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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시찬 신부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제11강 의식 성찰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6-24 조회수7,295 추천수5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유시찬 신부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제11강 의식성찰


 

1. 중요성
   -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 있더라도 살아냄(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 깨달음은 무엇이고, 행함은 무엇인가? :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에 걸맞게 행동하라.'
    - 수행을 통해 거듭 닦아 나가야 함
    - 의식성찰과 기도는 영적 여정의 두 축이다. 다만, 의식성찰은 기도와 달리 삶 전체의 모습

       내지 흐름을 관조한다
    - 성찰은 무겁고 엄숙하고 비장한 분위기 속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경쾌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움직임 속에서 이뤄진다  

2. 성찰의 목적
    - 이미 완전한 사람으로서, 깨달은 사람으로서, 그에 합당하게 살아내고 있는가를 살피며

      계속 다듬어 나가기 위함
    - 성찰은, 반성하며 수정 보완해 나가는 것에 일차적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중도의

      입장을 취하는 가운데 삶을 즐기며 기뻐하기 위한 것이다
    -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3. 성찰의 방법
   - 일체의 시비선악을 떠나고,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조차 놓고, 빈 마음으로 성찰
    - 성찰기준 : 자유인/노예, 주인/종 -양변(兩邊)에 떨어지지 않았나?
    - 모두 받아들임 → 이해 → 격려

4. 성찰의 열매
    - 지행합일(知行合一)
    - 행(行)에 대한 성찰을 통해 지(知:깨달음)도 깊어짐

 

# 오늘 이야기 ...

여러분들 혹시 의식성찰이라는 말 들어봤어요? 아니면 여러분들 살아가면서 의식성찰을 하고

계시는 분은 계세요? 사실 우리가 신앙심을 깊게하고 싶다든지, 영성을 심화시키고 싶다든지

이런 이야기들 많이 하죠? 그랬을 때 의식성찰은 영적 심화를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부

분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 이것을 좀 집중적으로 살펴봤으면 합니다.

 

# 시작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예수님, 저희들 이 여정에 계속 함께 하시면서 필요한 용기와 힘을 더해 주십시오.

특별히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는 의식성찰에 대해서 깊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당신께서 인간을 바라보셨던 그 눈길로 저희들 자신을 바라보고 저희들 삶을 바라보고 정리

하는 가운데 더욱 더 본래의 저희들 모습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잘 통합을 이뤄낼 수 있도

록 필요한 지혜들을 더해 주십시오. 좋으신 당신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 우리 다음 주가 되면은 영신수련 둘째 주간으로 넘어갈 거예요. 그런데 둘째 주간으로

어가기 전에 오늘을 의식성찰에 대해서 좀 보고 다음 주오 넘어갔으면 하는데 지난 주에 우리

가 이렇게 봤지마는 이 첫째 주간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다 이런 이야기를 했었죠.

 

# 지난 시간 ...

영신수련 첫째 주간 ㅡ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

 

통상은 죄의 묵상을 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마는 무슨 윤리 도덕적인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는가? 그리고 그 점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뉘우치고 있는가? 이런 것을 보는 것이라

기보다는 내 안에 있는 어두운 점들과 나쁘다고 생각하는 점들 이런 점들을 함께 봄으로써

내 자신의 온전한 모습 밝은 면과 어두운 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이것을 함께 보는

가운데 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러는 가운데 성장을 일궈내고자 하는 것.

그것이 첫째 주간의 목적이다 이랬죠.

 

# 영신수련 첫째 주간의 목적

  - 나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함께 보는 가운데 생각을 이루어 내는 것

 

그래서 영신수련 피정에 있어서 첫째 주간의 기도를 하는 것과 의식성찰을 하는 것. 이것이

같은 맥락인 거예요. 이 의식성찰을 하고 거기에 따라서 우리가 고백성사에로 이어지는 것.

이게 전부 같은 맥락이죠. 하나로 이렇게 쭉 연결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중에서 오늘 우리는 특별히 의식성찰 하는 것을 좀 봤으면 하는데 의식성찰이라는

이야기 들어 본적 있어요? 예, 양심성찰이라고도 그러죠. 그런데 양심성찰 하는 단어보다는

의식성찰 하는 표현을 저는 더 좋아하는데 양심성찰 이러다보면은 또 자연히 양심이 좋으니

나쁘니 이런 이야기를 하죠. 양심이 올바르니, 그르니 이런 이야기도 하고.

 

그러면서 곧잘 우리는 또 죄 중심으로 그래서 윤리,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단죄할려고 하는,

책임을 물으려고 하는 이런 움직임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차원에서 양심

성찰하는 것보다는 의식성찰, 내 마음의 흐름들, 의식의 흐름들을 좀 깊게 살펴보자.

 

# 의식성찰: 내 마음과 움직임의 흐름을 깊게 살펴보기

 

이런 관점에서 의식성찰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더 좋은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단어를 들어보지도 못하신 분들도 많이 계실 거예요. 우리 옛날부터 뭐 일일삼성

올바르게 살아가려면은 하루에 세 번 자기를 반성해야 된다.

 

# 일일삼성(一日三省): 하루에 세 번 자신의 행동을 반성함

 

이때 성(省)하는 거는 반성(反省), 돌이켜서 성찰해 본다. 이 말인데 곧잘 우리가 그동안에

우리 신앙생활하면서 이루어져 오고 있는 관행이라고 그럴까? 습관들을 보면은 성찰한다

이러면서 양심성찰 내지는 내가 뭘 잘못하고 뭘 잘했는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 이런 면에

다가 촛점을 두고 성찰해 온 것이 대부분이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가 잘 살아왔는가, 잘못 살아왔는가? 그거 성찰하고 거기에 따라서 반성하고,

반성에 따라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려고 하고, 그런데 그런 식의 어떤

성찰들, 이것을 첫째 주간 이 묵상하고 관련지어서도 이야기했다고 느껴지는데 그런 식의

성찰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 영혼을 개방시키고 건강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오히려 영혼을

죽이는 수가  생기는 수가 생기는 것 아닌가? 우리의 생명력을 오히려 갉아먹게 되는 것

아닌가? 

 

# 죄의식에만 얽매인 성찰은 오히려 우리의 생명력을 약하게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의식성찰이라든지 양심성찰 자체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제대로 사용하지

않으면은 어쩌면 독이 될 여지도 있다. 이런 점을 우리가 좀 염두에 두고 봤으면 하는 거예요.

그러면은 이런 의식성찰이 왜 필요한가?

 

# 의식성찰의 필요성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하는 것을 알아듣는 것에 촛점을 두었었죠? 그러면서 기도를

통해서 지나온 체험들이라든지, 내 성경이라든지 이런 걸 가지고 내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깊게 알아들으려고 애써 왔던 거예요.

 

자, 그래 가지고 그런 기도들을 통해서 깊이 알아들었다 치자. 그 알아들음 혹은 깨달음이라

고 그럴까? 아니면은 알아들었다. 지(知)라 그럴까? 이런 깨달음이나 알아들음이 내 삶 속에

있어서 그대로 살아내지 못한다면, 행함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은 이 깨달음, 알았들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거예요.

 

# 행함으로 이어지지 않는 깨달음은 의미가 없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알아듣고 본래의 내 모습을 알아들었고 혹은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

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도 또 알아들었다 치자. 그런데 그렇게 기도에 깊게 머물고 알아

듣고 나름대로 깨달음까지도 얻었다 하는 사람이 실질적으로 일상의 삶 속에서 살아내는 모

습은 좀 오히려 보통 사람들 보다 떨어지는 면이 있다면은 그건 좀 곤란하지 않는가 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물론 깊게 깨달으면은, 알아들으면은 그대로 존재의 변화들이 일어나고 행함

도 그대로 일어나고, 그래서 일상의 삶 속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뀐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과연 그렇다고 보여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한차례의 그 깨달음이 내 안의

내 안의 존재를 빠꿔버리고 그것이 행동으로까지 이어지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닌 거예요. 깨달았다 해 가지고 바로 행동에까지 탁 연결되는.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서 전체적으로 "아, 이 사람이 바꼈구나. 이전 사람이 아니구나. 평화

방송 강의하는데 열심히 방청하고 기도하고 이러더니 진짜 딴 사람이 됐구나. 저 자매가 옛

날에 내가 알고 있던 자매가 아니구나." 이런 식의 어떤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은 그렇게 간단

한 일이 아니다 하는 거예요.

 

# 깨달음이 행함으로 바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뭘 알아듣고 깨달았다 손치더라도 이 알아들음과 깨달음의 깊이가 얕을

수가 있죠. 그러면은 당연히 거기에 따른 행함도 약해지게 마련이죠. 그래서 어떤 때는 그

깨달은 바대로 행하기도 하다가 ?어떤 때는 또 옛날 습관대로 넘어지기도 하고, 가정생활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변화가 일어날지 모르지마는 본당에 가서, 교회에 가서 활동하는데 있어

서는 아직도 변화가 더딘가 하면은,

 

의식주 같은 그런 ?문제에 있어서도 또 나름대로 변화가 일어나지마는 다른 또 자녀 교육을

시키고 사회에 내보내고 하는 그런 문제에 달리 이전 사람들과 똑같이 움직이고 할 그런

위험성들이 다분히 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성찰을 통해서, 의식성찰을 통해서 양면을

통합시켜 나가는 거예요.

 

# 의식성찰을 통해 깨달음과 행함을 통합시켜 나가도록

 

깨달음을 얻었다 치면은 그 깨달음에 입각해 가지고 내 모든 삶이 생각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그대로 변화되고 있는가? 내가 알아들은 그 깨달음에 입각해서 내 삶이 영위

되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차근차근 짚어보지 않으면은 안 된다 하는 거죠. 이런 점에서

의식성찰이 중요하다 하는 거예요.

 

# 의식성찰 : 깨달음과 행함의 통합

 

그래서 그렇게 본다면은 이런 깨달음과, 이 알아들음과 행을 통합시켜 낼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본래의 내 모습이라고 뭔가 알아들었죠. 그 본래의 내 모습과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 이것을 또 역시 통합시켜 내는 것이기도 한 거예요.

 

# 의식성찰 : '본래의 나'와 '있는 그대로의 나'의 통합

 

우리가 계속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알아들으면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본래의 내 모습 하는

것이 뭔가 하는 것이 늘 나침판 역활을 하면서 가르쳐 주어야 되죠. 거기에 입각해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쭉 봐 나가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하늼 당신 자신이 어떠신가? 내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가? 하느님 당산을 손에 잡히는,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형태로

변화시켜 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죠. 예수님이신 거예요.

 

이런 양자간에 통합이 일어나지 않으면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혹은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늘 좀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다는 신앙생활하는 면

고 그 다음에 우리 일상의 살아가는 일상적인 삶의 모습하고 이 두 개를 또 어떻게 통합시켜

내는가?

 

# 의식성찰: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의 통합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이 제대로 된 신앙이라면은 본래의 내 모습에 적합한 그런 신앙생활일

것이고 하느님 보시기에 좋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그런 모습에서 신앙일 것이다 하는 거예

요. 거기에 비해서 또 일상의 삶이라는 것은 그거 가족 안에서, 이웃 안에서 지지고 볶고 그러

면서 살아가는 거기에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고 구체적인 내가 있고, 구체적인 이웃, 인

간들이 있는 모습들이죠. 이런 모습들을 어떻게 통합시켜 낼 것인가?

 

여러분들 기도 많이 하고 계시겠지마는 진짜 주위에 보면은 한 시간, 두 시간 예사로 앉아서

기도에 몰두하고 계시는 분들도 계시는 거예요. 성체조배를 깊게 하신다든지, 아니면 묵상기

도를 깊게 하신다든지, 그런데 대단히 좀 유감스러운 장면은 가끔은 그렇게 기도에는 깊게

몰입을 하는데 그래서 무슨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본다든지,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면은 혹은 속되게 이야기 해서 성스러운 이야기를 뭘 해본다면은 아주 많은 이야기를

깊게 잘 해내는데,

 

이상하게 그런 사람이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은 그냥 고개가 아주 약간 갸우뚱'

해 지는 것. 기도에는 깊이 머물고 신앙생활을 아주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오히려 사람과

사귀기에는, 가까이 다가가기 좀 겁나고, 너무 이렇게 엄숙하고, 그러면서 일상의 삶 속에서,

가족 안에서, 이웃 안에서 더불어서 편안하게 걸어가는 데는 좀 모가나는 거예요. 이상한

느낌을 주는.

 

막말로 극단적으로 이야기해 버리면은 약간의 좀 비정상적인 광신의 흐름에 다가가는 듯한

그런 느낌을 언뜻 던져주는 이런 모습들 종종 보죠. 이런 것들 전부 통합에 있어서 실패해

버린 거죠. 두 개를 갈라 놓고 하느님이 중요하고, 인간이 덜 중요하고, 신앙생활이 중요하고

삶은 덜 중요하고, 그저 먹고, 자고, 차마시고, 텔레비젼 보고 이런 거는 개도하고 소도하고

다 하는 거예요. 그건 그냥 시덥잖은 거.

 

그러면서 나는 거룩한 기도에 머물고, 감실 앞에서 성체조배에 깊게 빠져들고 그러면서 그

안에서 깊은 위로와 힘을 얻고 일상의 삶 속에 돌아오면은 오히려 어정쩡하게, 생뚱맞게,

생경스럽에 막 움직이는 것. 이런 모습을 우리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는 거예요.

 

예수님 자신의 공생애를 봐도 너무나 뚜렷하게 드러나죠. 예수님 만큼 영성이 깊으신 분이

계셨겠어요? 예수님 만큼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된 분이 계셨겠어요? 그런데 그런 분이 늘

일상의 삶 이거는 시덥잖은 것. 그저 목매한 중생들이나 지지고 볶오 사는 것. 그러면서 나는

거룩한 이야기나 하고, 거룩한 기도에 머물고, 거룩한 몸짓이나 하고 있고 그랬다면은 예수님

주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예수님을 좋아했을까? 이거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거예요.

 

지금 제가 조금은 극단적인 예를 들어버려서 그렇지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지 정도를 조금

떨어뜨리면은 이런 점에 있어서 불일치를 일으키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는 거예요. 기도에

몰입한다, 신앙생활에 충실한다 이러면서 가정에 불충실 한 거.

 

어머님들 같으면은 자녀들을 돌보고 남편을 보완하면서 뒷바리지 하고 하는 이런 점들 이런

점들에 있어서 소홀하다면은 그 신앙은 잘못된 것이라고 보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토록 먹고 마시고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셨

던 것은 아닌가?

 

예, 좀 성격이 내성적이고 소극적이라서 너무 막 사람들하고 만나고 있으면은 에너지 뺏기고

그러는 거는 그러더라도 만나는 자리에서는 편안하게 이야기를 하고, 편안한 가운데 신앙 이

야기도 하고, 하느님 이야기도 하고 이러는 거지. 쉽게 말해서 티를 내는 것. 이거야말로 진짜

아직도 갈 길이 멀었고 알아들음이 아주 약하다고 보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양자를 통합하기 위해서 내가 알아들은 것과 내 삶의 모습을 일치시켜 내고 조화

를 이뤄내기 위해서 너무나 중요한 거예요. 이 의식 성찰이야말로 기도하고 맞물려서 우리 영

적 여정에 있어서 두 개의 큰 축인 거예요.

 

# 의식 성찰과 기도는 영적 여정의 두 축이다

 

기도에 머물지 않고, 의식 성찰을 좀 더 깊게 나가겠다 이러면은 이거는 거짓말이다 이거예요.

풀장에 한 번도 안 들어가면서 "나는 수영 선수가 돼서 금메달을 다겠다."고 덤비는 것하고 꼭

마찬가지인 거예요. 이런 점에서 의식 성찰 이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이냐시오 성인께서 의식 성찰을 아주 강조하셨어요. 예수회 회원들이 지금도 그렇지마는 이냐

시오 성인 당시에도 꽤나 바빴던 모양이죠. 사도직 하느라고. 그래서 가끔은 성인께  찾아와

가지고는 예수회 회원들이 기도, 내가 지금 일 때문에 너무 바쁘고 힘드니까 기도를 좀 안 할

수 있도록 관면을 해 주십시오. 이러면은 관면을 주셨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 기도하지 말고 그러면은 사도직에 충실해라. 그런데 의식 성찰에 대해서는 일절 관면을

주신 적이 없다 하는 거예요. 이거는 반드시 해야 되는 거예요. 이것 하지 않으면은 안 되는 거

예요. 그리고 기도하고 의식 성찰 이것이 우리 영적 여정에 있어서의 큰 두 축이라고 그랬는데

어떻게 좀 다른가? 이 기도하는 것은 어느 하나의 주제에 몰두 해 가지고 기도를 하게 되겠죠.

그런데 의식 성찰 하는 것은 내 삶 전체, 내 존재 전체를 놓고 살펴보고 기도하는 것인 거예요

 

# 기도: 한 가지 주제에 집중

  의식 성찰: 내 삶 전체를 살펴 보는 것

 

그래서 의식 성찰도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넓은 의미에서는 기도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

마는 복음 묵상기도라든지 이런 차원에서 기도하는 것 하고는 이건 다르죠. 그래서 이 의식

성찰을 어떤 식으로 할 것인가? 의식 성찰을 해 나가는 방법 이런 것하고 관련지어서 보면은

더욱 더 기도하고의 차이점이 보이는 거예요.

 

# 의식 성찰 방법

 

그래서 의식 성찰 한다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눈 떠서부터 지금까지, 아침에 눈 떠서부터

지금까지 내 삶 전체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그것을 쭉 살펴보는 거예요.

 

# 의식 성찰 방법: 깨어나면서부터의 내 삶 전체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살펴보는 것

 

그리고 의식 성찰을 한다 이러면은 원칙적으로 하루에 두 번 정도 하면은 바람직하고 좋다

싶어요. 그게 정 안 되면은 하루에 끝에 한 차례만 하면 되겠지마는 보통은 두 차례 정도를

하는데 점심 무렵에 점심 식사 전이든 식사 후든 그때 한번 하고, 그 다음에 저녁에 자기 전

에 한 번 하고. 이런 식으로 하면 되는 거예요.

 

# 의식 성찰 방법 ㅡ 하루에 두 번: 점심 식사 무렵, 잠들기 전

 

그리고 이거는 의식 성찰 하는 거는 시간은 딱히 정해져 있는 시간은 없지마는 통상 우리가

생각하는 거는 15분 정도 하는 거예요. 15분 남짓. 만약에 저녁 때 한 차례만 하게 되면은

15분 보다 조금 더 길어질 수도 있겠죠. 그렇게 하는데 그럼 점심 때 만약에 한다 이러면은

진짜 아침에 눈 떠서부터 지금까지. 의식성찰 할 때까지의 매 삶의 모습, 내 존재가 어떻게

문양을 그리면서 쭉 걸어왔는지 그 모습을 살피는 거예요.

 

그 다음에 저녁 때 한 차례 한다 이러면은 점심 때 의식성찰한 그 이후부터  저녁 때 자기 전

까지 또 그 시간에 어떤 식으로 내가 살아왔는지, 내 안에서 어떤 움직임들이 있었는지 그것

을 쭉 살피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기도는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를 했지마는 "기도할 시간이 없는데요." 하는 것

별로 믿을 수가 없다고 그랬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부득이 기도를 진짜 못할 경우도 생기죠.

정말 바쁘고 정신없게 어떤 일에 휘둘리다 보면은 기도하기가 어려워지기도 하는데 그럴 때

조차도 의식성찰은 할 수가 있고 해야 된다. 의식성찰은 또 기도하고 달라서 반드시 정자세를

하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꼼짝도 하지 않고 집중해 가지고 의식성찰 하라는 그런 게 아닌

거예요. 훨씬 더 자유롭고 편한한 가운데 기도하는 거예요.

 

# 의식성찰 방법: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그러니까 예컨대 뭐 산책을 하면서 의식성찰을 해도 좋고 소파에 앉아서 차라도 한잔 마시면

서 의식성찰을 해도 좋고, 만약에 직장 같은데서 일을 하는 분 같으면은 그 퇴근 길에 지하철

안에서, 버스 안에서 성찰을 해도 좋고 이런 의미에서 훨씬 더 자유롭고 편안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식성찰을 통해서 또 한다는 것은 그렇게 수월한 것은 아닌 거예요.

 

우리가 첫째 주간의 기도를 할 때도 그랬지마는 이 첫째 주간의 기도는 과거의 내 체험이라든

지 어떤 체험이나 성격을 새로운 눈으로 읽어드릴 때까지 반복해서 기도한다고 그랬죠. 그래

서 그 기도가 수월한 것이 아니라고 그랬죠. 만약에 우리가 좀 있으면은 둘째 주간 들어가면은

성경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기도 생활에 좀 진보하고 있는 사람 같으면은 좀 더 수월할지

몰라요.

 

그저 예수님 모습 이렇게 보면서 예수님 생각들을 좀 더듬어 보고, 예수님 스타일을 몸에 좀

익히고, 이런 거는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쉽다. 그런데 이런 체험이나 성격을 가지고 의식성

찰을 하고 이러는 거는 구체적인 내 삶 속에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움직이고 계시는지 성령께

서 어떻게 활동하고 계시는지 이것을 읽어드리는 것이니까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사실 어렵다.

 

# 일상적인 내 삶을 주제로 기도와 의식성찰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큰 사건이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날 경우도 있지마는 매일 매일의 삶을 따지고

이렇게 보면은 늘 어떤 면에서는 다람쥐 체바퀴 도는 듯한 일상적인 삶이 반복적으로 계속

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 별 특별한 것도 없고 유별나지도 않은 그런 내 삶을 들여다 보면서

그런 평범한 가운데 하느님의 손길, 성령의 움직임 이런 것들을 읽어드리려니까 만만한 게

아닌 거예요. 그런 점에서 좀 어려움들이 있다.

 

그래서 의식성찰을 해 나간다 해 가지고 하루 이틀 사이에 뭐가 막 알아듣는 것들이 있고,

내한테서 변화가 막 일어나고 그런 것은 아닌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오랫동안

이 작업을 해 나가다 보면은 나도 모르는 가운데 내 체질이 바뀐다고 그럴까? 근본적인 내

성향, 기질 이런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나가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의식성찰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그럴까? 성실한 자세로 의식성찰에 임할

필요가 있겠다. 그런데 이 의식성찰을 할 때 무엇보다도 유념해야 될 것은 아까도 말씀드렸

지마는 의식성찰, 양심성찰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성찰한다고 그러면은 곧잘 내가 뭘 잘했

는가? 뭘 잘못했는가?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을 ○,×로 동그라미 가위 이런 식으로 점수 메겨

나가는 것. 이런 식으로 성찰할 위험이 너무나 많은 거예요.

 

그러면은 여기에 잘못된 것들을 쭉 보면서 사시는, 내일은 앞으로 이런 것을 고쳐나가겠다.

안 하겠다. 이러면서 결심하는 것. 그렇게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것. 이런 식의 태도를 많이

가르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나름대로 괜잖죠.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여러 가지 위로와 힘도 많이 얻죠. 그리고 사람도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볼 때는 이런 것이 그냥 소싯적에, 어릴 때 할 일이지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이

일을 게속하고 있어서는 곤란한 것 아닌가? 가끔은 보면은 수도회에 이렇게 다니다 보면은

수도회에서 처음에 수도생활을 시작하는 그 초심자라고 그럴까? 처음에 지원자, 청원자,

수련자 이렇게 기초 양성기에 있는 그런 사람들을 양성시킬 때도 곧잘 이 방법을 쓰는 것

같애요.

 

그러면은 늘 내가 수도회 규칙을 어긴 것이 없는가? 혹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

규범, 생활 관습 이런 데 비추어 가지고 내가 뭘 잘했고, 내가 뭘 잘못했는가? 그런 게 리스트

가 죽 있고 거기에 따라서 ○,×를 쭉 메겨 나가고. 그리고 이런 점은 내일부터 고치겠다 결심

하고.

 

그런데 적어도 수도회에 들어올 나이가 되면은 20살이 넘죠. 20살이 넘으면 아니 그 전부터라

도 중.고등학생 정도만 되도 이 방법이 과연 바람직하고 좋을까? 제 개인적으로는 의문인 거예

요. 이렇게 되면은 늘 정답은 늘 빤히 다 나와 있는 거예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고, 무엇

을 좋고, 무엇은 나쁘고, 무엇은 해야 되고, 무엇은 해서는 안 되고 이게 명명백백하게 리스트

가 작성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은 나는 거기?에 맞추어서 잘했냐, 잘못했냐? 이런 점수 메기는 것만 하게 될 뿐이지 정

말 내 존재에 대한 이해 이런 것을 놓칠 위험이 너무나 많은 것 아닌가? 똑같은 행동이라도 이

런 상황에서는 바람직하고 좋은가 하면은, 저런 상화에서는 안 좋죠.

 

술 마시는 거 일률적으로 술을 마셔도 된다. 마시면은 안 된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

하는 거예요. 정말 흥겨운 자리에서 서로 축하하면서 그럴 때 술 한 잔 하는 것. 체질상 도저히

술이 한 방울이라도 들어가면은 몸이 그냥 반란을 일으키는 사람도 있죠. 그런 체질상으로 뭔

가 안 되는 경우를 제외하도는 술이 좀 약하고 술 별로 안 좋아하고 이런 다 하더라도 그 분위

기에서 함께 더불어 기뻐하기 위해서 한 잔쯤 마실 줄 아는 것. 그런 게 훨씬 바람직하고 좋은

게 아닌가 하면은

 

또 어떤 자리에서는 아예 술을 아무리 좋아하고 잔 마신다 하더라도 입에도 안 대야 할 자리도

있는 거죠. 이런 점에서 우리는 어떤 규범이라든지 내 행동을 규정하는 여러 가지 규칙들이

명명백백하게 딱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늘 그때 그때 상황을 봐야 된다. 지금 이 자리에서.

 

# 정해진 규범과 규칙만 따르기 보다는 나의 현재 상황을 살피고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저렇게 하는 것이 좋은가? 이런 것들을 살피면서 거기

에 쫓아서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성령의 움직임이신 것 아닌가? 그래서 이런 점들을 우리가 필

히 염두에 두고 의식성찰을 해 나가야 되겠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은 의식성찰을 통해 가지고

내가 지금 너무나 부족하고 잘못된 부분이 많으니까 그것을 전부 체크해서, 찾아내서 반성하고

그래서 그것을 수정, 보완해 나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의식성찰을 알아들었으면 곤란하다

싶은 거예요.

 

# 의식성찰은 반성과 수정, 보완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은 늘 내 부족한 것이 보이고 그것을 이루어 내지 못한 점에 대해서 늘 답답하고, 괴롭

고 죄의식까지 느끼고 그러면서 좌절감에 떨어지고. 이러면서 의식성찰 해야 되는 것이 늘

무감으로, 숙제로서 이렇게 다가오는 그런 식의 의식 성찰을 한 것이 아니고 지금 내 자신이

얼마만큼 완전한 존재인가를 깊게 알아듣고 하느님게서 나를 얼마만큼 이쁘게 보시고 좋아하

고 계시는가? 이 점에 대한 깊은 자각이 선결 문제인 거예요.

 

# 내가 얼마나 완전한 존재인지를 깊게 알아듣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자각해야 함

 

그래서 지금 현재 내가 대단히 아름답고 좋은 존재다. 그러면서 완전을 이루고 있는데 그것이

있는 그대로 오늘 살아내는 내 모습을 이렇게 보면서 본래의 모습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지 어떤 면에서는 하느님의 놀이라고 친다면은 그 놀이가 정말 재미있게, 신바람 나게 ?펼쳐지

고 있는지, 아니면은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을 한다면은 그 작품이 오늘 내가 이 하나의 작품

이 정말 아름답고 깊이가 있게 전개되었는가? 이것을 살피면서 어떻게 하면은 좀 더 아름답게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좀 더 깊이있는 것으로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여기에 의식 성찰의

어떤 목적이 놓여있는 거예요.

 

# 의식 성찰의 목적: 본래의 내 모습에 합당하게 살고 있는지를 살피고

                  좀 더 아름답게 다듬어 나가는 것

 

이런 점에서 의식 성찰을 한다 할 때 우리한테 가장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이 하느님 안에서

대단히 친밀감있게, 부드럽게, 따뜻하게 머무는 것. 그 말은 내 자신을 지극하 사랑스럽고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거예요.

 

# 성찰은 하느님 안에서 부드럽고 따뜻하게 머무는 것

 

이 점에 있어서 그 전에 양심 성찰이라든지, 죄의 묵상을 중심으로 하는 그런 관점에 서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여기에 걸려 넘어지기 십상인 거예요. 따뜻한

눈으로 잘 보지 못하고 판관의 눈으로 딱 보기가 쉬운 거예요.

 

여러분들 스스로를 이렇게 보면은 여러 가지 부족하고 결점 많고, 불완전하고 이런 점들이 확

부각되어서 눈에 들어올 가능성이 크죠. 한쪽 면만 특별히 강조해서 보는 거죠. 반대편에 있는

그 면은 같이 잘 못 볼려고 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 점을 함께 볼려고 덤빈다 하는 것 자체

가 자기 자신을 크게 신뢰하고 자기 자신을 깊게 사랑하고 보듬어 안아주는 자세인 것이고 그

자세야말로 예수님의 눈길로 바라보는 자기 자신의 모습일 거예요.

 

#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는 나 ㅡ 나 자신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관점으로 성찰

 

그런 식으로 첫째 주간에서 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바라보시는 그 눈길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그런 의식 성찰이 되지 않으면은 안 되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품 안에서

의식 성찰 하는 것이다. 하느님 제쳐놓고 내가 내 머리 속에 있는 여러 가지 기준들을 가지고

판관이 되어서 그렇게 성찰해 가는 것 아니다 하는 거예요.

 

그런 어떤 내적 태도라 할까? 바라보는 시각 이것이 탁 확립이 되면은 그 바탕 위에서 의식성

찰 할 때 비로소 성장이 있고 변화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랬을 때 특별히 어떤 점을 기준으

로 해서 의식 성찰을 할 것인가 하면은,

 

# 의식 성찰의 기준

 

내가 자유인으로 살았는가? 노예처럼 살았는가? 내가 주인이 되어서 움직였는가? 종으로서

움직였는가? 이런 것들이 식별을 하는데 있어서의 기준인 거예요. 내 자신의 작품성을 본다

할 때 혹은 놀이를 얼마나 재밌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볼 때 그런 평가 기준이 자유인인가,

노예인가, 주인인가, 종인가?

 

아침부터 일어나서 지내온 것을 보면서 그냥 남편이 별 뜻없이 지나가는 말로 뭘 이렇게 처갓

집 하고 관련돼서 이야기를 한 마디를 툭 던졌는데 그것 때문에 그냥 발끈해 가지고는 막 언쟁

이 벌어지고 그랬다 그러면은 가거를 의식 성찰하면서 쭉 보면서 내가 그때 그런 것들을 이런

요소, 남편이라는 사람이 평소에 내 집안을 잘 건드리곤 했다 그런다 손치더라도 남편이 어떤

맥락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또 남편 안에 있는 어러 가지 밝음과 어두운 모습이 어떤 것인지 그런 것들을 깊이 있게 이해

하고 그것을 내가 자동적으로 조절을 하지 않고 남편이 그냥 이런 반응을 나타내면은 거기에

따라서 나도 맞받아치는 식으로 즉각적인 반응을 탁 일으키는 그런 식의 움직임은 노예의 모

습이고 종의 모습이죠. 이런 저런 점에 있어서 내가 정말 주위의 여건에 쫓아서 상황에 휘둘리

면서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가? 아니면은 그런 상황의 변화들을 내가 취사 선택하면서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가?

 

# 나는 주의 상황에 휘둘려 움직이는가 상황을 선택하며 움직이는가

 

우리 죽는 모습도 그렇죠. 예수님 당신 자신 그러시죠. "나는 누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 스스로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 내가 만약에 내 놓는 것이 아니라면은 어누 누구도

감히 내 생명을 건드릴 수가 없다." 가장 긍극적인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까지 당신이 얼마

만큼 확연하게 주인으로서, 자유인으로서 움직이고 계시는가? 우리처럼 그저 막판까지 쫓

기는데까지 쫒겨서 어쩔 수 없이 죽음이라는 세력에 굴복하는 것 하고는 아주 다른 모습인

거예요.

 

예수님, 복음에서 그런 이야기 하시죠. 여러분들이 신앙이 제대로 되어 있다면은 마치 곳간에

서 새것과 헌것을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는 곳간 주인과 같다. 우리 안에서 이런 저런 움직임

이 일어나더라도 거기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을 일단 한번 더 스크린을 할 필요가

있는 거예요.

 

남편이 언짢은 소리를 하면은 기분이 나빠지고 발끈 하는 것. 이거는 자연스럽다. 그런데 거기

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반응을 하느냐 아니면은 한번 더 물러나서 한번 더 생각을 하고 내가 화

를 낼 건지, 말 건지 결정을 하고 움직이는 것 하고는 이거는 아주 다른 거예요.

 

이런 점에서 내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살펴 보고 그것도 또 노예처럼, 종처럼 살았다 해

가지고 나를 나쁜 녀석이다. 내일부터는 절대 이런 식을 살지 말고 자유인으로 살자. 이런 식

으로 결심하자는 것이 아니고 노예처럼 살면서, 종처럼 살면서 내 삶이라는 이 작품이 얼마나

작품성이 떨어져 버렸는지, 생명력이 얼마만큼 떨어져 버렸는지 그것을 보면서,

 

아, 좀 더 아름답게 만들자, 오늘은 요정도 만들어 봤는데 성에 별로 안 차니까 내일은 좀 더

이쁘게, 아름답게 만들자. 거기에도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 데도 무슨 의무감, 책임감 이런 것

이 있는 게 아닌 거예요. 그저 작품에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 내 자신, 하느님에 대한

사랑 이런 것 때문에 절로 움직이는 것이지.

 

# 의무나 책임감이 아닌 하느님과 나, 삶에 대한 사랑으로 성찰

 

이런 식의 의식 성찰들이 계속 일어날 때 우리는 앎과 행함이 일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알

아 들었다 하는 것이 정말 본래의  모습대로 더욱 더 깊어질 것이다. 우리가 "아는데요" 하는

것도 그 아는 것이 천차다. 아주 다양하게 펼쳐지는 거예요. 행함이 따라 붙을 때 비로소 이

앎 하는 것의 그 깊이가 점점 더 깊어지는 것. 앎이 제대로 완성되는 것은 행함이 같이 따라

붙을 때 비로소 우리의 앎은 완성되는 거예요.

 

# 행함이 있어야 앎도 완성된다

 

그전까지는 그저 피상적인 얕은 앎만 일어나는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별 부담없이 가볍게

하면서도 깊은 큰 그런 큰 열매를 거둬낼 수 있는 이 의식 성찰 빠트리지 않고 잘 할 수 있도

록. 그리고 이런 의식 성찰을 깊게 나가는 가운데 내 삶 속에서 진짜 하느님께서 움직이고

계시구나! 성령의 움직임이 이렇구나 하는 것을 알아듣고 우리 작자의 존재와 삶을 심화시켜

나갈 수 있도록 그런 은총을 계속 드리면서 걸어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예,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함께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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