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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5.14)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05-14 조회수7,541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7년 5월 14일

부활 제5주일

제1독서 사도 6,1-7

1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2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4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5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뽑아,

6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7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제2독서 1베드 2,4-9

사랑하는 여러분,

4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5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
6 그래서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선택된 값진 모퉁잇돌이다.

이 돌을 믿는 이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7 그러므로 믿는 여러분에게는

이 돌이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하는 그 돌이며,

8 또한 “차여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걸려 비틀거리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은 정해진 대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그 돌에 차여 넘어집니다.
9 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복음 요한 14,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

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저는 시간이 되면

자전거를 타고 종종

여행을 다닙니다.

차는 너무 빨라서 주변을

바라볼 수 없고,

 반면에 걷는 것은

너무 느려서 힘들지요.

그 중간이 바로 자전거이기

때문에 자전거 여행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한 번은 꽤 먼 거리를

달려온 것 같은데 생각했던

목적지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맞겠지.’라는 생각으로

계속 달렸지만, 원하는 목적지가

아닌 엉뚱한 곳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형제님께

여쭈어보았지요. “제가 ***를

가려고 하는데, 이 길이 맞습니까?”
그 형제님께서는 “아니요.

방향이 틀렸어요. 정반대로

가고 있는 거예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했을까요?

제가 원래 가고 있었던 방향으로

계속 갔을까요?

아니면 가르쳐주신 길인

정반대의 길로 갔을까요?

당연히 가르쳐주신 길인

제가 가던 길과 정반대의

길로 갔습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그것을 안 순간 바로 방향을 돌려야

목적지에 가장

 빨리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올바른 길을

가르쳐주신 분의 말을 무시하고

제가 생각했던 길로만

계속 갔다면 목적지에는

절대로 도착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 자신이 하느님처럼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분명히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과 판단만을

믿을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생각과 판단을 따르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왜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생각을 좀처럼 버리지 못할까요?

특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길만을 박박

우기면서 가려고 할까요?
주님께서도 이 땅에 오실 때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고,

이 세상을 떠날 때 역시 가장

겸손한 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주님께서도 직접 보여주신

이런 겸손의 삶을 간직하지 않고,

 주님의 길보다는 세상의 길을

선호하다보니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삶에 대한 불안감으로

마음이 산란해집니다.
그러한 우리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

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만을 믿고 세상의 길만을

믿으려고 하면 마음이 산란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전지전능하신 주님을 향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올바른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가고 있는 길에 대해서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혹시 주님의 길이 아닌 나만의 길을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욕심과 이기심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원하는 최종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습니다.

행복의 한 쪽 문이 닫힐 때,

다른 한 쪽 문은 열린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닫힌 문만

 오래 바라보느라

우리에게 열린

다른 문은 못 보곤 한다.

(헬렌 켈러)

제대로 된 길을 향해 가고 계신가요?

"예수님은 어디에?"

어느 주일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그리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열심히

하느님을 그리고 있었지요.

대부분의 아이들이 성당에 있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나

성당 마당에 있는 예수성심상의

예수님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그린 그림이

조금 이상한 것입니다.

아이가 그렸다는 예수님은 뒤에

십자가도 없고, 성당 마당에 있는

 예수 성심상의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대신 양복과 넥타이를 맨 그리고

안경까지 낀 어떤

남자를 그린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우리 친구는 누구를

그린 거예요?”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이에 아이는 환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예수님 모습이

잘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아빠를 그렸어요.”
이 아이의 눈에는 아빠가

예수님처럼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한없는

사랑을 주면서

잘 키워주시는 아빠가

예수님처럼 보였던 것이지요.
이제 나의 이웃들에게

주님을 보여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막연히

 하늘에만 계시고,

성당에 있는 성상 안에만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바로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내 이웃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제 피정 받으신 춘천교구 퇴계성당의

치명자의 모후 꾸리아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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