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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복 받은 자의 삶에 찾아오는 기근(饑饉) (창세42,1-23)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7-07 조회수6,770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7. 7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도란도란글방

 

복 받은 자의 삶에 찾아오는 기근(饑饉)

 

(창세42,1-23)

1 야곱은 에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왜 서로 얼굴들만 쳐다보고 있느냐? 2 내가 들으니 에집트엔 곡식이 있다더라. 그러니 내려 가 곡식을 사 오너라. 어떻게든지 살아야지 이러고 있다가 그냥 죽을 수야 없지 않느냐?' 3 그래서 요셉의 열 형은 에집트로 밀을 사러 떠났다. 4 그러나 야곱은 요셉의 아우 벤냐민만은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않았다. 베냐민이 무슨 변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5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들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아들들도 다른 사람들 틈에 끼어 곡식을 사러 내려 가지 않을 수 없었다. 6 그 때에 요셉은 이미 그 땅의 통치자가 되어 있었다. 그가 바로 그 땅 온 백성에게 곡식을 파는 책임자였다. 요셉의 형들은 도착하는 길로 얼굴을 땅에 대고 그에게 절을 했다. 7 요셉은 형들을 보자 곧 알아 보면서도 남을 대하듯이 거칠게 말하였다. '너희는 어디서 온 자들이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가나안 땅에서 양식을 사러 왔습니다.' 8 형들은 요셉을 알아 보지 못했으나,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고 9 형들이 이렇게 되리라 꾸었던 꿈을 생각하면서 을러 메었다. '너희들은 간첩이지? 이땅의 헛점을 살피러 왔지?' 10 그러자 형들은 변명을 늘어 놓았다. '아닙니다. 나리, 소인들은 그저 양식을 사러 왔을 뿐입니다. 11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의 자식입니다. 우리는 거짓말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절대로 간첩이 아닙니다.' 12 그가 말하였다. '그럴 리가 없다. 너희는 틀림없이 이 땅의 헛점을 살피러 왔어.' 13 그들이 대답하였다. '소인들은 본래 열 두 형제였습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의 아들들인데, 아버지는 지금 가나안 땅에 계십니다. 막내 동생은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있습니다. 동생 하나는 없어졌습니다.' 14 '내 말이 틀림없다. 너희는 간첩이야.' 하고 요셉은 을러 메었다. 15 '너희를 시험해 봐야겠다. 너희 막내 동생을 이리로 데려 오지 않고서는 파라오가 살아 계시는 한 여기에서 절대로 나갈수 없다. 16 너희 가운데서 한 사람을 보내어 동생을 데려 오너라. 그 동안 너희는 옥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너희 말이 참말인지 시험해 봐야겠다. 만일 데려 오지 못하면 그때엔 파라오가 살아 계시는 것처럼 너희가 간첩이라는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17 그리고서 사흘 동안 그들을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18 사흘째 되던 날 요셉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도 하느님 두려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 너희는 이렇게 하여라. 그래야 살 수 있다. 19 만일 너희가 정직한 사람이라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감옥에 남겨 두고 나머지는 너희 집안 식구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곡식을 가지고 가거라.' 20 그리고서 너희 막내 동생을 나에게로 데려 오너라. 그렇게 하면 너희 말이 참말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너희는 죽음을 면할 것이다 그들은 그대로 하기로 하고 21 서로들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사실이지, 우리가 동생에게 그 짓을 하고 어떻게 벌을 면하겠니? 그렇게 가슴 아프게 애원하는 것을 보면서도 못 들은 체했는데! 그 때문에 우리가 이런 곤경에 빠진 거야.' 22 그러는데 르우벤이 그들에게 한 마디 했다. '그 애에게 못할 짓을 하지 말자고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너희는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제 그의 피가 앙갚음을 하는 것이다.' 23 그들은 자기들과 요셉 사이에 통역이 서 있었기 때문에 요셉이 자기들의 말을 듣고 있는 줄은 몰랐다. 요셉은 듣다 말고 물러가서 울었다. 다시 돌아 와서 말을 주고 받다가 요셉은 그들중 시므온을 불러 내어 그들이 보는 앞에서 묶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이 당한 억울한 감옥살이를 그대로 경험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마치 인생 속에서 예수님의 억울함을 그대로 겪어내야 하는 성도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복이 전달되어지는 모습인 것입니다. 과연 이 에피소드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오늘 자세하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느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에서 나타나는 모든 종류의 사건과 상황과 정황을 가리켜 형통이라 합니다. 그런데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형통의 삶은 자신의 뜻과 비전과 야망과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형통은 죄에서 비롯된 우리의 꿈을 꺾고 당신의 꿈을 우리의 삶에 성취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삶이 쉽지 않은 삶이라 했습니다.

이제 창세기 42장부터는 기근을 맞은 야곱과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가게 되는 과정과 그 곳에서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나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 그리고 하느님의 예언대로 이루어지게 된 야곱과 그 가족들의 애굽 이주가 기록이 되어 있고, 이스라엘의 대표요 상징으로 창세기에 등장했던 야곱의 죽음으로 50장에서 끝을 맺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이 야곱을 장사지내기 위해 가나안으로 야곱을 옮기는 그 행로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창세기 50장에 보면 요셉이 야곱의 시신을 가나안으로 옮기는데 굳이 요르단 동편으로 가서 곡을 한 뒤에 요르단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애굽은 가나안 서편에 있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가나안 땅 동편 끝이 요르단강입니다. 따라서 애굽을 출발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굳이 요르단 강 동편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요르단강 건너편 아닷의 타작마당에서 칠일 동안 애곡을 하고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그곳 이름이 아벨미스 라임입니다.

야곱의 삶이 그로부터 400년 후에 출애굽을 하는 전체 이스라엘 민족과 닮아 있지요? 성경은 나그네 인생길 147년 동안 하느님과 동행하며 결국 이스라엘로 완성이 되어 하느님 나라인 가나안에 입성을 하게 되는 야곱의 生死의 모든 과정들을 통하여,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 가나안이라는 하느님 나라로 입성하게 되는 우리 교회의 삶을 상징적으 로 예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502절에는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표기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야곱의 인생과 죽음에서 우리 자신의 인생과 죽음을 찾아 읽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느님의 복을 받은 야곱의 인생에 기근이 닥칩니다. 왜 하느님은 복을 받은 사람의 인생에도 기근을 허락하실까요? 아니 엄밀히 말하면 야곱과 그의 후손들의 애굽 이주라는 하느님의 계획 때문에 다른 이들까지 기근(饑饉)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내린 기근에 야곱을 밀어 넣으신 것이 아니라 야곱에게 내린 기근에 다른 사람들이 덩달아 고통을 받게 만드신 것입니다.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우리는 로마서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야곱을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사랑하셨다는 진술을 보았습니다.(로마9:13) 그리고 히브리서의 진술을 통해 야곱이 믿음의 사람이었음도 확인한 바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을 입은, 믿음의 사람의 인생이 이처럼 험악하게 진행이 되다가 결국 이방 땅에서 끝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그 하느님의 사랑성도의 믿음’, 그리고 험악한 삶이라는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조화가 되십니까? 사랑과 믿음이 근거가 되고, 전제가 된 삶이 험악하고 외롭게 진행이 되다가 결국 그렇게 끝이 난다는 것에 쉽게 동의가 되세요?

 

거기에 동의가 안 된다면 우리는 야곱의 인생을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현실과 삶에도 쉽게 동의가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늘 원망과 불평과 아쉬움의 한숨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야곱의 삶에 나타난 기근의 이유를 올바로 이해를 하고 현실 속에서 여러분의 인생에 일어나고 있는 기근에 대해 올바로 반응을 하시고 대처를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하느님의 사랑이 폭포수처럼 쏟아 부어진 야곱의 삶을 잠깐 돌아볼까요?

그는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가족들에게서 도망쳐, 외삼촌 집에서 온갖 사기와 권모술수에 치이며 고생 고생하다가, 결국 자기가 그 토록 사랑하던 라헬을 얻어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렇게 애지중지했던 라헬을 잃었고, 얍복 나루터에서 하느님과 씨름을 하다가, 평생 지팡이를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라헬의 소생 중 그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 요셉의 피 묻은 옷을 부둥켜안고 아들을 잃은 자의 쓰라린 고통을 십수년간 경험해야 했으며, 먹을 것이 없어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내어 양식을 동냥해야 하는 처참한 처지에 처해지기도 했고, 막내아들 베냐민까지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지팡이를 의지하여 아들들에게 축복을 한 후 이방 땅 애굽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이 뱃속에서부터 하느님의 사랑을 입고 믿음을 선물로 받은 이스라엘, 야곱의 삶입니다. 그런 그가 나그네 인생길을 모두 지나서 요르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 묻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야곱, 즉 이스라엘의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느님의 사랑성도의 믿음의 결론은 영적으로, 혹은 죽어서 들어가게 되는 하느님 나라인 것이지 이 땅에서 가시적 결과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을 입고 믿음을 가지게 된 성도들이 이 땅에서 겪는 모든 일은 하느님 나라 입성을 위한 과정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겪는 모든 일은 그 자체가 결론이나 목적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교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고 반대로 절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험악한 삶이 바로 그것입니다. 야곱은 살아생전에 세상 적 관점에서의 복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하느님의 복이 어디서 만개를 했습니까? 죽어서 들어간 가나안에서 만개를 한 것입니다. 그 건 하나의 상징입니다.

 

성도의 인생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이러 저러한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고 하는 기대와 추측을 무참하게 박살내며 돌진해 오시는 하느님의 열심으로 점철되어 집니다. 우리는 섣불리 추측하기를 이왕이면 뱃속에서부터 하느님의 미움을 받았다고 하는 에사오가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가서 온갖 고생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왕이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믿음의 사람 야곱이 애굽의 왕 바로에게 양식을 꾸어 주는 자리에 앉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고 나름대로의 시나리오를 써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의 상식과 기대를 뛰어 넘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을 궁지로 몰아넣으십니다. 그런데 그 일이 결국 승리와 영광의 사건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獨生 하신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아버지, 할 수만 있으시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애원을 했음에도 기어코 그 잔을 아들의 입에 털어 넣으십니다.

그런데 항상 아버지의 행사가 옳았습니다. 십자가는 누가 봐도 미련하고 허약하기 그지없는 실패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진짜 승리였고, 참 된 옳음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지혜를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의 일에 그 어떤 조언도 할 수 없는 미련한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 속에 나타나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도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로마11:33~34) 33 !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 누가 그분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34 '주님의 생각을 잘 안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주님의 의논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는 사건들과, 당면하게 되는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을 자기 마음대로 재단을 하고 정의를 내리는 것은 정말 위험한 짓입니다. 왜 하느님은 착하게 살고, 목숨 걸어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의 간절한 기도를 들은척 만척 지나치시냐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성도의 삶에 그렇게 무시무시한 고난과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선이며 그 자체가 옳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애정 어린 충고와 잔소리를 하고, 때로는 그가 올바른 길을 가게 하기 위해 체벌을 가하기도 하는 사람을 악하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의 선하심을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다 없애셔야만 하는 것으로 규정짓는 것은 오산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신이 고통 속에 던져지게 되자 그 모든 자기의 주장과 논리들이 망각되어지고 하느님에 대한 원망만이 쏟아져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나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마치 고통에 대해 달관한 듯했던 그의 말년에 무서운 고통을 허락하심으로 그의 연약함과 무력함과 불신앙을 폭로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그게 복입니다.

그렇게 극한의 고통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인간은 하느님의 선과 하느님의 공의와 하느님의 열심까지도 의심을 하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나에게 당면해 있는 고통과, 하느님의 선까지 의심하고 있는 나의 불경스러운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성도의 고통은 가중이 됩니다. 거기에서 인간은 자신을 부인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결국에는 하느님만 꼭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옳으십니다. 그 바보 같고 어리석어 보이는 골고타의 十字架이고 옳음이었듯이 성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상황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느님의 열심의 산물인 것입니다. 선은 항상 하느님에게서만 나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선한이가 없다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루가18:19) 선은 하느님에게서만 나오는 것이니까요. ‘이라는 단어 ‘good’‘god’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 말은 선의 존립 기반이 바로 신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납득이 되지 않는 모순 속에서 하느님의 선하심을 분별해 내고 인정하는 이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하느님을 향하여 삿대질을 해 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를 놓지 않으시고 항복시키시고 부인시켜서 그 고통과 모순의 과정 끝에 마련되어 있는 요르단 강 건너의 가나안에 반드시 넣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모든 일상은 하느님 나라 입성에 꼭 필요한 교육과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성도의 삶을 한마디로 시험이라고 부릅니다.(신명8:1-3) 시험은 단순히 점수를 잘 맞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실력을 키우기 위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실력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착하게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구제와 섬김에 열심을 내는 삶일까요? 만일 그것이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실력이라면 우리는 바리새인들을 쫒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야훼의 증인이나 몰몬교인 들을 따라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기실 완전한 거룩과 완전한 선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레위11:45) 45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이 되려고 너희를 에집트 땅에서 올라 오게 한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야 한다.

 

(창세17:1) 1 아브람이 구십 구 세 되던 해에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신이다. 너는 내 앞을 떠나지 말고 흠 없이 살아라.

 

보다시피 하느님의 거룩, 하느님의 완전, 이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실력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시험이 닥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 동안에 하느님과 같은 완전한 존재로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가 인생이라는 그 하느님의 시험을 통과하면 모두 하느님의 거룩과 하느님의 완전이라는 합격 커트라인을 통과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요?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 기근이 닥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지점은 완전성화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가 하느님의 시험이라는, 신앙생활을 통해 도달해야 할 진짜 실력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바로 여기입니다.

 

(신명8:1~3) 1 너희는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계명을 성심껏 지켜야 한다. 그래야 너희는 행복하게 살며 번성할 것이고 야훼께서 너희의 선조들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 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 2 너희는 지난 사십 년간 광야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어떻게 너희를 인도해 주셨던가 더듬어 생각해 보아라. 하느님께서 너희를 고생시킨 것은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 시련을 주어 시험 해 보려고 하신 것이다. 3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고생시키시고 굶기시다가 너희가 일찌기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 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광야의 삶을 허락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시는 것은 그들이 정말 자신들의 힘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지 킬 수 있는지를 확인시키시기 위함이며, 결국 인간은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쫒아 살 때 가장 행복할 수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성도가 신앙생활이라는 광야의 시험을 통과하며 연마해야 할 실력은, 난 도저히 내 힘으로 하느님의 거룩과 완전함에 도달 할 수 없다는 자기 부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의 연약함과 불가능함과 더러움이 나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폭로가 되고 인정이 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온전함이 우리의 비워진 가슴 속에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괴리(乖離)의 공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사다리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력함이 폭로가 되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괴리(갈라짐)의 공간이 드러나게 될 때 그 인간과 하느님과의 괴리(乖離)를 십자가와 성혈이 채우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단절되어 굳은살이 박혀버린 그 괴리의 공간은 절대로 인간의 노력과 훈련에 의해 메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수긍하며 하느님 앞에서 를 완전히 비워낼 때 하느님의 은혜가 그 자리를 메워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하느님 나라의 생존법칙 입니다. 거기에 쓰여 지는 것이 광야의 시련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광야 시험의 첫 번째 목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인생에 주어지는~

(신명82-3) 2 ”너희는 지난 사십 년간 광야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어떻게 너희를 인도해 주셨던가 더듬어 생각해 보아라. 하느님께서 너희를 고생시킨 것은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 시련을 주어 시험 해 보려고 하신 것이다”. 3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고생시키시고 굶기시다가 너희가 일찌기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 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성도는 인생 속에서 소유에 관한 시험도 통과하게 됩니다. 그게 신명기 83절의 시련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의 빵에 의해 존재하고 행복에 도달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존재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시험입니다. 그것도 역시 자기부인이라는 커다란 괄호 속에 들어 있는 세상부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풍요라는 시련을 통과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결핍이라는 시험을 통과하기도 합니다. 성도는 풍요와 결핍이라는 시험을 통과하며 결국에는 사람이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즉 이 세상의 소유의 많고 적음에 의해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과는 무관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쫒아 사는 것이 행복의 전제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필립4:11~13) 11 내 처지가 어려워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12 비천하게 살 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13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풍요나 가난이 자신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함께 하심이 성도를 움직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가 바로 성도의 광야 시험의 또 다른 목적지인 것입니다. 이렇게 자만심과 자신감에 펄펄 뛰던 자아가 부인되고, 하느님이 아닌, 이 세상의 힘의 소유가 행복의 근거가 아님을 알게 되는 성도의 광야 시험 속에 고난과 고통과 이해할 수 없는 사건과 상황들이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잊지 말고 은혜만 붙들라고요. 그걸 야곱과 요셉의 삶이 알기 쉬운 그림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애굽이라는 나라에 요셉이라는 인물이 개입하기 전에는 나일강 삼각주 지역에서 풍성한 추수가 그치질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세상이 심음과 거둠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은혜를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의 직장과 가정, 여러분의 수입과 지출, 이 모든 것들이 그냥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혜의 산물인 것입니다.

 

(창세8:22) 22 땅에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밤과 낮이 쉬지 않고 오리라.'

 

이렇게 심음과 거둠과 사계절과 추위와 더위와 낮과 밤까지도 하느님의 언약에 의해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밖에 나가서 일을 하고 100불을 벌든 1,000불을 벌든 그건 모두 창세기 822절의 하느님의 언약과 그 분의 허락하심 에 주어지는 거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러한 것들이 그냥 자연스러운 것인 양, 아니 자신들의 노력으로 주어진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는 이 세상의 힘들을 쌓고 모아서 자신들이 추구하고 고안해 낸 행복에 도달하려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 게 우리 성도들의 옛 사람으로 우리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자아숭배입니다.

거기에 하느님이 개입을 하여 그 인생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혜로 주어지게 되는 것이며, 오직 하느님의 은혜의 이끄심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자아숭배, 자기주장에서 자기부인으로의 성숙입니다.

잘보세요. 평안하던 삼각주 애굽 땅에 하느님의 사람, 요셉이 개입을 하게 되자 흉년이 듭니다. 창세기 41장에 애굽 왕 파라오의 꿈이 나오지요? 일곱 마리 살찐 소를 일곱 마리 흉악한 소가 잡아먹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마른 일곱 이삭이 삼켜 버리는 꿈이었습니다. 그것은 애굽의 칠년 풍년과 칠년 흉년에 관한 꿈이었습니다.

멀쩡한 애굽 땅에 갑자기 흉년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요셉과 야곱, 그리고 야곱의 후손들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이 애굽의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전 세계의 역사가 그들을 중심으로 움직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 흉년 기간 동안에 요셉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고, 그로부터 양식을 공급받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자가 없게 됩니다. 거기에는 아주 중요한 성도의 삶에 대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성도의 삶에 예수가 개입을 하시면 평안하던 성도의 삶 속에 여러 가지 모양의 흉년이 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흉년은 단순히 사업이 망하고, 가난해 지고, 병이 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흉년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흉년이 있습니다. 풍요 속에서의 흉년, ‘이렇게 돈을 많이 벌었는데 왜 아직도 공허하지?, 이렇게 돈이 많은 데도 자식이 속을 썩이니까 아무런 흥이 나지 않는구나등등의 흉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흉년 속에서의 흉년도 있습니다. ‘가난하니까 무시까지 당하는구나, 돈이 없으니까 몸에 힘도 없어지는구나.’ 등등 여러 가지 흉년이 성도의 삶에 찾아옵니다. 그 때 성도는 흉년을 맞은 자들이 하느님의 사람 요셉에게 구걸하여 생존하게 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꼭 붙들고 그 분께 항복하는 자가 참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 에피소드 안에는 또 다른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인생은 반드시 영광으로 끝이 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풍년을 추구하는 세상은 결국 흉년으로 마감을 하게 되지요? 그러나 요셉의 삶은 결국 영광으로 끝이 나게 되지요? 그것은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쫒아 인내하며 시험에 통과한 성도들의 삶은 영광으로 결론이 나게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셉에게 두 자녀가 생기게 되는데 그 자녀의 이름은 이러합니다.

 

(창세4150-52) 50 흉년이 오기 전에 요셉은 온이라는 곳의 사제 보디베라의 딸 아세낫에게서 두 아들을 얻었다. 51 하느님께서 나의 온갖 쓰라림과 아버지의 집 생각을 잊게하셨다 하면서 요셉은 맏아들의 이름을 *므나쎄라 지었다. 52 둘째는 '내가 고생하던 이 땅에서 하느님께서는 나를 번성하게 하셨다.' 하면서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지었다.

 

이 요셉의 두 아들의 이름이 바로 요셉의 인생 전체를 요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다시피 처음 아이는 요셉의 힘든 인생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아이는 그 고난의 결과의 표현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풍년에서 흉년으로 치닫게 되지만 요셉의 운명은, 고난 다음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세상과 거꾸로 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기 위해 고난이라는 광야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셉과 야곱, 그리고 그 아들들에게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 그리고 인간의 불가능함과 하느님의 은혜를 가르치시기 위해 애굽의 왕이 힉소스 왕조로 바뀌기도 하고, 다시 함 족의 왕조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것을 위해 애굽의 왕이 꿈을 꾸기도 하고 그 꿈대로 풍년과 흉년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권세 자들이나 정권이나 이데올로기 등이 전부 하느님 나라의 완성과 하느님 백성들의 시험을 위한 들러리, 엑스트라, 무대 배경에 불과한 것입니다. 미국이라는 대 제국이 존재하는 것이 여러분의 완성에 쓰이는 무대 세트라는 것입니다. 트럼프, 바이든, 하산 로하니, 시진핑, 블라디미르 푸틴, 등이 하느님 나라 백성들의 양육에 잠시 쓰이는 엑스트라 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성경에 근거하여 세계의 역사와 여러분의 인생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시 세계 최고의 권력자였던 파라오의 꿈이 요셉에 의해 해석이 됩니다. 파라오가 가지지 못한 능력을 하느님의 백성인 요셉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꿈, 즉 성경 말씀을 가지고 이 역사를 해석합니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이나, 자연재해, 전쟁, 에이즈 코로나19 등의 전염병 등을 보면서 우리는 역사를 해석하고 이 땅을 살아가는 피조물들의 타락상을 해석해 냅니다.

파라오가 요셉의 꿈 해석에 의해 지배를 받았듯, 우리 성도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알고 있다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위의 상위 권세는 없습니다. 성도 위에 존재하는 상위 권세는 하느님 한 분 뿐이십니다. 우리 성도는 그러한 해석학 적 공동체로서 역사에 지배당하지 않고 역사를 올바르게 해석하여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어떤 두 사람이 똑같은 부위를 똑같은 크기로 칼에 베었다고 해 보자고요. 칼에 손을 벤 두 사람 모두 아픕니다. 그걸 영어로 pain 이라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요리사의 꿈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요리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칼을 다루다 손을 벤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희망을 근거로 고통을 수월하게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친구나 가족의 공격에 의해 손을 베었습니다. 나의 측근이 나를 공격하기 위해 내 손을 찌른 것입니다. 그 사람은 pain(통증)과 함께 정신적으로도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걸 고통 (suffering)’ 이라 합니다. 그 두 종류의 아픔을 비교해 보세요. 똑같은 부위를 똑같은 정도로 다쳤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고통의 크기가 줄어들기도 하고 커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고통은 무엇 때문에 우리가 느끼게 되는 주관적 아픔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허락하시는 고통, 불쾌한 감각, 정서적 경험 등은 여러분을 해치기 위한 하느님의 공격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대한 하늘의 왕자와 공주로 만들기 위한 하느님의 집요한 애정표현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통증속에서도 아파하지 않으실 수 있어야 하고 고통 속에서도 속히 빠져나올 수 있는 복음의 올바른 이해를 전제한 실력을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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