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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배 오른 쪽에 그물을 던져라!)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06-11 조회수6,975 추천수1 반대(0) 신고

 

"배 오른 쪽에 그물을 던져라!"

†찬미예수님

본당 교우분들,

안녕하셨습니까?

또 순례오신 우리

순례 신자 분들도 환영합니다.

새벽밥 먹고 오시느라 바쁘셨지요?

제가 어느 대학생들 피정을

시키면서 질문을 했습니다.

불교와 천주교.... 더 넓게 따지면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차이점이 뭐냐?

대학생들답게 아주 코믹하게

어느 학생이 얘기하기를

“차이가 많이 있는데

예수님은 찡그린 얼굴이고,

부처님은 복스럽게 웃는 얼굴입니다.”

두 번째로 어느 학생이 손을 들더니

‘몸무게 급이 다릅니다.

부처님은 헤비급이고

예수님은 라이트급이다.’

또 어느 학생이 손을 들더니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예수님은

장발이고 부처님은 빡빡 입니다.’

그러다가 쪼금 교리를

 알고 있는 어느 대학생이

그럴듯한 얘기를 했어요.

“천주교는 계시종교요,

불교는 자연종교입니다.”

“야, 참~~ 너 아버지 이름 뭐냐?

아주 똑똑한 집안 자손이구나!”

그렇죠. 천주교는 인간이 만든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스스로

당신을 드러낸 종교지만,

불교는 인도의 한 왕자가

도를 닦아서 각자(覺者),

즉 깨달은 자가 된 거죠.

석가모니는 석가모니식대로

그렇게 부처가 되지만,

또 불교신자들은 다 각기

다른 방법으로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계시종교냐?

자연종교냐?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계시종교냐?

자연종교냐?

하는 바로 여기서부터

나온 아주 중요한

테마가 있습니다.

뭐냐?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찾아나서는

종교입니다.

뭐하는 종교요?

찾아 나서는 종교!

그렇죠. 방문하는 종교입니다.

그물을 던지는 종교입니다.

개신교 용어로 하면

심방하는 종교입니다.

불교는 먼 절로

사람들이 찾아가지만~~

요즘은 불교도

이젠 뭐 포교승~~

이런 것을 해서

도시로 절이 나옵니다만

원래 절은 깊은 산속으로

수 십리 길을 걸어서

찾아가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찾아나서는 종교입니다.

그 근원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찾아나서는 종교요~~

심방하는 종교요~~

그물을 던지는

종교라고 하는 그 뿌리는

창세기 3장 9절에

‘찾아 나서시는 하느님’

으로 등장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아담과 하와는 숨었습니다.

그때 하느님 쪽에서

아담과 하와를 찾아 나서십니다.

알몸인 것이 부끄러워서 나무 뒤에

숨어있는 인류의 첫 조상을

찾아 나시면서 말을 건네십니다.

대화를 하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

여기서 어디라고 하는 것은

장소를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Where..... Where are you?'

하고 묻는 게 아니죠?

 ‘니가 지금 어떤 상태이길래

나를 보고 숨느냐!’

하느님이 나무 뒤에

숨어있는 거 몰라서

'너 어디에 있느냐?'

묻는 거 아니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알몸인 것이

부끄러워 숨었습니다.

‘너 알몸이라고

누가 가르쳐주었더냐!’

죄지은 인간에게 하느님

찾아오셔서 대화를

통해서 말을 건네십니다.

그 대화를 통해서

아담과 하와의 상처를,

수치심을, 죄의식.....을

치유시켜주시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쓰시는

야훼 하느님의 모습이

창세기 3장 9절에 등장됩니다.

그리고 손수 가죽옷을 지어서

수치를 가리워 주십니다.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

‘세 번째 나타났다!’ 하셨듯이

끊임없이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평화를 주시고자 하시고~~

특히 베드로의 그 수치심을.....

세 번이나 주님을 배반했던

베드로의 수치심을 치유시키고자

세 번이나 물으십니다.

늘 우리들 짧은 복음을

 읽었지만 긴 복음에는

‘니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하는 거를 세 번 묻습니다.

세 번의 배반을.... 세 번의

순종의 답으로써 베드로를

치유시켜주십니다.

그러면서 고기를

못 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라.’

바로 이 성서에 근거해서

낚시꾼들은 낚시를 가면

제일먼저

오른쪽으로 던진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건

확인이 안 된 겁니다.

아무튼 저도 낚시를 가면

항상 오른쪽으로부터

먼저 던집니다.

그러면 대부분

대어가 걸립니다.

그물을 오른쪽에 던지라고

하는 뜻은 뭐겠습니까?

‘내 양들을 잘 돌보라.’고 하는

그 뜻은 찾아다니라는 뜻입니다.

근본적으로 천주교는

가만히 앉아서 오는 신자를

맞이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신발이 닳도록

전교 다니는 종교입니다.

방문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사제이고

 수도자이고

평신도이고 간에

사랑의 그물을 어깨에 걸치고~~

관용의 그물을 어깨에 걸치고~~

치유의 그물을 어깨에 걸치고~~

상처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야 되는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교 신자요

또 그리스도교입니다.

아까 심방이라는 말을

표현했는데

차~암 좋은 말입니다.

심방(尋訪)이라고 하는

그 한자는 그 말 자체가

‘축복을 주러간다.’

그런 뜻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심방 오셨다.’

그 얘기는 ‘축복 주러간다.’

그 뜻입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 그 말을

그 단어를 먼저 쓰니까

천주교에서는 심방이라는

말을 못 씁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뭐 어떡해요?

무슨 말 씁니까?

심방이라고

쓰지 않고...‘방문 간다.’

그런데 이 ‘방문’이라고 하는

단어에는 축복의 개념은

0.01프로도 없습니다.

빚쟁이가 찾아가는 것도

방문입니다.

보험회사 직원이 보험 들라고

초인종 누르는 것도 방문입니다.

싸우려고 문 두드려 부수면서

그 집 찾아가는 것도

역시 방문입니다.

‘심방’이라고 하는 말 그 자체는

아주 아름다운 말입니다.

이 심방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탄의 심방이 있고

두 번째는 천사의 심방이 있습니다.

사탄의 심방은 뭐냐?

교우들이 다른

집 신자 집을 찾아갑니다.

아니면 외인 집을 찾아갑니다.

이 사탄의 심방으로 모여 있는

교우들은 항상 모였다 헤어질 때는

꼭 상처받는 사람이 생깁니다.

왜냐?

사탄의 심방은 기도로

시작되지 않는 모임이기 때문에

늘 마귀가 장난을 합니다.

그래서 여럿이 앉아 모여

얘기하면 항상 남 얘기로

시작해서 남 얘기로 끝납니다.

대모가 대녀 흉을 봅니다.

대부가 대자 흉을 봅니다.

같은 구역방원들이 아무개...

아무개... 흉을 봅니다.

본당신부 흉을 봅니다.

수녀들 흉을 봅니다.

도마 위에 올려놓고

요거를 회를 떠먹을까?

샤브샤브를 해먹을까?

아주 지들끼리

있는 말 없는 말

다 만들어 냅니다.

소설을 씁니다.

그 말이 또 돌고 돌지요.

‘이거 우리들끼리만 알아야 돼.

이거 밖에 나가면 큰일 나.’

그 말이 밖에 안 나가겠습니까?

뻥튀기처럼 살이 붙어 붙어서

당사자들 귀에 들어갑니다.

대모가 대녀 흉을 본 것이

나중에 대녀 귀에 들어갑니다.

대녀가 그 얘기를 듣고

‘세상에 도대체 누가

나를 이렇게 모함했어?’

알고 보니까 그토록 따르던

대모 입에서 나왔다는 거였죠.

그땐 어떻게 됩니까?

쫓아가서 대모 멱살을

잡고 싸우게 됩니다.

사탄의 심방은 평화와

기쁨을 주기보다는

분열과 혼란을 일으킵니다.

남에 대한 뜬소문과 비판을

일삼은 방문,

그래서 영적인 말의 살인을 해서

교회의 일치를 깨는 이런 방문은

사탄의 계획에 놀아난 방문입니다.

대화의 내용도 지극히

세속적인 얘기요,

시간을 보내는 것도 지극히

세속적으로 보냅니다.

교우들끼리 모여 앉았다 하면은

고스톱 치는 거,

 어쩌다 치는 거는 괜찮지만

신자들끼리 모여 앉았다 하면은

화톳장 꺼내는 거,

이거 역시 사탄의 심방입니다.

고스톱 치다가 돈 잃고

기분 좋은 놈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남이 만원 달라고 하면 쉽게

줄 수 있지만 잡기를 하다가

돈 잃는 거는 상처를 받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교우들끼리는

고스톱치지 마십시오.

치더래도

 ‘성전 건립금을 위해서 치자.’

‘성모님순례지 빚을 갚는데

우리 지향을 두고 치자.’

이러면 아주 아름다운

고스톱이지만~~

남의 돈 천원 따먹으려고

기를 쓰고 토끼눈처럼

쌔빨개져 가지고 날밤을 샌다면

그거는 사탄의 심방입니다.

그 다음으로

천사의 심방이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개신교 신자들이 있을 겁니다.

개신교신자들은 여러분의 집에

들어가면 신발 벗자마자

수다부터 떱디까? 아니지요?

어느 개신교 신자들이던지

철저하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성서 말씀대로

 ‘어느 집에 가던지 제일 먼저

그 집에 평화를 빌어주라.’

하는 그 성서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개신교신자들은

아무튼 어느 집에 방문하던

지간에 신발을 벗자마자

무릎을 꿇고 손을 모우고

눈을 감고 그 집에

축복기도를 해주고 난 다음에

용건을 얘기 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로 시작된

신자들의 모임은 마귀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어느 집에 가던지 먼저

기도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야기 하더라도

그 사람에 이로운 이야기,

좋은 장점을 이야기해줍니다.

‘참 훌륭한 분이다.’

고 얘길 합니다.

모여앉아 고스톱을

치기 보다는,

하느님 말씀에 맛들이고/

성서를 같이 읽고/

같이 성지순례를 다니고/

같은 반원의 어려움을

위하여 기도하고/

본당의 일치를 위하여

상의 하는 것이 바로

천사의 심방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심방하는 종교요,

찾아나서는 종교라고 그랬습니다.

교우들이 어느 집을 방문하던

지간에 방문의 결과는

평화와 치유가 이루어져야 됩니다.

 인간적인 재미만으로 모인 것은

세상의 모임이지 교우들끼리의

모임이 결코 아닙니다.

‘저 자매가 우리 집에

다녀가면 참 평화가 싹튼다.

저 자매랑 얘기하다 보면

마음의 상처가 저절로 치유가 된다.’

이런 존재로 우리는 살아가야 됩니다.

하느님에게 속한 사람이냐?

악에 속한 사람이냐?

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은

하느님에게 속한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일치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악에 속한 사람은

분열을 가져옵니다.

하느님에게 속한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되지만

악에 속한 사람은 늘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끼칩니다.

하느님에게 속한 사람은

 어디 가든지

‘내 탓’이라고

자기 가슴을 때리지만

악에 속한 사람은 늘

 ‘니 탓이야! 니 탓이야!’

항상 니 탓이라고 그럽니다.

하느님에게 속한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저는 주님을 닮은 바봅니다.

큰 바봅니다.’ 하면서

늘 낮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지만~~

악에 속한 사람은

 ‘우리 성당에 나만큼

똑똑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나 없어봐라!

성당이 제대로 굴러가나~~

우리 신부님 내가 안 도와드려봐!

저 양반 꼼짝도 못해!’

요런 식으로 교만을 떱니다.

우리들은 늘 약하기 때문에

하느님 쪽으로 속하려고 하다가도

늘 악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어둠이 있으면

반드시 빛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은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그물을 던져라!’

그리스도교는

찾아나서는 종교입니다.

우리 순례자들은

찾아오셨습니다.

성모님의 아름다운

성지를 찾아 나오셨습니다.

여기서 성모님께

힘을 얻고/ 치유를 받고

이제는 여기서 받은

그 영적에너지를

그리스도교를 모르고

상처받고 소외되고

힘든 이들을 위해

찾아나가셔야 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

부르신 목적일겁니다.

오늘 미사 중에는

천사들이 이 제대 위를

날라 다닐 겁니다.

사제가 성체 성혈 축성할 때는

성모님께서 사제 앞에

무릎을 꿇고 성체성혈을

경배하실 겁니다.

이 거룩한 성지에

초대받은 우리들.....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감사의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아멘!

느티나무신부님ㅡ2007. 4. 22 (부활 제 3주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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