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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 부활 대축일 낮미사]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4-03-31 조회수93 추천수7 반대(0) 신고

[주님 부활 대축일 낮미사] 요한 20,1-9 “보고 믿었다.“

 

 

 

 

주님 부활의 이야기는 날이 밝기 전, 아직 어두울 때에 시작됩니다. 요한 복음사가에게 있어서 ‘어둠’은 단순히 시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짓과 탐욕, 위선과 폭력이 여전히 남아있는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희망적 사건이 일어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해서 갑자기 세상이 180도 달라지는게 아닙니다. 그분을 믿는 신앙인들의 삶 역시 여전히 힘들고, 괴롭고, 두려운 상황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달라진 게 있습니다. 이제 이 세상의 어둠 속에 희망의 ‘빛’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나 그 빛을 발견할 수 있는건 아닙니다. 그 빛을 알아보려면 믿음으로 열린 눈이 필요하지요. 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관점을 하나씩 살펴봄으로써,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그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볼 수 있을지 그 답을 찾을 겁니다.

 

첫번째로 살펴볼 인물은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예수님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그녀는 예수님을 여읜 슬픔 속에 깊이 잠겨 있었습니다. 즉 그녀의 시선은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 그리고 그분의 시신에 머물러 있었던 겁니다. 안식일 때문에 시간에 쫓겨 사랑하는 스승님의 시신을 제대로 염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주간 첫날 새벽 아직 해가 뜨기도 전부터 그분의 무덤을 찾아가지요. 그리고 거기서 주님의 무덤을 막아놓았던 큰 돌이 한쪽으로 치워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보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블레포”(blépein)로서 대상을 그저 눈에 보이는대로 한 번 슥하고 훑어보는 무덤덤한 ‘봄’을 의미합니다. 즉 그녀는 아직 날이 어두워 시야가 흐릿한 상황에서 무덤 입구에 있던 돌이 치워져 있는 외적인 상황을 확인하는데에 그친 겁니다. 물론 날도 어둡고 연약한 여인 혼자인데다가 생각지도 못한 큰 일에 놀라기까지 했으니, 무덤 속까지 들어가 샅샅이 살펴보지 못한 것이 이해는 됩니다. 그러나 그녀가 제대로 보지 못한 탓에 ‘누군가 주님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갔다’는 커다란 오해를 하게 된 것은 큰 문제입니다.

 

두번째로 살펴볼 인물은 ‘시몬 베드로’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주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은 베드로는 한달음에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그 안으로 들어가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그 현장을 유심히 ‘바라보지요’. 여기서 ‘보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테오레오”(theoréin)로서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나 사물을 꼼꼼하게 ‘살펴봄’을 의미합니다.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상황을 대충 훑어보고 엉뚱한 결론을 내린 마리아 막달레나보다는 분명히 나은 모습이지만, 베드로의 ‘봄’은 우리가 본받고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살아계실 때에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서 당신께서 겪으셔야 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음에도, 베드로는 그 말씀을 귀기울여 듣지 않았지요. 주님의 뜻보다는 자기 뜻에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진리를 찾는데에는 관심이 없고 세속적인 부귀영화에만 마음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에 그칠 뿐 그 사실 안에 담긴 메시지를, ‘빈 무덤’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세번째로 살펴볼 인물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 깊이 머무르며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노력하던 요한은 주님의 무덤이 비어있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마음의 눈으로 상황을 바라봅니다. 여기서 ‘보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호라오”(oràn)로서 의미와 이유를 생각하며 현상 너머에 있는 본질을 통찰하여 봄을 의미하지요. 마리아의 말대로 누군가 주님의 시신을 무덤에서 몰래 꺼내갔다면 그분의 시신을 감쌌던 아마포가 왜 무덤 안에 그대로 놓여 있는지,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재빠르게 일을 처리하느라 경황이 없었을텐데 주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을 가지런히 접어두는 여유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곰곰이 생각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자취를 더듬어가다보니 비로소 ‘진실’에 접근하게 된 겁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무덤이 비어있는 것은 그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던 주님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이 알아보고 믿게 된 ‘구원의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만’ 했습니다. 이는 평범한 ‘사실’이 아니라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당위’의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 꼭 부활하셔야만 했던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분을 믿는 우리의 신앙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가 ‘나도 주님처럼 부활하여 그분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이 팍팍한 세상에서 기쁘게 살아가도록 이끄시려고, 그리고 그 희망을 현실로 만드시려고 우리보다 먼저 죽으시고 우리보다 먼저 부활하신 것이지요. 그리스어로 부활은 ‘일어나다’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죽음에서 일어나신 것처럼 우리도 일어나야 합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불평과 원망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일어남으로써 우리는 멸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갑니다(파스카). 그러니 말로만 주님의 부활을 축하할 게 아니라 내가 부활하기 위해, 하느님을 닮은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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