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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중풍 병자 치유 (마태9,1-8)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7-01 조회수7,082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7월 1일 목요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중풍 병자 치유 (마태9,1-8)

   

 

1독서 <우리 성조 아브라함의 제사>(창세22,1-9)

그 무렵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그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그곳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하인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서는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팬 뒤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곳으로 길을 떠났다.

사흘째 되는 날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자멀리 있는 그곳을 볼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어라나와 이 아이는 저리로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겠다.”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자기는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그렇게 둘은 함께 걸어갔다.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하고 부르자그가 얘야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이사악이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자,

아브라함이 얘야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하고 대답하였다둘은 계속 함께 걸어갔다.

그들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다다르자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았다그러고 나서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10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11 그때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그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네가 너의 아들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다아브라함은 가서 그 숫양을 끌어와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14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야훼 이레라 하였다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고들 한다.

15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 말하였다.

16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주님의 말씀이다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곧 너의 아들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17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18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19 아브라함은 하인들에게 돌아왔다그들은 함께 브에르 세바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브에르 세바에서 살았다.

 

화답송 시편 116(114115),1-2.3-4.5-6.8-9(◎ 9)

◎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 나는 주님을 사랑하네애원하는 내 소리 들어 주셨네당신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니나는 한평생 그분을 부르리라

○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에우고저승의 공포가 나를 덮쳐고난과 근심에 사로잡혔네나는 주님의 이름 불렀네. “주님부디 이 목숨 살려 주소서.” 

○ 주님은 너그럽고 의로우신 분우리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네주님은 작은 이들을 지키시는 분가엾은 나를 구해 주셨네

○ 당신은 죽음에서 제 목숨을 구하셨나이다제 눈에서 눈물을 거두시고제 발이 넘어지지 않게 하셨나이다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복음<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9,1-8)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용기를 내어라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5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8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제1독서 (창세22,1-19)

 

그 무렵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2)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3)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 (6)

 

'하느님께서'로 번역한  '웨하엘로힘'(wehaellohim)에서 하느님을 '엘로힘'으로 표현한 것은 하느님의 절대성 즉 전지전능하심과 인격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느님께서 전지전능 즉 절대 능력과 지혜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에도 '엘로힘'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명칭은 하느님께서 창조주 되심과 구원 역사를 주도하심을 보여주는 명칭이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내면을 몰라서가 아니라 확인하여 더 큰 기쁨을 누리시기 위해 몸소 그의 믿음에 대한 시험을 주관하고 계신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은 '엘로힘' 앞의 정관사 '하'(ha)가 붙은 데서 더 드러나는데, 지금까지 아브라함을 인도하고 보호해 주셨던 바로 '그 하느님'이 앞으로 전개되는 시험을 주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시험해 보시려고'

 

'시험해 보시려고'로 번역한 '닛싸'(nissa)에서 '시험하다'에 해당하는 '나싸'(nassa)는 구약에서 36회 나온다.

 

그런데 이 단어가 사람이 주어일 경우에는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시험했을 때도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탈출17,2.7).

따라서 모세는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은 인간이 절대로 해서는 안될 일로 규정하여 금지 시켰다(신명6,16).

 

하지만 이 단어가 주어를 하느님으로 할 때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당신을 경외하는지 '알아 보시다'(test), '입증하다'(prove)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따라서 여기서 '닛싸'는 상대방을 잘못 행하도록 '유혹하다'(tempt)는 의미보다는 무엇을 입증하기 위해 '시험하다'(test)는 뜻을 지니고 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성숙과 오롯한 순종을 몸소 확인하시고, 또한 확증하시고자 시험대 위해 그를 올려 놓으신 것이다.

 

일찌기 하느님께서 가나안 땅에 남은 이민족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시험하셨다(판관2,22; 3,1.4).

또한 바빌론 대신들이  히즈키야에게 사절단을 보내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히즈키야를 돕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시험하셨다(2역대32,31).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이러한 시험의 목적은 시험받는 자를 엄밀히 단련하여 그가 하느님을 더 잘 알고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였다(탈출16,4; 신명8,2; 시편26,1-3).

 

마찬가지로 여기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진정한 의도는 이사악을 죽이는데 있지 않고  하느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지를 알아보는 데 있다(창세22,12).

 

이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의 신앙을 얼마나 크게 성장시키고 또 얼마나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 이렇게 하시는가를 생각해야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그 명령에 긴장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의 이성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만든 모든 윤리, 도덕, 인륜까지도 하느님의 말씀보다 앞세우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면 우리에게 닥친 모든 시험을 이길 힘을 갖게 된다(야고1,12).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서는 이런 시험의 도구가 될 이사악을 삼중으로 반복 강조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인간적이고 본능적인 부성애를 깊숙히 자극하신다.

'외아들', '독자'로 번역된 '예히드카'(yehidka)의 원형 '야히드'(yahid)는  구약에서 10번 나오는데, 8번이 '독자'라는 뜻으로, 2번이 '유일한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시편22,20; 35,17).

 

사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사악은 외아들(독자)이 아니었다.  그의 배다른 형 이스마엘이 있기 때문이다(창세16,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악을 '외아들'이라고 번역한 것은, '외아들'(독자)이라는 말이 '부모에게 소중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 3장 17절을 보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향해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고 하셨다.이것과 병행하는 요한 복음 3장 16절과 18절은 '외아들' 이라고 했다.

 

이처럼 '독생자' 또는 '독자'의 의미가 신구약에 있어서 모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부모의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을 바치라고 했던 것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려는 의도만이 아니고, 모리야 산에서 이사악을 죽여서 제물로  삼으시려고 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자신의 아들인 예수님을 갈바리아 산 언덕의 십자가에 못 박아 희생제물로 죽이실 것을 미리 보여 주기 위한 사랑의 표현이었다(요한3,16).

 

또한 '사랑하는'으로 번역된 '아하브타'(ahabtha)에서 '사랑하다'에 해당하는 '아하브'(ahab)라는 말은 단순히 '좋아하다'는 뜻 이상으로 '바라다', '갈구하다'(시편40,17), '기뻐하다'(이사56,10)란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이 표현 속에서 이사악에 대한 아브라함의 지극한 부성애와 아들로 인해 아브라함이 갖고 있었던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 강조되어 있다.

 

하느님 당신 스스로가 이사악에 대한 아브라함의 사랑을 잘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약으로 주어진 유일한 후손인 그의 아들 이사악을 모리야 산에서 제물로 바치하고 하셨던 것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향하여 오직 당신만이 그들의 가장 큰 희망, 가장 큰 기쁨과 g행복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시편16,2).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원문의 '웨하알레후~레올라'(wehaallehu ~ leolla)를 직역하면, '그리고 너는 그를 태우는 제물로 바치라'(sacrifice him ~as a burnt offering)가 된다.

하느님께서는 번제의 통상적인 제물인 정결한 짐승들과 새들(창세8,20)대신아브라함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신 아들 이사악을 온전히 태워 번제로 드릴 것을 요구하셨다.

 

한편 '번제'를 뜻하는 '올라'(olla)는 '올라간다'를 뜻하는 '알라'(alla)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이것은 희생물을 태운 연기를 하늘로 올라가게 해서 하느님께서 향내를 맡으시도록, 하느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드리는 제사의 한 방법이다(창세8,20).

 

창세기 22장 6절에 불과 더불어 칼을 준비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외아들 이사악을 죽여 목과 손과 발을 자르고, 각 부분의 각을 떠 번제단 위에 놓고 불을 붙여 바치는 번제의 과정을 조금도 차질없이 마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는 데서 드러나지만, 이것은 단순한 영적인 복종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이해와 상식을 초월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온전한 헌신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인간의 사랑은 사라져 슬픔을 남기지만

그리스도(십자가)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한 기쁨을 줍니다.

(마태9,1-8)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성전)로 가셨다. 2ㄱ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중풍병머리의 지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병곧 우리의 머리이신 주님의 말씀대로 신앙을 살지 못하는 죄인을 뜻합니다.

 

2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용기를 내어라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중풍병자의 믿음도 아닌 그들의 믿음으로?

 

(마르2,1-4)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냈다.

=가파르나움(나를 위한 고을성전)의 지붕을 벗기고곧 인간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집그 성전의 지붕은 용서의 권한이 없음을 깨닫고 그 자격 없음을 벗겨낸 네 사람의 믿음인 것입니다.

네 사람,(4)- 동서남북춘하추동상하좌우땅의 숫자땅의 사각형의 완성곧 땅의 구원의 완성을 뜻하는데 그 땅의 완성이 하늘의 대속 그 진리로 이루어짐을 믿는 그 네 사람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한이고병자가 반성이나 어떤 보속의 행위를 한 것이 없는 사람의 규정과 교리도 한 것이 없는데 용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하느님의 용서를 완성하시기 위해 오신 그분의 외 아드님(독생자예수그리스도를 모르기에 모독이라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 모든 이들의 죗값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마태28,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우리의 모든 죄의 용서는 예수께서 대속으로 이루셨고권한이 있으신 것입니다중풍병자는 하느님의 은총은혜로 거저 용서 받은 것입니다.

 

 (에페2,8-9)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9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5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모든 죄의 용서치유는 예수님께서 짊어지심으로 나은(치유것입니다.(이사53,4-6참조)

그 말씀을 믿으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얻는 쉼안식이기에 어느 쪽이든 쉬운 것입니다. (마태11,29참조)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7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병으로 누워있던 지긋지긋한 평상병이 치유 되었으니 버리고 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그 평상을 가지고 가라 하십니다.

그것은 사람은 육을 입고 사는 동안은 늘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요그래서 그 평상의 신세를 지게될 것이라 의미인 것입니다.

 

(갈라5,17-18) 17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18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육의 욕망을 위해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그래서 평상의 신세를 질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그래서 그 죄인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러 오실 수밖에 없으셨던 겁니다.

 

(로마8,1-3)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3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곧 당신의 친 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평상의 신세를 지게 될 것이고 그때마다 제사와 율법과 세상의 법으로 넘어가지 말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용서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그 성령의 법을 기억하라고자유하라고그래서 그 지긋지긋한 평상을 들고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로마8,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2코린5,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십자가)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옛것은 지나갔습니다보십시오새것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모든 권한은 예수님 한분께 있는 것입니다그런데 시람들은 용서를 주시는 분과 용서를 받는자그리고 믿는자모두를 지칭하는 것이지요그러나 용서의 주체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사람으로 보는 그들의 잘못된 모습도 보라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 환호송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용서)의 말씀을 맏기셨네 ``아멘.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복음(마태9,1~8)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4~5)

 

마태오 복음 9장 4절의 '아시고'에 해당하는 '이돈'(idon; knewing)의 원형은 '호라오'(horao)로 추정되는데, '보다', '주목하다', '관찰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의 마음속까지도 정확하게 꿰뚫어 관찰하셨음을 나타내기 위해 여기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시편 7장 10절에서는 하느님께서 사람의 심장즉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으로 계시된다.

천주 성자이신 예수님께서도 전지전능하신 신적(神的속성을 가지고 계셨기에 즉시 율법 학자들의 마음을 간파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는 내용은 마르코 복음이나 루카 복음에는 없고마태오 복음사가가 첨가한 부분이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율법 학자들의 생각이 하느님의 영광과 그 이름을 보호하려는 율법의 근본정신과는 동떨어져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제2위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율법 학자들의 마음속에서 시작된 주님을 대적하는 마음은 결국 주님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고 가는 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었다.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병고침의 기적을 통해 보이지 않는 죄사함의 기적이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며당신 자신이 바로 그 권세를 지니신 유일하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음을 마태오 복음사가가 부각시키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자신의 일차적인 독자인 유대계 크리스챤들에게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정확하게 알리기를 원했던 것이다.

 

한편, '어느 쪽이 더 쉬우냐?'에서 '쉽다'는 의미로 번역된 '유코포테론'(eukopoteron; easier)은 '좋다'는 뜻의 부사 ''(eu)와 '일하다', '노력하다'는 뜻을 지니는 '코포스'(kopos)의 합성어로서 '일하기 좋은'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러나 그 의미가 확대되어 '보다 쉽다혹은 '보다 알맞다'는 비교급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사실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가시적인 결과가 요구되는 선언이지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은 그 선언의 결과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율법 학자들은 유다인들의 인과응보(因果應報사상에 입각해서 죄로 말미암아 병이 생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그들의 논리를 가지고 병을 먼저 치유하면그 병의 원인인 죄가 자동적으로 없어진 것이니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 9장 2절에서 '얘야용기를 내어라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씀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고그 선포는 하느님만이 할 수 있고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선포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시고자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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