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빛나는 조연의 기쁨을...
작성자상지종 쪽지 캡슐 작성일2002-01-11 조회수2,591 추천수29 반대(0) 신고

 

 

2002, 1, 12 주님 공현 후 토요일 복음 묵상

 

 

요한 3,22-29 (세례자 요한과 메시아)

 

그 후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은 유대 땅으로 갔다. 그분은 그들과 함께 거기에 머무시며 세례를 베푸셨다. 한편 요한도 살렘에서 가까운 에논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다. 거기에는 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찾아와서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아직 감옥에 갇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대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에게 가서 "랍비,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당신과 함께 있었고 또 당신이 증언한 바 있는 그분이 이젠 세례를 베푸는데 모두 그분에게로 가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당신들 자신이 나에게 증언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단지 그분에 앞서 파견되었을 뿐이오’ 한 사실을 말입니다.

 

신부를 얻는 이는 신랑입니다. 그러나 신랑의 친구도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합니다. 내 기쁨도 그렇게 벅찹니다. 그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묵상>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연도 있고 조연도 있습니다. 우리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주연에게 쏠리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유독 조연에게 더 시선이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작가가 의도했던 안했던 조연이 주연보다 더 관심을 끈다면, 이미 조연은 자신의 역할을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연은 주연을 받쳐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받쳐준다는 것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조연이 조연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때, 주연도 제대로 살아날 수 있기에, 조연 역시 꼭 필요한 인물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조연으로 머물 때 자신의 존재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지요.

 

조연은 조연으로 머물 때 의미가 있습니다. 조연은 조연으로 머물 때 가치가 있습니다. 조연은 조연으로 머물 때 아름답습니다. 조연은 자신을 통해 주연이 한층 더 빛을 낼 때 기뻐합니다. 조연은 자신이 작아짐으로써, 그리고 이를 통해 주연이 커짐으로써 보람을 느낍니다.

 

세례자 요한, 분명히 조연이었습니다. 자신의 제자들,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이 주연이 되라고 떠밀었지만, 요한은 분명 자신의 자리, 자신의 역할을 알았고, 그것에 충실할 뿐이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통해, 자신의 증언을 통해, 구세주가 모든 이들에게 알려지는 것에 만족하면서 벅찬 기쁨을 느꼈던 빛나는 조연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의미있는 사람, 가치있는 사람, 모든 이에게 기억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제로 살아가면서 가장 커다란 착각이 무엇이냐 하면... 제 경우에 한정 될 수 있겠지만, 자신을 주연으로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잘못 살지만 않으면(잘 살지는 못한다 해도) 주위에서 ’신부님, 신부님’ 하면서 신자분들이 따릅니다. 그러다가 보면 극단적으로는 ’교회’ 또는 본당’이라고 하는 나라의 왕이나 된 것처럼 착각하기도 하지요. 입으로는 주님을 말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으로는 자신을 드러내곤 합니다. 주님을 드러내는 조연으로서의 빛나는 의미와 가치를 져버리고, 주님의 자리에 박차고 들어 앉아서 ’하느님 나라와 복음 선포’ 라는 멋진 드라마를 완전히 망쳐 놓는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추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끄러운 자화상이기도 하구요.

 

오늘 또 다시 세례자 요한을 보면서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가는 빛나는 조연으로서의 기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기쁨에 넘쳐 외치는 요한의 음성을 제 것으로 삼고 싶습니다. 요한의 초연함, 굳건함을 제 것으로 삼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제이기 전에 나약한 한 사람이기에, 굳센 의지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쉽게 유혹에 걸려 넘어질 수 있는 사람이기에, 거룩한 주님 교회의 사제단의 한 사람으로서 사랑하는 믿음의 벗들에게 부탁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사제가 조연으로서의 자신의 의미와 가치와 자리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옆에서 많이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작정 추켜세우는 것이 사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제가 사제일 수 있도록, 사제를 사제로서 사랑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위의 어떠한 칭송이나 부추김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준비하고 드러내는 조연으로서의 자신의 길을 충실히 걸어 갔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그리고 그렇지 않은 다른 신부님들께는 외람되지만, 많은 신부님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세례자 요한처럼 그렇게 굳건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언제 어디서 인간적인 유혹에 넘어가 조연으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주연이 되겠다고 덤벼들지 모릅니다. 아니 주연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갈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조연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라는 애정어린 충고를 외면하고 오히려 주연 대접을 하지 않는다고 섭섭해하거나 불만을 가질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저의 과민한 추측에 불과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잘 되어가리라 희망을 가져봅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고, 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많은 신부님들이 계시고, 함께 하는 소중한 믿음의 벗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땅의 모든 사제들이 빛나는 조연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그리고 함께 하는 모든 믿음의 벗들이 옆에서 항상 커다란 용기와 힘이 되어주시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 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가 띄웁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