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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예수님의 마음)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06-14 조회수9,542 추천수1 반대(0) 신고

 

"예수님의 마음"

+찬미예수님

오늘은 사제의 제의도

빨갛고 제단 초도 빨갛습니다.

그 이유는 내일 성령강림

대축일이고 우리는 그 특전미사를

드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성령강림에 관한

강론은 내일로 남기고,

오늘은 6월이 예수성심

성월이기에 예수님의 마음에

관하여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내속으로 난 자식이지만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자식일겁니다.

부모마음에 들게

잘 자라는 자식도 있지만,

철이 날 때부터 엇나가

정말 부모의 속을 새까맣게

태우는 자식도 있을 겁니다.

옛날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옛날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

외아들하나 바라보며 살던

과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크면서

엄마의 기대와는 다르게

정말 개망나니처럼

살았습니다.

이 아이의 꿈은 산적이

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산적두목을

찾아갑니다.

산적되고 싶다하니 두목은

시험에 통과해야한다고 하면서,

엄마의 심장을

꺼내오라고 합니다.

그 산적도 꼬맹이가 와서

산적된다고 하니 포기를 시키려고

말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그것을

그대로 믿고 집에 와서,

엄마, 나 엄마의 심장이 필요해

?”

그래야 산적이 될 수 있대.”

며칠을 밥도 안 먹고

끙끙거리는 자식을 보자니

엄마는 속이 끓었습니다.

진짜 이 애미 심장이 필요하니?”

그럼 어떻게 심장을

꺼내 갈건대?”

엄마 잠들면 죽이고 꺼내갈게

아이는 거리낌 없이

엄마에게 지껄였습니다.

엄마는 하얀 소복을 입고,

마지막으로 아이에게

네가 내 심장을

꺼내가서 잘 살아라.”

엄마가 잠이 들자,

아이는 부엌칼로 엄마를 죽이고

펄떡펄떡 뛰는 심장을 꺼내서

보자기에 싸서 신나게

산속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개울을 건너다

이끼에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심장이든 보따리를 놓칩니다.

풀어진 보따리에서 나온

심장이 둥둥 떠내려가면서

넘어진 아들을 향해

얘야, 다친대 없니?”

그 때야 그 아이는

제정신이 돌아옵니다.

엄마의 심장을 가슴에 앉고

통곡을 합니다.

인간에게는 극단적인

두 마음이 있습니다.

지금 말한 것처럼 엄마를

죽여서라도 심장을 꺼내

내 욕심을 채우려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창세기 310절에 보면

선악과를 따먹고 알몸인 것이

두려워 하느님이 거니실 때

나무 뒤에 숨어있는

아담과 하와를 보고

하느님이 던지는 첫마디는

아담아, 너 어디 있느나?”

그 때 어디 있는지 몰라서

하느님이 장소를 물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장소가 아니라

상태를 물으신 겁니다.

네가 도대체 어떤 상태이기에

나를 보고 숨느냐?

신앙은 관계성입니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

나와 나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

이러한 관계성이 깨어질 때

우리들은 숨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유리상자 같아

쉽게 깨집니다.

리고 피를 흘리고

중심을 잃어버립니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성이

깨어질 때는 거짓마음이 들고,

폭력적인 마음,

인적인 마음,

핑계되는 마음,

책임 전가하는 마음으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이 하느님에게

 당신이 짝지어준 저 여자가

그 열매를 따주었기에

먹었을 뿐입니다. 어쩌라구요?”

책임전가를 합니다.

동생을 때려죽인 카인은

 내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이란 말입니까?”

두 번째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죽으면서까지,

심장을 꺼내주면서 까지

자식을 사랑하는

그 어머니의 마음!

심장을 꺼내가는 그 자식이

다칠까 걱정하는 그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마음을

마태복음 1129절에 다

음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이 온유와 겸손에서 성부께

죽기까지 순명하는

순명의 마음이 나옵니다.

그런 마음이 우리에게

어떻게 전달이 됩니까?

잃은 자를

구원하시는 분으로 옵니다.

심판하는 주님이 아니라

생명을 주기 위한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서십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헤매시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옵니다.

조건 없이 용서하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탕자를 조건 없이 기쁘게

맞이하는 마음이 바로

예수성심의 마음이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마음이 예수성심의 마음이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는

마음이 예수성심의 마음이요,

죄 중의 막달레나를,

탐관오리였던 자캐오를

가슴에 끌어 앉았던 그 마음이

예수성심의 마음입니다.

과부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동정의 눈물을 흘리는 그 마음이

바로 예수성심의 마음입니다.

십자가위의 수치스러운

죽음을 통하여 당신 목숨까지

우리의 대속물로 내어주신

그 마음이 예수성심의 마음입니다.

이제는 성체성사 안에서 빵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내어주는 마음이 바로

예수성심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과

산적이 되려하는 그 어두운

마음사이를 방황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두 마음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 일겁니다.

어느 쪽으로 내가

 기울어지느냐 하는 것은,

내가 얼마나 기도생활을 하고

희생의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예수성심의 마음으로

기울어질 수 도 있을 것이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어둠으로만

가득 차 있는 어둠의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갈 수도 있을 겁니다.

결국 선택은 내 주변사람이

나대신 선택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이 어떻더라도 내가

예수성심의 마음을 찾아서

기를 쓰고 살 것인지 아니면

마귀의 마음을 가지고 살 것인가의

선택권은 분명히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압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어머니가

떠나신 후 깨닫고,

회개의 삶을 살아간 것처럼,

세속에 빠지고 욕심에 허덕이는

마음을 우리들은 이 한 달 동안

꾸 예수님의 마음으로

변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마리아야, 어디 있느냐?

베드로야 도대체 어디 있느냐?”

반갑게 맞아하던 그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을 보고 숨었을 때,

그 하느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하느님과의 관계성이 깨지면

우리는 하느님을 무서워합니다.

두려워합니다.

냉담 전에는 신부님 뵈면

달려가서 인사했던 그 모습이

신부님을 뵈면 무서워질 겁니다.

지나가다 십자가를 보면

성호를 긋던 그 예수성심의 마음이

십자가를 안 보려 피해갈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하느님이

부르셨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자격이 있기에,

혹은 내가 선택해서

성지에 왔다는 그 생각은

잘못된 생각일겁니다.

예수성심의 마음으로

변화시켜주시기 위하여,

깨달음을 주시기 위하여,

깨어진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

내 자신과 나와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그 깨어진 관계를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접착제로 붙여주시기 위하여,

오늘 초대해주셨다는 것을 믿으며,

오늘 이 거룩한 밤 예수성심으로

살아갈 것을 약속드립시다. 아멘!

201706월 은총의 밤(6/3)

배티성지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배티성지 - photo by - 느티나무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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