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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0517 -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05-17 조회수6,958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7
05 17 () 가해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사도행전 15,1-6
요한복음 15,1-8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너희는 가지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라고 불렀습니다. 이사야서는 하느님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다.(5,2)고 말하고, 예레미아서는 하느님이 “특종 포도나무를 진종으로 골라 심었다.(2,21)고 말합니다. 시편은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지켜 주소서.(80,15)라고 기도합니다. 따라서 예수님 시대에 ‘포도나무’라는 말은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단어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라고 말하며, 하느님은 그 나무를 손질하는 농부이시며, 신앙인들은 포도나무 가지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을 심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의 수액(樹液)을 받고, 하느님의 손길이 다듬어서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 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우리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고, 그 계획을 실현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 계획과 실현을 잘한 삶을 우리는 성공한 인생이라 부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우리가 속하는 집단을 위해, 우리는 계획하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나들이를 할 때는 목적지까지 계획을 세우고, 합당한 교통수단을 택합니다. 물건을 구매할 때도, 우리는 미리 계획하여 구입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계획하고 그 계획대로 실현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계획하지 않고 접근해서 얻는 것들도 있습니다.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미리 계획하고, 계획의 결과를 감상하지 않습니다. 그 작품의 세계 안에 우리는 그냥 빠져들고 심취합니다. 우리는 그 작품에서 받은 감동으로 우리 자신이 달라져서 그 자리를 떠납니다. 문학작품을 읽거나, 음악을 감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계획 없이 접근합니다. 감상과 감동은 우리 계획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가 만난 대상이 우리 안에 일으키는 파장(波長)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도, 우리 자신이 만든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열어주는 세계에 빠져들고 감동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접할 때도 같은 자세가 요구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계획을 포기하고, 복음이 전하는 이야기들이 열어주는 세계로 우리는 빠져듭니다. 복음서에서 교훈을 얻어 우리를 위해 유익하게 활용하겠다는 계획으로 접근하면, 우리는 우리가 계획하고 예상한 교훈만 복음서에서 얻을 것입니다. 이때 복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린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계획하면서 기대했던, 우리 자신을 위해 유익한 교훈만 얻어내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복음서가 열어주는 하느님 나라의 진실을 만나지 못합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새로운 세계를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오늘 복음은 나무 가지가 나무에서 수액을 받아 나무의 생명을 살듯이, 우리도 예수님과 연결되어 그분의 생명을 받아서 살라고 말합니다.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소인(小人)의 근성을 탈피하여, 예수님이 보여주신 큰 생명을 받아 살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습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이 그 삶 안에 살아계시게 하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사신 생명의 특징은 다른 사람의 불행에 마음 아파하며, ‘불쌍히 여기고, 가련히 여기며, 측은히 여긴’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이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 주셨다.(10,38)는 말로 그분의 생애를 요약합니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겨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가련히 여겨 마귀를 쫓으며, 측은히 여겨 죄인으로 지탄받는 사람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당신 앞에 나타난 사람들의 불행을 퇴치하는 좋은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성공을 위한 계획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기득권자들의 마음에 들어, 그들의 가호를 받아 종교지도자로 출세할 길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유대교의 율법과 관행을 열심히 따라서, 유대교 기득권자들로부터 칭찬 받는 길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에게 소중한 것은 오로지 자비하신 하느님이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그분의 확신은 유대교 기득권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미움을 받는 원인이었지만, 그분은 그것을 한()으로 가슴에 품지도 않으셨습니다. 사랑과 자비는 한이라는 응어리를 남기지 않습니다. 그분은 불쌍히 여기고, 가련히 여기시는 하느님 생명의 진실에 감동하고 심취하셨습니다. 그 점에서 그분은 여느 인간과 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계획 없이, 하느님 생명의 진실에 몰두하셨습니다. 신앙인의 기도는 자기 자신을 열어서 하느님의 진실을 받아들이고, 그 진실이 자기의 실천 안에 살아 있게 하는 시간입니다.

요한 제1서에서는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보다 더 크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당신 행동의 기준으로 삼아,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신 예수님에게서 큰마음을 배워 살라는 말씀입니다. 자비롭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자신의 일에 골몰한 마음보다 더 크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육신으로 태어나 세상에 살다가 그것을 대자연에 돌려주고, 어디론가 가는 생명입니다. 떠나야 하는 세상이고, 내어 주어야 하는 몸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자비로운 마음과, 그 마음의 실천만 하느님 안에 살아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알리는 바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우리 계획의 결과로 우리가 획득하는 명예와 재물은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 잘린 가지’의 운명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배워서 하느님 생명의 열매를 우리 안에 맺게 하여, 하느님의 영광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하는 계획들을 다시 평가하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보다 더 크신’ 하느님의 마음을 영입하여 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었던,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생명이 우리 안에 흘러 들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비록 보잘것없는 실천이라도, 그분 자비의 몸짓을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머무는 길입니다. 농부이신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각자를 다듬어서,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는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자라고 열매 맺게 하실 것입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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