 고향 사람이란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태어나신 팔레스타인 땅에서 유대인 전체의 유대주의 사상,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는 하느님의 백성들 전체를 예수님의 고향 사람이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유대주의. 더 나아가서는 유대주의적 인본주의적 사고로 똘똘뭉친 모든 인간들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게 고향 사람이에요.

그들은 절대 예수님을 존경 못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누가 예수님을 존경하느냐. 예수님에 의해 우발적 잉여를 기대치 않았던 우발적 잉여를 선물 받은 유대주의 밖의 어떤 존재 이걸 이방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반복적으로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넘어가는 듯한 표현들이 쓰이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자들 중에서 아버지가 택하여 당신께 주신 자들을 건져내셔서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자신의 존재 안에 갇혀 있던 그들의 눈을 뜨게 해버리시는 거예요. 그들이 바로 이방인인 거예요. 눈을 뜨게 된 자.

모든 인간이 다 예수님 고향 사람이에요. 유대주의에 빠져있는 자들이에요. 그런데 그중에서 하느님의 은혜로 눈을 뜨게 된 자들을 이방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은혜를 입은 자들을 이방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세상의 이방인 유대주의의 이방인. 하느님이 그렇게 만들어 버리시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인간의 무식함과 불가능함이 폭로되는 현장이 예수님의 고향 배척 사건인 거예요. 구원은 오직 은혜에 의해 완결된다는 거죠. 인간들의 모든 행위는 결국 예수 배척 행위더라는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리고 이어지는게 세례 요한의 죽음이에요. 세례 요한은 이미 죽은 상태에요. 예전에 죽었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예수님의 고향 배척 사건과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 사이에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설명이 끼어들어가 있는가? 왜 뜬금없이 갑자기 옛날에 죽은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여기 들어가 있냐 말이에요. 그 해석의 키가 세례 요한의 죽음 사건 맨 앞에 서술이 되어 있어요.

 

(마르6,14) 14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그 소문이 헤로데왕의 귀에 들어 갔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 고 말하는가 하면

 

뜬금없이 세상 왕들의 모형이자 대표인 헤로데와 그 헤로데에게 맞아죽은 세례 요한이 대조가 되면서 등장해요. 그런데 마르코복음이나 마태복음 공히 헤로데왕이 세례 요한을 예수님과 비교하고 있어요. 헤로데왕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세례 요한이 살아난 곳이라고 두려워 떨어요.

그 세례 요한을 죽인 이가 그러고는 세례 요한의 죽음의 기사가 이어지는 거예요. 복음서 기자들이 이러한 내용 속에서 던지고 싶은 메시지는 세례 요한의 죽음의 내용과 이유가 예수님의 죽음의 내용과 이유와 똑같은 것이다라는 것을 비교하여 설명해 주는 거예요.

세상이 왜 예수를 죽였는지를 세례자요한의 죽음의 기사를 통해 설명하는 거예요. 그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를 등장시켜서 이 헤로데 안에는 누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내가 들어가 있는 겁니다. 이 헤로데가 바로 나인 거예요. 그럼 내가 왜 예수를 죽였는지 그리고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왜 수시로 나는 예수를 죽이고 있는지를 이 기사 속에서 여러분이 읽어 내실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헤로데는 사실 예수님을 죽일 마음이 없었어요.

 

(마르6,20) 20 그것은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여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간할 때마다 속으로는 몹시 괴로와하면서도 그것을 기꺼이 들어 왔기 때문이다.

 

헤로데는 세례 요한의 말을 달게 들었고 큰 번민도 느꼈다 그래요. 마치 바로 앞에 등장했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과 똑같죠.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 듣더니 참으로 지혜 있는 말이다라고 달게 들었단 말입니다. 똑같은 내용이 나오는 거예요 지금.

그들이 왜 예수님의 지혜를 묵살하게 되었다 그랬죠? 고향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행색과 배경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라 그랬죠. 다른 말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성취해 줄 수 있는 배경과 능력이 없다고 판단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거예요. 나에게 세상적 유익을 줄 수 없는 것은 그 어떤 지혜로운 말도 필요없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말씀을 듣고 '야 성경에서 어떻게 저런 말을 찾아냈지' 하고 감동하다가도 그게 여러분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금방 버리는 거예요. 그게 내 삶에 세상의 삶에 유익이 안되면 우리는 그 말을 계속해서 감사함으로 품을 실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세례 요한의 말을 달게 받았던 헤롯이 왜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지 보세요.

 

(마르6,26) 26 왕은 마음이 몹시 괴로왔지만 이미 맹세한 바도 있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어서 그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뭐예요? 체면과 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에요. 나를 지키기 위해서에요. 내 가치와 내 존재성 내 체면을 지키기 위해 그 세례자 요한의 말이 아주 달았고 그리고 감동도 받았고 번민도 일으켰던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존재성과 내 가치를 지키기 위해 죽이더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바로 너희들에 의해 그렇게 죽임을 당했다라는 뜻이에요.

성경은 성경의 독자들에게 그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그만큼 예수는 이 땅에 은닉되어 들어온다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계속 천국의 비유 다음에 그런 내용들이 붙어 나오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의 존재성에 조금이라도 흠이 되거나 티가 되는 건 전부 삭제해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존재성을 수호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들에 악마성인 거예요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자아숭배교에 빠진 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른 사람들 떠 올리면서 '나쁜 놈들' 그러면 안 돼요.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지적하는건 다 우리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도 우리 안에 들어있는거. 우리 안에 들어있는 예수만 진짜입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은 하늘의 만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먹이가 되셔서 그들에게 하늘의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구원의 이야기를 모형화한 사건이죠.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제자들의 현실 인식이에요. 제자들의 현실인식은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현실과 상식과 경험에 묶여 있어요.

무리가 배고프니 밥을 먹여야 된다 이 현실인식에 묶여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합리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해요. 무리에게 말하여 밥을 먹고 다시 오게 하자는 거예요. 합리적이죠. 그때 예수님께서 참으로 물정 모르는 말씀을 하세요. '너희가 너희에게 있는 먹을 것을 줘라' 그래요.

'? 이 몇만 명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걸 주라고요?' 가지고 왔더니 오병이어에요. '우리가 갖고 있는 건 이건데요' 이 답답한 인간들 보세요. 예수님이 하늘의 풍요 하늘의 복음을 제자들에게 끝없이 말씀해주고 계시는데 그들은 그걸 오병이어 정도로 밖에 안 여기고 있는 거예요.

수만 명 앞에서의 물고기 두 토막 보리떡 다섯 개 옵사리온은 두 마리가 아니에요. 두 토막이에요. 빵 먹다가 목 메이면 한 번씩 빨아먹었던 거예요. 요만한 생선 조림. 이 세상의 이 생존 세계의 육적 만족만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 그것만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복음은 고작 수만 명 앞에서의 오병이어로 밖에 안보인다라는 것을 설명해 주는 거예요.

너희들에게 있는 거를 줘라 그랬더니 자기들에게 있는걸 떡 내놨는데 그것밖에 없었다 말입니다. 근데 예수님이 그걸 축복하시고 전부 갖다가 나눠 주라 그랬어요. 그랬더니 거기 있는 자들이 다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어요.

'그런 너희들은 지금 이 세상의 현실을 바라보느라 이 생존 세계만을 바라보느라 생명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아서 내가 너희에게 준 생명의 말씀을 고작 오병이어로 밖에 여기지 않는데 이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한번 보라'라고 한번 보여준 거예요. 진짜 이게 하늘의 풍요다라는 것을 그 자리에서 한번 보여주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을 먹이는게 하느님의 목적이었다면 매일매일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어야죠. 아니었다 말입니다. 딱 두 번. 오병이어 칠병이어. 그게 모두 유대인의 구원과 이방인의 구원을 설명하기 위한 두 가지 기적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칠병이어인 거예요. 그게 이방인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그렇게 예수님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해 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분이다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거기에서 오병이어로 뻥튀겨서 기거에 있는 수만 명을 다 먹여버린 것입니다. 이게 진짜 생명의 양식이다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나 보잘것없는 식사에요. 거기에서 주님이 오병이어로 진수성찬을 만들어 준게 아니라 그냥 서민의 도시락 보리떡은 그 당시에 돼지만 먹었던 거예요. 돼지나 소 애기가 그거 갖고 왔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돼지나 소가 먹던 거 그냥 주셨다니깐요. 이 땅에서 하늘의 양식은 그렇게 은닉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성찬식 행할 때 그 맛없는 빵과 시큼털털한 2,000원짜리 포도주 찍어 먹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서 여러분들이 하늘의 풍요를 그대로 현실화시켜 받을 수 있다면 여기에 진수성찬 차려 있어야 돼요. 성찬은 그렇게 하면 안 돼요. 그러나 하늘의 풍요는 이 땅에서 그렇게 은닉되어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오병이어에요. 돼지 먹는 보리빵. 그러나 그 속에 진짜 생명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그런데 보세요. 이렇게 제자들이 너희들에게 있는 걸 줘라 그랬을 때 덜렁 내놓은 게 오병이어였는데 나중에 사도행전으로 가면 베드로와 요한이 뭐라 그래요?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그런거와 비교할 수도 없는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자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이게 우리가 갖고 있는 거라 말입니다. 사망의 증상에 주저앉아 있던 그가 하늘의 생명으로 벌떡 일어나게 되는 그 하늘의 풍요를 우리가 갖고 있는 거예요.

제자들이 나중엔 그걸 알았다니깐요. 지금 이때는 세상의 그 현실 생존 세계의 현실만 바라보니까... . 오병이어인 거예요. 이거 어떡하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알고 나니까 내게 있는게 이게 엄청난 거구나!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일어나 걸어라'

여러분에게도 이런 당당함이 있어야 돼요. 가난하면 어때요 못 배우면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 있잖아요. 내게 있는 하늘의 것 그걸 자랑할 수 있는 분들이 돼야 되는 거예요. 성도는요.

자 이렇게 오병이어의 사건 속에서도 역시 인간 쪽에서의 무력함과 불가능에 대한 폭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만이 오롯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 사건인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사건도 똑같은 맥락의 기적이에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현장에서 제자들을 보내세요. 어디로? 겐넷사렛으로 보내시는 거예요. 이렇게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서 갈릴리 서편 겐네사렛으로 가라고 예수님께서 보내셨어요. 그리고는 산으로 올라가셔서 밤 사경까지 그들을 주시하여 보셨다 그러죠.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보낸게 맞죠. 밤 사경은 새벽 3시에요. 한시부터 3시까지이니까. 이 베테랑 어부들이 새벽 3시까지 노를 저었는데 꼼짝을 못하고 바다에 갇혀 있는 거예요. 풍랑이 이는 바다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곳은 빈들, 에레모스라 그랬죠. 요르단 동편이에요. 그러니까 어디에요? ‘광야에요. 빈들이란 단어가 광야니까...

 

광야에서 갈릴리 바다 건너 어디로 가는 거예요? 겐네사렛은 갈리리 서쪽이잖아요. 가나안으로 가는 거예요.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가는데 있어서 인간들의 노력이 과연 하느님의 열심에 도움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이 사건은요,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통틀어서 제자들 뒤로 딱 한번 물러간 사건이에요.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던 불기둥 구름기둥이 누구예요? 야훼의 사자. 그런데 야훼의 사자는 하느님이 보내신 하느님. 누구? 예수에요.

광야에서 불기둥이 딱 한번 뒤로 물러간 적 있었어요. 어디? 홍해 앞에서. 홍해 앞에서 불기둥이 뒤로 물러가서 이들을 홍해를 건널 때까지 지키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 예수님의 물 위를 걷는 사건은 무슨 사건이에요? 홍해를 건너는 사건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어떻게 구원의 이야기가 들어가 있는지 한번 보세요. 예수님께서 밤 사경 세시에 그때까지도 풍랑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제자들에게 다가가세요. 그것도 물 위를 걸어서 가세요.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다' 이 단어가 아주 중요한 거예요.

잘 생각해 보세요. 왜 제자들이 갑자기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외쳤는지 오병이어의 사건과 연결해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왜 유령이다 그랬을까요.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인간들이 자기 자신들의 그 육적 생존의 문제에 묶여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을 어떻게 여겼다고요? 오병이어로 여겼잖아요. 그들이 지금 풍랑 속에서 육적 생존의 문제에 허우적대고 있을 때 예수가 어떻게 보인다는 얘기에요? 유령으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성도라는 사람들이 육적 세계에서 육적 생존의 문제에 묶여 있을 때 예수는 유령인 거예요.

보세요. 여러분의 문제가 그 예수에 의해 척척 해결이 돼요. 유령처럼 안 잡히잖아요. 예수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아이고 나는 응답받았어' 쑈는 많이들 하지만 사실 유령처럼 안 잡히잖아요. 그게 하느님 나라의 은닉성인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은닉성. 예수가 그때 침묵하는게 아니다 라는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너희들이 그때 바로 예수에 의해 구원받고 있는 중이다 라는걸 보여주는 거예요.

제자들이 생존의 세계 속에서 그들의 육적 현실인 풍랑에 묶여 있을 때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가 유령으로 보여졌어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육적 생존 세계에서 눈을 돌리지 못할 때 우리에게 예수는 그저 유령이에요.

내 현실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그냥 유령. 눈에 보이는 체험을 주고 기적을 경험하게 해주는 그런 예수였으면 좋겠는데 사업이 잘 안되니까 '주님 좀 도와주세요' 그러면 다음날 그냥 매출이 빵빵 튀어 오르고 이런 기적적인 체험을 좀 하게 해주는 예수였으면 좋겠는데 유령처럼 대답도 안 하고 응답도 안 해주고 그렇게 경험이 된다 말입니다.

우리에게 내 현실에 침묵하시는 것 같아 심지어 나를 자꾸 낭떠러지로 밀어내는 분 같이 여겨질 때가 있어요. 그래서 어떨 땐 그러죠? 예수님 도와달라는 말 안할테니까 밀지만 마세요. 그럴 때 있다니깐요. 성도의 삶엔 반드시 그런 일이 있어야 돼요. 자 그게 바로 현실이라는 생존의 세계에 묶여 있는 유대주의의 예수 인식인 거예요.

유령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에게 다가가세요. 예수님의 나타나심은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함도 아니고 제자들을 도와주기 위함도 아니었어요. 예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을 목적으로 하셨다면 십자가 위에서도 능력을 보여주시면서 살아나셨어야 돼요.

예수님은 그런 거 보여주려고 제자들을 건너가게 한거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도와주려고 나타난 것도 아니에요. 애초에 제자들을 도와주려고 하셨으면 풍랑을 아예 일어나지 말게 하시던가 아예 건너가지 말게 하셨어야죠. 그런데 풍랑 속에서 밤새도록 고생하게 하셨다니깐요.

그래놓고 그냥 극적으로 나타나서 짠하고 내가 구해줄게. 이거는 마치 강도 만나가지고 실컷 뚜들겨 맞고 돈 다 뺏기고 난 다음에 '아휴 양발 속에 있는 십 불 요거 안뺏거서 감사하다' 이거랑 똑같은 거예요. 아니 아예 강도 안만난게 감사한 거지 실컷 뚜들겨 맞고 다 뺏기고 양발 속에 감춰둔 십 불 안뺏긴게 그게 감사한 겁니까? 예수님이 그런 거 보여주려고 지금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거겠냐고요.

예수님은 지금 성경의 독자들에게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교훈하고 계시는 거예요.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 현장에서 한마디로 기고만장했을 거예요. 자기들이 나누어준 빵과 물고기가 줄어들지를 않는 거예요. 분명히 자기들은 봤거든요. 자기들은 뭔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구별 의식도 생겼을 거고. 왜 모든걸 다 버리고 그 예수를 쫓고 있었던 거든요. 그리고 자기들 안에 능력이라는 것이 사유화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괜찮은 사람으로 한 단계 더 나아졌다는 착각을 했을 수도 있어요. 인간은 분명히 그런 착각을 합니다.

잘 들으세요. 성령은 말씀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괜찮은 사람으로 바꾸는게 아니라 죄가 무엇인지를 분별해 내는 눈을 주시는 거예요. 잘 분별하세요. 말씀은 죄가 무엇인지를 구별할 수 있게 만들어서 자기부인을 시키는 거예요. '아 나는 이런 존재구나'라고 내려가게 만드는 거지 여러분을 예수처럼 바꿔 내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때때로 우리에게서 나오게 되는 기특한 행위나 멋진 선택 등도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우리에게서 격발이 되는 거예요. 내 안에 사시는 예수에 의해 잠깐 나오는 거예요. 그거는요. 내께 아니란 말입니다. 내꺼면 끊임없이 계속 나와야 돼요. 그게. 내 꺼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이 수시로 예수를 의심하는 거예요. 믿음도 내 것 아니에요. 하느님의 믿음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 믿음이 되는 거지 내가 사유하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육적 생존의 세상에만 눈을 두고 그 세상의 경험과 상식 안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 예수가 세우신 천국은 유령 같은 신기루에 불과할 뿐이에요.

그래서 풍랑이라는 현실 속에서 영생과 천국을 주시는 예수님의 영적 도우심을 구하는 자가 아닌 육적 세상의 풍랑과 싸우고 있는 자로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이다 라고 부르는 장면이 거기에 딱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생명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리고 우리가 이 풍랑 속에 빠져 죽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라는 그 확신이 있었다면 거기에서 예수를 불렀겠죠. 그러나 이들은 풍랑과만 싸우고 있었다니깐요.

그러니까 정작 예수가 나타나도 유령으로밖에 못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단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지금도 이 세상의 풍랑과 싸우느라 예수가 나타나서 '아니야 너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주어져 있잖아. 얘야 내가 몇 번 얘기했니 천국이 주어져 있잖아. 영생이 주어져 있잖아. 왜 그렇게 낙심하고 있어?' 그런데 이 소리가 안 들려. 유령이거든요 예수가. 우리는 여전히 유대주의 속에 들어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계속해서 베드로라는 인물을 통해 구원의 본질에 대해서 설명해주세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주님 만일 주님이시면 나를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오라'라고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요. 그런데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여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요.

그러니까 지금 베드로는 어디로 빠지고 있는 거예요? 노아의 홍수사건으로 가서 우리가 추론을 해보면 모든 숨쉬는 것들이 다 빠져 죽어야 하는 죽음으로 빠지고 있는 거예요. 도대체 베드로가 뭘 잘 못 했길래 그 예수님의 제자가 사망으로 빠지고 있는가를 알아야 되겠죠.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일 물 위를 걷는 베드로에게 그 물 위를 걷는 능력이 베드로에게 주어진거라면 베드로는 빠지면 안되요. 그죠? 베드로에게 그 능력이 주어진거라면 베드로가 바람이 아니라 허리케인을 봐도 빠지면 안돼요. 능력이 베드로꺼니까. 그런데 베드로가 빠졌다는건 그 능력이 베드로에게 사유화되게 주어지지 않았단 뜻이에요. 이게 지금 들어갔다 나갔다 하고 있다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건 그 앞에 어떤 말 때문에 지금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건데 어떤 말때문에 물 위를 걷는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 '오라'라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 들어있을때 물 위를 걷는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 오라라는 말씀 안에 들어있을때 걷는 거예요. 그 오라라는 말씀에 들어있는 고 상태가 지금 물위에 떠 있는 상탠데 이 베드로가 곧 내가 물 위를 걷네 제자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서 굉장한 자존심과 자만심을 갖고 지금 풍랑속을 가고 있는 그 상태와 똑같은 거예요.

'내가 물 위를 걷는 구나. 야 나는 다른 이들보다 확실히 수제자 자격이 있구나'라는 마음을 먹는 그 순간이 바람을 보는 거예요. 이게 지금 나를 보는 거거든요. 나를 바라 보는게 이 생존세계를 바라보는 거예요. 나를 바라볼 때 우리는 곧 바람을 바라보게 돼요. 그게 물에 빠진 상태다라는걸 보여주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그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와 그 하느님이 나에게 이미 허락되었다라는 그 사실 안에서 우리는 하늘의 풍요를 누리면서 살 수 있다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풍요를 누리냐면 말씀 안에서만 살 수 있어요. 우리의 환경과 조건은 절대 우리를 그 하늘의 풍요로 누리는 자로 못 만들어준다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 안에서 그 하늘을 사는 자가 아니라 갑자기 나의 현실과 그리고 나의 능력과 나의 행함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반드시 육적 세상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 말입니다. 고 상태가 바로 빠져 있는 상태에요. 구원이라는건 우리들의 어떤 노력이나 행위가 요만큼이라도 가입이 안된다는걸 보여주는 거라 말입니다. 이게 그게 바로 믿음 없음의 상태인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 하나 놓고 쩔쩔매고 있었죠. 이미 바로 고 전에 예수님에 의해 파견되었을때 귀신들을 막 쫓아내고 온 사람들이잖아요. 그 능력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믿었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계시지도 않는데 지들끼리 귀신을 막 쫓아내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안나갔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오시더니 '이 믿음없는 자들아' 그래요. 심지어 패역한 자들이라 그래요. 뭘 잘못했어요? 귀신들린 사람 고쳐달라고 데리고 온 사람 쫓아내고 있었는데... 패역한 그리고 믿음없는 상태가 뭐냐면 나에게 나는 하느님에 의해 어떤 능력과 은혜를 받아서 다른 이들보다 굉장히 괜찮은 존재가 되어져 있다라고 세상사람들과 나를 구별하는 그 의식! 그 자체가 바로 믿음없음이란 말입니다. 그게 물에 빠져 있는 상태인 거예요. 고게 물에 빠져 있는 베드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적을 베풀고 눈에 보이는 능력을 행해서 생존 세계의 눈에 보이는 풍랑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분이 아니에요. 이 생존의 세상에서 예수님은 마치 유령처럼 잡히지 않는 분으로 경험되어지는게 맞습니다. 그게 은닉되어있는 천국이에요.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침묵속에서 우리를 진짜 사망의 풍랑에서 건져내시는 분인거에요.

우리 인간의 행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거예요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가는데에는 사경까지 열심히 노 저었는데 못가요. 그 어떤 열심으로도 못갑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들어있을 때 물 위를 뜨는 거예요. 베드로처럼 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물에 계속 빠져 있죠. 여러분의 삶이 지금 빠져 있는 상태에요. 누구나 다 힘들어요. 이 세상의 삶은...

 

'나는 늘 빠져 있는거 같애' 그런데 그 빠져있는 상태에서 나는 이렇게 영원히 빠질 수밖에 없는데 예수님이 나 때문에 빠져죽은거 아니에요. 그게 요나서 아닙니까. 예수님이 죽고 요나가 스올(지옥)3일간 들어갔다가 나오니까 불가능한 아시리아가 구원을 받더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인 거예요. '내가 물에 빠져 이렇게 영원히 빠져 죽어야 되는데 이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사망의 물에 영원히 빠져 죽어야 되는데 이 순간에 예수가 나를 대신하여 빠져죽고 계시는거구나' 그때 이 사람이 물에 뜬거라 말입니다. 빠져 있지만 현실속에선 빠져있지만 거기에서 예수를 붙든 말씀을 붙든 사람이 뜬거라 말입니다. 이게 그리스도교인 거예요. '세상 풍랑 속에서 나를 건져주세요'가 아니라 '나는 빠져 있는데 어떻게 나에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나라가 믿겨집니까'가 떠있는 거라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 '야 하느님께서 기도 응답으로 이것도 해줬고 저것도 해줬고 야 나는 굉장히 괜찮은 사람이야 그래서 난 이런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할꺼야' 요게 빠진 거예요. 물속에 빠진 거예요. 나는 이렇게 물속에 빠질수 밖에 없는 자라는걸 자각하는 사람이 뜬 겁니다.

오직 물 위로 뜰 수 있는 분 저주와 사망의 바다 위에 발을 딛고 설수 있는 분은 예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그때마다 그 예수를 붙드는 자가 뜨는 거지 어떤 노력과 행위를 해서 물 위를 뜨겠다는 자는 곧 가라 앉아요. 아무리 수영 잘하는 사람도 하루 이틀 물 위에 못 떠있습니다. 물 위에 떠있는 방주로 들어가야죠.

예수를 붙들어야 된다니깐요. 그래야 가려던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오라라는 주님의 말씀 안에서만 사망의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거예요. 그들은 이 생존세계만 바라보는 이들은 이 생존세계 속에서 절대 빠져 나갈수가 없어요. 성도는 풍랑이는 현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물 위를 걷고 있는 영생의 현실을 볼 수 있어야 돼요

거기서 필요한게 믿음이라는 거예요 믿음이 뭐예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아닙니까. 자기 자신이 부인이 되어야만 가능한 거예요. 복음은 그렇게 성도를 부인시키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고 성도는 그 복음의 힘에 의해 저주의 풍랑 속에서 물 위의 현실을 볼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요러한 내러티브에 겐네사렛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다 기억하고 계셔야 돼요.

인간에 행위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는데 조금도 도움이 안된다. 그죠? 예수님께서 게네사렛에 이르렀는데 제자들 중 몇명이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었나 봐요.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쫓아왔다가 그걸 보았어요. 예루살렘에서 겐네사렛 까지는 저 아래에서 끝이거든요. 그런데 일부러 예수님의 책잡기 위해서 이 사람들이 쫓아온 거에요. 겐네세렛 까지요.

그리고는 올타꾸나하고 이제 흠을 잡아서 예수님을 막 공격한 거예요. '? 원로들의 전통을 무시하냐' 그때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의 말씀으로 응대를 하세요. 보세요.

 

(마르7,6) 6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사야가 무어라고 예언했느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원로들의 전통까지 지켜가면서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하는 자들의 실체가 '나는 깨끗해요' 그렇게 나의 깨끗함을 자랑하려고 하는 자들의 실체가 사실은 뭐였냐면 입술로만 하느님을 존경하되 마음은 그렇지 않은 헛된 경배라는 거예요. 근사해 보이는 인간들의 행위 전체를 다 부정해 버리시는 거예요. 행위전체를 다 그리고는 코르반의 예를 드시죠. 코르반이라는건 하느님께 드린 물건이란 뜻의 맹세물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거 하느님께 드린 거예요 라는 맹세. 나중에 지키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고렇게 맹세물 안에 들어가 있는 물건은 누구도 손을 못대요.

그런데 율법에는 너희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죽을 지어다라는 율법이 있거든요. 그건 율법이에요. 그런데 원로들의 전통이 코르반인데 '요거는 하느님께 드린 거예요'라고 하고 어머니 아버지를 봉양해야 할 자들이 봉양을 안한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이 약속을 어겨요.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 원로들의 전통을 지킨다고 코르반으로 드려진건 부모님에게 주면 안되니까 원로들의 전통을 지킨다고 율법을 정작 어기더라는 것이죠. 말씀을 어기더라는 거예요. 원로들의 전통을지킨다고 하는 너희들의 행위가 바로 고렇다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너희들 자신을 위해서 그러는 거지 너희들이 진짜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그러는거니' 라고 확 폭로시켜 버리는 거예요. 그들의 실체를...

예수님이 화가 안나겠어요? 여러분 인간의 율법에 대한 열심 도덕과 윤리에 대한 열심은 고작 그 정도의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라는걸 지적하는 거예요. 그 말은 바꾸어 말하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율법을 잘 지켜서 보다 낳은 사람으로 성숙되어지고 변화되어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의 그 율법적 열심은 결국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한 쑈에 지나지 않는 거란 말이에요. 우리는 뭔가 다르다는걸 증명하고 우리의 다른 신앙을 자랑하기 위해 공짜로 주는 건물을 안받았다라는 바로 고 행위처럼 결국 그게 무서운 죄였던 거예요. 자랑 할만한 착한 삶이 아니라 고게 결국 가장 무서운 죄였던 거예요. 그러면서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게 아니라 인간의 마음 안에 들어있는 것이 인간을 더러운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세요.

 

(마르7,18-23) 18 예수께서는 '너희도 이렇게 알아 듣지를 못하느냐?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 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느냐? 19 모두 뱃속에 들어 갔다가 그대로 뒤로 나가 버리지 않느냐? 그것들은 마음 속으로 파고 들지는 못한다' 하시며 모든 음식은 다 깨끗하다고 하셨다. 20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21 안에서 나오는 것은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음행,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 23 이런 악한 것들은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주님은 지금 인간들의 율법 지킴을 음식의 비유에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음식이 뱃속에 들어가서 뒤로 나가는 것처럼 인간의 행위가 인간을 더럽게 하거나 깨끗하게 하는 조건이 될 수 없다라는 거예요. 왜냐면 음식이 배속에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가는 동안 마음에 영향을 못미치는 것처럼 육체에는 영향을 미치지만 성경이 얘기하는 깨끗함은 마음에 깨끗함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육신의 깨끗함이 아닙니다. 그런 것처럼 율법 지킴이라는 인간의 행위도 인간의 더러움과 깨끗함의 판결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거예요. 죽을 때 까지 착한 일만 하다간 더러운 자가 있고 죽을 때 까지 살인만 하다간 깨끗한 자가 있단 뜻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더럽다고 규정하는데 무엇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걸까 보세요.

 

(예레17,9-10) 9 사람의 마음은 천길 물 속이라 아무도 알 수 없지만 10 이 야훼만은 그 마음을 꿰뚫어 보고 뱃속까지 환히 들여다 본다. 그래서 누구나 그 행실을 따라 그 소행대로 갚아 주리라.

 

너희들이 겉으로 내어 놓는 행위 뿐만이 아니라 심장에서 나오는 마음에서 나오는 그 행위를 살핀다는 뜻이에요. 그거 자신있냐라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인간의 마음은 날때부터 더럽기 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도 깨끗하게 청소가 안된데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돼요?

 

(필립2,5)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아니면 다 죽는다는 뜻이에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그러면 어떻게 열심히 노력을 해야 우리의 이 더러운 마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럽다라는 이 우리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될까요? 불가능이죠. 안됩니다. 무엇으로도 안돼요.

여러분이 깨끗한 행위 몇개해도 그 마음에 전혀 영향을 못미쳐요. 더러운 행위 몇개 했다고 그걸로 더러워지는게 아니라 마음이 더러워서 더러운거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그러면 그 마음은 어떻게 해야 돼요? 고칠 수가 없으니까 바꿔야 돼요. 새걸로 바꿔줘야 돼요. 그게 새 언약입니다.

 

(에제36,26) 26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 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 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

 

우리의 옛 마음은 하느님이 빼가신다는 거예요. 언제? 성령이 오실 때.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성령을 받았어요? 성령이 아니계시고는 예수를 주님이라 시인할 수 없다 그랬으니까 성령 받았죠. 성령 안 받고 여기와서 한시간씩 어떻게 듣고 있어요? 돌지 그럼...

그러면 여러분에게 새 마음이 있어요? 있어요. 그러면 여러분은 그 새 마음을 가진 구원받은 자가 되는 거예요. 성경은요 여러분의 행위가 어떻든 그 새 마음을 가진 자들의 행하는 모든 행위를 옳은 행실이라 그래요. 요한묵시록으로 가보세요.

 

(묵시록19,8) 8 하느님의 허락으로 빛나고 깨끗한 모시옷(아마포)을 입게 되었다. 이 고운 아마포(모시옷)는 성도들의 올바른 행위이다.'

 

여러분은 아마포는 뭐라고 배웠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의 흰 옷이라고 배웠잖아요. 우리가 그게 아마포잖아요. 그런데 성도들이 아마포를 입었는데 그게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래요. 그러면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여러분이 행한 옳은 행실들을 많이 쌓아놓은 거예요? 아니면 예수님에 의를 전가받은 그 아마포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은혜를 꼭 붙든 그 상태. 이게 옳은 행실이란 말입니다. 그게 야고보서에서 이야기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에서의 그 행함인 거예요. 예수의 행함을 내가 붙들고 있느냐. 거기에서 나오는 행함이 옳은 행실. 그거 없으면 죽은 믿음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착한일 많이 안하면 죽은 믿음이다가 아니라, 그래서 하느님 앞에 단 한가지도 가져갈 수 있는게 없어요. 그래 오늘날 개혁주의는 전부 성화를 하자는 거예요. 그 성화의 과정속에서 예수님은 늘 소외되는 것입니다. 성화는 우리가 이루는게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가 튀어 나오는걸 성화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변했다구요? 내가 변한게 아니라 내가 그만큼 부인되니까 내 안에 있는 예수가 나오는 것일 뿐이에요. 내가 변하는거 아니에요. 내 껍데기가 한꺼풀 한꺼풀 고난 속에서 벗겨지다 보니까 내 안에 있는 예수가 나오는 거지 내가 변한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왜 나를 자랑하냐 말이에요. 내가 변했다고 이게 인간들의 악마성이에요. 자기를 자랑할 수밖에 없는 그런 악마성. 보세요.

 

(1코린2,15-16) 15 영적인 사람은 무엇이나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사람 자신은 아무에게서도 판단 받지 않습니다. 16 성서에는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알아서 그분의 의논 상대가 되겠느냐?' 고 하였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착하게 살아라 그런 말 없어요. 그리스도에 마음을 가졌느니라 끝. 그걸 아는 자의 행위가 예수의 행위로 바뀌어가는 거예요. 이거 알아서 착하게 사는게 아니에요.

새 마음은 우리가 누구한테 배워서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착한 행위를 열심히 해서 갖게 되는 것도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옛 마음을 제하여 버리고 새 마음을 심어 버리는 은혜의 선물로만 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한 은혜의 복음을 믿는 자들이 이미 새 마음을 받은 자인 거예요.

그들에게는 영원한 하느님 나라가 약속이 되어 있고 그 속에서 누릴 영생이 이미 주어져 있어요. 그들에게 있어서 눈에 보이는 세상적 조건이나 환경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될까요? 함부로 고개 흔들지 마세요. 새 마음을 가졌는데 내 조건과 환경이 나에게 문제가 됩니다. 안된다고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거짓말 하지 마세요. 된다 말입니다.

미치겠어요. 죽을거 같아요. 내 환경과 조건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육적 생존의 세상에서의 예수님의 침묵이 그렇게 원망스러운 것이 될까요? 원망스럽습니다. 저도 때때로 원망스럽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육적 생존의 세상에서의 예수님의 침묵이 원망스럽습니다. 그들이 여전히 자기의 체면과 존재성 챙기기를 위해서 예수님마저도 살해해 버리는 삶을 살게 되겠습니까.

전 오늘 아침에도 예수님 손에 못박고 왔어요. 그들에게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이 오병이어의 보잘것없는 것으로 보이겠어요. 내 눈 앞에 있는 내 현실문제가 그 생명의 복음보다 더 크게 보여요. 어떨 때는 그들이 여전히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이 세상 문제 해결 따위로 해석을 할까요. 죄송하지만 우리는 전부 여기에 걸려요.

그래서 하느님께서 밖에서 들어가는 게 너희에 마음을 더럽게 못하게 조치를 취해 놓으신 거예요. 지금 새 마음을 받고 우리는 그 질문들에 다 걸리고 있잖아요. 그러면 지금 이것들이 우리 안에 들어가서 이 새 마음을 전부 더럽히고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새 마음이 밖에서 들어오는 것으로부터는 전혀 이제 흠을 타지 못하게 하느님이 조치를 취해 놓으신게 바로 구원의 완료성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아는 만큼 그 은혜의 깊이를 아는 만큼 우리는 나를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구나 안되는 거구나' 예수님만 꼭 붙들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와라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뭘까요? 인생의 질고를 진 사람들아 다 내게로 오라 아니에요.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하느님의 백성들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이 뭘까요? 율법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태11,28-30)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너희 마음이 쉼을 얻는다 그랬어요. 그 짐 다 없애준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데 그 지고 있는 짐이 쉽게 바꿔준다는데 어떻게 바꿔주냐 말이에요. 여기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이 누구인지는 바로 고 윗절에 설명되어 있는데 한번 볼까요. 마태복음 1125.

 

(마태11,25) 25 그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 누굽니까? 유대주의자들이에요. 율법주의자들. 바리새인들. 율법 지켜야지 착한일 많이 해야지, 제사 잘 지내야지 구원받는거야라고 자기들의 지혜로 구원을 정의하고 있는 자들. 그들이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에요. 어린아이는 뭡니까? 아버지에게 절대적으로 의존되어져 있는 자들. 아버지가 해야 쫓아가는 거예요. 애기는 자기가 그 아버지 일에 뭐하나 도움이 될 수 없는 어린아이.

자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겨져 있어요. 뭐가? 이 자유가. 그런데 어린아이 같은 백성들에게는 열려 있다고 하는데 그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 그들은 끊임없이 자기의 행위를 근거로 하여 다른 사람에게 내가 인정을 받고 자랑이 되야 돼요.

그리고 하느님 앞에도 그 율법과 행위를 가지고 가야 되기 때문에 헌금도 많이 해야 되고 선교도 많이 가야되고 착한일도 너무 많이 해야 돼. 교회 오기 싫어도 그거 때문에 와야 돼. 하느님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건 뭐예요? 짐이에요. 무거운 짐.

 

여러분 성당에 와서 예배 드리는거 이거 율법이에요. 조상들의 전통이에요. 예배 순서 조상들의 전통이에요. 율법이에요. 전통이에요. ... 주일날 11시 미사예배 드리는거 누가 정했습니까? 교회의 전통이 정한 거예요. 유아세례 교회의 전통이에요. 다 그 교회의 전통.

이걸 지금 짐으로 갖고 오기 싫은 거 억지로 오고 있는 분들, 여러분 죄짓고 계신 거예요. 그렇다고 주일에 다 여행가라는 말은 아니에요. 보세요.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죄를 짓고 있다니깐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잖아요. 여기에서 솔직히 듣기 싫어 죽겠는데 억지로 듣고 있는 분들 계시죠?

내가 여태까지 배운거랑은 너무 달라 그런데 안가면 죽인다니까 와서 앉아 있는 거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에요. 왜 짐을 지세요? 오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왜 짐을 지세요? 예수님이 쉬게 하신다 그랬잖아요. 어떻게 쉬게 한다 그래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그러죠. 배우래요. 말씀을 배우란 뜻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라고 하는데 온유와 겸손을 배워서 너희도 온유와 겸손을 내놓아라가 아니라 모든 인간은 겸손할 수가 없어요. 왜 내가 신이 되야 되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만 하느님 앞에서 겸손했어요. '죽어' 하니까 죽었단 말입니다.

그 십자가를 이해하고 그 십자가 붙드는게 바로 예수님의 멍에지는 거예요. 그거 붙들게 되면은 그 다음부터 그 예수의 은혜가 너무 알고 싶어서 와서 앉아 있게 되는 거예요. 이건 전통지키는게 아니라 그때는 진짜 예수가 알고 싶어 오는 거라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먼저 아는 거예요. 예수의 겸손과 온유가 그 십자가가 뭔지를 먼저 배우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내가 지금 뭔가를 하고 있다고 이거 안하면 사람들이 나를 뭐 우습게 볼거니까, '내가 원로인데 사목위원인데 아이고 내가 그래도 이때 안가면은 사람들이 얼마나 나를 우습게 볼까, 나 얼마나 폄하할까, 얼마나 뒷담화를 깔까' 이거 때문에 온다면 오지 마세요. 죄짓는거라 말입니다. 그게 그게 행위에요. 악한 행실.

옳은 행실이 뭐라 그랬어요? 예수님에 의의 흰옷 아마포 입는 거예요. 그냥 가만히 서있었는데 입혀 주는 거예요. 그거 입고 '이거 감사해서 어떡하지 이거 감사해서 어떡하지 내가 도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나는 그렇게 거져 입혀줘야 되는 존재일까' 이거 배워가는 거예요. 성도는요 그렇지 않고 그냥 자기의 행실을 쌓아서 자기의 자랑을 챙길려고 하는 이들 그들을 어떻게 한다고 그래요? 하느님께서.

 

(묵시20,12-13) 12 그리고 죽은 이들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책들이 펼쳐졌습니다. 또 다른 책 하나가 펼쳐졌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이들은 책에 기록된 대로 자기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13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고, 죽음과 저승도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바로 고 앞에서 우리에 행위에 정의를 배웠어요. 우리의 행위는 뭐예요? 옳은 행실, 옳은 행위 뭐예요? 예수님의 . 우리는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으면 어떻게 돼요? 예수님으로 여겨주시는 거예요. 꼭 끌어안아 주시는 거예요 하느님이.

그러나 내 행위를 거기에 요만큼이라도 보태겠다고 한 사람은 그 행위대로 갚아 주겠다는 거예요. 가서들 자랑하겠죠. 하느님이 계속 쳐가신다구요 너희들 심장에서 나오는 옳은 행위를 갖고 와 그때 우리가 뭘 내놓겠냐구요. 예수만 내 놓으면 되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 예수와 십자가만 하느님 앞에 내 놓으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죽은 흙입니다. 우리가 무얼 얼마나 더 아름답게 만들어서 하느님 앞에 내 놓겠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이여 자유하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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