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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7(녹)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 독서, 복음서 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6-06 조회수6,715 추천수1 반대(0) 신고

1독서<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어,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시작입니다. 1.1-7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와 티모테오 형제가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와 온 아카이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인사합니다.

2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오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이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4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5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듯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리는 위로도 우리에게 넘칩니다.

6 우리가 환난을 겪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고,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위로는 우리가 겪는 것과 똑같은 고난을 여러분도 견디어 니아갈 때에 그 힘을 드러냅니다.

7 우리가 여러분에게 거는 희망은 든든합니다. 여러부니 우리와 고난을 함께 받듯이 위로도 함께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1독서 주해(해제.역주 정양모 신부님)

1

1절에선 누가 누구에게 인사하는지 밝힌다. 바오로와 디모테오가 코린토 시 교우들과 아카이아 속주 모든 교우들에게 인사한다.

 

2

서두인사로 은총과 평화를 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사때 기쁨을 축원하고, 유다인들은 단순히 평화를 빌거나 또는 자비와 평화를 함께 빈다. 바오로는 친서 7권 서두인사 때 언제고 은총과 평화를 빈다. 바오로 자신이 이 인사법을 창안한 것 같고 그의 영향으로 이 인사법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크게 유행했다. 여기 평화는 하느님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시는 화해를 뜻한다. 평화는 하느님이 베푸시는 선물인 까닭에 은총과 짝을 이룬다. 은총과 평화는 언제고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내린다.

 

3

찬양받으소서대신 찬양받으십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찬양기도와 감사기도는 양식과 내용이 매우 비슷하다. “자비로우신 아버지자비들의 아버지를 의역한 것이다. 유다교 신앙고백문 셔마에서 자비들의 아버지라 하고, 쿰란 시가에서 자비들의 하느님라 하고 쿰란 시가에서 자비들의 하느님이라 하는 사실로 미루어 이는 바오로가 유다교 예배에서 빌려온 표현이다.

그리스어 파라클레시스는 위로 또는 용기를 뜻한다. 따라서 위로의 하느님대신 용기의 하느님이라 번역해도 좋다. 이렇게 번역하면, 환난을 참고 견디는 용기를 주시는 하느님이라는 뜻이 된다.

 

4

환난은 묵시문학과 종말론에서 역사의 종말 직전에 닥칠 파국을 뜻한다. 그러나 4.6절에선 바오로가 직전에 겪은 구체적 고초들을 가리킨다. 즉 고린토 교우들과의 극심한 불화로 말미암은 심적 고통 및 아시아의 수도 에페소에 주둔한 로마군 감옥에서 죽을 위협에 처했던 옥살이 고통을 가리킨다.

 

5

5-7절의 논지를 이해하려면 먼져 바오로의 그리스도관.세례관.사도관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스도관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됨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함이다. 소명을 받아 사도가 됨은 더더욱 그리스도의 복음과 부활에 동참함이다. “나는 그분을. 그분 부활의 힘을. 그분 고난에의 동참을 깨닫고자 합니다. 나는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습이 됨으로써, 될 수 있는 대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의 부활까지 도달하고 싶습니다보다시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과 사도는 팔자가 같다. 운명 공동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5-7절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쳐 내리는 위로로 표현이 바뀌었으나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사도 바오로가 겪은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요, 그가 넘치도록 받은 위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나아가 고난을 겪고 위로를 받는 고린토 교우들역시 그리스도의 고난의 동참자들이요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위로의 동참자들이다.

 

 

 

복음<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2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주님의 말씁닙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서 주해 (해제.역주 정양모 신부님)

3

가난한 이들은 매우 흔한 낱말이다. 그러나 구약. 신약을 통틀어 두 낱말이 함께 붙어 사용된 경우는 없다. 오직 마태 5.3에만 영으로 가난한 이들이란 표현이 나온다. 그러니 그 뜻이 자못 불분명할 밖에. 그러던 차에 1947년부터 쿰란 문헌에 보면 영의 가난한 이들이란 표현이 두 번 나오는데 예수 시대 쿰란 수도자들이 그렇게 자처했다.

 

우리만 번역에 문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공동번역)는 잘못된 번역이다. 그리스어 원문에는 마음이없고 그 대신 영으로라고 한다. 원문에는 행복하다가 맨 앞에 나온다. 공동번역 문장은 우리 어감에 거슬린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가난할지라도 마음만은 풍족하게 살아야지. 마음조차 찌들면 어쩌나.

 

5

기원전 1200~1000년에 이스라엘 백성은 팔레스티나 땅을 점령하여 지파별로 나누어 가졌다. 3 이사야서에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 상속을 약속하는데 여기서는 종말 축복을 가리킨다. 쿰란 수사들도 자기네는 선택된 이들의 공동체인만큼 땅을 상속받으리라고 믿었다. 이제 마태 5.5에서는 하느님의 새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이 땅을 상속받으리라 하는데, 여기 땅은 하늘나라를 가리킨다고 여겨진다.

 

6

마태오가 강조하는 의로움은 하느님의 뜻을 행함이다. 그러니까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를 갈망하는 이들이다.

 

7

하느님은 제사를 바라지 않고 자비를 바라신다. 모름지기 제자들은 하느님의 자비로운 처사를 본받아야 한다. 하찮은 십일조는 지키면서 막중한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저버려서는 안된다. 예수께서 불쌍한 사람들이 자비를 간청하면 꼭 들어주신다. 또한 돌보는 이 없는 군중을 불쌍히 여기신다. 그리고 불행한 이들을 돌보면 종말 심판 때 구원받는다고 하신다.

 

8

구약:“하느님을 뵙는다”.“하느님의 얼굴을 뵙는다는 것은 하느님이 계시는 성전에 참배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유다교: 의인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하느님을 뵙는다.

그리스도교: 종말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뵙는다.

 

9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은 개인적 또는 사회적 차원에서 화해를 증진하려고 적극 투신하는 사람들이다. 평화의 기도 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구약과 유다교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ㅂㄱ성의 대표인 임금, 미래의 메시아 임금, 의인을 하느님의 아들로 여겼다. 이제 평화를 이륙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은 장차 하느님의 아들로 일컬어질 것이라 한다. 원수들을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만큼 평화적이어야만 하느님의 아들로 불릴 것이다.

 

10

머태오 시대 박해상을 드러내는 말씀을 참조: “이 도시에서 여러분을 박해하거든 다른 도시로 피하시오.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인자가 올 때까지 여러분은 이스라엘의 도시들 (전도)를 끝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예언자들과 현자들과 율사들을 보낸다. 너희는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형에 처하며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형에 처하며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도시에서 도시로 (뒤쫓아다니며)박해할 것이다.

 

12

12절의 예언자들은 마태오복음 집필 당시 이 교회 저 교회로 다니면서 예언활동을 벌인 그리스도교계 떠돌이 예언자들이다. 이와는 달리 병행문 루카 6.23의 예언자들은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일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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