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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6.15)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06-15 조회수6,960 추천수5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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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5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제1독서 2코린 3,15─4,1.3-6

형제 여러분,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15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16 그러나 주님께

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

17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18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

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4,1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이 직분을 맡고

있으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3 우리의 복음이 가려져 있다

하여도 멸망할 자들에게만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4 그들의 경우,

이 세상의 신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느님의 모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5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6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복음 마태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얼마 전 성지에서 아빠로 보이는

한 형제님께서 아이를 테이블 위에

뉘이고서 함께 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갓난아이가

엄청나게 유연한 것입니다.

글쎄 너무나 쉽게 자신의

발가락을 입으로 물더군요.

그 유연함에 감탄하면서

 “아이가 정말로 유연하네요.”

라고 웃으며 말했지요.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어떤 자매님께서

 “신부님, 아이는 다 저렇게 유연해요.

아마 신부님도 갓난아기 때에는

유연했을 거예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현재 저는 과연 유연할까요?

 유연하지 않을까요?

유연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딱딱하고 굳은 몸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의 몸은 노화가 시

작될 때 가장 먼저 유연성이

 떨어지는 변화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의 몸은 말랑말랑하고

부드럽지만, 어른의 몸은

 뻣뻣하고 거친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각이 젊으면 사고가 젊어지고,

생각이 늙으면 사고가

경직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생각이 젊고 유연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바로 새로움을 잘 받아들인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생각이

 결코 유연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새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매사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항상 젊고 활기차게 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새로움으로

다가오시는 분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경직된 사고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이시지요.

사랑을 위해서라면 유다인들이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고

또 믿었던 율법의 세부 조항도

무시할 정도로의 새로움을

보여주신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당시의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지하기 위해 이 땅에 온

악의 한 축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어제 복음에 나왔듯이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

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통해서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은 잊어버리고

단순히 계명의 준수에만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생각의 유연함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를 위해 근본을

알아야 합니다.

수학 문제를 풀 때에도

원리를 아는 사람은

복잡한 문제에도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 푸는 것에만

집중했던 사람은 약간의

문제 변형에도 당황해하고

절망에 빠집니다.

우리의 삶 역시

예외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기본 원칙이라 할 수 있는

‘사랑’에 집중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유연하고

부드럽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몸이

뻣뻣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내 정신까지

딱딱하게 경직되지 않도록

늘 새로움을 받아들으려는

넓은 마음과 긍정적 생각을

간직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할 수 있다고 말하다 보면,

결국 실천하게 된다.

(사이먼 쿠퍼)

어제 오랜만에 강의 때문에

명동성당을 다녀왔습니다.

"6월 14일"

어제 외부에서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니 성지에서 봉사하시는

한 자매님께서

케이크를 하나 들고 오십니다.

그리고 축하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축하할 일이 없었거든요.

그러자 힌트를 주신다면서,

초의 숫자가 16개랍니다.

어떤 축하의 일이었을까요?

제가 기억하지 못한 축하의 일은,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쓴 지 만 16년째

되는 날인 것입니다.
2001년 6월 14일에 첫 번째

묵상 글을 시작한 지가 벌써

만 16년이 되었습니다.

 엊그제 시작한 것 같은데,

이렇게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 놀랍더군요.

사실 한 두 해 하다가

그만두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저의 하나의

일상이 된 것입니다.
이 하나의 일상들이 모여져서

참 많은 것들을

할 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선 어렸을 때 글을 잘 쓰지

못해서 자주 놀림을 받았던 제가

책을 8권이나 출판했습니다.

많은 글을 쓰다 보니 이 내용을

가지고 이곳저곳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신학교에서 후배들에게

강의를 하게 된 것 역시 이 묵상 글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루의 한 순간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 시간들이 바로 나를

 더 나은 나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어떤 꽃씨라도 제대로 심고

시간을 들여 정성스레 가꾸면

반드시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내 자신에 대해서는

정성스레 가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나를 정성스럽게 가꾸는

지금의 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앞으로도 묵상 글

열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출신본당 신부 모임이 있었습니다. 셀카라...

사진이 이렇네요. ㅋㅋㅋ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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