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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간음한 여인 / 이현주 목사
작성자성경주 쪽지 캡슐 작성일2014-06-12 조회수6,836 추천수7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나는 간음한 여인                       


간음한 여인, 이것이 세상이 알고 있는 나의 이름이다. 나는 남편이 아닌 남자와 관계를 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남편은 일찌감치 나를 버렸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버림받은 숱한 히브리 여인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나는 나를 이유없이 버린 남편과 이 세상에 대하여 보복을 하기로 결심했다.

행복한 가정을 깨뜨려 부수는 저 뭇 남성들의 횡포에 대하여 내가 할 수 있는 보복의 수단이란 그들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또다시 옷을 벗고 그들 앞에 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 일이 대충 그렇듯이 나 또한 간음을 통한 보복이란 것이 참으로 터무니없는 공상이요 보복당하는 자는 아무데도 없고 오직 상처받는 나만이 남을 뿐이라는 사실을 흐르는 세월과 함께 차츰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마침내 나는 죽음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천하의 이름난 '간음녀'답게 간통의 현장에서 붙들려 뭇 남성들의 돌멩이 세례를 받으며 죽어가는 것이었다.

 

영문도 모르게 태어난 이 세상에서 영문도 모르게 버림받은 한 여자가 자기를 팽개친 세상을 향하여 행할 수 있는 마지막 보복의 수단이란 스스로 더럽게 죽음을 당하는 것뿐이었다. 참말이지 더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이었다.

 

이윽고 사나운 발소리와 함께 남편을 앞장세운 일단의 무리가 들이닥쳤을 때, 가련한 나의 마지막 남자는 알몸으로 도망을 쳤고 그들은 의기가 양양하여 나를 움켜잡았다. 나는 벗은 몸을 가리지도 아니하고 그들 앞에 당당하게 섰다. 그리고는 속으로 마음껏 외쳤다.

"보아라. 여기 당신들의 손에 의하여 찢어진 몸뚱이가 있다. 당신들의 발바닥에 짓밟힌 상처뿐인 생명이 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라.당신들의 더러운 피고름으로 가득 채운 저주스런 이 몸을!"

 


그들은 너무나도 당돌한 나의 태도에 일순간 기가 질렸는지 정면으로 바라보는 대신, 난폭하게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더러운 계집아, 어서 옷을 걸쳐라!"

나는 침착한 태도로 벗어두었던 옷을 입었다. 남편의 우악스런 손길이 내 어깨를 움켜잡아 길거리로 끌어냈다.

지나가던 뭇 사람들이 따라오면서 나를 욕하기 시작했다. 특히 여자들이 입에 담지 못할 저주를 퍼부으며 나에게 돌을 던졌다. 나를 현장에서 잡은 남자들은 곧장 랍비가 있는 회당으로 데려갔다.


"무슨 일이오?"

그들의 물음에 남편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제 아냅니다. 괘씸하게도 다른 남자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그렇다면 그 남자는 어찌 되었는가?"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누군지 알고 있소?"

"모릅니다. 이 여자는 알겠지요."

랍비가 나를 바라보았다.

"상대인 남자는 누군가?"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와 관계를 했단 말인가?"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불쌍한 도살장의 사내를 내가 모를 리 없었지만, 그의 신분을 밝힐 아무런 이유도 나에게는 없었다. 모두가 나에게는 나를 이 지겸으로 몰아넣은 공범자들이었다. 그들이 그들의 법에 따라 판결을 내렸다. 돌로 쳐 죽이시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 바리사이가 술렁거리는 사람들을 진징시키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 더러운 여인을 죽이는 일은 이미 어쩔 수 없이 결정된 일입니다. 그러나 죽이기 전에 이 여인을 한번쯤 우리의 목적을 위하여 쓸모 있게 이용하는 게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저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자가 스스로 예언자임을 자처하면서 온갖 부정한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그는 모세의 법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가르친다는데, 이 여인을 그에게 데리고 가서 어떻게 판결을 내리는지 봅시다. 게다가 그는 자기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호연하고 다닌다는데, 어디 이 더러운 죄인을 어떻게 살려 내는지도 살펴볼 만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다른 자가 맞장구를 치며 재미있어 했다.

"그것 참 신통한 생각이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우리가 그 예수라는 자를 골탕 먹이는 데 좀 이용한다 해서 죄가 될 것은 없지요."

 

그들은 이제 나의 몸에 돌 던지는 일을 잠시 연기하고는 예수라는 그들의 적대자를 사로잡기 위한 올 가미로 이용할 참이었다. 얼마나 치사하고 하늘 아래 부끄러운 노릇인가! 나는 마음껏 그들들을 경멸하였다.

명석한 두뇌와 좋은 가문 덕분에 공부를 하여 율법의 박사가 되고 바리사이의 옷을 걸치고 회당의 주인 노릇을 하고 주야로 하느님의 말씀을 암송한들, 그 모든 것이 다 무엇인가?  적수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교활한 여우처럼 함정이나 파는 것들이 도대체 하느님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인가? 우습게도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은 그런 자들이 주인 노릇을 하며 설치는 세상이었다. 이른바 지도층이란 자들이 누구보다도 먼저 부패하고 누구보다도 더욱 이기적이며 탐욕스럽고 기만적이며 어리석고 유치했다.

 

나는 죽음의 골자기로 가는 대신 뜻밖의 미끼가 되어 성전 안으로 끌려갔다. 거기서 그분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나를 끌어다 그분 앞에 세우고 올가미를 던졌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 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분이 한없이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그동안 나를 노려보던 자들의 그 숱한 탐욕의 눈, 능멸의 눈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맑아서 차라리 텅 빈 하늘처럼 공허한, 그런 눈으로 그분은 나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땅 위에 쪼그리고 앉았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쪼그리고 앉은 그분이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언가 쓰기 시작했다. 땅바닥에다 말없이 낙서를 하고 있는 그분을 보고, 그들은 마침내 그분을 꼼짝할 수 없는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는지, 어서 대답을 하라고 재촉하였다.

 

마침내 그분이 앉은 채 고개를 들어 둘러선 자들을 쳐다보셨다. 나는 그 눈에서 이글거리는 분노와 애끓는 연민의 정을 함께 보았다. 그분이 입을 열어 천천히 말했다.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치시오."

한 마디 말을 마치고 그분은 다시 바닥에다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방은 물속에 잠겨버린 듯 고요해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이제는 내 몸에 떨어질 돌멩이를 기다릴 차례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돌멩이는 날아오지 않닸다.

"툭!"



돌맹이가 힘없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슬그머니 돌아서서 자리를 뜨는 게 보였다. 그토록 등등하던 위세와 살기는 어디론가 자취도 없이 사라졌고, 모두들 풀이 죽어서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아아,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사람들, 짓밟고 욕하고 침 뱉고 저주하고 조롱하던 그 모든 사람들이 그분의 한 마디 앞에서 한꺼번에 허물어지듯 녹아버렸다. 그 순간 나는 사라지고 나면 그림자일 뿐인 그 모든 것의 실체를 보았다. 그렇다면? 결국 나는 아무것도 아닌 그림자들로 인하여 스스로 절망하였고 세상을 저주하였고 마침 내 자신을 내버린, 불쌍하고 어리석은 인간이 아니었던가? 내가 쓰다듬고 보듬어 안아야 할 세상은 다른 것이었는데, 사랑하고 미워할 대상은 다른 데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허깨비들과 다른 구경꾼들까지 모두가 사라져가자 마침내 그 자리에는 그분과 나만이 남게 되었다. 그분이 눈을 들어 나를 올려다보면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소? 돌을 던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소?"

"예,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나는 그분의 발 앞에 쓰러지며 겨우 대답했다.

"나도 당신의 죄를 묻지 않겠소. 돌아가시오. 그러나 다시는 같은 죄를 범하지 말아요.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에게는 살아야 할 아름다운 의무가 있어요. 자기든 남이든 사람을 버린다는 것은 무서운 죄악이오. 다시는 어느 누구든 버리지 말아요."

그분의 억센 손이 내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세상은 아직 넓어요. 찾아보면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오.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거든 우선 저기 보이는 들판과 나무와 작은 짐승들을 찾아가요. 그것들은 모두 당신의 사랑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과연 그분의 말씀대로였다. 다시 살아난 나의 앞에 세상은 전과 다름없이 그대로였지만, 그러나 옛날의 그 세상은 결코 아니었다. 내 눈이 열리자 그 순간 세상의 모습이 바뀌고 말았다. 나는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아직 나에게는 뜨거운 몸뚱이가 남아 있었다.

 

                                                           - 이현주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 중에서 (루카스크라나흐)


      


명화 속 불멸의 성인들] 45. 마리아 막달레나 Ⅲ

한 점의 꾸밈도 없는 절실한 참회
초췌한 얼굴·지저분한 머리카락
살아있는 ‘미라’ 연상시킬 정도로
진정한 참회의 모습 사실적 묘사
발행일 : 2010-07-25 [제2707호, 18면]

 ▲ 작품 해설 : 도나텔로,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1453-55, 높이 188 cm, 피렌체 대성당 부속 박물관.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가장 먼저 만난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주일 아침 돌아가신 예수님의 무덤을 보러 갔다. 그때 눈처럼 흰 옷을 입은 천사가 내려와서 무덤을 막은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십자가에 못 박혔던 주님이 되살아나셔서 지금 여기 계시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이 천사를 보고 까무러쳤다.

화가들은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놀라 까무러치는 장면을 예수님의 부활을 대신하는 장면으로 그리곤 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오는 장면, 즉 부활의 순간을 다룬 그림은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서야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오는 장면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은 부활한 예수님이 처음으로 마리아 막달레나와 만나는 장면을 비교적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막달레나는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는 슬피 울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녀 뒤에서 물으신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막달레나는 이 사람을 정원지기로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시자 그때서야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인 것을 알고 주님을 잡으려 하자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장면은 마리아 막달레나에 관한 복음서 중 가장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에 속하며 많은 화가들이 이 장면을 즐겨 그렸다. 그래서 그림의 제목도 “나를 붙잡지 말라”라고 불리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가서 사람들에게 당신이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 올라가실 것임을 전하라는 특별한 임무도 주신다. 

성경에 따르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처참한 순간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하고 슬퍼했던 여인이며, 또 무덤에 묻히신 후에도 걱정이 되어 무덤을 찾는 열성을 보였고, 예수님께서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심으로써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목격한 증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이 성경의 말씀이라면 전해져 내려오는 전승은 이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프랑스의 마르세이유로 가서 전교하다가 동굴에서 30년 동안 머물며 참회하다 생을 마감했다고 전하고 있다. 흔히 화가들이 막달레나를 참회하는 모습으로 그린 배경에는 이 같은 전승의 몫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엘 그레코, 티치아노를 비롯하여 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렸는데 대부분 막달레나를 눈물을 흘리는 아름다운 금발의 여인으로 그린 것과 달리 15세기 피렌체의 조각가 도나텔로가 제작한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 모습이 충격적일 정도로 사실적이다. 여기에 그동안 마리아 막달레나를 수식했던 아름다움이란 찾아볼 수 없다.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기는커녕 살아있는 미라를 연상시킬 정도로 얼굴은 가죽만 남았고, 눈은 처참할 정도로 변형되었으며, 이빨도 흉하게 빠져있다. 목은 닭의 목을 연상시키듯 뼈만 남았고, 아무렇게나 자란 머리카락은 온 몸을 치렁치렁 뒤덮고 있다. 

미술사에는 수많은 사실주의 작품들이 존재하지만 도나텔로의 이 작품처럼 한 점의 꾸밈도 없는 작품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도나텔로는 이 목조(木彫) 작품을 통해 진정한 참회가 무엇인지를 너무도 절실하게 보여준 것 같다. 


고종희(한양여대 교수·http://blog.naver.com/bella4040)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막달레나는 주님이 수난당하실 때 함께 있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던 날 아침 그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최초로 뵙는 영광을 얻었다(마르 16,9). 이 성녀에 대한 신심이 특히 12세기부터 서방 교회에 두루 퍼져나갔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복음서에 대한 강론에서
(Hom. 25,1-2. 4-5: PL 76,1189-1193)

 

막달레나는 누가 치워 버렸다고 생각한 그리스도를 애타게 찾았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에 가서 주님의 성시를 찾아내지 못 했을 때 그 성시를 누가 치워 버렸다고 생각하고는 제자들에게 말해 주려고 갔습니다. 제자들은 와서 보고 그 일이 막달레나가 자기들에게 말해 준 대로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복음서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계속됩니다. "제자들은 자기 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어서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다."라고 덧붙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이 여인의 마음속에 있는 열렬한 사랑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제자들이 가버린 후에도 주님의 무덤을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찾아내지 못한 것을 계속 찾았습니다. 또 찾는 동안에 울고 있었습니다. 사랑으로 불타 올라 누가 치워 버렸다고 생각한 그리스도를 애타게 찾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뒤에 남아서 혼자 찾고 있었기에 자기 혼자만 그분을 뵙게 되었습니다. 선업에 따라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항구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 자체이신 그분은 "끝까지 참는 자는 구원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찾았지만 처음에는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찾았기에 찾아냈습니다. 찾고 있는 동안 그녀의 애타는 소망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소망이 더욱 강렬해져 마침내 그것이 이루어졌습니다. 거룩한 열망은 그 성취가 지체될 때 더욱 커집니다. 열망이 지체되어 시든다면 그것은 참된 열망이 아니었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진리에 도달하게 되면 이는 그가 진리를 불타는 사랑으로 갈망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내 영혼,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아가에서 "나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었도다."라고 말하고, 다시 "내 영혼이 녹아 버렸노라."고 말합니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마리아의 열망이 더욱더 커지도록 주님은 그에게 슬픔의 원인에 대해 물어 보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찾고 있는 분의 이름을 말할 때 그분께 대한 한층 더 큰 사랑으로 불타 오르게 하기 위해 물어 보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셨다." 주님이 먼저 마리아를 "여인"이라고 모든 여성에 공통되는 명칭으로 부르셨을 때 그녀는 그분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은 그녀의 이름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너를 알아보는 분을 이제 깨달아라. 나는 너를 다른 사람들처럼 일반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알고 있다."라고 명백히 말씀하시려는 듯이 그의 본이름으로 부르십니다. 마리아는 본이름으로 불리우자 자기를 부르는 분을 알아뵙고 곧장 "라뽀니" 즉 "선생님이여"라고 외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외적으로 마리아가 찾고 있었던 대상이었지만, 내적으로는 그에게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신 분이었습니다.

 




[성미술 이야기] ‘참회하는 막달레나’ / 노성두
 
 
(사진말)
1. 엘 그레코의 「참회하는 막달레나」, 1587~1597년, 109x 96cm, 카우 페라트 미술관. 바르셀로나.
2. 엘 그레코의 「참회하는 막달레나」, 1579~1586년, 104x 85cm, 윌리엄루킬 넬슨 미술관, 켄사스 시티.
3. 엘 그레코의 「참회하는 막달레나」, 1603~1607년, 118x 105cm, 펠릭스 발데스 이자기르 컬렉션, 빌바오.
 
 
속죄의 눈물
금방이라도 쏟아질듯
 
 
막달레나와 세례자 요한의 공통점은?

둘 다 광야에서 고행을 겪었다는 것. 그리고 미술에서는 자주 알몸으로 등장한다는 것이 답이다. 가령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숲 속의 세례자 요한」은 알몸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그림을 본 사람들이 엉뚱한 마음을 품었다고 하고, 티치아노 베첼리오가 그린 「참회하는 막달레나」는 심하게 벗었다는 이유로 비난을 사기도 했다. 이들 뿐 아니라 성 예로니모도 광야에 나가면 웃도리를 예사로 벗어 던지고, 성 세바스티아노, 성 아녜스, 성 가타리나도 덩달아 몸매를 자랑한다. 아마 미술의 역사에서 노출 패션을 선보인 것은 아담과 하와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여기서 알몸은 「진실」의 다른 말이다. 진실은 모름지기 한 올의 거짓도 없는 알몸이라야 한다는 「벌거벗은 진실」(nuda veritas)의 재현 전통이 고대의 전통으로부터 종교미술에 스며들면서 15세기에는 성자들도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게 되었다.

여자들은 처음에는 목부터 조심스레 드러내다가 차츰 어깨와 등허리로 옷주름이 흘러내리고 급기야는 가슴과 배꼽을 거쳐 둔부와 허벅지까지 시원스레 노출한다. 남자들도 뒤질세라 너나없이 딱 달라붙는 바지를 입고 각선미 자랑에 열을 올리는 것도 흥미로운 현상이다. 이때부터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교회와 세속의 엇갈린 요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작한다.

성서가 말하는 막달레나

「참회하는 막달레나」는 알몸의 성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위태로운 소재였다. 죄악과 참회, 관능과 정숙의 경계가 모호했기 때문이었다. 신약성서를 들추면 막달라 여자 마리아(막달레나) 이야기가 무척 많이 나온다. 웬만한 제자들은 저리 가라고, 심지어 성모 마리아와 어깨를 겨룰 만큼 기록이 풍부해서 예수님께서 왜 막달레나를 열 세 번째 제자로 삼지 않았나 궁금할 정도다.

얼른 생각나는 대목만 꼽아도, 간음의 죄를 저지르고 돌에 맞을 뻔한 마리아, 시몬의 집에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신 마리아, 베다니아에서 예수님의 발에 나르드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낸 마리아, 언니 마르타가 끼니를 준비하는 동안 주님 곁에서 귀기울인 마리아, 죽은 오라비 라자로를 살려 달라고 간청한 마리아, 예수님께서 골고타에 오르시는 고난을 지켜보았던 마리아,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 가운데 마리아, 입관을 앞두고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는 마리아 같은 주제들이 떠오른다.

그뿐일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찾았던 사람도 막달레나였다. 어머니 마리아나 베드로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무척 섭섭했을 테지만, 이런 것만 보아도 예수님께서 막달레나를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셨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반가워서 손을 내미는 막달레나에게 이렇게 잘라 말하셨다.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라』(요한 20, 16~18).


광야에서의 고행

화가 엘 그레코는 「참회하는 막달레나」를 여러 차례 그렸다. 엘 그레코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16`~17세기 화가들에게 가장 주문이 많이 들어왔던 주제였다. 그 까닭은 대강 이랬다. 1517년 독일에서 시작된 루터의 개신교 운동이 확산되자 가톨릭에서도 대응책을 강구하게 되었는데, 이때 로마에서는 막달레나가 과거를 후회하면서 눈물을 뿌리는 그림을 교화의 수단으로 내세운다. 신앙의 변절자들에게 재개종을 권유하는데 「참회」의 슬로건이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막달레나가 광야에 나가서 30년 동안 고행했다는 이야기는 성서에는 없고 「황금전설」에 나온다. 왜 하필 광야를 참회의 장소로 골랐을까? 막달레나 뿐 아니라 많은 은둔 성자들이 그랬다. 광야는 예수님께서 고행하시며 시험을 받으신 적도 있지만, 그보다 앞서 아담과 하와가 처음 자신들의 삶을 개척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여기서 광야는 도시의 반대말이다. 도시와 전원, 문명과 자연을 따로 구분해서 생각한 것은 르네상스 이후에 일반화된 근대의 사상이다. 도시가 인간이 지어 올린 유혹과 죄악을 상징한다면 광야는 그것의 속죄와 물림을 의미한다. 땅은 용서하고 치유하는 모성이요, 무한히 인내하는 생명의 품으로 보았다.


엘 그레코의 그림

엘 그레코는 자연의 품에 돌아가서 참회하는 막달레나를 그렸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스산한 풍경이다. 인적도 보이지 않는다. 막달레나는 바람이 씽씽부는 추운 겨울을 남루한 겉옷 한 벌로 지낼 모양이다. 몸을 비스듬히 젖히고 있지만, 우리가 손을 내밀면 닿을 만큼 가깝다. 막달레나의 파리한 입술과 시린 눈망울에는 슬픔이 짙게 묻어있다. 금세라도 눈물이 굴러 떨어질 것 같다.

막달레나는 오른손으로 긴 머리카락을 감싸쥐었다. 시선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응시한다. 앞에 놓인 해골은 죽음의 단호한 표상이다. 막달레나의 왼팔은 육신과 죽음이 한 매듭으로 묶여 있다는 덧없음의 교훈을 설명한다. 뒤쪽 벼랑에는 인동넝쿨이 한 가닥 붙어 있다. 시련을 이기는 기도의 생명력을 이런 식으로 표현 한 것이 아닐까? 배경에는 푸른 구름이 어지럽게 춤춘다. 죄 많은 기억이 꼬챙이를 휘둘러서 먼 곳의 구름을 휘저어놓은 모양이다. 엘 그레코의 그림에서는 예사로운 풍경조차 내면의 기억을 반영한다.

막달레나의 이름을 풀면 「비탄의 바다」라는 뜻이 된다고 한다. 『비탄의 눈물이 후회의 바다를 씻어준다』라고 읽으면 어떨까?
 

[가톨릭신문, 2003년 8월 10일]



편집 : 불광동성당 미디어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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