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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마리아의 향유(요한12;1-8)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28 조회수6,871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마리아의 향유

(요한복음 121절에서 8)

1 예수께서는 과월절을 엿새 앞두고 베다니아로 가셨는데 그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라자로가 사는 고장이었다. 2 거기에서는 예수를 영접하는 만찬회가 베풀어졌는데 라자로는 손님들 사이에 끼어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있었다. 3 그 때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4 예수의 제자로서 장차 예수를 배반할 가리옷 사람 유다가 5 '이 향유를 팔았더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 하고 투덜거렸다. 6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이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아 가지고 거기 들어 있는 것을 늘 꺼내 쓰곤 하였다. 7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말라. 8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멘

    (마태복음 26:1~16) 마리아의 거룩한 낭비

우리는 어제 요한복음 11장에 그 나자로에 사건이 담고 있는 심오한 복음에 내용에 관해서 심도있게 살펴봤습니다 죽은 나자로가 무덤 속에서 살아나온 사건은 단순히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요르단 동편에서 나자로에 이야기가 예수님이 요르단 동편으로 가신 것으로부터 시작되죠 그러니까 동편에서 서편으로 오시는 예수님이 뭔가를 하시는 그런 사건이란 말이에요

요르단 동편에서 요르단강을 건너서 철옹성 여리고를 파하신 것으로 모형된 그런 하느님에 구원의 능력과 권세를 작은 그림으로 보여주는 거라 그랬죠 나자로의 이야기가 그래서 사망이 물러가고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는 모습으로 죽은 나자로가 부활을 하는 그림이 그렇게 등장을 하는 거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느님 백성들에 구원은 죽은 나자로와 연합된 예수 그리스도에 죽으심과 부활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나자로에 사건은 그 자체가 예수님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한거라 그랬죠 그렇게 과월절 어린 양으로 죽으셔서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교회라는 하느님에 장자들을 살려내시는 예수님에 구원사역이 오늘본문에서부터 이제 본격적으로 실제화되어서 나타나는 거에요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아주 잘 아시는 마리아의 향유 도유사건이에요

 

많은 이들이 이 마리아의 도유사건을 마리아의 헌신으로만 그렇게 보고 있는거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오늘 본문은 3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비싼 향유 옥합을 깬 마리아를 본받아서 우리도 우리에 가장 귀한 것을 주께 혹은 교회에 드리자 아까워하지 말고 드리자 라는 그런 선동에 소재로 자주 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보다 더 웅숭깊은 복음에 메세지를 담고 있는 아주 은혜로운 에피소드에요

1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과월절 엿세전에 다시 베다니아로 가셨다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 베다니아를 어떻게 소개하는가 하면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자로가 있는 곳 이라고 이렇게 소개를 합니다.

그리고 7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말라. 어절이 나와요

요한은 지금 그러한 나열을 통해서 죽은 나자로가 살아나게 되어서 잔치가 벌어지게 된 것은, 지금 나자로가 살았다고 지금 잔치가 일어나고 있는거 아니에요 그렇게 잔치가 일어나게 된 것은 예수님에 죽음에 의한 것임을 넌지시 힌트를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향유 옥합을 깨어서 예수님께 부은 이 마리아에 향유 도유 사건은 마리아에 헌신에 초점이 있는게 아니라 예수님에 죽으심에 초점이 있는 거에요 이 마리아에 향유 도유사건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 26장 마르코복음 14장 루가복음 7장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4복음서에 각기 기록된 그 마리아에 이야기에 내용들이 조금씩 달라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많이 달라요 마태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집이 베다니아 문둥이 시몬에 집이라는 것이 명기되어 있죠 거기서 문둥이 시몬에 집이라는 것은 예전에 문둥이였다가 예수님에게 고침받은 시몬에 집 이런 뜻이에요 그 사람이 아직도 문둥이라면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부정한 사람이라서 그러니까 세리였던 마태가 나중에 예수님에 제자가 된 후에도 세리 마태 이렇게 부르는 것처럼 문둥이 시몬 이렇게 부르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오늘 읽은 그 요한복음 본문에는 그 잔치가 벌어지는 집이 누구에 집인지가 기록이 되어 있지 않아요 언뜻 보아서는 나자로가 예수님 옆에 앉아 있고 또 나자로에 동생 마르다가 여전히 분주히 참 부지런한 여자에요 여전히 분주히 집안일을 돕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나자로에 집이나 나자로에 가까운 친척 집 처럼 보이기도 해요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바로 이 문둥이 시몬이 마르다에 남편일 것이다라고 이렇게 추측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거는 그렇게 중요한게 아니에요

그런데 루가복음에 나오는 어떤 여인에 향유도유사건은 장소도 베다니아가 아니구요 그를 초청한 이도 어떤 예의없는 바리세인이에요 그는 예수님이 들어오셨는데 발씻을 물도 드리지 않았다 그러죠 그러니까 나중에 예수님이 너는 내가 들어왔을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저 여인은 저렇게 귀한 향유를 나에게 부었다라고 말씀 하시잖아요 그렇게 그런 예의없는 바리세인이에요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것을 예수님이 허락하시자 그 바리세인이 뭐라 그러냐 하면 이가 만일 예언자였더라면 저 여자가 얼마나 죄인인지 알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저 여자가 하는 행동을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하고 믿음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루가 복음에서는 그 여자가 죄인으로 등장을 하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나중에 여자여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디로 보나 루가복음에 그 여자는 나자로에 동생 마리아는 아니에요 그리고 그 루가복음에 향유 도유 사건은 예수님 공생애 기간 중간에 일어났던 사건인데 나머지 세복음서에 마리아에 향유 도유사건은 예수님에 공생애 마지막 일주일 기간동안에 일어났던 사건이죠

그러니까 향유 도유사건은 예수님에 공생애 기간동안에 적어도 두번 이상 일어났던 이야기인 거고 마태복음 마르코복음 요한복음에 기록된 마리아의 향유 도유사건과 루가복음에 그 죄인이였던 어떤 여자에 향유 도유사건은 완전히 다른 사건인 거에요 도유라 그러니까 무슨 말인가 그러는분 계실텐데 바를 도자에요 그래서 기름 유자해서 도유라고 하는 거에요 길게 풀어쓸려니까 너무 길어서 그냥 향유 도유사건이라고 그러는 거에요 그런데 마태복음 마르코복음 요한복음에 그 마리아에 향유 도유사건도 그 내용이 조금씩 달라요 마태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이 마리아에 향유 도유사건이 과월절 이틀 전으로 기록되어 있어요 그리고 요한복음은 보다시피 과월절 엿새 전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게 맞는 거에요?

(마태복음 262.6-7) 2 '너희가 알다시피 이제 이틀만 있으면 과월절이 되는데 그 때에는 사람의 아들이 잡혀 가 십자가형을 받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6 그 때 예수께서는 베다니아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셨는데 7 어떤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식탁에 앉으신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반면에 오늘 본문이 이러합니다 121 예수께서는 과월절을 엿새 앞두고 베다니아로 가셨는데 그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라자로가 사는 고장이었다.

이런걸 가지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성경을 부인하려는 자들이 봐라 성경 자체도 이렇게 엉켜 있지 않냐 그러니까 성경에 역사성 이런건 다 갖다 버리고 잊어버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교훈이나 잘 채득을 해서 예수를 쫓는 훌륭한 사람이 되자라고 그렇게 공격을 해요

 

예수님께서 베다니dk 문둥이 시몬에 집에 가신 것은 과월절 엿세 전이 맞아요 그런데 왜 마태오와 마르코는 과월절 이틀전이라는 것을 그 사건 바로 앞에 궂이 삽입을 해 넣었는가 마태오와 마르코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요 유과절 이틀전에 있었던 바로 그 공회에 결정 예수를 죽여 버리자라는 그 공회의 결정에 있었어요 마태오와 마르코에 강조점은 이스라엘에 지도자들은 과월절 이틀전에 공회에 모여서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했다구요 그러니까 마태오와 마르코는 과월절 이틀전에 있었던 그 사건을 먼저 기록을 하고 그걸 강조하는 거니까 먼저 기록을 하고 베다니아에서에 마리아의 향유 도유사건을 회고식으로 간략하게 그 이야기 아래에 붙여서 기록하고 있는 거에요 왜냐하면 그러한 음모를 배태케 한 사건이 바로 베다니아에서 죽은 나자로를 살려내신 사건이였고 나자로를 살리자 마자 저놈 죽이자라 그랬단 말이에요

사람들이 저를 다 쫓아갈지도 모르니까 죽이자 그렇죠 그러고 바로 그 베다니아에 문둥이 시몬에 집에서 유다가 예수님에 책망을 듣자마자 나가서 팔아버렸단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과월절 이틀 전에 그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 지도자들에 그 음모 뒤에 그 음모에 매개체 그 음모를 발생하게 한 그 음모에 매개체인 마리아 향유 도유사건을 거기다가 붙여서 기록을 한 거에요

 

잘 보면 이 마리아에 향유도유사건 앞이나 뒤에 마태오복음이나 마르코복음에 아주 잘 쓰는 단어 그 후에 덴 이라든지 이미디어틀리 라는 그 단어가 나오지 않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그 말은 마태오와 마르코가 마리아에 향유 도유사건과 그 공회에 음모 그 사건,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은 과월절 엿세전에 있었던 거고 공회의 음모는 이틀전에 있었던 거잖아요 그것을 시간적인 순서로 기록을 하고 있지 않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에요

 

만약에 그 이야기들이 시간적 순서로 연결이 된 것이라면 마태오와 마르코는 그들에 글쓰기 습관상 반드시 덴이나 이미디어틀리를 거기다가 넣었을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를 일체 쓰지 않아요 그들이 즐겨 쓰는 단어를 거기에 일체 쓰지 않고 그냥 이틀전에 유월절 이틀전에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일려고 음모를 꾸몄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그 아래에다가 회고식으로 향유 도유사건을 이렇게 붙이고 있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과월절 이틀전에 그 잔치에서 유다가 예수님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고 나가가지고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았단 말이에요 그 결과 과월절 이틀전에 공회 회원들이 모여서 그래 죽이자 라는 그런 결론이 도달이 됐잖아요 그러니까 고 이야기를 먼저 강조를 하고 요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이렇게 나오게 된것인지를 알려 주기 위해서 시간적 순서를 배제하고 그냥 거기다가 회고식으로 이렇게 붙여 놓은 거에요 그러니까 전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 처럼 성경이 자체내에서 모순을 갖고 있거나 자체내에서 엉켜 있는게 아니란 말이에요 오히려 잘 보면은 성경은 기가 막히게 그렇게 상호 보완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어요

 

12절 보세요 과월절 엿세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에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1절에는 나자로 죽음 살아남 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2절에는 예수와 함께 앉다라는 어구가 나와요 죽음과 살아남 함께 앉음 하면 생각나는 구절이 있죠? 에페소서 2장 볼까요 5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6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셔서 하늘에서도 한 자리에 앉게 하여 주셨습니다.

똑같은 단어들이거든요 죄와 허물로 죽었던 나자로가 하느님에 은혜로 살아나서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는 그 그림은 바로 이 에페소서에서 기술되고 있는 복음에 이야기인 거에요 그런데 구원이 무엇을 근거로 발생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주된 메세지인 거에요

본문 7절로 한번 가볼께요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말라.

마태복음에는 그 구절을 어떻게 기술을 하고 있는지 보세요 26 12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나의 장례를 위하여 한 것이다. 13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코복음에는 어떻게 기술이 되었는지 한번 볼까요 148 이 여자는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이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것이다. 9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발에 향료옥합을 깨트려 바르는 마리아

보시다시피 성경은 죽은 나자로가 살아난 사건은 예수님에 죽음 예수님에 장사지냄에 의해서 일어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마리아의 향유 두유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라는 것을 알수있어요 이 여자가 나에게 기름을 붓는건 나에 죽음을 준비하는 거야 라고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하시잖아요 그 마리아에 향유 도유사건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어디에서든지 함께 전하여 져서 저를 기념할 것이다 그래요

 

먼저 히브리 사람들이 어떤 때에 사람에 기름을 붓는지 한번 보자구요 히브리 사람들은 집을 방문한 손님에게 발을 딱아주고 그러니까 종 중에서도 가장 낮은 지위에 있는 종이 발을 딱아요 손님에 발을 딱고 냄새가 나기 때문에 향유를 조금 발라줘요 그때 바르는 향유는 올리브유라 그래요 그래서 손님이 올때 그렇게 기름을 붓습니다.

루가복음 744절에 보면 나오죠 또 두번째로 왕이 즉위를 할때에 기름을 부어요 사무엘상 10장에 나와요 열왕기하 9장에도 나오고 또 세번재로 거룩하게 하는 고대적 예식에 측면에서 기름을 부여요 이렇게 성별할때 구별할때 예식에 측면에서 기름을 붓습니다 창세기 28장에 나오죠 네번째로 제사장에 의식적 성별을 위해서 기름을 부어요 제사장 그리고 다섯번째로 선지자를 세울때 기름을 붓고 다 아시는 거죠 여섯번째로 장래식때 시신위에 부어서 발라요 냄새나지 말라고 향유를 발라요 지금 마리아에 의해 주님에게 부어진 기름은 위에 모든 것을 아우르는 그런 기름이에요 주님은 스스로 그 기름이 자신에 장사를 준비하는 기름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도 그럴것이 그때에 상황은 유대지도자들과 바리세인들이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던 그런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 같은 시간이였어요 그래서 이 기름이 바로 내 장례를 장사를 준비하는 기름이다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예수님에게 잔치가 벌어지고 있단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상을 베푸셨다 그러죠 시편 23편에 거기서 상이라는 것은 상장이 아니라 밥상이에요 잔치상에 식탁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슐한이라는 단어죠 그 슐한 이라는 단어는 잔치상에 식탁 그런까 잔치를 열어주시는 거에요 그리고 그 머리에 기름이 부어지고 있어요 시편 23편과 오늘 본문에 이야기가 정확하게 겹쳐지죠

그러니까 베다니 문둥이 시몬에 집에서 열리는 그 잔치는 원수의 목전에서 하느님이 베푸시는 승리의 잔치인 것이에요 왜냐하면 그 잔치가 나자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잔치니까 승리에 잔치인 것이며 예수님께 부어지는 그 기름은 아이러니칼 하게도 그 승리를 위한 그 장사 지냄에 기름이였던 거에요

따라서 지금 잔치집에서 마리아에 의해 예수님께 부어지는 향유는 예수님에 장사를 준비하는 기름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왕으로 제사장으로 구별된 분이심을 증명하는 즐거움에 기름이기도 한 거에요 물론 그 즐거움은 하느님에 즐거움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예수님은 당신에 죽으심으로 하느님에 계약을 완성하시고 그분에 대제사장이심과 왕이심을 증명해 내시는 거에요

 

가만히 보면 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마리아가 예수님과 똑같은 길을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마리아는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어요 300 데나리온은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치 월급이니까 1년치 노동자의 1년치 임금에 해당하는 돈이에요 향유 그렇게 비싼 향유에요 그걸 갖다가 목을 친거죠 깼다 그러니까 아주 박살을 낸거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게 아니라 주둥이를 짜른 거에요 밀봉이 되어 있거든요 향유는 향이 나가면 안되니까 그래서 그걸 붓기 위해서는 고 주둥이를 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거를 갖다 부어 버리는 거에요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몽땅 부었어요 그렇게 해서 마리아는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게 되죠 너 그 비싼걸 왜 갖다 다 부었니 물론 유다가 주동이 되서 조롱을 하고 비난을 하긴 하지만 모든 이들이 거기에 동조한다구요 그 비싼 거를 팔아가지고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면 될걸 너왜 거기다 갖다 부었어라고 그렇게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는 모습으로 등장을 하는 거에요 예수님에 그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에 마리아가 동참을 하게 되는 거에요 사람들로 부터 비난을 받고 조롱을 받고 버려짐으로 말미암아 그런데 모두가 그녀를 비난하고 있는데 그 원수들에 목전에서 예수님이 하느님이 그에 편을 들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어라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녀가 한 일을 잘한거다라고 이야기해주신 다니깐요 예수님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를 지난 그녀에게 주님에 원수들에 목전에서 그녀를 위한 잔치를 베푸시고 그녀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시는 형국이죠 시편 23편이 마리아에 삶에서 그대로 또 나타나고 있는 거에요

 

마리아에 머리에는 어떻게 기름이 부어졌죠 그녀가 머리를 풀어서 그 기름을 예수님에 발에다가 발르므로 말미암아 그녀에 머리에 기름이 발라진 거에요 그러니까 이런 거에요 마리아는 예수님께 감사에 표시와 존경에 표시로 그리고 절대 순종에 표시로 그 발 앞에 꿇어앉아서 자기에 머리를 풀고 그 머리를 이용해서 향유를 발랐어요 마리아는 그냥 감사해서 기뻐서 그리고 그분께 나는 이런 분이라면 내 삶을 전부 맡기고 이분께 나를 복종시키고 이분에 삶에 내 삶을 의지할 거야 라는 의미에서 기름을 붓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기름을 발랐는데 그게 결국 자신에 머리에 즐거움에 기름이 발라지는 격이 된 거에요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자기가 부정한 자가 되어 저는 부정한 자입니다 라는 것을 인정하는 표시로 머리를 풀어 헤치고 당신에게 저는 절대 순종할거에요 라는 의미로 그 발 앞에 업드려 그 발로 예수님에 가장 더러운 것을 씻었단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115절에 보면 여자에게 있어서 머리는 가장 영광스러운 거에요 거기에 영광을 내가 순종하고자 하는 그 하느님에 가장 낮은 발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걸 자기 부인이라고 하는 거에요 어렵습니까 아 확 고만하고 싶네요 흐흐 옛날 얘기나 해줘야 좋다 그러지. 이거 아시겠죠 이해가 가시는 거죠? 예 그러니까 마리아는 예수님에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자기에게 있는 가장 비싸고 소중한 것을 가지고 나와서 그것을 아낌없이 주께 부었고 자기에 몸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머리카락을 이용해서 주님에 가장 더러운 발을 딱았어요

 

자기에 가장 소중한 것들을 전부 비우시고 자기에 영광마져도 비우신 채로 가장 비천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그녀가 그대로 담고 있는 거에요 그러나 주님께서 그러한 마리아의 편을 들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원수에 목전에서 잔치가 벌어진 격이 된 거에요 그래서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바로 이 여자에 이야기가 함께 전해질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바로 그 여자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게 복음이니까

    [마르코복음 성서쓰기] 14장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다 ~ )

마리아가 300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것은 헌신이요 헌금이요 다른 말로 하면 봉사라고도 할 수 있는 거에요 그러나 그에 헌신이 주님께 칭찬을 받은 것은 그가 부은 향유가 값비싼 것이여서도 아니고 하나도 남김없이 몽땅 부어서도 아니에요 마리아가 예수에 삶과 죽음에 동참하는 모습으로 진정한 헌신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헌신에 참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그러는 거에요 자신에 영광과 소유를 모두 부인하고 다 내려 놓고 그것을 이용하여 오로지 주님에 영광만을 드러내고 있단 말입니다 발을 닦으므로 말미암아,

신약성경에 보면 성전에 헌금함에 두렙돈을 넣은 과부에 이야기가 나와요 그 두 렙돈은 아주 보잘것 없는 금액이였어요 그러니까 한 데나리온에 128분에 1 그러니까 뭐 10원도 안되는거 같해요 보니까 한 데나리온에 노동자 하루 임금에 128분에 1이니까 그런데 그거는 그 과부에 전재산이였어요 그 과부가 그 전 재산을 헌금함에 넣는데 예수님이 그 과부를 칭찬하신단 말이에요

 

마리아가 자기에 향유를 깨어서 예수님에 발을 닦은것 처럼 모든 교인들이 사도들에 발 아래에다가 자기에 가장 소중한 것들 자기에 영광들을 갖다가 내려 놨어요 그리고 그것을 필요에 따라 나누어 썼어요 그랬더니 핍절한 사람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 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우리도 어디 아파트 큰거 하나 사갖고 전부 거기에 같이 모여서 살까요 그럼 재미있을거 같해요 그죠 부부싸움도 못하고 그렇게 살라는 건가요 이게 그 이야기하는거 아니에요 여러분 성경이 굳이 이러한 초대교회에 모습을 기록해 놓은건 후대 교회들이 이 세상에서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라는 것을 교훈하기 위함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단들에 속임에 속지 마세요 성령이 처음 교회에게 임하시고 교회라는 것이 오순절날 처음 생겼을때 이러한 일이 있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에요 그것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하나에 도구로 쓰였던 거지 그러한 것이 이 땅에 지역교회에 바람직한 모습임을 보여주는게 아니에요

 

신명기 154절 보세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유산으로 주시어 상속받게 하신 땅에 틀림없이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니 너희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전부 지키고 행하면 그리고 야훼에 말씀만 들으면 복을 받고 그 중에 가난한 자가 없을 것이다 라는 말을 해요 그러나 유사 이래로 가난한 사람이 없었던 적이 있었나요 그런적은 없었어요 그 어떤 때에도 가난한 자가 없었던 때는 없었어요 오늘 본문에도 나오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거라 그러죠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 128절 보세요 8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왜 그럴까요 왜 가난한 자들은 항상 이 역사와 함께 존재해야 될까요 이 세상에 야훼의 말씀만 듣고 또 그 분이 명하는 것을 다 지켜 행할 수 있는 자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가난한 자는 없어질 수 없다라는 거에요 그래서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사회주의는 애초에 방법이 틀린 거에요 계급을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착각들을 하는데 그들은 방법이 틀린 거에요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도록 하려면 우리가 하느님에 말씀을 완벽하게 지켜 내야 되요 그래야 가난한 사람이 없어져요 사회를 개혁하고 계급을 타파해봐야 여전히 가난한 사람은 생겨요 아니 더 생기죠 북한 보세요 그 전에는 절대 이 세상에서 가난이 사라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사도행전에는 가난한 자가 하나도 없는 그런 공동체가 생겨났죠 누군가가 여호와에 말씀만 듣고 그 말씀을 다 지켜 행했다라는 증거죠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율법 지킴과 그에 순종과 그에 십자가에 의해 정말 신명기 154절에서 약속된 그 공동체가 이 땅에 생겨났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에요 사실 그러한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에 공동체지 이 땅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는 거에요

 

고린도후서 81절 보세요 1 형제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께서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에 얼마나 큰 은총을 내려 주셨는지를 여러분에게 알려 드립니다. 2 그들은 환난을 만나 큰 시련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기쁨에 넘쳤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많은 희사를 했습니다. 3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제 푼수대로만 희사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희사까지도 했습니다. 4 그리고 부디 자기들에게도 성도들을 구제하는 일에 참여하는 특전을 달라고 자진해서 간청해 왔습니다. 5 우리가 기대도 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께 그들 자신을 바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에게도 헌신하였습니다.

 

여기 아주 중요한 단어가 나와요 헌금은 자신을 주께 드리는 것이다라는 것이 여기에 명확히 나오고 있죠 당시 구약에 능통했던 초대교회 사람들은요 성령이 임하시자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어요 그 전에는 몰랐어요 자기들이 종교행위하고 재물드리면 하느님이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 성령이 임하시고 구약이 깨달아지자 교회가 성경을 이해하기를 아 우리는 절대 하느님 앞에 제물이나 우리에 힘이나 우리에 업적이나 이런 걸 올려 드릴 수 없는 존재구나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구요

이사야서 110절 보세요 10 소돔 고관들아, 야훼의 말씀을 들어 보아라. 고모라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 보아라. 11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이 많은 제물들을 나에게 바치느냐? 나 이제 수양의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짐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수염소의 피는 보기도 싫다.

아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바치라고 하시고 제사를 지내라고 하셨는데.... 그게 어떤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하느님에게 기쁨이 되지 않는 것이구나를 알았단 말이에요 여러분이 이렇게 보시고 아시는 것처럼,

말라기 1장 보세요 6 아들은 아비를 어렵게 알고 종은 주인을 어렵게 아는 법인데 나를 아비로 어렵게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나를 주인으로 어렵게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나 만군의 야훼가 너희 사제들에게 말 하였다. 너희 사제라는 것들은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있다.' 그랬더니, 너희는 뻔뻔스럽게도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 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우리를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하느님께 제물로 바쳐진 거에요 그 말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하느님께 열납되어지는 흠이없는 진짜 제물이 되었다라는 의미인 거에요 그렇게 구약에 제물이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였다면 신약에 헌금은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거란 말이에요

따라서 지금 우리가 헌금을 하는건 나를 품에 앉고 하느님께 제물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에 십자가를 온전히 믿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내가 하느님께 드려진 온전한 흠이 없는 제물이 되었다라는 것을 믿고 그것을 의지하고 있는 자들에 아름다운 신앙고백이 바로 헌금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신앙고백이 없는 사람은 헌금을 할 수가 없어요 헌금을 가져오는 족족 하느님으로부터 욕만 먹죠 내가 돈 필요해서 너한테 돈가져 오래는줄 아니 가져가 이놈아 구약에 나오잖아요 그래서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분들은 헌금하지 마십시오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헌금하면서 하느님께 욕먹으니까

 

그러나 내가 예수 안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드려진 자 구약에 흠도 없는 하느님이 열납할 만한 제물이 되었다 그런 자격이 있는 자가 되었다라는 것을 믿는 자는 이미 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내가 하느님께 드려진 자가 되었으므로 나를 드리는 행위로 헌금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마케도이나 사람들이 헌금 하지 마 그랬더니 죽어도 해야 되 그러고 그 가난한데 그걸 쪼개갖고 다 내버린 거에요 그 극한에 가난에 처해있던 사람들이 그들이 갖고 있던 걸 그렇게 헌금을 하여 예루살렘 교회를 도울려고 했다는건 내 목숨을 하느님 앞에 내어 놓은 것입니다 나를 내어 놓은 거에요

감히 내가 어떻게 하느님 앞에 나를 내놔 예수님 안에서 내가 하느님께 나를 드릴 수 있는 자가 되었다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자들만 헌금할 수 있는 거에요 그래서 그들은 그냥 자기에 분수에 지나치게 자꾸 하고 싶은 거에요 자꾸 드리는 거에요

 

나는 하느님 앞에서 절대 선한 삶을 살수 없는자인데 하느님이 나를 선하다 받아주셨으므로 내가 그렇게 살 수 있는 자격이 되었으므로 선하게 사는 것이지 이렇게 선하게 살고 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하면 하느님이 나에게 어떤 것으로 보답해 주겠지 그건 하나님 앞에 전혀 카운트가 안되는 것입니다 이해하세요? 그러니까 그것이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은 교회에서 아무일도 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여러분에 삶 속에서 자랑없는 자발적인 헌신과 자발적인 헌금과 자발적인 봉사와 자발적인 선교 자발적인 선한 행위가 자연스럽게 유발되어 나올 거에요 그 전까지는 복음을 열심히 배우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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