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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야훼이레(2) (창세22,1-19)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7-01 조회수6,665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7. 1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도란도란글방

 

야훼이레(2)

 

(창세22,1-19)

1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셨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하고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2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분부하셨다.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일러 주는 산에 올라 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 3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종과 아들 이사악은 데리고 제물을 사를 장작을 쪼개 가지고 하느님께서 일러 주신 곳으로 서둘러 떠났다. 4 길을 떠난 지 사흘만에 아브라함은 그 산이 멀리 바라보이는 곳에 다다랐다. 5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거라. 나는 이 아이를 데리고 저리로 가서 예배드리고 오겠다.' 하고 나서 6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씨와 칼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둘이서 길을 떠나려고 하는데, 7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불렀다. '아버지!' '얘야! 내가 듣고 있다.'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8 '얘야!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나, 9 하느님께서 일러 주신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은 다음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더미 위에 올려 놓았다. 10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막 찌르려고 할 때, 11 야훼의 천사가 하늘에서 큰 소리로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어서 말씀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12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말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 13 아브라함이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보니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수양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아브라함은 곧 가서 그 수양을 잡아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렸다. 14 아브라함은 그 곳을 야훼이레라고 이름붙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 고들 한다. 15 야훼의 천사가 또다시 큰 소리로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16 '네가 네 아들, 네 외아들마저 서슴지 않고 바쳐 충성을 다하였으니, 나는 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17 나는 너에게 더욱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불어나게 하리라. 네 후손은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성을 점령할 것이다. 18 네가 이렇게 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19 아브라함은 종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 와서 그들을 데리고 걸음을 재촉하여 브엘세바로 돌아 갔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눌러 살았다.

 

우리는 지난 시간(2021. 2. 28. 사순제2주일 우리들의 묵상 No.144898) 에 이 모리아 산 사건을 하느님의 열심과 주권의 측면에서 바라보며 해석을 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그 *하느님의 주권과 열심이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 격발케 하는 성도의 책임과 의무의 관점에서 모리아 산 사건을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모리아 산의 이야기는 창세기 315절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사건이지요. 하느님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한(반드시 죽으리라)죄인들을 살리시는 방법으로 여인의 후손의 희생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여인의 후손의 발뒤꿈치가 상함으로 (십자가) 뱀의 머리가 박살이 나는 십자가를 통한 구속 사건을 미리 예시하신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좀 더 구체적으로 무죄한 짐승의 희생으로 벌거벗어 부끄러운 아담과 하와의 죄가 가려지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고(창세3:21) 다시 죽어야 할 자들을 품에 안고 저주와 심판의 물을 맞고 그 홍수 속에 빠져 죽어 버리는 노아의 방주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며,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창세기 15장의 쪼개진 제물 사이로 홀로 지나가시는 하느님의 그림으로 이어집니다.

거기에서 죄인들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죽게 되는 무죄한 제물의 정체가 드러난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의 희생(십자가)으로 말미암아 당신 백성들의 새 창조를 이루실 것임을 예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노력과 열심과 자격을 하느님 앞에 제시합니다. 그것이 롯과 엘리에젤과 이스마엘로 나타났었지요. 하느님은 그 모든 것들을 기각시켜 버리시고 하느님 자손들의 탄생은 오로지 당신의 쪼개짐, 다른 말로 할례 받으심에 의해서만 말미암게 된다는 것을 17장에서 확인시키십니다. 그 창세기 17장의 할례 이야기가 구체적인 그림으로 그려진 곳이 바로 오늘 본 문입니다.

 

죽어야 할 죄인들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나게 되는 것은 하느님이 창세전에 준비하신 어린양으로 오셔서(야훼 이레)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예수의 공로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모리아 산 사건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느님의 주권과 열심에 의해 부르심을 입은 이들은 모리아 산에서 자기보다 더 소중한 백세에 난 아들을 하느님께 아낌없이 드린 아브라함처럼 그들의 신앙 여정을 통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예배자로 성숙되어져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성도는 필연적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주권과 열심은 반드시 성도의 책임 완수와 의무 수행을 격발해 낸다는 것이지요.

 

(사도2:36) 36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온 백성은 분명히 알아 두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쪼개신 것은 그 분을 우리의 주님과 그리스도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메시아)이십니다. 그 분의 쪼개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그리스도일 뿐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 말은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하느님의 백성으로 회복이 된 우리 성도는 이제 주인 되신 예수님께 오롯이 항복하고 복종하여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에는 복(blessing)과 책임과 의무(demand)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것입니다. 동전은 아무리 얇게 잘라도 여전히 양면이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은 blessingdemand라는 양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바로 그 절반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만 받아들이지 결코 자신의 주인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기도제목이 된 것이 아닐까요?

 

(루가17:7~10) 7 '너희 가운데 누가 농사나 양치는 일을 하는 종을 데리고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 오면 '어서 와서 밥부터 먹어라' 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8 오히려 '내 저녁부터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실 동안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고 나서 음식을 먹어라' 하지 않겠느냐? 9 그 종이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10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이게 바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종으로서의 성도의 자세이어야 합니다. 하루 종일 양을 치고 밭을 갈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주인의 식사를 준비하고 주인이 식사하실 동안 그 곁에서 수종을 들고 나서 겨우 밥 한술 뜨고도 아무런 사례를 요구할 수 없는 것이 종의 신분입니다.

주인이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것이 고대 시대의 주종 관계였습니다. 주인이 산 채로 무덤에 묻어도 아무 저항하지 못 하고 묻혀야 하는 것이 종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하느님의 힘을 빌려 우리의 계획과 목적을 성취하고 우리의 문제해결을 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목적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의 주도권은 하느님께로 옮겨진 것입니다. 주인이 나를 위해 네 자식의 심장에 칼을 꽂으라.’하시면 그렇게 따라야 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루가9:57~62) 57 예수의 일행이 길을 가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예수께 '저는 선생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59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는 '선생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60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 하셨다. 61 또 한 사람은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께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자격이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당신을 쫒겠다고 하는 이들에게 아주 매몰찬 말씀을 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는데 당신은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당신을 믿고 쫒는 것이 이 세상 것으로 보상되지 않을 것이니 잘 생각해서 결정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엉뚱한 것 기대하고 쫒아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기대하는 것 나에게는 없다는 것이지요.

브라질 리오에 가면 꼬르꼬바도라는 곳에 천 톤이 넘는 예수상이 있습니다. 리오시를 향해 양쪽 손바닥을 펴서 축복을 하는 그런 모양의 예수상입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그 예수님의 모습이 애들아 나 돈 없다라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요구하는 세상의 힘을 채워주러 온 것이 아니라 영생을 선물하러 왔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당신의 무소유를 알리신 후에 이어서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오겠다는 사람에게 죽은 자는 죽은 자들이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다는 사람도 못 가게 하십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매몰차실 수가 있어요? 그것은 다름 아닌 주권의 확인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을 쫒겠다고 하는 이들의 처사가 틀리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사를 지내러 가야 한다는 것이나 이제 주님을 쫒게 되면 오래도록 가족들을 보지 못할 것 같으니 가서 작별인사를 하고 오겠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 당신을 쫒겠다는 자들에게 그러한 것들을 금하셨는가? 그것은 주님을 쫒는 이들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확인시키신 것입니다. 아무리 종의 생각이 옳다고 하더라도 주인이 시키면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이 종의 신분임을 주지시켜 주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어떤 집의 종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름대로 자신의 하루 일과를 계획했습니다. ‘오늘은 아침을 먹자마자 밭에 나가서 밭을 갈고 돌아오는 길에 논에 물을 대고 오자마자 집안 청소를 하고 거름을 퍼서 밭에 뿌리는 걸로 오늘 일을 마감하자하고 나름대로 계획을 짜고 있는데 주인이 다짜고짜 너 지금 당장 밭에다가 거름 좀 주고와라했습니다.

그 때 종이 아니 주인님 저도 생각이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지금 시간과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이러 저러하게 계획을 세워 놓았는데 왜 주인님이 그 계획을 망치십니까? 주인님은 그저 멀찌감치 서서 제가 하는 일을 지켜보기나 하세요.’할 수 있습니까? 아니요. 종은 아무리 자기의 계획이 옳다고 생각되어도 주인이 시키면 그대로 해야 하는 것이 종입니다.

주인 앞에서 가 상실되고 부인되는 것입니다. 그게 종입니다. 하느님의 쪼개짐은 우리에게 이사악을 드리라고 요구합니다. 그건 상식적으로, 윤리적으로, 혹은 언약 성취의 측면에서도 옳지 않은 요구였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듣고 하느님 당신의 약속이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이 아이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어떻게 아비가 아들의 가슴에 칼을 꽂습니까? 그건 너무 잔인한 요구 아닙니까?’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주인의 말씀을 쫒아 자기의 아들의 가슴에 칼을 꽂으려 했습니다.

 

하느님의 쪼개짐은 우리에게 하느님 앞에서의 우리 자신의 쪼개짐을 요구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십자가를 반드시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래서 주님은 당신을 쫒겠다는 이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쫒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언약의 목적지는 하느님이 주인이 되시고 우리가 그 앞에서 온전히 순종하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신분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제가 우리 성도들을 하느님의 종이라 표현하는 것은 성도의 삶의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마치 종처럼 하느님 아버지께 순 을 하는 삶을 산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 종과 아들을 혼용해서 쓰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일체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들의 뜻이 되는 완전한 일체, 즉 완전한 순종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아들 됨을 목숨을 내 놓는 순종으로 증명하셨듯이 우리가 정말 하느님의 자녀가 맞다면 우리의 삶의 내용이 그렇게 나의 목숨까지도 아버지께 내어 드리는 것으로, 다른 말로 생사여탈을 주인의 손에 맞기는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 성도는 하느님의 종으로 성숙되어져야 한다고도 말씀을 드렸던 것이고 우리 성도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도 말씀드린 것입니다. 구분이 가시지요?

그렇게 모리아 산에서의 예수님의 쪼개짐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 앞에 온전히 항복하여 나와 나의 가장 소중한 것까지 하느님 앞에 내어 드리는 성도들의 예배의 삶입니다.

따라서 모리아 산에서의 하느님의 쪼개짐은 반드시 인간들의 행위를 도출시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신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성숙을 위해 수시로 구원받은 성도들을 시험하십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는 어구가 나옵니다. 거기서 시험하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닛싸는 상대방을 잘못되게 하는 '유혹(temptation)'이 아니라 알아보다(test), 입증하다(prove)’라는 의미로 쓰인 단어입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이 자신을 부인하고 하느님을 예배하는 자로 성숙되어져 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시험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삶 또한 하느님의 시험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시험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 공히 주어지는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시험인 것입니다.

 

(로마4:16) 16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상속자로 삼으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시며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까지, 곧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에게 그 약속을 보장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믿는 자의 조상입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이 간 그 믿음의 여정을 모든 믿는 자들이 공히 가야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또한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 나의 가장 소중한 것, 이사악을 바쳐내는 모리아 산의 시험대 위에 반드시 서게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구원 받은 우리 성도는 반드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시험대 위에서 내어 놓아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본문 16절로 가보겠습니다.

 

(창세22:1618) 16 '네가 네 아들, 네 외아들마저 서슴지 않고 바쳐 충성을 다하였으니, 나는 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17 나는 너에게 더욱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불어나게 하리라. 네 후손은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성을 점령할 것이다. 18 네가 이렇게 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의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자 하느님께서 창세기 12장과 15, 그리고 17장에서 약속하셨던 복의 선언을 동일하게 하십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그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면 그 축복의 선언은 유보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축복의 선언은 이미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부터 반복하여 주어졌던 것이었습니다.

그 말은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던 그 날부터 창세기 22장의 모리아 산에서의 성숙한 신앙인 아브라함으로의 완성을 이미 계획하고 계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시험을 통과해야만 주어지게 될 하느님의 복을 미리부터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아브라함처럼 수시로 실수하고 넘어지는 삶을 살고 있을 지라도 하느님은 반드시 우리를 모리아 산에 세우시고 그 시험에 넉넉히 합격할 수 있는 자로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그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 하느님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될 복의 구체적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 하느님의 복을 요약하여 네 후손은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성을 점령할 것이다.’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여기서 원수의 문을 부순다.’는 말은 히브리 사람들의 관용구로서 대적과의 싸움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대적의 성문을 정복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정복하다라고 번역이 된 그 히브리어 야라쉬는 미완료입니다.

그러니까 그 어구는 하느님의 열심에 의한 당신의 쪼개짐으로 대적이 정복되고 승리가 주어지게 된 것처럼 그와 같은 방법으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승리를 얻게 될 것이라는 아주 웅숭깊은 메시지가 담긴 어구입니다. 약속의 자손인 이사악의 아내 리브가의 가족들이 리브가를 축복하는 말 중에도 그 어구가 그대로 쓰입니다.

 

(창세24:60) 60 리브가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누이야, 너는 억조창생의 어머니가 되어라. 네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부수고 그 성을 빼앗아라.'

 

여기서도 축복의 내용이 원수의 성문을 부수다.’입니다. 그 어구는 그대로 신약으로 가서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마태16:18) 18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음부)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죽음(음부)의 권세라고 번역이 된 부분이 죽음의 대문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손해와 상함(모리아 산에서의 어린양의 대신 쪼개짐)에 의해 죽음의 대문을 정복해 버리신 예수님처럼 교회 또한 그러한 십자가의 삶으로 죽음의 대문을 부수는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게 복입니다. 바로 그 죽음의 대문()을 정복하는 삶이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너도 하느님처럼 될 수 있어.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할 필요도 없고, 너 스스로 너의 행복과 만족에 도달할 수 있어. 그러니까 네가 네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라는 원수의 속삭임에 속지 않고 하느님께 오롯이 순종하며 사는 것이 피조물 된 자의 행복이며 만족이다하며 하느님의 말씀에 목숨까지 내어놓는 삶이 바로 원수의 성문을 얻는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 연합된 교회),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복은 뭡니까? 소원이 이루어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복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아숭배교(自我崇拜敎)에서 빠져나와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 항복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나의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는 자로 성숙되어져 가는 것이 성경이 말 하는 복인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 315절의 원시복음,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는 승리의 예언이 모리아 산에서, 골고다 언덕에서 성취되는 것이고 아울러 거기서 탄생한 교회의 삶 속에서 그 대적의 문을 부수는 정복의 삶이 성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적의 문을 부수는 정복의 삶은 원수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놓아야 하는 사랑의 삶이요 섬김의 삶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죽어야 할 이사악을 대신해서 죽어주는 어린양의 모습과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자기 자신보다 더 귀한 백세에 난 이사악을 드리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정확하게 같은 그림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삶은 이 역사 속에서 연합되어진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열심에 의한 하느님 자신의 자해는 반드시 하느님 백성들의 순종의 행위를 도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이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하는 반면 야고보서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모순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야고2:21)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친 행동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 말은 우리의 구원은 로마서의 진술처럼 하느님의 주권과 열심에 의해 성취되고 완성되는 것이지만 구원받은 성도의 삶 속에서는 야고보서의 진술과 같이 하느님 앞에 항복하여 자신을 드리는 예배의 삶이 행함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우리 성도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 원수의 대문을 정복하는 삶을 내어놓아야 하는 시험대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복음의 가시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들이 자주하는 말이 무슬림들의 삶을보고 이슬람을 판단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이슬람교는 자신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천박하거나 지저분한 것이 아니라는 변명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도 가끔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런 변명을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의 삶을보고 그리스도교를 평가하지 말라신자의 삶 속에서 나타나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종교가 무슨 존재가치가 있습니까? 성도의 삶 속에 존재하지 않는 복음은 이미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절대 하느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시험을 통과한 후에야 하느님께서 복을 선언 해 주신 것을 잊지 마세요. 우리도 반드시 그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우리를 완전히 비워내는 시험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아브라함이 겪어낸 시험의 내용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세요. 아브라함의 시험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마엘을 취할 것인가 이사악을 기다릴 것인가 하는 문제였고, 둘째는 이스마엘을 이사악과 함께 용납할 것인가 아니면 쫓아내고 이사악만을 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이사악을 취할 때 이사악 자체에 대한 애정으로 그를 취할 것인가 아니면 이사악을 주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그를 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스마엘은 육에 속한 사람, 곧 아담(옛사람)을 나타냅니다. 그 옛 사람은 율법을 가리키고 율법은 곧 인간의 가능성을 전제하는 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자신의 인생에 왕이 되어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의 힘을 쌓아 행복과 구원에 이르겠다는 생각과 시도를 얼른 접어야 합니다.

육적 자아인 이스마엘과 영적 자아인 이사악을 함께 붙들고 싶어 하는 두 번째 시험은 첫 번째 시험보다 조금 더 힘이 듭니다. 내가 하느님을 부인하고 하느님의 자리에 앉아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세상의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죄의 뿌리인 인본주의의 망령은 우리가 거듭난 후에도 우리를 쉽게 풀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거듭난 후에도 자꾸 자기의 지혜와 힘을 의지하여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고 싶어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단호하게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명령하십니다.

 

(갈라5:16~17) 16 내 말을 잘 들으십시오. 육체의 욕정을 채우려 하지 말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 가십시오. 17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정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어떠세요? 물론 힘이 들지만 우리는 성경이 이토록 명확하게 육체의 소욕을 쫒지 말라고 명하시기에 이를 악물고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악과 이스마엘이 내 안에서 공존하며 싸울 때 우리는 자꾸 이사악의 편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모리아 산에서 이사악을 바치는 시험은 정말 힘이 드는 시험입니다. 이삭이 누구입니까? 약속의 자손입니다.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 탄생되고 완성된 하느님 나라 백성입니다. 하느님은 왜 그 약속의 자손을 죽이라는 시험을 하실까요?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백성답게 살아내는 여러 가지 분투들이 우리 안에서 발견 될 때 때로 우리는 뿌듯한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내 그 뿌듯한 마음이 자기의 자랑이 되기도 하고 그러한 새 사람으로서의 삶이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에서 격발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한 행위가 되는 때가 종종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토록 연약한 존재입니다. 내 욕심을 자제하고, 자기의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며, 다른 이웃을 섬기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 그러한 삶을 가지고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비록 그 당사자가 손해와 상함과 비움을 감수하고 있더라도 죄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세상적인 힘의 축적과 성공과 번영의 힘의 원리에서 벗어나 영적 강건함과 평안함, 가정의 화목, 직장에서의 성실 함, 교회 형제들과의 교제와 선한 일에 동참하는 것, 구제와 선교, 봉사, 성경을 공부하고 거룩한 삶을 경주하는 것, 凡事에 신자답게 규모 있고 검소하게 사는 것 등등을 추구하며 분투하고 있다고 해 보자고요. 참 훌륭한 삶이지요?

분명 그러한 삶은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에 맺혀지는 열매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하느님은 아닙니다. 잘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삶을 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나의 주인이시며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삶이기에 그렇게 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서 발산되는 모든 경건한 삶은 하느님을 목적으로 하여 하느님 앞에서 티끌에 불과한 피조물로서의 내가 그 분 앞에 오롯이 엎드려 항복하는 데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그러한 선한 일이 목적이 되는 경우가 왕왕 있더란 것입니다. 심지어 그러한 선한 일 조차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추구하는 이들이 참 많이 있는 것을 봅니다.

하느님은 그것마저 죽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이사악까지 드리는 시험입니다.

혹 지금 여러분은 하느님과 관계없는 선행과 봉사, 자기의 자랑을 위한 성경공부와 기도, 일주일간의 형편없었던 삶에 대한 죄책감을 해소하기 위한 봉사, 헌금,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한 위장된 행복의 모습 등등 이런 지저분한 것들로 여러분을 미사예배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즐기며 사랑하고 있지는 않으세요?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2절의 사랑하는 외아들(獨子)’에 쓰인 예히드카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집중하여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사랑하는 아들을 하느님 앞에 드렸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주신 하느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 그를 사랑하지 못하고 그 이사악 자체에 집착하고 있었다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그렇게 선뜻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너무나 사랑하는 이사악보다 하느님이 더 소중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10:37)’고 하셨습니다.

어떠세요. 하느님이 주신 어떤 것에 매여 계시지는 않으신가요? 아니면 그 것을 선물해 주신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 분께 감사하고 계십니까?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는 50마일(80.5km)이 넘는 거리입니다. 나귀를 타고도 사흘 이상을 가야하는 곳입니다. 그 긴 시간 동안에도 아브라함의 마음을 흔들 수 없었던 것은 하느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사랑과 믿음이 하느님에 의해 자라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자리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는 나의 자랑과 나의 증명을 위한 그 어떤 선한 것도 하느님은 당신 앞에 내려놓으라 하십니다. 그러니 창세기 12장부터 22장까지에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모든 시험은 한 마디로 옛 사람 아브라함의 철저한 자기 부인인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다 비워내라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우리를 반드시 그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지혜와 힘으로는 절대로 참 행복에 도달할 수 없으니(구원에 이를 수 없으니) 나에게 순종하고 나에게 항복하여 나의 말을 들으라.’ 그게 아브라함의 삶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싶어 하셨던 하느님의 유일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하느님의 쪼개짐으로 영생을 소유하게 된 복된 이들입니다. 우리를 위해 쪼개지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나처럼 원수를 위해 쪼개지는 삶을 살라고, 너희 자신을 통째로 내 앞에 내 놓으라고 요구하십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의 페르소나로 이 땅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페르소나는 무대에서 배우가 쓰는 가면을 뜻하는 라틴어입니다. 그 말이 요즘은 영화 용어로 쓰입니다. 영화감독의 의중과 사상과 인품까지도 그대로 그려내는 특별한 배우를 가리켜 페르소나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바로 하느님의 페르소나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보고 하느님의 성품과 하느님의 의중과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삶, 원수를 위해 내가 쪼개지는 삶, 그 삶을 잘 살아내십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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