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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언약에 속한 자가 치러야 할 대가 (창세22,20-23,20)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7-02 조회수6,733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7. 2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도란도란글방

 

언약에 속한 자가 치러야 할 대가

 

(창세22,20-23,20)

22,20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아브라함은 아우 나홀의 아내 밀가에게서 자식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21 그들의 이름은 아래와 같다. 맏아들 우스, 그 밑에 부즈와 크무엘이 있었는데, 크무엘은 아람의 아버지다. 22 또 케셋, 하조, 빌다스, 이들랍, 브두엘이 있었는데 23 브두엘에게서 리브가가 태어났다. 이렇게 밀가가 아브라함의 아우 나홀에게 낳아 준 아들은 모두 여덟이었다. 24 나홀에게는 르우마라는 소실이 있었는데, 그에게서 테바, 가함, 다하스, 마아가가 태어났다.

23,1 사라는 백이십칠(127)년을 살고 2 키럇아르바라고도 하는 헤브론 땅에서 죽었다. 아브라함은 빈소에 들어 가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다. 3 아브라함은 시신 앞에서 물러나와 헷 사람들에게 가서 청하였다. 4 '나는 당신들한테 몸붙여 사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으나, 내 아내를 안장하게 무덤으로 쓸 땅을 좀 나누어 주십시오.' 5 헷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청을 받아 들이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6 '영감님, 들으십시오. 영감님은 우리 가운데서 세력있는 귀인입니다. 그러니 우리 묘지 가운데서 가장 좋은 곳을 골라 부인을 모시십시오. 영감님이 부인의 묘지로 쓰시겠다는 데 거절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7 아브라함은 일어나 그 땅에 사는 헷 사람들에게 절하며 8 말하였다. '내 아내를 안장하도록 허락해 주시니 하나 더 청을 올리겠습니다.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말해 9 그의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 동굴을 나에게 양도하도록 해 주십시오.' 값은 드릴 만큼 다 드릴 터이니 당신들 앞에서 그것을 내 묘지로 삼게 해 주십시오. 10 마침 에브론은 헷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헷 사람 에브론은 성문께에 나와 있는 헷 사람들이 듣는 데서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였다. 11 '영감님, 내 말을 들으십시오. 그 밭을 영감님에게 그냥 드립니다 그 밭에 딸린 동굴도 함께 드립니다. 내 겨레가 보는 데서 드리는 것이니 어서 부인을 안장하십시오.' 12 아브라함은 그 곳 백성들에게 절하고 13 그 곳 백성들이 듣는 데서 에브론에게 말하였다. '그러시다면, 내 말도 들어 주십시오. 땅값을 드릴터이니 받아 주십시오. 그래야 내 아내를 거기에 안장할 수 있겠습니다.'

14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였다. 15 '영감님, 들으십시오. 땅값으로 말하면 은 사백 세겔이 되지만, 그것이 당신과 나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됩니까? 어서 부인을 안장하십시오.' 16 아브라함은 에브론의 말을 받아 들여 그가 다른 헷 사람들이 듣는 데서 말한 은 사백(400)세겔을, 당시 상인들 사이에 통용되던 무게로 달아 치렀다. 17 이리하여 마므레 동쪽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은 거기에 딸린 동굴과 사방 언저리에 있는 모든 나무와 함께 18 성문에 모인 헷 사람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아브라함의 땅이 되었다.

19 그제야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막벨라에 있는 밭에 딸린 동굴에 안장하였다. 그 밭은 가나안 땅으로 마므레라고도 하는 헤브론 동쪽에 있었다. 20 그 밭과 거기에 딸린 동굴은 헷 사람에게서 아브라함에게로 넘어 와 그의 묘지가 되었다.

 

창세기 22장의 모리야 산 사건은 시온 산에서 쪼개진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게 되는 교회의 탄생에 관한 상징적 그림이었으며(야훼이레) 아울러 그러한 하느님의 열심과 주권 속에서 구원받은 하느님 백성들의 삶 속에 나타나야 하는,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온전한 순종의 삶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22장에서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 죽어야할 자 대신에 죽음을 맞게 되는, 죽기까지 충성하는(필립2:8) 하느님이 준비하신 어린양이 담고 있는 내용과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백세에 난 이사악을 하느님께 순종의 제물로 드리는 아브라함의 삶은 정확하게 같은 것이지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 그로 말미암아 탄생케 되는 성도의 순종으로 나타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 잘 그려져 있는 장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그 완전한 순종의 삶이 자기 부인의 삶이고, 십자가의 삶이며, 거룩한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완전한 순종의 삶을 예수님의 삶 속에서 보았고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보았으며 온전히 완성된 하느님 백성들의 삶 속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이자 규범이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주권이 우리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격발시켜 자기를 부인하는 자로 만들어 가는지에 대해 공부를 해 보았습니다.

그러한 창세기 22장에 이어서 전개되는 오늘 본문인 23장의 내용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죽음과 막벨라 동굴을 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두 이야기 사이에 뜬금없이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2220절 이하를 보면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이 역시 아브라함의 형제였지만 일찍 세상을 떠난 하란의 딸 밀가와 결혼을 합니다. 밀가는 롯과 남매지간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이 자기 조카하고 결혼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여덟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중 막내아들 이름이 브두엘인데 그가 바로 야곱의 외삼촌인 라반과 이사악의 아내이자 야곱의 어머니인 리브가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악과 리브가는 오촌 당숙과 조카지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리브가의 이름이 등장하고는 23장의 사라의 죽음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유 없이 기록되어 있는 구절은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이 그렇게 귀한 지면을 할애하여 뜬금없이 나홀의 족보를 삽입해 놓았을까요? 나홀의 족보 역시 그 앞의 모리아 산에서 나타난 야훼 이레의 속편 인 것입니다.

사라는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 살다가 믿는 자들의 어머니가 될(창세17:16) 생활의 행적을 남겨 놓고 하느님 품으로 떠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이어서 이 땅 위에서 경영하는 하느님 나라의 일 가운데 안살림을 할 리브가가 하느님에 의해 준비되어져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언약은 중도에 실패되거나 중지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라가 죽었다고 해서 하느님의 언약이 파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 나라의 완성 때까지의 하느님 언약의 끊임없는 전승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철저한 계획에 의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유지되며 완성되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홀의 족보에 뒤이어 나오는 23장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창세기22장 마지막 부분의 족보는 그 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제멋대로 하던 시대였다.’는 판관기의 마지막 구절(21,25)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왕을 허락하셨다는 사무엘서 사이에 하느님이 준비하신 다윗의 이름이 등장하는 룻기가 들어가 있는 것과 같은 형국으로 삽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계획하시는 하느님이시며 준비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야훼 이레의 모리야 산 사건에 강조하여 첨가해 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창세기 22장은 앞부분도 야훼 이레요 뒷부분도 야훼 이레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준비하시고 예비하시는 하느님에 의한 언약의 확실성과 영원성과 최종성이 이제 23장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23장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사라의 뒤를 이을 리브가가 출현하고 사라가 역사의 뒤로 사라집니다. 231절을 보면 사라가 127세에 헤브론 땅 기럇아르바에서 죽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137세였고 아브라함은 그 후로도 38년을 더 산 뒤 175세에 죽습니다. 사라가 죽을 때에 이사악의 나이는 37살이었습니다.

이사악이 3년 뒤인 마흔에 리브가와 결혼을 했고 60세에 야곱을 낳았으므로(창세25:26) 아브라함은 이사악과 75년을 함께 동거했고 야곱과는 15년을 함께 산 셈입니다. 이사악과 야곱은 아브라함과 함께 한 장막에서 동거하며 아브라함의 삶을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상당히 긴 시간과 공간을 서로 공유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동거하며 하느님과 교제를 했고 하느님의 인도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삶은 나그네요 우거(寓居)하는 자의 삶으로 서로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을 가리켜 아브라함 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라 칭하시기를 서슴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의 삶을 축약하여 한마디로 표현을 한다면 나그네 의 삶입니다. 아니 이 땅을 살다간 모든 하느님 나라 백성들이 나그네여야 합니다. 이 땅은 자기가 영원히 살 나라가 아니니까 요.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니까요.

본문 4절에 아브라함이 자신을 가리켜 나그네요 우거(寓居, 몸 붙여 사는)하는 자라고 하는데 나중에 야곱도 바로 앞에서 내 나그네 세월이 130이라고 자기 인생을 요약하여 밝힙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도 자신을 가리켜 나그네요 몸붙이(寓居者)라합니다.

 

(시편39:12) 12 야훼여, 나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살려 달라 호소하는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울부짖는 소리 못들은 체 마소서. 조상(열조)들처럼 나 또한 당신 집에 길손이며, 식객입니다.

 

그렇게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나그네요 우거(寓居)하는 자로 이 세상을 살다가 갔습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살다간 이들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 부르십니다. 하느님 나라 백성이 이 땅에서 주인처럼 행세하며 산다면 그는 매국노나 배신자임이 분명할 것 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도 우리의 선조들처럼 이 땅을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처럼 살아야 하며 그렇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역대상29:15) 15 하느님 보시기에 저희는 저희 선조(열조)들처럼 이리저리 떠돌며 남에게 몸붙여 사는 신세였읍니다. 아무 희망도 없이 떠도는 모습은 마치 땅 위를 스쳐 가는 그림자 같았읍니다.

 

세상의 세월은 화살같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니 이 땅에서는 나그네요 우거(寓居)하는 자로 살라는 말입니다. 세월은 정말 쏘아놓은 화살같이 흐릅니다. 언제 우리의 삶이 끝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영원을 준비하는 나그네로 이 땅을 살다가 영원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어떻게 사는 것이 이 땅을 나그네요 우거(寓居)하는 자로 사는 것인지, 그리고 그들의 특징은 어떻게 나타나게 되는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삶이 야훼 이레로 성취되어지는 하느님의 언약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도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실 사라의 죽음에 그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라의 죽음에 대처하는 아브라함의 행동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 먼저 성도가 이 땅을 나그네요 우거(寓居)하는 자로 살게 되는 근거가 무엇인지부터 보지요. 본문 3절로 가겠습니다.

 

(창세23:34) 3 아브라함은 시신 앞에서 물러나와 헷 사람들에게 가서 청하였다. 4 '나는 당신들한테 몸붙여 사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으나, 내 아내를 안장하게 무덤으로 쓸 땅을 좀 나누어 주십시오.'

 

3절의 물러나와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와야 쿰은 그냥 일어나다, 세우다, 들어 올리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히브리 원어에는 나갔다는 말이 없습니다. 사실 그 와야 쿰이라는 단어는 아주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먼저3절 초반부의 시체 앞에서앞에서라는 단어부터 분석해 보겠습니다. 앞에서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단어는 파님 알입니다. 직역하면 얼굴 위에서입니다.

그러니까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를 올바로 직역을 하면 아브라함이 죽은 사라의 얼굴 위에서 일어났다.’입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이지요? 그러한 표현은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죽은 자의 부활을 상징하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이 죽은 이들을 살릴 때 그 위에 포개지듯 엎드렸다가 그 죽은 자의 얼굴 위에서 일어나는 의식 같은 것을 행한 것입니다.

 

(열왕상17:21~22)21 그는 아이 위에 세 번 엎드려 몸과 몸을 맞추고 나서 야훼께 기도하였다. ', 야훼 나의 하느님, 제가 당신께 기도합니다. 이 아이의 몸에 다시 생명의 호흡이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 22 야훼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아이에게 다시 생명의 호흡을 주시어 마침내 아이는 살아났다.

 

시렙다 과부의 아들이 죽었는데 엘리야가 그 아들의 시체 위에, 오늘 본문의 표현으로 하자면 그 시체의 얼굴 위에 엎드렸다가 일어남으로 아이가 살아납니다. 여기도 역시 ’ ‘위에서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열왕기하4장에 보면 엘리사가 죽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는 사건이 나오지요? 거기서도 엘리사가 그 죽은 아이의 눈에 자기의 눈을, 그 아이의 입에 자기의 입을 대었다가 그 얼굴 위에서 일어나자 아이가 살아납니다. 그렇게 히브리 사람들에게서 죽은 자의 얼굴에 산자의 얼굴이 포개어졌다가 일어나는 것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와 연합이 되어 그 죽은 자의 死亡을 자기가 가져가시고 자신의 생명을 불어 넣어주시는 십자가 복음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신약에서도 유디코라는 청년이 창문에서 떨어져 죽었을 때 사도 바울로도 그 유디코의 몸 위에 엎드렸다가 일어남으로 그를 살려내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입니다.(사도20:10) 10 바울로가 내려 가서 그 청년을 부둥켜 안고 사람들에게 '걱정하지 마시오. 아직 살아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사라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포개었다가 일어났습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이 사라의 부활을 믿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게 사실일까요? 아브라함은 이미 그로부터 20여 년 전에 사람의 부활을 굳게 믿었던 사람입니다.

 

(히브11:1719) 17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시험하시려고 이사악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기꺼이 바쳤습니다. 이사악은 외아들이었고 그를 두고 하느님께서 약속까지 해 주신 아들이었지만 그를 기꺼이 바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18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에게서 너의 후손이 퍼져 나가리라' 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19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었던 사람들까지 살리실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는 이를테면 죽었던 이사악을 되찾은 셈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사라가 죽기 20여년전에 이미 사람의 부활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의 약속을 분명히 믿는 신앙의 실력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었을 때 슬퍼하며 애통했다라고 두 가지 사이한 단어로 그의 슬픔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 어구도 아주 중요한 어구입니다. 2절로 올라가 보지요.

 

(창세23:2) 2 아브라함은 빈소에 들어 가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다.

 

여기서 슬퍼하다라고 번역이 된 리쓰포드는 가슴을 치고 쥐어뜯으며 통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사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리쓰포드와 연이어 붙어있는 애통하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 단어 웨리브코타흐는 스스로 감정을 자제하며 조용히 흘리는 눈물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왜 성경이 아브라함의 슬픔을 표현하는 데에 이렇게 각기 다른 의미의 두 종류의 단어를 연이어 반복하여 표현을 했을까요?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에 대해 두 가지 감구지회(感舊之懷)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사라에 대한 깊은 사랑을 대변하는 단어로 리쓰포드가 쓰인 것이고 아브라함이 갖고 있던 사라에 대한 부활 희망을 웨리브코타흐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라에 대한 사랑이 아브라함을 통곡하게 만들었지만 그에게는 부활 희망이 있었기에 웨리브코타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슬픔을 자제하며 조용히 담담하게 아내의 죽음을 맞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그러한 성도의 죽음에 대한 관점과 태도에 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데살전4:13) 13 교우 여러분, 죽은 사람들에 관해서 여러분이 알아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무섭도록 섬세합니다. 바로 그 부활 희망과 연결되는 단어 웨리브코타흐에 이어서 역시 부활을 상징하는 얼굴 위에서 일어나다’ ‘파님 알 와야 쿰이라는 어구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부활신앙으로만 이 땅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모든 이들이 두려워하는 육체의 죽음까지도 담담하게, 아니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의 죽음 뒤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죄와 허물과 아무 관계가 없는 완전한 부활의 몸이며 그 몸을 입고 살게 되는 행복과 기쁨과 안식과 평화의 영원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시편116,15) 5 야훼께 충실한 자의 죽음은 그분께 귀중하다.

 

(묵시14:13) 13 나는 또 ''이제부터는 주님을 섬기다가 죽는 사람들이 행복하다' 고 기록하여라' 하고 외치는 소리가 하늘에서 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옳은 말이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의 업적이 언제나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성도의 죽음을 이라고 까지 말을 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렇게들 오래 오래 살고 싶어 할까요? 자기의 부활에 대해 자신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그는 확실한 부활 신앙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부활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땅을 나그네요 우거(寓居)하는 자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진짜 고향은 이곳이 아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은 이미 하느님 아들의 나라로 옮겨져(골로1:13) 하느님 나라의 시민권을 소유한 자 라는 것을(필립3:20) 알았기 때문입니다.

 

(히브11:8-16) 8 아브라함도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를 불러 장차 그의 몫으로 물려주실 땅을 향하여 떠나라고 하실 때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사실 그는 자기가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떠났던 것입니다. 9 그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도 같은 약속을 물려받은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나그네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며 머물러 살았습니다. 10 그러면서 그는 하느님께서 설계자가 되시고 건축가가 되셔서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 주실 도시를 바라며 살았던 것입니다. 11 그의 아내 사라도 이제 나이가 많은 여자인데다가 원래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사라는 약속해 주신 분을 진실한 분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12 이렇게 해서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늙은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서 난 자손이 하늘이 별과 같이 많아지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셀 수 없게 되었습니다. 13 그들은 모두 믿음을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약속받은 것을 얻지는 못했으나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으며 이 지상에서는 자기들이 타향사람이며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 했습니다. 14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그들이 찾고 있던 고향이 따로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15 만일 그들이 떠나 온 곳을 고향으로 생각했었다면 그리로 돌아 갈 기회도 있었을 것입니다. 16 그러나 실지로 그들이 갈망한 곳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고향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자기들의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수치로 여기시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한 도시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면서 하느님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땅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땅이 자기가 딛고 있는 이 세상 속의 가나안이 아닌 다른 나라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살면서 하느님의 언약을 신뢰하는 신앙의 모습을 보였으나 그 곳에 집을 짓지 않고 천막에서 살았으며 한 평의 땅도 구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도 갈대아 우르에서 나서 아브라함과 함께 자랐습니다. 둘은 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이복 남매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 사라를 묻어야 했습니다.

짐승들은 죽을 때가 되면 고향을 찾아간다고 하지요? 그건 본능입니다. 대표적인 동물이 코끼리입니다. 여우도 죽을 때는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두고 죽는 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도 죽을 때가 되면 고향을 생각하고 고향을 찾아 가고 싶어 합니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지요. 뿐만 아니라 망자는 고향에 묻는 것이 고대시대의 관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사라의 매장지를 갈대아 우르가 아닌 가나안에 마련합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을 자신의 고향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사랑하는 사라가 죽었지만 하느님께서 자기와 사라에게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사라와 자신은 죽어도 다시 살아서 그 약속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부활 신앙이 그의 본향을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물론 그 것은 상징적인 땅이지만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아내를 매장함으로써 자신의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물리적인 가나안 땅에서의 부활을 기다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마하신 하느님 나라를 그가 확고하게 믿고 희망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만일 그가 이 세상의 가나안에서의 부활을 기다렸다면 아브라함이 그의 재산으로 가나안 땅을 힘닿는 대로 조금씩 구입을 하거나 자기의 사병들을 동원해서 빼앗거나 하는 열심을 부렸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약속하신 모형의 가나안 땅에서 끝까지 믿음으로 진짜 하늘나라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살다간 나그네요 우거(寓居)하는 자의 삶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요, 최종목적지가 아니라는 확고한 부활신앙에 근거하여 격발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언약 안에 들어 있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은 지금은 비록 보이지 않고 성취의 기미도 없는 것 같지만 그 언약을 確固히 붙들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希望하며 보이는 것들을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라를 다른 곳에 매장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의 언약 안에 들어 있던 사람이고 그 하느님의 언약을 굳게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역시 그 가나안 땅의 막벨라 동굴에 묻혔고 이사악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도 그 곳에 묻혔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 일가가 모두 그 헤브론의 막벨라 동굴에 묻힌 것입니다. 야곱은 애굽에서 죽었음에도 굳이 자기를 가나안에 묻어 달라했고 요셉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해서 요셉은 죽은지 400년이나 지난 후에 가나안으로 돌아와 매장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언약은 우리의 육신의 숨이 끊어진다 해도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부활신앙이 우리 선조들의 삶 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절망의 나락에서 돈을 400세겔씩이나 주고 막벨라 동굴을 사 버린 것입니다.

자기와 함께 언약을 받았던 사라가 죽었습니다. 자기도 이제 노쇠하여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이제는 누가 봐도 하느님의 언약이 성취되기는 틀렸다고 할 만큼 절망적 상황이 도래했지만 그래도 그는 믿었던 것입니다. 자기는 그곳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 아내와 자기의 장지를 가나안에 사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약속 은 지켜질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살아 있을 때에는 자신의 의지로 그 가나안 땅에 머물러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이 죽은 후에는 다른 이들이 자기 시신을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은 거금을 주고 무덤을 사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백성은 이 땅에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확고하게 붙들며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자기의 손해를 감수하며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확신하고 그 아직 오지도 않았고 보이지도 않는 하느님 나라에 자신의 소중한 물질과 시간과 능력과 힘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세상의 힘을 털어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러한 사람에게 진짜 하느님 나라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가나안 땅 막벨라 동굴 구입사건은 이 땅을 나그네요 몸 붙이로 살아가는 하느님의 백성들의 분명한 신앙 고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오늘날에 적용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날 성도인 우리에게 주어진 이 땅의 가시적 가나안이 어디입니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땅 가나안은 참 약속의 땅인 하느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재의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는 완성된 하느님 나라를 상징하는 약속의 땅이 무엇으로 주어져 있지요? 敎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언약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 교회에서 세상과 구별된 나그네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성도인 것입니다. 성도는 교회에서 하느님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고 희망할 수 있어야 하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막벨라 동굴에 자기를 묻어달라고 한 것처럼 여러분을 교회에다가 희망과 함께 묻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앙의 여정 동안에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나그네로 살다가 교회에서 죽어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성도는 교회를 떠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우리의 희생이 요구됩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의 막벨라 동굴을 사기 위해 자기의 것을(400세겔) 희생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 나라를 상징하는 교회에서 물질과 시간과 힘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의 소유를 털어 성당을 천국처럼 크게 지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건 마치 아브라함이 상징적 하느님 나라인 가나안 땅에 다가 성을 쌓고 멋진 집을 짓는 것과 같은 짓인 것입니다. 제 말은 우리의 이 세상 힘을 추구하던 삶을 돌이켜 하느님 나라를 위해 나 자신을 바치는 희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성을 쌓고 살지 않았습니다.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나안에서 진짜 가나안을 바라보며 죽어서라도 그 하느님의 언약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자기와 후손들이 무덤자리 정도만을 산 것입니다. 자기 것을 희생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집 팔아서 교회 헌금할 생각말고 빚내서 헌금할 생각 마세요. 씨앗 헌금 이라는게 한국에서 유행한다고 하는데 집 팔고 빚 얻어서 교회에다가 씨앗으로 헌금을 해 두면 하느님께서 열배 백배의 열매로 돌려준다는 것이 씨앗 헌금이랍니다. 그건 투자지요. 아니 그 정도면 투기입니다. 그런 거 하지 마세요. 교회에 필요 이상의 돈이 들어오면 반드시 그 돈 때문에 문제 생깁니다.

 

교회는 우리 성도들이 흩어지지 않고 우리의 신앙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유지비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목숨 걸고 지켜내야 하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세상의 힘을 얻기 위해 세상에 온갖 힘을 쏟아 내느라 신앙을 잃어버리는 그런 삶에서 돌이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상 것을 손해 보는 그런 삶이 우리에게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아브라함의 막벨라 동굴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교회의 존속과 유지를 위해서는 나의 것을 아낌없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시간, , 물질 그 어떤 것을 지불하더라도 희망의 보고인 교회는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2000년 동안 교회가 지켜 진 것입니다. 수많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자기의 소유를 털어 세계 곳곳에서 그들의 막벨라 동굴을 사는 것으로 교회는 이렇게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을 힘 삼아 살던 삶에서 돌이켜 우리가 소유한 이 세상의 힘을 값으로 주고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부인입니다.

아브라함이 소할의 아들 에브론으로부터 그 막벨라 동굴을 거저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굳이 돈을 주었습니다. 그것도 시세보다 훨씬 비싸게 주고 샀습니다. 신앙의 보전과 교회의 보전은 우리의 희생이 수반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이들입니다. 요행이나 기적을 바라며 어떻게 해서든지 내 것을 손해 보지 않고 세상을 등쳐먹으려 하지 마세요.

오늘날의 교회는 너무 심한 거지 근성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제들도 다른 이들과 식사를 하면 당연히 자기는 얻어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필요한 일은 당연히 헐값에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무례하게 값을 깎습니다. 그건 현명한 것이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엉뚱한 기대하지 마세요.

교회는 우리가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아무런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굴러갈 것이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털어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은 목숨처럼 여기는 힘의 상징인 돈과 명예와 시간과 노동력을 나를 증명하고 나를 자랑하는 도구로 삼아 살지 않겠습니다.’라는 고백이며 우리 아버지는 천지 만물의 주인이시므로 내가 궁핍하거나 인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헌금이요, 봉사요, 구제요, 선교요, 예배입니다.

값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나에게 약속된 하느님 나라가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면 그 막벨라 동굴이 밭의 끝에 있었다고 하지요? 밭은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것은 우리의 소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 소유의 끝에는 우리의 매장지가 있다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밭을 팔아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상속자인 아브라함이 겨우 얻은 가나안 땅이 그의 매장지였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성도가 받게 될 궁극적인 유산, 진짜 참 유산은 그의 죽음과 함께 받게 되는 하늘나라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밭을 팔아 매장지를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유를 팔아 교회를 사는 것이고 이 세상을 팔아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그 삶이 바로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부활신앙으로 이 세상을 팔아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삶을 사는 이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보이는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헷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영감님은 우리 가운데서 세력있는 귀인이라 부릅니다. 그 말은 당신의 하느님이 보내신 왕자요, 장군이라는 의미입니다. 가나안 원주민이었던 헷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통해 하느님을 본 것입니다.

그러한 헷 사람들을 향한 아브라함의 태도를 보세요. 나이도 137이니 그들 중 누구보다 많았을 것입니다. 거느린 가솔도 만만치 않게 많습니다. 재산도 꽤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두 번씩이나 그들 앞에 정중히 몸을 굽히고 예의를 표합니다. (7,12)

 

부활 신앙을 가진 하느님 나라 백성들은 그들의 이웃에 대해 겸손합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거들먹거리며 어떻게 해서든 이 땅에서 자기의 잘남을 자랑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들은 겸손합니다. 그들은 나이브하며 염치(廉恥)가 있으며 정결(貞潔)한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그들의 염결성(廉潔)은 세상을 감동시킵니다.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부활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정말 영원을 믿으십니까? 아니 여러분은 정말 영혼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한시적인 이 세상에서 제한된 힘을 갖고 제한된 시간을 살다가 결국은 죽게 될 이 육신의 몸에서 관심을 돌려 우리의 영혼을 챙겨야 합니다.

세상의 힘이 여러분의 영혼을 살찌우지 못합니다. 돈과 명예와 인기로 여러분의 영원을 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배우십시오. 하느님 나라를 배우십시오. 리고 이 땅에서 인색하게 잔머리 굴리며 온갖 사기와 임기응변과 권모술수를 동원해서라도 세상의 힘을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그런 추잡한 옛 사람의 삶의 방식을 저 멀리 던져 버리십시오. 세상의 힘은 분명 매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과는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이 마음에 드는 좋은 차를 갖게 되는 것은 참으로 그의 삶에 활력소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자기의 두 다리와 자동차를 바꾸는 바보는 없을 것입니다. 자동차는 두 다리가 없어지면 그에게 있어 아무런 효용도 가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새 생명의 성숙과 자라남에는 전혀 관심도 없이 이 세상의 달콤한 힘에만 몰두 하는 것은 두 다리와 자동차를 바꾸는 바보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짜 중요한 것인지를 분명히 확인하고 살아야 합니다. 聖徒는 우리의 영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영원한 나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재물과 명예와 인기에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여러분의 새 생명의 성숙에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이 얼마나 되십니까? 더욱더 진지해 지시고 더욱더 열심을 내야 합니다. 여러분의 소유를 털어 밭 끝에 있는 막벨라 동굴을 사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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