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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 빛과 소금으로 살면 정말 세상이 칭찬 해 주나? (마태 5:13-16)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6-08 조회수6,642 추천수0 반대(1)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6. 8.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도란도란글방

 

 빛과 소금으로 살면 정말 세상이 칭찬해 주나?

 

(마태복음 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그런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 없어 밖에 내버려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15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 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16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오늘 본문은 두말할 것 없이, 신자들의 경건(敬虔)한 삶에 대한, 권고(勸告), 경고(警告)처럼 보이죠? 소금으로 살지 않으면, 밖에 버려져서, 밟힘을 당할 것이다. 그러니까 성도는 반드시,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죠? 그리고 누가 등불을 발아래에다 두느냐? 등불은, 등경 위에 두는 것이므로, 반드시 주변에 빛을 비추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등경 위에 높이 서서, 열심히 세상을 환하게 비추어라. 이거 아닙니까?

대부분이 이 산상수훈(山上垂訓)의 빛과 소금의 이야기를 가지고, 세상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 성도들의 본분(本分)의 측면(側面), 초점을 두고 해석하죠? 소금은 짠 맛을 내는 것이므로, 성도는 세상 속에서, 맛을 내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느니,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므로, 세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충분한 역할을 감당해내야 한다느니, 소금은 자신의 몸을 녹여서, 제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니, 반드시 희생(犧牲)을 감수(感受)해야 한다는 식의 교훈(敎訓)을 던지곤 하죠? 지금까지 배운 것 아닙니까?

아울러 빛은, 온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는 힘이 있는 것이니 만큼, 성도는 어두움의 세상에 긍정적(肯定的)인 영향(影響)을 미쳐서, 세상의 어두움을 몰아내는데, 기여를 해야 한다고 웅변(雄辯)을 하죠.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팔복을 쏙 빼고, 요것만 보면, 그렇게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게 팔복(八福)의 밑에 붙어 있다는 걸 염두(念頭)에 두어야 되는 거예요.

정말 성도가, 그렇게 세상에 소금으로, 빛으로 살게 되면, 세상이 긍정적 영향을 받든가요? 성도가 빛과 소금의 삶을 살면, 정말 세상이 영향을 받아서 변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오늘 본문 바로 위의 구절하고 충돌이 일어나죠. 예수님은 바로 위에서, 성도는 의() 때문에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핍박(逼迫)을 받게 된다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단 말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고 전하는 성도는, 세상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당한다고 말씀하셨단 말예요. 그 말은 세상이, 성도의 삶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말예요. 영향은커녕, 핍박을 한다고 했어요. 옳게 안 본다는 이야기예요. 그건요.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이, 바로 아래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서, 세상에게 영향을 주라는 말씀을 하시겠어요? 많은 성경주석가들이 이 부분을, 성도의 경건한 삶에 대한 교훈(敎訓)으로 곡해(曲解)를 하는 이유는, 본문 16절 때문이에요. 본문 16절을 보면, ‘너희 착한 행실(行實)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榮光)을 돌리게 하라!’라는 내용이 나오죠? ‘착한 행실!’

그러니까 빛과 소금의 삶이 착한 행실인 거고, 그 착한 행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힘이 있다는 식의 해석이 나오게 되는 거예요. 표피적으로 보면 그렇잖아요? 여기에서의 착한 행실은, 빛과 소금의 삶이 맞아요. 그러나 그 착한 행실은,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이 합의(合議)하고 결정해 놓은, 도덕적이며, 윤리적이며, 양심적인 착한 행실과는 아주 거리가 먼 착한 행실이라는 걸, 그들이 놓치는 거예요.

 

한국에 그리스도교인이 천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전체 인구(人口)의 사분의 일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예요. 그들이 전부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낸다면, 한국 전체가 정말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까요? 세상은 성도가 의로운 삶, 다른 말로 빛과 소금의 삶을 살게 되면, 미워하고 핍박을 하도록 되어 있지, 절대로 하느님께 돌아오게 되지 않는다는 게 성경이 내놓는 공식(公式)입니다.

그 말은 천만 명이 빛과 소금의 삶을 진짜 잘 살아낸다 할지라도, 그 천만 명이 세상을 변화시켜낼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천만 명이 그대로 고립(孤立)되는 거예요. 그게 성경이 말하는 공식이에요.

 

세상은, 절대 교회의 삶에 영향을 받지 않아요. 변화(變化)되지 않아요. 교회만 변해요. 그게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거든요. 예수님은, 지금 빛으로 살아라! 소금으로 살아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냥 선포(宣布)하세요. ‘너희는 빛이다,’ ‘너희는 소금이다.’ 이미 완료(完了)된 걸. 어느 시점에 완료된 걸 공포(公布)하고 선언(宣言)하는 거예요. 산상수훈의 팔복이 전부 어떤 내용이었어요? 창세전에 신령한 복을 받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이 역사 속에서 하느님나라를 살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現象)과 현실(現實)을 설명하는 거였죠? 그런데 그 내용이, 이 세상이 정의(定義)하고 있는 복()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樣相)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우리가 아실 거예요. 애통하고, 주리고, 목마르며, 핍박 받고, 자비를 구해야 하는 그런 모습이었어요.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는 빛과 소금의 삶! 이 여덟 가지를 다 아우르는 게, 지금 빛과 소금의 삶이란 말예요. 그 빛과 소금의 삶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양심적인 삶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세상 복과는 전혀 무관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성도의 현실을, 다른 언어로 그리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팔복의 내용처럼, 우리는 예수의 의()로만 구원(救援)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거잖아요? 그리고 심령(心靈)이 가난한 거고. 그래서 애통(哀痛)하게 되는 거고, 예수의 의에 의해서만, 평화에 이를 수 있고, 예수의 의()가 아닌 모든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굳게 믿고 전하는 삶이, 팔복의 내용이었어요. 그러면 빛과 소금의 삶도, 그것을 내용으로 해야 맞는 거란 말예요.

 

먼저 소금의 삶이 어떤 삶인지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소금이 등장(登場)하는 곳은, 하느님의 언약을 가리킬 때, 그리고 성전의 제물을 묘사하는 곳에, 주로 등장을 해요.

 

(역대하 13:5) 5 너희도 알다시피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는 다윗과 소금으로 계약을 맺으시고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권을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히 주셨는데 6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신하였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일어나 상전에게 반역하였다.

 

(민수기 18:19) 19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에게 흔들어 바치는 모든 거룩한 제물을 나는 너뿐 아니라 너와 함께 있는 너의 아들 딸들에게 준다. 이것이 언제까지나 너희가 받을 보수다. 이것은 소금을 치며 너와 네 후손과 맺은 야훼의 영원한 계약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언약(言約)을 가리킬 때, 소금이라는 단어를 함께 끌어다 쓰곤 해요. 그런데 그 소금이라는 단어가, 언약이라는 단어와 붙을 때, 항상 등장하는 단어가 있는데, 그게 오람, 영원(永遠)’이라는 단어예요.

소금언약이라는 건, ‘영원한 언약, 변하지 않는 언약을 지칭(指稱)하는 것으로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소금처럼. 소금은, 수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소금입니다. 본질(本質)! 화학적인 변화(變化)가 일어나지 않아요. 맛도 그대로예요. 소금을 오래 놔두면 싱거워지는 거 봤어요? 소금은 맛이 안 변해요. 영원성(永遠性)이 있어요.

그러니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소금처럼, 절대 변개(變改)되거나, 취소(取消)될 수 없는, 하느님의 창세전 언약(言約)을 가리켜요. 그래서 오람 베리트가 같이 쓰여요. ‘변하지 않는 영원한 언약이렇게. 소금언약이라는 거죠.

영원히 맛이 변하거나, 본질이 변하지 않는 소금의 특징을, 영원한 하느님의 언약을 수식하는 단어로 끌어다가 쓴 거예요. 바로 그 단어, 오람!’ 영원이라는 단어가 언약, 베리트라는 단어와 함께 등장하는 곳을, 하나하나 다 찾아 봤거든요. 그걸 찾아보면서, 오늘 본문의 실마리를 풀었어요. 제일 먼저 창세기 9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창세기 9:12, 16) 12 하느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너뿐 아니라 너와 함께 지내며 숨쉬는 모든 짐승과 나 사이에 대대로 세우는 계약의 표는 이것이다.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 나는 그것을 보고 하느님과 땅에 살고 있는 모든 동물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계약을 기억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주시는 무지개 언약이죠. 무지개 언약이 뭐예요? 레인보우(Rainbow). 보우가 뭐예요? ! 활인데, 저주의 비에 의해 만들어진 활! 이 활이 하느님께로 당겨지는 게 레이보우죠? 무지개. 그래서 하느님이 희생(犧牲)을 당하여, 날 때부터 악인인, 그들이 살아나는 게 무지개 언약이에요. 성경은 그걸 언약! 영원한 언약! 소금언약! 이라 그래요. 두 번이나 반복해서. ‘오람 베리트.’

노아 언약의 주된 내용이 뭐였어요? 하느님께서 그렇게 혼을 내 줬는데도, 또 죄를 짓는 게 너희들이다. 그러잖아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가나안에 집어넣으면서, 모세가 뭐라 그래요? 하느님이 모세에게 너희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애굽이랑 똑같이 살 거야.’ 그러잖아요? 그리고는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게 해요. 나는 똑같을 거야! 나는 똑같을 거야!’ 이렇게. (하하하) ‘나는 변할 거야가 아니라, ‘나는 똑같을 거야!’ 그런데 하느님이 은혜(恩惠) 베풀어주실 거야!’ 이게 복음(福音)인 거예요.

 

(창세기 8:20-21) 20 노아는 야훼 앞에 제단을 쌓고 모든 정한 들짐승과 정한 새 가운데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 바쳤다. 21 야훼께서 그 향긋한 냄새를 맡으시고 속으로 다짐하셨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 마련,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다시는 전처럼 모든 짐승을 없애 버리지 않으리라.

 

노아의 무지개 언약의 배경(背景), 정결한 제물이, 부정한 제물들을 살리기 위해, 제물로 바쳐지는 사건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고 나서 무지개 언약을 내리세요. 소금언약! 영원한 언약!

그러니까 영원한 언약! 소금언약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인해서, 거저 살아나게 되는 하느님의 은혜의 구원! 그 구원의 은혜성에 초점이 있는 거요. 그게 소금언약이에요. 영원한 언약이에요. 사람은 어려서부터, 날 때부터,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교훈을 준다거나, 혼을 내준다 하는 방법으로는, 그 악을 제거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방법을 준비했다는 거죠.

두 번째, 오람, 베리트영원한 연약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곳이, 아브라함 언약 때입니다.

 

(창세기 17:7) 7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느님이 되어 주기로, 너와 대대로 네 뒤를 이을 후손들과 나 사이에 나의 계약을 세워 이를 영원한 계약으로 삼으리라.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는데, 아브라함뿐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과의 사이에서도, 언약을 세우시겠다, 그러죠?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 요 후손이 누구라 그래요? 이거 복수 아니다, 그러죠? 단수다 그러잖아요. 여럿이 아니라, 한 사람인데,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죠.

 

(갈라디아서 3:16) 16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실 때에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후손들에게' 라는 말 대신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네 후손에게' 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한 사람이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세우신 그 언약의 원형, 그 원형을 찾아보면, 소금언약의 실체가 좀 더 분명해지겠죠? 그 원형이 어디에 나와요? 히브리서 9장에 나오잖아요? 가 볼게요.

 

(히브리서 9:15-22) 15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이십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먼젓번 계약 아래서 저지른 죄를 용서받게 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유산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16 상속에 관한 유언(언약)이 효력을 내려면 그 유언을 한 사람의 죽음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17 유언이라는 것은 유언을 한 사람이 죽어야 효력이 있는 것이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18 그래서 사실은 먼젓번 계약도 피를 가지고 맺었던 것입니다. 19 모세는 율법에 있는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선포할 때에 송아지 피와 물을 가져다가 박하묶음과 붉은 양털로 계약의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렸습니다. 20 그리고는 '이것은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맺으신 계약의 피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21 또 같은 모양으로 그는 천막 성전과 예배의식에 쓰이는 모든 기구에도 피를 뿌렸습니다. 22 율법에 따르면 피로써 깨끗해지지 않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피 흘리는 일이 없이는 죄를 용서받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유언(遺言)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언약(言約)이에요.

그러니까 영원한 언약! 소금언약이라는 건, 하느님과 언약의 당사자이신 예수 사이에서, 피가 반드시 뿌려져서, 내가 너에게 주는, 내 백성들이 살아나게 될 것이다. ‘피 흘림이 없으면 절대 사함이 없다.’가 영원한 언약의 핵심(核心)인 거죠. 피의 언약이에요. 그 창세전 언약의 핵심 단어 하나만 뽑으라고 하면 예요. ‘!’ 예수라는 하느님의 후손의 피로 말미암아, 피 흘려 죽어야 할 진짜 죄인들이, 거저 살아나게 되는 게,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후손과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란 말예요.

그 창세전 언약을 에페소서에서 이렇게 묘사하죠?

 

(에페소서 1:3-7)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4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6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이 영광스러운 은총에 대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7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풍성한 은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구출되었습니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점 많고 흠 많던 우리가 거저 구원을 받고,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게 창세전 언약의 핵심(核心)이에요. 피예요. 역시 피! 그런데 우리가 조금 전에 찾아 읽었던, 민수기 18장에 보면, 그 소금언약의 내용이, 제사장과 연관(聯關)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민수기 18:19) 19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에게 흔들어 바치는 모든 거룩한 제물을 나는 너뿐 아니라 너와 함께 있는 너의 아들 딸들에게 준다. 이것이 언제까지나 너희가 받을 보수다. 이것은 소금을 치며 너와 네 후손과 맺은 야훼의 영원한 계약이다.'

 

여기에서는 모세가 소금언약을 설명하면서, 그걸 제사장의 분깃과 연결하고 있어요. 하느님이 제단에 바쳐지는 예물을 제사장에 영원히 주신다고 하신 언약이 소금언약이래요. 영원한 보수(응식)으로, 영원한 분깃으로, 영원한 분깃으로 네가 줄 거다. 이게 소금언약이다, 그런단 말예요. 이게 무슨 말이에요? 소금언약은 백성들이 드린 제물을, 제사장이 먹고 사는 일, 백성들이 드린 제물을 제사장이 먹고 살죠? 그 일이 변함이 없을 거야. ‘영영히, 오람,’ 영영히 변함없을 거야. 이게 오람 베리트소금언약이라는 거요. 영원한 언약!

그게 무슨 말이겠어요? 바꾸어 말하면 제사장들의 그 봉사(奉事)와 희생(犧牲), 백성들이 알아주고 대접하는 게, 그들에게 예물을 나눠주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제사장이 한 일을, 그 봉사와 희생을 알아주고, 그들을 대접하는 일이, 이제 영원히 지속(持續)될 거야. 이게 소금언약이에요. 그 일이, 언약이 안 이루어졌죠? 판관기에서 제사장들이 거지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빌어먹을 데를 찾아다녀요. 이스라엘이 대접 안 해 줬다는 거요.

그러면 이 소금언약은, 도대체 어디서 지켜지는 거예요? 누구와 누구의 사이에서 지켜지는 걸까요? 이게? 교회(敎會)와 대제사장(大祭司長)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이에서, 성취(成就)되는 언약을, 바로 이 소금언약이라고 하는 거요. 교회는, 그 대제사장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 희생(犧牲)과 봉사(奉事), 십자가의 그 희생, 그 공로를 영원히 대접해주는 자로 살 수밖에 없는 거죠?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 사이에서, 성취될 그 언약을, 지금 소금언약! 영원한 언약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느님께서 소금언약에 의해서, 당신 자손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해내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소금언약 성취의 그 공로를, 온전히 인정(認定)하고 찬송(讚頌)하며, 그 앞에서, 왜 예수가 소금언약을 성취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걸 인정해드리면서, 자신의 무력(無力)함과 불가능(不可能)함을 시인(是認)할 때, 그때 소금언약이 온전히 성취되는 거란 뜻이에요.

그런데 이건 반드시 될 일이기 때문에, 소금이 어떻게 짠 맛을 잃겠느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착하게 살아라! 선한 일에 힘써라!’ 이런 이야기가 아녜요.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서 맛을 내주는 사람이 되라! 사람들의 부패를 막아라! 여러분들의 부패나 막으세요. 누구의 부패를 막아요? 그 이야기하는 거 아녜요.

도저히 산 자가 될 수 없는 죽은 흙들이, 하느님의 아들의 피로 반죽이 되어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완벽(完璧)한 하느님나라 백성이 되는 게, 하느님의 영원한 연약, 소금언약인 거고, 거기에서 탄생이 된 교회가, 그 소금언약이 실제로,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서만, 성취가 된 것임을 인정하고, 거기에 희생하시고, 거기에 봉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인정하고 찬송하게 되는 거, 이게 에페소서 1장의 창세 전 언약의 목적이잖아요? 그게 바로 소금언약의 성취(成就)란 말예요.

다른 말로, 자기가 완전히 부인되게 되는 그 상태, 그걸 소금언약의 성취라고 하는 거예요. 그 언약은 반드시 성취가 된다는 의미로 그 언약을 소금언약! 영원한 언약이라고 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하느님은 성도를 반드시 육적자아의 죽음의 자리로 몰고 내려가신다는 게, 소금언약이에요.

그래서 본문에서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어찌 그게 소금이냐? 라고 하는 거예요. 소금은 절대 맛을 잃을 수 없다. 천 년이 지나고, 이천 년이 지나도, 소금은 그 맛을 그대로 유지한단 말입니다. 그 말은, ‘성도야, 너희들은 천 년이 걸리든, 이천 년이 걸리든, 반드시, 이 역사 속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가야 한다.’라는 말과 똑같은 말인 거예요. ‘내가 죄인 중에 죄인 맞네요. 내가 갖고 있는 이 몸이 사망의 몸이 맞네요.’ 요 자리요. 자기 부인의 자리잖아요?

 

 

본문 13절은, 복음은 절대 소금의 역할을 못 벗어난다.’에 초점이 있는 거지, 그래서 맛을 잃지 않는다고 하는 거지,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밖으로 집어 던져서 밟아 버릴 거야!’ 여기에 초점이 있는 게 아녜요. ? 맛을 잃을 수 있는 소금은 없으니까.

따라서 우리 성도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그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소금언약을 성취해내신, 예수님의 의만을 자랑하고, 찬송하고, 전해야 되는, 하느님나라 백성들이다. 그 소금언약의 성취에는, 인간 측에서의 그 어떤 선한 행위도 보탬이나 기여가 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예수님의 의를 높이는 곳으로 가야지,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상의 소금으로 잘 살아서, 세상의 부패(腐敗)를 막아야지로 가면 안 되는 거란 말예요. 그건 내가 지금 할 수 있다고 내가 부인이 안 된 거기 때문에, 그게 바로 부패예요.

 

이렇게 소금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대제사장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예우(禮遇)해드리는 거예요. 그게 소금언약 이라고. 그래서 성도가 소금인 거예요. 성경을 보면 소금과 언약(言約)을 막 혼동해서 써요. 언약의 소금! 소금언약! 이렇게. 막 혼용해서 쓴다 말이죠? 그러니까 성도는 하느님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가 되었는지를 몸으로, 입으로 살아내고, 증거 하는 삶을 사는 거예요. 그게 소금으로서의 성도의 삶인 거예요. ‘내 꼬락서니가 이런데,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 소금언약에 의해 나는, 내 구원은, 절대 실패될 수 없다.’ 이게 소금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의 의()만을 높이고 자랑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게 소금인데, 그러면 어떻게 된다, 그래요?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 핍박 받는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소금의 삶은, 도덕과 윤리를 잘 지키는 경건하고 깨끗한 삶이 아니라, 영원한 소금언약을 홀로 성취해내신, 예수님의 대제사장 되심을 자랑하느라,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삶을 말하는 거예요.

소금이신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짓밟힌 것처럼! 예수의 의()만 증거(證據)하는, 그 소금언약을 예수가 성취하고 완성해냈다는, 그 소금언약의 성취자로서의 그 예수를 증거(證據)하는 소금으로 살게 되면, 우리가 이 세상으로부터 밟히게 된다는 그런 뜻이에요. ? 인간의 자존심을 뭉개는 거니까.

그래서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 바로 밑에, ‘너는 소금이니까라는 말이 들어가는 거예요. ‘넌 소금이니까, 의를 인하여 반드시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란 뜻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문맥(文脈) 안에서 이해를 하지 않으면, 전부 도덕책이 되는 거예요.

우린 예수라는 제물(祭物)과 예수라는 제사장에 의해 살아난 자들이지만, 우리 자신 역시, 제물의 삶과 제사장의 삶을 살게 되어 있죠.

 

(로마서 12:1) 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그 제사가 제물이에요. 우리가 제물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면서요? , 예수가 제사장으로 제물로, 소금언약을 성취(成就)하기 위해, 자기 몸을 자해(自害)한 거예요, 그죠? 피를 흘린 거죠. 그러면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된다는 뜻이에요? 소금으로서의 우리의 삶이? 똑같이 간다는 뜻이에요. 세상에게 핍박 받다가 십자가 지고 죽는 거예요. 육적 자아가 그렇게 죽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저주(詛呪)와 심판(審判)의 삶을 미리 받아내면, 영원한 심판과 저주에서 벗어나는 게, 성도의 인생(人生)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 인생 동안에, 그 영원한 저주와 심판의 요만큼의 맛을 보면서, 인생 속에서 그걸 경험(經驗)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우리의 육적 자아에게 떨어지게 되면, 내가 부인이 되고 삭제가 되는 경험을 해요. 이 세상에서. ‘, 예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겠구나! 하느님의 은혜만 붙들어야 되겠구나!’ 이렇게. 그게 십자가 지고 죽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의 그 심판의 현실, 저주 받은 현실을 묘사할 때에, 소금으로 묘사를 하곤 하는 거요.

 

(스바니야 2:9) 9 그래서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스라엘의 하느님, 만군의 야훼께서 하시는 말씀이시다. '모압을 소돔처럼 만들리라. 암몬족을 고모라처럼 만들리라. 잡초나 우거지고 소금이나 캐는 곳, 언제까지나 쑥밭으로 남게 하리라. 살아남은 내 백성, 이 겨레가 그들을 털고 그 땅을 차지하리라.'

 

모압과 암몬은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와서 딸들과 근친상간하여 낳은 자식들이죠? 영원한 이스라엘의 대적들. 그들을 어떻게 만들겠다, 그래요? 소돔과 고모라처럼, 소금으로 만들어버리겠다, 그래요. 그러니까 소돔과 고모라의 저주의 현실이, 소금이란 뜻이죠? 그래서 롯의 아내가, 돌아다보고 소금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소금은 심판(審判)과 저주(詛呪)의 현실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금이라는 건, 이 세상에서 바로 그 심판과 저주를 경험(經驗)한다는 뜻이에요. 그걸 핍박(逼迫)이라 그래요. 그런데 그렇게 핍박 받아 죽게 되면, 영원한 심판과 저주에서 벗어나는 게 공식이란 말입니다.

 

(시편 107:33-34) 33 때로는 야훼께서 강물들을 사막으로 바꾸시고 샘구명을 막아 마른 땅이 되게 하시고 34 기름진 땅을 소금밭으로 만드셨으니 그 땅에 사는 자들이 악한 탓이다.

 

(신명기 29:22-23) 22 야훼께서 화를 내시어 뒤엎으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같이, 유황과 소금으로 다 태워 버려 이 땅에 씨를 뿌릴 엄두도 나지 않게, 움이 틀 가망도 없게, 그리고 풀포기 하나 자랄 수 없도록 뒤엎으신 것을 보고 23 모든 민족들은 물을 것이다. '어찌하여 야훼께서 이 땅에 이런 일을 하셨을까? 이토록 혹심한 분노를 터뜨리셨을까?'

 

소돔과 고모라 또 나와요. 저주와 심판의 현실! 거기를 소금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이걸 잘 이해해야 돼요. ‘그래, 소금으로 살자!’ 큰일 납니다.

 

(마르코복음 9:48-50)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49 누구나 다 불소금에 절여질 것(지옥에서)이다. 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그 소금을 짜게 하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

 

이 이야기가 어디에서 출발(出發)하는 거죠? 제자들이 서로 내가 잘 났다, 내가 잘 났다.’ 이 싸움하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서로 높아지려고 하는 제자들의 싸움, 거기에서, 하느님이 너희들이 죄를 짓고 지옥에 가느니 차라리, 다 잘라버려라그러죠? 잘라버려라커트(cut) 그게 뭐라 그랬어요? 제사용어라 그랬어요. 할례(割禮)! 너희들이 그렇게 절대 천국에 못 들어가기 때문에, 이 역사 속에서 내가 너희들의 그 육적자아를 다 잘라버릴 건데, 그걸 예수가 십자가에서 이미 다 완료했단다. 그래서 그 완료한 구원의 현실을, 역사 속에서 너희들이 경험하고 갈 텐데, 그게 바로 영원히 잘려야 할, 그게 소금치듯 불로 공격을 받는 지옥이란 말예요.

그런데 이 세상 속에서, 너희들의 육적자아가, 하느님에 의해 핍박당하고 공격당하는, 바로 그 소금을 경험할 텐데, 그 소금은 좋은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소금을 너희에게 두면, 어떻게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뭐가 자격이 있어서, 내가 어떤 공로(功勞)를 쌓아서 구원을 받은 게 아니라, 영생을 얻은 게 아니라, 우리 주님이 소금으로 쪼개지셔서, 소금언약을 성취하므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 받은 거니까. 너나 나나 우리 주님의 소금언약 성취가 아니면, 다 죽은 흙이었다.’

요게 뭐예요? 평화롭게 하는 거였잖아요? 그래서 소금을 두고 평화롭게하라라고 한 거예요. 화목(和睦)하라. 그러니까 그 소금언약의 성취, 그걸 알고 그걸 전하는 소금으로서의 삶을 사는 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걸, 화목(和睦)이라 그래요. 그게 평화예요. ’에이레네

그런 연유에서 성경에는, 그 저주의 소금 심판의 소금이 부어졌을 때, 회복이 일어나는 사건을 반복하여 기록을 하는 거예요. 그 저주의 소금! 심판의 소금이 죽어 있는 것에 확 뿌려지잖아요? 이게 우리예요. 그런데 그 저주의 소금, 심판의 소금이 우리에게 뿌려지면,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이 이율배반적(二律背反的)인 이야기를, 성경이 여러 군데서 이야기를 한다 말에요.

 

(열왕기하 2:19-21) 19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스승께서도 보시다시피 저희 성읍은 매우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나빠서 이 고장에서는 자식을 낳을 수가 없습니다.' (유산(流産)) 20 이 말을 듣고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오라고 하였다. 그들이 그릇에 소금을 담아 가져오자, 21 엘리사는 샘터에 가서 그 소금을 뿌리며 말하였다.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이 물을 정하게 하리라. 이제 다시는 사람들이 이 물 때문에 죽거나 유산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생명(生命)이 잉태(孕胎)가 안 되는 건, 죽음이죠? 그래서 구약에서 사망의 상태를 묘사할 때, 자식을 못 갖는 것으로 표현한 거예요. 그런데 그게 죽음이에요. 죽음의 현장에 죽임이 가서, 심판이 가서 그 죽음을 죽여 버리니까, 육적자아가 죽는 거예요. 인간의 가능성이 죽는 거예요. 죽여 버리니까, 잉태(孕胎)가 되더라는 거예요. 생명이 잉태되더라는 얘기예요. 죽음을, 하느님의 심판이, 죽여 버리니까. 이게 우리 역사 속 인생이란 말예요. 이게 지금까지 공부한 팔복의 내용이에요. ! 그랬더니 죽어 있던 자가 살아나더라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소금으로서 이 세상에서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게 소금의 삶이에요. 그래서 성경이 소금이 되라 그러지 않고, ‘너희는 소금이다.’ 그러는 거예요. 너희는 의 때문에 반드시 핍박을 받을 건데, ? 소금이니까.

 

(출애굽기 30:35-36) 35 향 제조공이 하듯이 잘 섞은 다음 소금을 쳐서 순수하고 거룩한 가루향을 만들어라. 36 너는 그것을 조금씩 빻아서, 내가 너를 만나 대화하기로 정한 만남의 장막 안 증거궤 앞에 놓아 두어라. 이 향은 가장 거룩한 것으로 다루어야 한다.

 

거룩하지 않은 것이 소금을 뿌리자, 거룩하고 성결(聖潔)하게 바뀌어요. 그게 소금이에요.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세상과 막 섞여서 살죠? 세상이 좋아하는 걸, 같이 좋아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하느님의 그 칼, 좌우에 날선 칼이 떨어져서, 우리와 세상을 분리시키는 걸, ‘거룩이라 그래요. 그걸 소금이라 그래요. 그걸 뜯어내는 게, 핍박(逼迫)이며, 환난(患難)이며, 고난(苦難)이에요. 이 세상에 눈 두지 말라고.

그래서 레위기에서도 부정(不淨)한 짐승은, 전부 땅을 기어 다녀요. , 지네, 이런 거. ()한 짐승은 뛰어요. 메뚜기 이런 거. 하늘로 올라가는, 하늘을 향하여, 땅에서 발을 떼는 자들이, 정결한 자들이다. 이걸 보여주는 거거든요. 우리는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흙 지향성(指向性)이 있어요. 흙이 너무 좋아, 땅이 너무 좋아. 그래서 여기서 안 떨어지려고 복지부동.

그러니까 하느님이 배 밑창에 칼은 넣어서 끊어내는 걸, 거룩하게 한다, 그래요. 그게 환난이에요. 그게 소금의 삶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소금이 뿌려졌더니, 성결해지더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요.

 

(레위가 2:13) 13 너희가 드리는 곡식예물에는 반드시 소금을 쳐야 한다. 너희 곡식예물에 너희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때 치는 소금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가 바치는 모든 예물에 소금을 쳐야 한다.

 

여기에 보면 모든 곡식예물, 소제물(素祭物)에는 소금이 뿌려져야 한다고 하는데, 그 소제물에 뿌려질 소금을, 언약의 소금이라 그러죠? 언약의 소금! 소금 언약! 막 혼용되고 있어요. 언약! 소금! 같은 거예요. 언약의 핵()은요, 예수님의 희생! 예수님의 십자가죠? 그게 뭐요? 소금이잖아요? 환난! 심판! 저주! 그런데 그 소금이, 소제에 뿌려지므로, 온전한 제물이 되어, 그것만 하느님이 받으세요. 꿀과 누룩이 들어가면 안 돼요. 그것은 변질(變質)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금만 들어가야 돼요. 꿀과 누룩이라는 건, 그걸 넣으므로 말미암아, 내가 원하는 걸 얻는 거예요. 달고, 풍성하고, 맛 좋은 거. 그건 안 돼요. 하느님께 제물로 못 드려요.

그런데 소금이 뿌려지면, 하느님이 그걸 받으세요. ? 짭짤해서? 제물(祭物)이 뭐예요? 그건 하느님이 받으실만한 것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무죄(無罪)한 걸 갖다 바쳐야 돼요. 그리고 하느님이 받으실만한 건, 하느님나라의 것이라는 뜻이고, 하느님나라의 것은, 반드시 생명력으로만 채워져 있어야 되죠? 그런데 이 제물이, 자기의 것을 요만큼이라도 갖고 있으면, 어떡해요? 하느님의 것으로 완벽하게 채워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소금이 뿌려져, 완전히 죽어야 돼요. 그게 심판(審判)이에요. 그랬을 때, 하느님이 그 안을 채우는 거예요.

미꾸라지 잡을 때 소금 뿌려본 적이 있어요? 시골에서 우리 할머니가 가끔, 미꾸라지 잡아다가, 추어탕을 끓여주시려고, 미꾸라지를 양동이에다 한가득 넣어놓고, 소금을 쫙 뿌리잖아요? 뻣뻣하게 다 돌아가세요. 그거 생각하시면 돼요. 죽이는 거예요. 예수라는 제물이, 왜 십자가에서 죽었는지 아세요? 너희들이 이 세상 속에서, 그렇게 가게 될 것이다. 그래야 하느님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 거예요. 그게 하느님나라의 존재의 메카니즘(mechanism)이라 그랬잖아요. 존재 양식. 안 그러면 하느님나라의 존재가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소금이 뿌려지는 거예요.

이 역사 속에서, 시퍼렇게 살아서, 자신의 가치(價値)와 존재성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챙겨 갖는 이들이, 영원 속에서, 죽을 자들이에요. 이 땅에서 살고자 하는 자들은 다 죽어요. 그거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죽는 자가 살아요. 그게 소금이에요. 저주의 삶! 심판의 삶! 육적 자아가 부인되는 삶! 그래서 아파요. 이 상처투성이! 하느님에게 맞아서. 이 상처투성이! 이사야서에서 나오죠? 어딜 더 때릴 때가 있니? 그러잖아요? 그 몸에 하느님이 소금까지 확 뿌리시는 거예요. 우리 인생(人生)에요. 죽으라고. 그러니까 재미없어요. 성도의 인생은 그렇게 재미없어요. 하느님이 계속 소금 뿌리는 인생이기 때문에.

 

예전에 시골에서 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어디 부정(不淨)한 곳에, 초상집 같은 곳에 갔다 오면, 항상 소금 뿌리죠? 이 부정한 것, 잡귀야 물러가라! 하느님이 우리 인생에 그런 거예요. 너희들은 잡귀(雜鬼)! 고거 안 죽고, 하느님나라 못 들어와. 그래서 소금 뿌려주시는 거예요. 잡귀야, 물러가라! 잡귀도 잘 대우(對偶)해주는 거죠. 마귀 대장인데, 우리가. 그래도 잡귀라고 얘기해주면, 그건 조금 핫바리잖아요? (웃음)

그 소금의 삶이 없으면, 정결(淨潔)케 될 수가 없고, 거룩케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 바로 밑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가 이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이해(理解)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에 대해서 살펴보자 말예요. 원래 빛의 원형은 하느님이죠?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도 창조의 첫머리에 빛이 있으라!’하면서 빛이 등장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부터 일어나는 모든 창조의 일은, 다 빛이신, 하느님의 주도하에 일어나는 것임을, 명시(明示)하는 거예요. , 그 빛이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내려오시죠?

 

(요한복음 1:1-5) 1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2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4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여기에 나오는 빛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가 같은 단어예요. ! 그런데 5절을 보면, 빛의 대척점(對蹠點)에 있는, 어두움의 특징(特徵)이 뭐죠? 빛이 비취는데, 그 빛을 못 알아보는 걸, ‘어두움이라 그래요. 어두움은 딴 게 아녜요. 빛이 비쳤는데, ‘내가 왜 저 빛의 도움을 받아야 돼?’라고 빛을 못 알아보는 거. 요걸 어두움이라 그래요. 요게 바리새인들이었어요. 그들은 하느님을 안다고 했고, 메시야를 기다린다고 했는데, 빛이 왔는데, ‘나는 빛의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빛이 나를 온전히 도와주지 않아도, 이미 빛의 삶을 조금 살고 있기 때문에, 쟤가 나를 온전히 안 도와줘도 돼! 쟤가 나를 온전히 도와주면, 나는 완전히 내 존재성을 상실(喪失)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건 안 돼!’라고 하는 고걸 어두움이라고 그래요. 빛을 못 알아보는 거.

 

(이사야 42:6-7) 6 ', 야훼가 너를 부른다. 정의를 세우라고 너를 부른다. 내가 너의 손을 잡아 지켜 주고 너를 세워 인류와 계약을 맺으니 너는 만국의 빛이 되어라. 7 소경들의 눈을 열어 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놓아 주어라.

 

감옥은! 하느님께서 빛이신 주님을 이 땅에 보냈는데, 그 빛의 임무는 백성의 그 언약, 즉 소금언약이 되게 하시며, 그러죠? 여기. 백성의 언약이 되게 한다고, 소금언약! 영원한 언약! 소금언약이 되게 한 대요. 그건 가서 죽이라!’는 뜻이에요. 죽여라! 네가 십자가 지면, 그들이 전부 유죄(有罪)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죽는 거거든요. 언약이 된다는 뜻이에요.

빛이 소경의 눈을 밝히고, 흑암에 처한 자를 그 흑암(黑暗)에서 나오게 하는 거래요. 그러니 빛은 심판의 소금 역할을 하러 오는 거죠.

잘 생각해보세요. 빛은 어두움이 뭔지를, 악이 뭔지를 이렇게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걸 밝혀서, 빛이 되게 하는 게 아니라, 빛은 저놈이 어두움이고, 저게 악()이구나를, 드러내고 폭로(暴露)하는 거예요. 그게 소금이 했던 일이잖아요?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너희는 소금이다, 빛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빛이신 그분이 왔더니, 사람들은 그 빛의 도움을 거절(拒絶)해요. 그게 빛을 못 알아보는 거예요. 그게 어두움이에요. 그로 말미암아 이 빛이, ‘세상은 어두움이다!’를 폭로시키고 십자가에서 죽어버린 거예요. 소금도 마찬가지잖아요? 똑같은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성경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을, ‘어두움이라고도 하지만, ‘소경이라고도 해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 어두움을 자주 소경에 비유(譬喩)하시죠? 그게 어두움에요. 빛의 대척점에 있는. 예수를 못 알아보는 거! 이 예수의 의만을 의지하지 않는 거! 이게 어두움이에요. 빛은 그걸 밝혀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알미니언주의 교회에 가서, 하느님의 은혜를 설교하게 되면, 알미니언주의가, ‘넌 뭐야? 왜 우리랑 달라?’라고 할 거 아녜요? ‘, 우리는 우리의 행위(行爲)를 지금 얼마나 의지(依持)하고 있는데, , 인간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데. 우리도 예수 믿어!’ 예수 믿는데, 그들이 다른 존재로 확 드러나게 되죠? 이게 빛이 어두움을 드러내는 거예요. 이게 빛의 삶이에요.

그런데 이 빛을, 인간의 가능성(可能性)과 힘을 의지하는 자들이, 반드시 밟아 끄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예수의 삶이었단 말예요. 빛의 삶이었어요. 이게. 바리새인들, 그 착했던 유대인들이, 이 빛을 꺼버리더라니까요. 그 착한 알미니언주의 신봉자(信奉者)들이 은혜를, 십자가를, 보혈을 이야기하는 자들을 이단으로 몰아붙인단 말입니다. 그건 역사 내내 있었던 일이에요.

 

(요한복음 9:39-41) 39 예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심판, 소금)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예수와 함께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 몇이 이 말씀을 듣고 '그러면 우리들도 눈이 멀었단 말이오?' 하고 대들었다. 41 예수께서는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면 빛이 왔을 때, ‘저는 소경이 맞네요. 저는 예수님이 비춰주지 않으면, 요만큼도 빛의 역할을 할 수 없는 자네요.’ 이게 나는 소경입니다? 고 사람을 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당신이 구태여 나를 비쳐주지 않아도, 나는 지금 이렇게 착하게 잘 살고 있어요. 율법 잘 지키고 있고, 교회 열심히 다니고 있어요.’ 요 사람을 소경이라고 한다니까요.

성경을 한 발자국만 더 깊이 들어가서 보세요. 한 발작만 더. 빛은 내가 소경이 맞습니다.’라고 인정(認定)하는 그 사람을 이라 그래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기가 이 세상에 심판(審判)하러, 소금으로 왔다고 하는 거예요. 이 세상은 다 본다고 하거든요. 다 하느님처럼 되었으니까. ‘난 괜찮아, , 우리끼리 힘 합쳐서 바벨탑 쌓아서 올라가자!’ 그런데 심판하러 오신 그분이, 당신의 백성(百姓)들에게 가서, 그를 심판해 버리시니까. ‘이게 뭐야?’ 곡이 내려와서 나를 공격하는데, 그 곡과 마곡의 전쟁에서 내가 지는 거예요. 예수님이 심판자(審判者)로 내려와서. ‘이거 뭐야? 나 이거 소경이네.’ 이게 심판당한 자예요. 그런데 하느님은 그를 빛이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렇게 내가 소경입니다라고 하는 그 자의 바로, 그 소경됨을 예수님이 먹어버리는 걸 구원이라고 그래요.

 

(이사야 42:18-19) 18 귀머거리들아, 들어라. 소경들아, 눈을 똑바로 뜨고 보아라. 19 내 종(고난(苦難) 받는 하느님의 종!’ 예수)과 같은 소경이 또 있으랴? 내가 보낸 심부름꾼과 같은 귀머거리가 또 있으랴? 나의 사명을 띠고 가는 자와 같은 소경이 또 있으랴? 야훼의 종과 같은 귀머거리가 또 어디 있으랴?

 

예수보고 소경이라 그래요. 지금 이 이사야서의 내러티브가 뭐죠?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서 하느님의 종이 내려간다.’예요. 그런데 그 종이 내려와서, 소경이 되어버렸어요. ? 이 세상이 어두움이기 때문에. 소경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분은, ‘, 제가 소경이 맞네요.’라고 하는, 그 자들의 소경만 먹어버리세요. 바꿔 말하면, 하느님이 창세전에 택()한 그들은 , 제가 소경 맞네요.’ 예수의 의, 십자가를 딱 듣게 되면, 말씀이 침공(侵攻)해 들어오면, ‘, 제가 어두움 맞네요. 소경 맞네요.’ 이 자리로 간다는 뜻이에요. 그들을 빛이다!’라고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요한복음 12:46) 4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빛이 어두움을 비추어서, 빛으로 끌어내기 위해 이 땅에 오셨는데, 그 어두움이었던 자들이, 빛으로 나온 상태를 뭐라 그래요? 나를 믿는 자라 그래요. 예수를 믿는 게, ‘이에요. 나를 믿으면 안 돼요. 자기 자신을 믿으면 안 돼요. 그 신뢰(信賴)가 깨지고, 사랑이 박살나야 돼요. 나에 대한, ‘라는 우상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그리고 예수에게로 그거 점점 돌려져야 되는 거요. 그들을 이라 그래요. 믿는 자라 그래요. 주님은 그렇게 여전히 인간의 가능성을 의지하는 자들을 흑암(黑暗)’이라 그러고 그늘진 사망(死亡)의 땅에 앉은 자들이라 그래요.

 

(마태복음 4:16) 16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이 빛을 못 알아보는 자들은, 전부 흑암이며, 사망이에요, 죽은 거예요, 그게. 그래서 주님은 그렇게 율법을 잘 지키고, 착하게 살려고 애를 썼던 그들! 그래서 예수의 필요성을 별로 못 느꼈던 그들을, ‘마귀(魔鬼)’라 그런 거예요. ‘죽은 자라 그런 거예요. ‘무덤이라 그런 거예요. ‘독사의 새끼라 그런 거예요. 소경, 어두움이란 뜻이에요. 그들이 바로! 예수의 필연성! 반드시 예수가 내 삶에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자들! 소경이라고 그래요.

빛이신 주님은 이 세상에 그렇게 오셔서 율법을 잘 지키고, 제사를 잘 드리며, 선행(善行)에 힘쓰던 바리새인들을 죄인으로 폭로해버리셨어요. 그동안에는 그들이 빛이었는데, 진짜 빛이 오니까, 그들의 실체가, 좀비로 확 드러나더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바로 그 일을 한다는 뜻이에요.

너희가 세상의 빛이다.’라는 뜻은, 지금 온 교회가 다 건강하고, 건전하고, 좋은 교회들을 만들려고, 애를 쓰죠? 그거 다 그렇게 추구해 가는데, 어떤 놈들이 오더니, ‘그렇게 해서 교회가 건강해지는 게 아니라, 예수의 의(), 십자가 은혜(恩惠)를 믿어야 돼!’ 어떡하겠어요? 당연히 공격받아요. 그러나 거기에서 구별(區別)이 일어나요. 빛이 오면 반드시 구별이 일어나고, 갈라짐이 일어나요.

창세기 1장 보세요. 빛이 오자,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전부 갈라지죠? 구별(區別)이에요. 그걸 거룩이라 그래요. 나중에 보자고요. 도대체 누가 빛인가?

우리 주님이 그렇게 성도도 빛이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도 그렇게 하느님의 의, 예수의 의()를 붙들고, 그 의를 전하면서, 빛인 척하는 자들의 어두움을 폭로(暴露)시켜버려야 돼요. 그게 빛이에요. 쉬울 것 같으세요? 그 삶이? 어렵습니다. 괜히 자기가 그렇게 못 사니까, 우리를 욕한다고, 욕먹죠. 근사한 외모와 행위로 자신들이야말로 세상의 빛이라고 굳게 믿고 있고, 우기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그게 빛의 삶이 아니라, 빛이신 예수를 믿는 게, 빛의 삶이라고 어기짱을 놓는 사람들, 그게 빛이에요.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내가 빛이니까 회개하라, 나를 믿어라.’ 그랬잖아요? 바리새인들은, ‘아니야, 우리 착하게 잘 살고 있다니까.’ 예수님이 계속해서, ‘아니, 나를 믿으라니까이게 빛이었단 말예요. 그 삶을 여러분이 살게 되어 있다니까요.

 

그래서 그러한 성도의 빛으로서의 삶을 통해, 산 위의 동네가 환히 드러난다고 본문 14절이 이야기하는 거요. 다시 보세요.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산 위의 동네가 어디예요? 한국의 달동네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태복음은 일차 수신자가 유대인이죠. 유대인들은 구약에 능통(能通)한 사람들이죠?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구약이 어마어마하게 인용(引用)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구약을 모르면 마태복음을 해석을 못해요. 산 위의 동네가 구약에 어디에 나올까요? 이 산 위의 동네는, 그냥 산꼭대기에 있는 동네를 이야기하는 거 아녜요. 성경은 그렇게 모호(模糊)한 표현을 쓰지 않아요.

 

(이사야 2:1-3) 1 이것은 아모쓰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이 어찌 될 것인지를 내다보고 한 말이다. 2 장차 어느 날엔가 야훼의 집이 서 있는 산이 모든 멧부리 위에 우뚝 서고 모든 언덕 위에 드높이 솟아 만국이 그리로 물밀듯이 밀려들리라. (예루살렘) 3 그 때 수많은 민족이 모여 와서 말하리라. ', 올라가자, 야훼의 산으로, 야곱의 하느님께서 계신 전으로! 사는 길을 그에게 배우고 그 길을 따라 가자. 법은 시온에서 나오고, 야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나오느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예루살렘이었어요. 그건 유대인들 누구에게나, 예루살렘은 산 위의 동네였단 말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은 뭐예요? 율법주의의 핵()! 율법주의의 총화(總和)! 거기에 성전이 있습니다. 제사지내는 곳이에요. 율법이 가르쳐지는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새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땅의 예루살렘은, 율법주의의 총화이기 때문에.

그런데 빛이 비추게 되면, 산 위의 동네가, 근사하게 위장(僞裝)을 하고 있다가, 예수님이 왔는데,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이, ‘우리 착한 사람이야.’라고 위장하고 있었단 말예요. 감추고 있었단 말예요. 그런데 빛이 와서 확 비춰버렸어요. 산 위의 동네를. 그랬더니 그게 악()으로, 무덤으로 확 드러나 버렸죠.

마찬가지인 거예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들이 진짜 빛이라면, 오늘날 교회를 좀 먹고 있는 율법주의, 인본주의가, 반드시 너로 말미암아 폭로될 거란 뜻이에요. 그게 산 위의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에요.

등불을 어디에 걸아야 산 위의 동네가 다 비쳐져요? 예루살렘 이야기하는 거요. 성경은 일관성(一貫性)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1절부터 여기까지, 단 한 치의 오차(誤差)도 없이, 그대로 하느님은 고속도로처럼 달려가고 있어요. 십자가로! 마태복음 2324절 보세요. 예수님께서 그 예루살렘의 중심, ()이라고 할 수 있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어떻게 폭로하는지 보세요.

 

(마태복음 23;24-28) 24 이 눈먼 인도자들아,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대로 삼키는 것이 바로 너희들이다.' 25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만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 차 있다. 26 이 눈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먼저 잔 속을 깨끗이 닦아라. 그래야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27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옳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목숨 걸고 율법을 지키던 사람들이에요. 아주 착하기 그지없던 사람들인데, 그들을 소경이라 그러고, 어두움이라 그래요. 그리고는 안을 깨끗이 해야지? 그래요. 안을 어떻게 깨끗이 하죠? 하느님이 부정(不淨)한 혈류병 환자인 우리를, 그게 에제키엘서에 나오죠? 우리가 땅을 피로 더럽히는 자들이라고, 월경하는 자들이라 그러잖아요? 그런 자들인데, 하느님이 물로 씻어서, 성령을 넣어, 새 마음으로 바꿔 준 거, 그죠? 그거 이야기하는 거예요. 안을 깨끗이 하라! 예수 믿으라는 뜻이에요.

너희들 진짜 그 예수 믿니? 너희들이 아무 것도 안 했는데, 하느님이 혈유병 환자, 부정한 자에 불과한 너희들을 깨끗이 성령으로 씻어서, 지금 이렇게 거저 구원해준 거, 마른 뼈 같았던 자들을 거저 구원한 거, 이거 믿니? 그게 안이 깨끗해진 거거든요? 그게 새 마음이에요. 안이 깨끗해진 거예요. 그 상태에서 나오는 거 맞아? 묻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恩惠)에 대해서, 죽을 때까지 배워도, 우리는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그 은혜를 계속 배워서, ‘, 맞아 나는 깨끗해졌지! 내 안이 이미 완전히 깨끗해졌지!’ 그거 확인하는 그 과정 속에서, 나의 육적 자아가 부인이 되어지고, 거기에서 진짜 하느님이 원하시는 행실(行實)들이 나오는 거죠. 도대체 이 바리새인들이 뭘 했길래, 하느님이 계속 소경이라고 그러고, 너희들은 겉만 번드르르하다, 그러고. 왜 계속해서 그들의 실체(實體)를 이렇게 폭로시키시죠? 빛이 오셔서 왜 자꾸 너희는 어두움이다. 어두움이다 그래요? 바로 그 위에 나와요.

 

(마태복음 23:15-19) 15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겨우 한 사람을 개종시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개종시킨 다음에는 그 사람을 너희보다 갑절이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고 있다.' 16 '너희 같은 눈먼 인도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성전의 황금을 두고 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 고 하니 17 이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황금이냐? 아니면 그 황금을 거룩하게 만드는 성전이냐? 18 또 너희는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그 제단 위에 있는 제물을 두고 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 고 하니 19 이 눈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제물이냐? 아니면 그 제물을 거룩하게 만드는 제단이냐?

 

어두움에 속한, 소경된 바리새인들이 사람을 가르치는데, 성전으로 맹세(盟誓)하면 아무 일 없는데, 성전에 바쳐지는 금, 혹은 성전에 있는 금으로 맹세를 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래요. 그리고 제단(祭壇)으로 맹세를 하면, 아무 일도 없는데, 제단은 제물이 태워지는 곳이죠? 그 위에 있는 예물을 두고 맹세 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성전과 제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되심과 제물 되심으로 성취되는, 새 언약의 현실을 모형으로 담고 있는 거죠? 하느님의 백성들은, 그 속에서 하느님의 은혜(恩惠)를 붙들어야 했어요. 성전과 제단에서.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성전에 바쳐지는 금과 예물에, 더 관심이 있더라는 거예요. 성전과 제단을, 금과 예물 아래로 밀어내는 거예요. ‘은혜? 나와는 상관없어!’ 지금 안 보이는 거니까. 당장 내 눈에 보이는 어떤 유익(有益)! 부수적 유익! 이것에 관심이 더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의()를 찬송하는 것보다는, 이건 나에게 아무 유익이 없어요. 지금 내가 사람들에게 율법을 잘 지키고, 종교행위를 잘 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어떤 평가를 받아낼까에, 더 관심이 있는 자들, 요 자들을 가리키는 거예요. 단순히 금과 예물, 제물에 관심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의 현실! 구원의 현실! 거기에는 관심이 없고, 지금 당장 나에게 어떤 유익이 올 것인가를, 종교행위 속에서 찾으려고 하는 자들을, 소경이란 한다 말입니다. 그들이 어두움이란 말예요. 그게 겉만 번드르르한 회칠한 무덤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의 의 앞에서, 그 산 위의 예루살렘, 인간들의 의()는 낱낱이 폭로(暴露)당하게 되어 있어요. 바리새인들이 잘 감추고 있었는데, 어떤 한 분이 오더니, 쫓아다니면서, ‘이 도둑놈들아! 간음한 놈들아! 어두움들아! 소경들아!’ 이러고 다니는 거예요. 아무도 몰랐는데, 칭찬만 받고 있었는데. 기도할 때도, 길 가운데서 기도하고, 단식할 때도 일부러 수염 길러서, 초췌하게, ‘난 밥 굶었어.’ 그래서 사람들이 다 존경해주고 있었는데, 어떤 분이 오더니, ‘나는 네 속을 안다. 이놈아!’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런데 그걸 우리에게 하라는 거예요. 예수의 십자가와 피만을 전하라는 거예요. 그 때에, 겉만 번드르르하게, 자기들의 행위로, 자기를 위장(僞裝)했던 자들이, 우리를 굉장히 불편해 할 거예요. ‘남들 다 존경(尊敬)해 주는데, 왜 저 인간만 아니라, 그래?’ 그런데 우리는 반드시 산 위의 동네를, 감추어진 산 위의 동네를, 확 드러내는 자로 살아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너희는 빛이다.’ ‘빛처럼 살아라!’가 아녜요. ‘빛이 되어라가 아녜요. ‘너희는 빛이다!’

이거 어디에 붙어 있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 밑에 너희는 빛이다!’가 붙어 있는 거예요. ‘너희는 핍박을 받을 거야. ? 빛이니까. 산 위의 동네를 드러낼 거니까. 그들이 너희를 얼마나 밟겠니?’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15절 보면, 그 빛이 누구에게 비춰져요? 빛은 집안사람들에게만 비춰져요. 그래서 그들만 나 소경 맞네요.’ 하고 빛으로 돌아와요. 그래서 집안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거예요. 성도만 알아보는 거예요. 남들은, 속으로 욕만 하고 있을 거예요. ‘은혜는 무슨 개뿔이나 은혜냐?’

 

(마태복음 5:15) 15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 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집안, 하느님의 집안, 식솔들은 전부, 모두, 그 빛을 보고 반응하게 되어 있어요. ‘맞군요!’하고, 나머지는 저 빛 좀 끌 수 없을까?’ 여자들 그러잖아요? 특히 우리 새벽미사예배 오는 분들, ‘불 좀 하나만 켤 수 없어요?’ (하하하) 왜 불을 여러 개 켜서, 이 아침에 눈곱이고 뭐고 다 보이게. 그거예요. ‘저 빛 좀 끌 수 없어?’ 그걸 핍박(逼迫)이라 그래요. 그러니 우린 반드시 그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렇게 나는 이렇게 어두움인데, 하느님께서 예수라는 빛을 나에게 비추어서, 내가 거저 빛이 된 거구나라고 하느님의 은혜를 찬송하게 되는 거! 이게 예수의 만 의지하는 거! 예수만을 믿는 거! 그걸 요한복음 6장에서 하느님의 일!’이라 그랬잖아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일을 합니까?’ 그게 행실(行實)이에요. 그게 믿게 되면 그게 착한 행실! 바로 그 착한 행실로 인하여 그 빛을 본 자들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 게 되더라. ! 빛과 소금의 이야기는 그 이야기 하는 거요.

다른 내용 없어요. 어떤 빛으로 사시려고 그랬습니까? 남들의 잘못이나 들추어내는 그런 빛? 아니면 맞으면 죽는 레이저 광선? 빛으로 살라고 했더니, 전부 레이저 광선이 되어서, 쏘는 족족 죽어! 너는 왜 이거 밖에 안 돼? 너는 왜 이렇게 더러워? 그게 레이저 광선이지 뭐예요? 아뇨. 그냥 우리는 예수의 만을, 빛이신 그분만을 드러내는 그 빛으로 사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산 위의 마을을, 내가 확 폭로시켜서, 그 중에 하느님의 백성들은, 빛으로 돌아오게 하고, 나머지 다른 이들에게는, 두들겨 맞는 거예요. 그러다가 주님이 오시면, 얼른 맨발로 뛰어가서, ‘왜 이제 왔느냐고?’ 어떤 교우 보고 비둘기라 부를 뻔 했잖아요? (하하하) 그렇게 되는 거예요. 신랑이여! 왜 이제 왔느냐고?’ 그렇게 그 신랑과 신랑이 계신 곳이 그리워져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는 반드시 그 핍박(逼迫)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왜 그 팔복의 내러티브 바로 밑에, 빛과 소금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지 아시겠죠?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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