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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바로보기 / 겨자씨 같은 천국의 은닉성 (마태13:31~32)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6-27 조회수6,465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6. 27. 성경바로보기 

 

겨자씨 같은 천국의 은닉성 

(마태13:31~32)

31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32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여러분 혹시 왕의 남자라는 영화를 기억하십니까? 이준익 감독에 의해 2005년에 만들어진 그 영화는 대종상 시상식에서 10개 부문을 수상한 수작입니다. 연산군과 장녹수로 대표되는 왕궁의 권세와 장생과 공길이라는 광대가 모형하고 있는 광대의 세계를 극명하게 대조를 시켜서 보는 이들에게, 과연 어떤 세계가 진짜 승리의 세계인가를 묻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영화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추구하는 이들 속에서 권력의 정상에 앉아있는 연산군의 세계에 장생과 공길이라는 광대의 세계가 침입을 하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세상 왕의 세계가 자유로운 광대의 세계와 만나게 되자 그 왕의 세계의 실체가 하나하나 폭로가 됩니다.

광대들은 마치 신들린 사람들처럼 왕의 세계를 해학으로 풍자하며 왕궁의 실체를 폭로시킵니다. 그렇게 폭로당한 이 세상 권세 자들은 그 자리에서 피 비린내 나는 살육을 저지르며 맞다, 내가 바로 그런 존재다라고 확인 도장을 찍습니다. 광대의 세계에 의해 폭로당한 왕의 세계는 그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처절하고 측은하며 어둡고 교활한 세계였습니다. 극 중간에 울다 지쳐 잠이든 연산군의 얼굴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왕의 눈물을 닦아주는 광대 공길의 모습이 나오는데, 왕의 세계의 초라한 실체가 광대의 세계에 들키는 장면입니다.

그럼에도 결국 광대의 세계는 왕의 세계로부터 공격을 당하여 눈을 뽑힙니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즈음에 눈을 잃은 광대들이 이런 대화를 합니다. 너는 다시 태어나면 뭐로 태어나고 싶으냐? 양반?’ ‘아니’ ‘그럼 왕?’ ‘아니’ ‘그럼 뭐로 태어나고 싶으냐?’ 높은 외줄 위에서 광대들은 소리칩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광대지하며 두 광대가 하늘 높이 뛰어 오릅니다.

광대들의 비상입니다. 그 순간 연산군을 몰아내려는 역모 자들의 군사들이 왕궁으로 몰려가는 그림이 이어지고 그것으로 그 영화는 끝이 납니다. 왕의 세계의 몰락입니다. 마치 세상의 마지막을 보는 듯한 그런 그림입니다.

 

이 세상은 그렇게 두 세계가 대립하며 흘러가고 있습니다. 한쪽 세계는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며 어떻게 해서든 세상 왕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하는 세계이고 다른 세계는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당하며 그 세상 세력의 실체를 폭로하는 역할을 하면서 그 세상 권세에게 눈을 뽑히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눈을 뽑히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난 다시 태어나도 이렇게 살 거야라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을 만큼 자신들의 역할을 기꺼워하는 이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왕의 세계의 실체와 종말을 너무 확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록 왕의 세계에 의해 눈을 뽑히는 고난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결국에 가서는 하늘 높은 곳으로 비상할 수 있는 자유로운 광대의 세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극 중에서 광대들이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땅도 아니고 하늘도 아니고 그 가운데 줄 하나 쳐 놓고 그 위에서 산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우리 성도의 삶이 그러한 것이라 공감을 했습니다. 우리는 땅과 하늘이 오버랩 되어 있는 이상한 공간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대와 오는 세대가 겹쳐져 버린 이상한 세대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아직 하늘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땅에 매이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 침노해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점점 땅에서 발을 떼게 되고 결국 하늘 높이 비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역사는 그 두 부류를 명쾌하게 분류해 내는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창세기 때부터 항상 인류를 둘로 구분해 내시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한쪽은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요 다른 한쪽은 하느님의 은혜에서 제외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쪽이 항상 은혜에서 제외된 자들에게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양쪽 진영의 싸움에서 가해자로 분류가 되는 자들이 항상 심판을 받습니다.

가장 먼저 카인이라는 힘의 세계와 아벨이라는 은혜의 세계를 나누시지요? 힘의 세계는 자신이 자기 인생의 왕이 되어 세상의 힘을 추구하며 그 힘을 쌓아 자신을 자랑하는 세계이고 은혜의 세계는 자신을 부인당하고 오직 하느님의 은혜만을 의존하는 자기 부인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힘의 세계에 의해 은혜의 세계가 폭행을 당해 죽습니다. 그 과정에서 힘의 세계의 특징과 은혜의 세계의 특징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왕의 세계, 즉 힘의 세계는 자신의 행위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 자신의 행위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업신여김을 당할 때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큼 잔인해집니다. 왜냐하면 힘의 세계 속에서의 주인공은 언제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제사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누구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이 자신의 제사, 즉 자신의 선한 행위를 인정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자신은 그 하느님보다 힘이 약합니다. 그래서 그 분노를 발산할 다른 대상을 찾습니다. 그런데 마침 자신의 제사를 초라하게 만드는 약자가 곁에서 발견됩니다. 동생 아벨입니다.

카인이 생각하기에 하느님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아벨에 의해 카인이 악인으로 폭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광대들에 의해 왕가의 비리가 드러나는 것처럼.

카인은 힘을 추구하고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며 뭇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사는 삶이 옳은 삶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았고 하느님께도 멋진 제사를 정성스럽게 올려드렸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제사가 기각이 되고 동생인 아벨의 제사만 하느님께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자 그의 열심과 정성의 실체가 살인이라는 극악한 모습으로 폭로가 됩니다.

카인의 모든 열심은 결국 자기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아벨은 그렇게 카인의 정체를 폭로하고 죽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천국의 1호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 아벨의 라인으로 노아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성경은 그 노아의 이름 앞에도 은혜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창세 6:4~8) 4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한자리에 들어 그들에게서 자식이 태어나던 그때와 그 뒤에도 세상에는 나필족이 있었는데, 그들은 옛날의 용사들로서 이름난 장사들이었다. 5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6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7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8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

 

여기에도 역시 두 부류의 세상이 등장합니다. 한쪽은 하느님의 한탄과 근심을 유발시키는 나팔족(네피림), 거인, 용사, 유명한 사람으로 불리는 세상 왕의 세계이고 한쪽은 120년 동안 그들에게 멸시와 조롱과 업신여김을 받으며 그들의 실체를 폭로하는 은혜 입은 노아의 세계입니다. 노아는 조롱과 멸시와 업신여김을 받으며 세상 전체의 악함을 폭로하는 역할로 섭니다. 광대입니다.

세상 왕의 세계는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의 목표지점을 설정하고 그것만을 추구하며 사는 세계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상식과 야망에 맞지 않는 것은 자신들의 판단 하에 어리석고 무식하고 악한 것으로 규정해 버립니다. ‘언제 비가 오냐?’ 그렇게 자신들의 선악구조에 의해 선악을 판단하고 가치와 무가치를 판단하는 세상 왕의 세계는 자기 주변에서 약함이라는 것이 감지가 되면 그 약함을 공격하여 자신의 위상을 세우는 데에 사용합니다.

힘의 세계 속에서의 강함은 약함을 감지하게 될 때 항상 폭력을 유발합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교활한지 그 왕의 세계 속의 인간들은 착한 일, 선한 일이라는 것으로도 상대방을 지배하려 합니다. 내가 착한 일을 더 많이 하고, 내가 종교적 열심을 더 많이 부리고 있고, 내가 더 헌신을 하여 하느님을 돕고 있다는 자기만족과 평판을 챙겨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자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힘을 쌓아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은 착함과 선함, 지혜로움까지도 힘으로 사용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도의 착함과 연산군이 장생의 눈알을 뽑은 것이 그 의도의 악함에 있어서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거기에 대한 아주 확실한 예가 노아와 노아의 두 아들의 이야기죠. 하느님은 노아를 에덴동산에서의 벌거벗은 아담의 모습으로 두 아들 앞에 제시하십니다. 그때 선악과를 따먹은 죄인으로서의 아담의 모습으로 함이라는 아들이 벌거벗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자마자 자신의 선악구조에 의해 벌거벗었네.’라고 판단을 해 버립니다. 지혜로움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자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셈이라는 아들은 그 어떤 판단도 유보한 채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가려 버립니다. 그랬더니 벌거벗은 노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그 둘에게 축복과 저주를 선언해 버립니다. 마치 그 이야기가 노아의 자작극처럼 보이지 않으세요?

하느님은 그렇게 자신의 선악구조에 의해 선과 악을 판단하며 스스로의 목표지점에 도달하려고 하는 세상 왕들의 세계와, 선과 악의 모든 판단을 하느님께 의탁하며 그 분께 순종하는 자로 살게 되는 은혜의 세계를 양분해 가시는 형국으로 이 역사를 경륜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의 후예들인 애굽에 셈의 후예들인 이스라엘이 노예가 되어 들어가게 됩니다. 역시 세상 왕의 권세에 의해 광대의 눈이 뽑히는 형국입니다. 그리고는 그 일로 세상 왕의 악이 폭로가 됩니다

바로 그 노아처럼 2,000년 전 예루살렘 골고다에서 벌거벗겨져 세상에 던져진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때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세상 왕의 세계는 그 분의 벌거벗음을 약함, 패배, , 저주로 판단해 버렸습니다. ‘메시아가 뭐 저래? 저런 자가 어떻게 우리에게 다윗 왕국의 회복을 선사하겠나? 죽여라함의 세계이며 마귀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은혜를 입은 무리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오직 교회만이 그 분의 십자가를 패배로, 약함으로, 저주로 판단하지 않고, 그 벌거벗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연약함과 추악함을 덮으시는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의 풍성함을 발견합니다. 그게 바로 자신들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벌거벗음과 예수님의 십자가가 절대 실패와 저주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이들이 바로 그 벌거벗음과 십자가로 초대를 받습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세상에게 붙들려 벌거벗겨지고 눈알을 뽑히는 십자가의 삶을 삶으로 해서 세상의 악함을 폭로하는 장생과 공길이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 왕의 세계는 자신의 강함과 자신의 왕 됨, 그리고 자신의 신 됨을 추구하며 스스로의 판단과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그 추구 점을 향해 일로 매진하며 삽니다. 그래서 그들은 강해 보입니다. 언제나 승자같이 보입니다. 성경이 그걸 세상 왕의 세계, 세상 나라라 부르고 그 세상 나라의 모형으로 함의 후예들이 만든 애굽과 바벨론 등을 등장시켜 당신의 백성들을 그 속에서 뽑아내는 것을 구원으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성도가 나와야 하는 애굽이나 바벨론 등은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들이 열심히 구축해온 라는 나라의 모형인 것입니다. 내가 나의 욕심을 따라 내 뜻대로 를 통치하는 것, 그것이 라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은 성도를 거기에서 끌어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옛 자아인 에게서 탈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힘을 이용하여 를 구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세상 나라의 반대편에 있는 나라를 하느님 나라, 천국이라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펼쳐질 때에는 세상 나라에게 맞아 죽는 모습으로, 선악 분별도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으로, 세상에게 조롱당하며 멸시 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아벨, 노아, , 교회 모든 천국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약자의 모습으로, 비경제적이고, 비실용적이며, 비합리적인 모습으로 보여 진다는 말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천국 백성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셨는데 그 결국이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왕의 삶이 그러했다면 그 나라 백성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는 자명하지요? 결국 세상에게 맞아죽는 것이 천국 백성의 삶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승리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왕 됨을 추구하며 살던 육이 죽어야 하느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며 사는 영으로 다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모형으로 예수님의 육신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사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이 세상 나라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성도는 계속해서 조금씩 죽어가다가 육신의 죽음과 함께 완전히 죽고 그 육신이 젖어 살던 세상 나라의 삶의 원리와 완전히 반대되는 원리로 살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몸으로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완성지점인 것입니다.

 

(골로1:13~14) 13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14 우리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 났습니다.

 

보다시피 이 세상에서 왕이 되고 싶어 하는, 흑암의 권세에게 붙들려 사는 상태를 죄라하고 그 흑암의 권세에서 빠져나와 아들의 나라로 옮겨가는 것을 구속, 죄 사함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 속에서 나타나는 그 아들의 나라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부인하고 하느님의 말씀만을 의지하여 사는 자로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무식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비실용적으로 보입니다. 오죽하면 세례 요한도 감옥에 갇혀 자기 하나 감옥에서 빼내주지 못하는 그 메시아가 이해가 안 되어서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 맞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물어 볼 정도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뭐라 전하라 하십니까?

 

(마태11:6) 6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은 지금 힘의 원리 속의 세상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는 모습으로 와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만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삶을 보고 실족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천국은 이 세상 나라를 침공해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이 세상 나라를 박살내어 점령해 버립니다.

 

(마태11:12) 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엄밀히 말해 천국은 예수님에 의해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만, 그 침노해 들어오는 하느님 나라의 길을 미리 예비한 자가 세례자요한이므로 세례자요한 때부터 천국이 이 세상을 침노해 들어왔다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국이 세상 나라 즉, 애굽과 바벨론을 침공하여 그들을 그 곳에서 빼내올 때 그 세상 나라는 풍지 박산이 납니다.

다른 말로 라는 세상 나라가 하느님 나라의 침공을 받게 되면 육신의 나라가 조금씩 점령을 당하면서 라는 나라 속에 갇혀있던 새 생명이 밖으로 드러나게 되고 결국 육으로서의 는 천국의 침공을 당해 멸절되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앙생활이라 합니다.

 

(마태12:28~29) 28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29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 어떻게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빼앗을 수 있겠느냐?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개념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 천국을 말씀하시면서 그 천국이 임한 자의 삶을 한 마디로 정의를 해 주시는데 그것이 강한 자의 집에 쳐 들어가 강한 자를 결박하고, 무력화시키고 그 마귀의 세간을 늑탈해 버리는 것, 즉 성령에 의해 귀신이 쫓겨 나가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자들의 삶은 라는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 온갖 세상 힘들을 끌어 모으고 쌓아가던 자아가 점차 결박이 되고 그 속에서 작은 불씨로 존재하던 새 생명이 밖으로 조금씩 드러나는 형국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의 세계, 세상나라는 바로 내 안에 응축되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내 안에 침노하여 바로 그걸 깨는 것입니다. 를 사랑하고 를 숭배하기 위해 심지어 착한 척, 바른 척, 열심 있는 척, 경건한 척까지 하며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려 하던 가 천국에 의해 실체를 폭로당하고 그 천국이라는 불도저에 의해 납작하게 오징어포가 되어가는 그런 모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의해 침공을 당하는 성도는 때때로 실패한 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연약한 자처럼 보이기도 하며, 때로는 불성실하고 부도덕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높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천국에 의해 빼앗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시편 73편 기자가 이렇게 묘사를 했습니다.

 

(시편73:2~14) 2 나는 미끄러져 거의 넘어질 뻔하였습니다. 3 어리석은 자들을 부러워하고 악한 자들이 잘 사는 것을 시샘한 탓이옵니다. 4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찌고 고생이 무엇인지 조금도 모릅니다. 5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겪지 않으며 사람들이 당하는 쓰라림은 아예 모릅니다. 6 거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횡포가 그들의 나들이옷입니다. 7 그 비곗덩어리에서 악이 나오고 그 마음에서 못된 생각이 흘러 넘칩니다. 8 그들은 낄낄대며 악을 뿌리고 거만하게 을러메며 억누릅니다. 9 하늘을 쳐다보며 욕설 퍼붓고 혓바닥으로 땅을 휩쓸고 다닙니다. 10 그리하여 내 백성마저 그들에게 솔깃하여 그들의 물에 흠뻑 젖어 들었습니다. 11 그러면서 한다는 말은 '하느님이 어떻게 알랴, 가장 높은 분이라고 세상 일을 다 아느냐?' 12 그런데 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악인이어도, 몸은 항상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갑니다. 13 나는 과연 무엇하러 마음을 맑게 가졌으며 깨끗한 손으로 살았사옵니까? 14 이렇게 종일토록 얻어 맞고 잠만 깨면 받는 것이 책벌일 바에야?

 

보다시피 이 시편을 쓴 아삽도 악인들의 삶과 의인들의 삶을 비교해 보면서 하마터면 실족을 할 뻔했다고 합니다. 힘을 추구하는 악인들은 마치 과연 그러하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열심히 얻어내며 삽니다. 그런데 자기는 매일 같이 재앙과 징책을 당하며 삽니다. 약자의 모습이고, 어리석은 자의 모습이며, 비실용적인 삶처럼 보입니다. 왕실 속의 광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 두 세계의 결국을 아삽에게 보이셨는데,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습니다.

 

(시편73:20~25) 20 주님은 일어나셔서 그들의 몰골을 멸시하십니다. 21 내 마음이 쓰라렸을 때, 창자가 끊어지는 듯 아팠을 때, 22 나는 미련하여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당신 앞에서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 23 그래도 나는 당신 곁을 떠나지 않아 당신께서 나의 오른손을 잡아 주셨사오니, 24 나를 타일러 이끌어 주시고 마침내 당신 영광에로 받아 들여 주소서. 25 하늘에 가도 나에게는 당신밖에 없사옵고 땅에서도 당신만 계셔 주시면 그에서 무엇을 더 바라리이까?

 

세상 왕들의 삶이 아무리 화려해 보이고 강해 보여도 그건 모두 한순간의 꿈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라는 존재의 왕 됨을 위해 살던 자들이 꿈에서 깰 때에 하느님으로부터 멸시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삽 자신이 약자로 보이고, 망하는 것처럼 보이고, 힘이 없는 자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삶이야말로 항상 주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라는 것을 그가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바로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천국은 우리를 침노해 들어와 우리를 부인시키시고, 해체시키시며 결국은 우리를 라는 세상 나라에서 늑탈해 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게 천국을 사는 이들의 삶입니다. 자칫하면 실족할 수 있는 그런 삶이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사람의 삶이란 말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에 붙어 있는 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겨자씨의 비유인 것입니다.

겨자씨의 비유가 어떻게 시작합니까? ‘천국은으로 시작이 되지요? 주님은 천국이 이 땅에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게 되는지를 아주 기가 막힌 소재를 사용하셔서 설명을 해 주십니다. 천국은 이 땅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 겨자씨처럼 은닉되어, 믿음이 없는 자들이 볼 때에는 이게 뭐야?’하며 실족할만한 모양으로 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천국은 공중의 새들이 와서 가지에 깃들일 만큼 엄청난 실체를 숨기고 있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천국의 완료성입니다. 완료성과 종결성을 은닉하고 있는 천국의 모습이 바로 겨자씨의 모습으로 와 있는 세상 속의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천국의 모형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을 침공해 들어오신 것입니다.

 

(루가17:20~21)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바실레이아 투 떼우’ ‘하느님 나라라고 부르십니다. 여기에서의 바실레이아는 통치권, 왕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하느님 나라라는 것은 공간적 개념의 국가 개념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통치권 안에 들어 있는 존재들과 하느님과의 상호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통치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하느님 나라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통치 속으로 끌어 당겨지는 하느님의 백성들 또한 각자가 하느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보여졌습니까? 수난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고, 연한 순과 같은 약자였으며,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리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왜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통치가 실현이 되는 곳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왕 되심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기까지 순종하는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의 통치권에 완전하게 항복하는 모습으로,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왕으로 통치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은 겨자씨처럼 작고 약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통치를 받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 왕국은 어떻습니까? 세상 왕국은 하느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왕이 되어 하느님을 자신의 통치권 안으로 끌어당깁니다. 내가 나의 뜻대로 를 통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소원과 비전과 야망을 성취하고 인기와 명성과 훌륭한 평판을 얻는 데에 하느님을 이용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교활한 것은 교회 안에숨어 들어온 세상 왕국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철저하게 섬기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라는 왕국의 수호와 발전과 번영을 위해 신앙의 행위와 신앙의 대상을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선교도 열심히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열심히 합니다. 성경도 열심히 공부하고, 착한 일도 많이 하는데 결국 그 모든 일의 열매는 자기가 따 먹어 버립니다. ‘라는 존재의 성실함, 경건함, 착함, 부지런함, 똑똑함 등을 챙기는 용도로 신앙 행위와 하느님이 근사하게 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겨자씨가 아닙니다. 이 겨자씨의 비유가 어디에서 인용된 것인지 아세요? 에제키엘서 17장입니다.

 

(에제 17:22~24) 22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 23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24 그제야 들의 모든 나무가 알게 되리라.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시든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이가 나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

 

예수님께서 왜 갑자기 에제케엘서를 인용하셔서 겨자씨의 비유를 말씀하셨는가? 이 겨자씨의 비유는 율법과 행위로 자신들의 우월한 선민 됨을 챙기며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의 힘의 원리 속에서의 화려한 성공으로 오해하고 있던 유대주의에 대한 대답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12장에서 이렇게 내가 그들을 민족들 사이로 쫓아 버리고 여러 나라로 흩어 버릴 때에야, 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말씀을 하신 후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길가 밭, 돌 짝 밭, 가시떨기 등으로 이 세상 밭의 상태를 폭로하시고 그 속에서 열매를 맺게 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뿌려져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인 밭을 침공하여 기필코 좋은 땅으로 기경(寄經)하여 열매를 맺으시고야 마시는, 한 알의 밀알로 오시는 천국의 왕을 소개 하시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 개의 비유를 던지신 것입니다. 그 중에 들어 있는 것이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이 겨자씨의 비유는 힘의 원리를 삶의 원리로 채택하여 살아가는 세상의 대표로 등장하는 유대주의에게 진짜 하느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그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비추어지는지를 설명하는 비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의 비유에 인용하신 에제케엘서 17장은 유대의 왕 시드키야의 이야기입니다. 남 유대의 요시야 왕이 애굽의 파라오에게 죽고 그 아들 엘리아킴이 왕이 됩니다. 그런데 애굽 왕 파라오가 그 엘리아킴의 이름을 여호야킴으로 바꿉니다. 애굽의 왕이 유다의 왕의 이름을 바꾸어 주는 행위는 절대 복종을 강요하는 행위였습니다.

그 때 설상가상으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를 침공해 들어옵니다. 여호야킴은 양수 겹장의 상태에서 삼 년간 바벨론을 섬기다가 바벨론을 배반합니다. 그 때 이상하게도 하느님께서 유다를 도와주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른 이방 민족들을 유다에 보내셔서 유다를 초토화시켜 버리십니다.

하느님은 유다의 그러한 도모를 돕지 않으시고 오히려 징벌을 하시는 이유를 열왕기하 24장에서 밝히시는데(열왕하24:1-3) ‘히즈키야의 아들 므낫세가 하느님 앞에서 지은 모든 죄 때문에 하느님이 유다를 치시는 것이라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므낫세는 아버지 히즈키야가 죽자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해 산당을 짓고 우상을 섬기며 박수무당을 신임하는 죄를 지은 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지혜와 열심을 동원하여 미래를 도모하는 것을 하느님은 제일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야킴이 죽고 그 아들 여호야킨이 왕이 되는데 그도 아버지와 똑같이 야훼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고 성경은 기술하고 있습니다.(열왕하24:9) 그 악은 다른 것이 아니라 여호야킨이 아버지 여호야킴이나 그의 조상 므낫세처럼 자기가 이 세상의 왕으로 군림하기 위해 자신의 꾀와 열심을 동원하여 미래를 계획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때 바벨론을 유다에 보내셔서 유다를 완전히 멸망시켜 버립니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 왕이 유다를 점령하고 여호야킨을 제거한 후 그의 숙부인 시드키야를 유다의 왕으로 책봉했는데 그 유다의 왕 시드키야가 몰래 애굽으로 사신을 보내어 원군을 요청하여 그 상황을 모면하려 시도를 했습니다. 역시 자기의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미래를 획책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므낫세의 죄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하느님은 지금 당신의 백성을 모형하고 있는 유다, 그리고 그 유다 전체를 내용으로 함의 하고 있는 유다의 왕에게 끊임없이 하느님 앞에서의 자기부인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유다와 유다의 왕들이 계속해서 자기들의 노력과 정성과 열심과 지혜를 동원하여 스스로 미래를 개척하려 합니다.

그 때 하느님께서 두 마리의 독수리와 포도나무라는 소재를 사용하여 내려주신 말씀이 에제키엘서 17장인 것입니다. 유다는, 다른 말로 하느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백향나무가 되고 싶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백향 나무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하느님처럼되어 보겠다는 타락한 아담의 모습이며, 자신의 제사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 카인의 모습이며, 하느님 앞에서 네피림, 용사, 유명한 자가 되고 싶어 했던 노아시대의 악당들의 모습이며, 자신의 선악구조로 선악을 판단하며 살고 싶어 하는 함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자신의 행위와 열심과 지혜와 비전과 희망을 모두 내려놓고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뢰하는 죽은 흙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향나무 가지 중 가장 연한 새순을 꺾어 땅에 심는 것이고 비로소 그 나무에 새들이 깃드는 그림이 에제케엘 17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성도는 그렇게 하느님 앞에서 연한 순으로, 비워진 그릇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느님의 생명력이 부어지는 것이 하느님 나라 백성의 존재양식인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하느님 나라 백성의 존재 양식이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보이겠습니까? 숨겨지고, 낮아지고, 연약해지고, 보잘 것 없어지고, 비워지고, 해체되는 모습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러한 약함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선악판단에 의해 그들을 조롱하고 비웃는 자로 폭로가 되고 그렇게 세상은 둘로 극명하게 갈라지는 것입니다.

장생이라는 광대는 반드시 연산군에 의해 두 눈을 뽑히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세상에게 두 눈을 뽑히는 장생이 하늘로 높이 비상하게 되는 승리자인 것이고 그의 두 눈을 뽑은 이 세상 왕들이 하느님의 심판의 칼날을 받게 되는 멸망 받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이 겨자씨인 것입니다.

그러나 번영신학을 주장하는 역사 낙관 주의자들은 이 비유를 아주 낙천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천국은 이 세상 속에서 겨자씨로 출발하여 새들이 깃드는 커다란 나무로 부흥되고 발전되는 것이라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덩치가 커지고, 사람이 많아지고, 소유가 많아지는 것이 축복이라고 가르칩니다. 완전히 반대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예수님의 비유가 구약의 어디에서 인용된 것인지 한 번도 연구를 해보지 않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아무튼 하느님은 그러한 가짜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일부러 비유를 이렇게 모호하게 만들어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했지요? 오늘 본문 바로 위에서 주님이 말씀해 주시잖아요?

 

(마태 13:10-16)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마르코복음으로 가면 조금 더 원색적으로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마르4:11-12)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12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떤 무리에게는 당신의 말씀을 못 알아듣게 하시려고 일부러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겨자씨의 비유를 성경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역사 낙관론이나 성공주의, 실용주의 등으로 해석을 하는 이들은 예수님에 의해, 들을 귀와 보는 눈을 차단당한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천국의 영광은 영원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지 절대 이 세상 속에서 겨자나무처럼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권세 잡은 자에게 속해 있는 교회 안의 가라지들은 천국이 이 세상 속에서 겨자나무처럼 번성할 것이고, 그 화려함을 드러낼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사업도 번성해야 하고, 병도 안 걸려야 하고, 성공의 가도만을 달려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겨자씨의 비유가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 비유인지 아세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바로 밑에 붙어 있습니다. 주님은 이미 교회 안의 가짜 가라지들이 이 겨자씨 비유를 어떻게 오해할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 겨자씨의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전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가라지들의 논리가 이 세상에서는 맞아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조금 전에 찾아 읽었던 시편 73편 아닙니까? 아삽뿐입니까? 하박꾹도, 요나도 하느님 왜 악인들이 성공하고 번영하고 번성하도록 놔두십니까?’하고 얼마나 불평을 했습니까?

그렇게 이 세상 가라지들의 삶은 이 세상에서 강자로, 왕으로, 다스리는 자로, 지혜 있는 자로, 힘 있는 자로, 번영과 번성과 성공을 누리는 자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 겨자씨의 비유를 역사 낙관론이나 번영 신학으로 곡해할 가라지들에게 무서운 경고를 아울러 하십니다.

천국의 겨자나무에는 천국 백성인 천국의 새, 즉 하느님의 열방이 거하게 되는데 이 땅에서는 그 천국의 겨자나무가 겨자씨로 보여 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겨자나무의 모습으로 오는 천국을 기대하는, 세상의 힘과 권세를 추구하는 자들의 교만한 백향 나무에는 힘을 추구하는 악한 새들이 우글거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에제 31:3~14) 3 가지가 멋지게 우거져 그늘이 좋고 키가 우뚝 솟아 꼭대기 가지는 구름을 뚫고 뻗은 레바논의 송백만큼이나 크다고 할까! 4 너는 물을 먹고 크게 자랐고 지하수를 빨아 치솟았다. 네가 선 주위로는 강물이 돌고 도랑물이 흘러 들나무를 모두 적셨다. 5 그래서 너는 들의 어떤 나무보다 키가 컸다. 그 많은 굵은 가지에 가지들이 무성하게 뻗은 것은 물이 많아서 잘 자란 탓이었다. 6 그 가지들에 하늘의 새들이 깃들였고 우거진 가지들 밑에서 온갖 들짐승들이 새끼를 쳤으며 그 그늘 밑에 큰 민족들이 모두 자리를 잡았다. 7 뿌리가 물을 마음껏 빨아 들여 키는 크고 가지는 멋있게 뻗었다. 8 하느님 동산에서 자란 어느 송백이 이만하랴! 전나무 가지도 그만큼은 되지 않았고 플라타나스도 그만큼은 무성하지 못하였다. 하느님 동산 어느 나무가 이만큼 멋지랴! 9 나는 이 나무를 가지도 무성하게 멋지게 키웠다. 하느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나무들조차 모두들 부러워하도록. 10 그래서 주 야훼가 말한다. 이 나무가 스스로 키 크고, 그 꼭대기 가지가 구름을 뚫을 만큼 높다고 으쓱해져서 우쭐대므로 11 내가 이 나무를 뭇 민족을 거느린 우두머리에게 넘겨 주었다. 못할 짓을 한 만큼 그대로 갚아, 내쫓은 것이다. 12 뭇 민족 가운데서도 포악한 침략자들이 이 나무를 베어 산에 내던졌다. 그래서 잎사귀들은 모든 골짜기에 너저분하고 무성한 가지는 부러져 이 계곡 저 계곡에 흩어졌으며 세상 모든 민족이 이 나무를 내버려 두고 그 그늘에서 도망쳐 버렸다. 13 그 넘어진 등걸 위에 하늘의 온갖 새가 깃들이고, 그 무성한 가지를 깔고 온갖 들짐승이 살게 되었다. 14 물가에서 자라면서도 다시는 꼭대기 가지가 하늘 높이 구름을 뚫고 뻗지 못하리라. 아무리 물을 잘 빨아 마음껏 자라도 넘어지고 말리라. 모두들 지하로 내려 갈 죽을 신세, 모든 사람이 가는 그 구렁으로 함께 내려 갈 운명이다.

 

이 세상에서 겨자나무 되고 싶어 하는 자들, 즉 세상의 힘과 권세를 얻어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숭배하고자 하는 자들의 무리 속으로 수많은 세상의 새들이 몰려듭니다. 그리고는 그 아시라아의 권세와 같은 세상 힘을 음미하고 누리며 승승장구하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세상의 백향나무에 내려앉는 모든 새들을 교만한자, 멸망할 자라 부르십니다. 하느님은 반드시 그들을 찍어버리고 꺾어 버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요한묵시록에서 그러한 세상(아시리아, 바벨론)의 권세와 힘의 나무, 백향목 나무에 내려앉으려 하는 새들을 더럽고 가증한 새라 부르십니다.

 

(묵시 18:2~4) 2 그가 힘찬 소리로 외쳤습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바빌론이 마귀들의 거처가 되고 온갖 더러운 영들의 소굴, 온갖 더러운 새들의 소굴, 더럽고 미움 받는 온갖 짐승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3 그 여자의 난잡한 불륜의 술을 모든 민족들이 마시고 땅의 임금들이 그 여자와 불륜을 저질렀으며 땅의 상인들이 그 여자의 사치 덕분에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4 나는 또 하늘에서 울려오는 다른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내 백성아, 그 여자에게서 나와라. 그리하여 그 여자의 죄악에 동참하지 말고 그 여자가 당하는 재앙을 입지 마라.

 

보세요. 세상 왕들, 다른 말로 이 세상에서 왕이 되고 싶어 하는 타락한 첫째 아담 속의 죄인들이 바벨론이라는 세상 나무에 모여 앉아서 바벨론과 음행을 일삼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바벨론을 사치의 세력이라고 부르시며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라하고 외치십니다. 그 나무에는 앉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속의 천국은 겨자씨이지 겨자나무가 아니란 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바벨론이라는 세상 나무에서 어떤 것이 거래되는지 기술해 놓은 대목입니다.

 

(묵시18:12~13) 12 그 상품은 금, , 보석, 진주, 고운 아마포, 자주색 옷감, 비단, 진홍색 옷감, 온갖 향나무, 온갖 상아 공예품, 그리고 매우 값진 나무와 구리와 쇠와 대리석으로 만든 물품, 13 또 계피, 향료, , 몰약, 유향, 포도주, 올리브 기름, 고운 밀가루, , , , , 마차, 노예, 포로 따위다.

 

바벨론, 이 세상의 백향목 나무에서는 온갖 세상의 힘과 가치들이 거래가 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사람의 영혼이랍니다. 사람의 영혼이 거래되는 곳이 어디일까요? 거시적으로 보면 이 세상 전체가 사람의 영혼을 담보로 하여 힘과 가치로 물물 교환을 하는 곳이지만 미시적으로 축약을 하면 이 세상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라는 곳에서 예수 믿으면 부자 되고, 예수 믿으면 병도 안 걸리며, 예수 믿으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식의 겨자나무 교리로 사람들의 영혼을 마귀에게 팔아넘기고 있지 않습니까? 긍정적 사고니, 긍정의 힘이니, 번영의 신학이니 하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이 바로 이 세상에서 하늘의 천국을 기대하는 교만한 백향목 나무인 것이고 거기에 벌 떼처럼 모여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더럽고 가증한 새들인 것입니다. 거기서 나오십시오. 아니면 죽습니다. 그 백향목과 함께 찍혀 버리게 된단 말입니다.

 

(묵시18:14~19) 14 네 마음이 탐내던 열매가 너에게서 사라지고 온갖 화려하고 찬란한 것들이 너에게서 없어져 다시는 그것들을 찾아보지 못할 것이다. 15 이러한 물품을 팔아 그 여자 덕분에 부자가 된 상인들은 그 여자가 받는 고통이 두려워 멀찍이 서서 슬피 울며 16 이렇게 말할 것이다. ‘불행하여라, 불행하여라, 저 큰 도성! 고운 아마포 옷, 자주색과 진홍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했었는데 17 그토록 많던 재물이 삽시간에 사라져 버렸구나.’ 모든 선장과 선객과 선원과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다 멀찍이 서서, 18 그 도성을 태우는 불의 연기를 보며 저 큰 도성 같은 곳이 또 어디 있으랴?’ 하고 외쳤다. 19 또 머리에 먼지를 뿌리고 슬피 울며 부르짖었다. ‘불행하여라, 불행하여라, 저 큰 도성! 바다에 배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그 재화 덕분에 부자가 되었건만 삽시간에 폐허로 변해 버렸구나.’

 

이 세상의 힘이 영원할 것 같지만 일 시간에 망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절대 이김을 추구하는 이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비워져가고 낮아지고 연약한 자로 내려가야 합니다. 세상에게 눈알을 뽑히는 자들이 교회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로마라는 세상의 힘을 붙들게 되자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정작 세상의 힘을 추구하며 인간들의 힘과 노력과 가능성을 굳게 의지했던 유대주의를 그리스도교가 두들겨 패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4세기경부터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유대교인들을 잡아다가 십자가가 새겨진 도끼로 목을 잘라 참수를 시키는 무서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무려 1,000년 이상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십자군 전쟁 등의 잔인한 과정을 통과하며 스스로 바벨론화 되어 간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은 루터라는 사람을 일으켜 세워 그 백향목이 되어 버린 교회를 박살을 내 버리셨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온 로마, 바벨론은 종교개혁 때에 멸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 개혁으로 자기부인과 십자가로 돌아간 듯 했던 그리스도교가 다시 바벨론화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역시 힘의 원리로 살아가는 세상 백성들의 대명사인 유대주의와 한판 전쟁을 벌이는 이상한 그림이 역사에 그려졌습니다. 유대주의의 다른 말은 인본주의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그 유대주의와 똑같은 인본주의가 되어서 유대주의와 서로의 패권을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게 이 세상 교회의 역사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유대주의자들의 대명사인 유대인들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그들을 수백만명이나 학살을 했던 반유대주의 자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나치들입니다. 그 나치와 손을 잡고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킨 자들은 누구지요? 무솔리니의 파시즘입니다.

나치즘은 종교개혁이 일어난 개신교의나라 독일의 것이고 파시즘은 가톨릭의 나라 이탈리아의 것입니다. 세상은 그 둘 다 그리스도교라 부릅니다. 공산주의도 자본의 획득과 축적을 모토로 하는 유대주의를 반대했습니다. 거기는 러시아입니다. 러시아 역시 동방교회인 러시아 정교의 본산인 곳입니다.

잘 보세요.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곳에서 유대주의와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리스도교가 유대주의를 공격할 때, 스스로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는 유대주의가 되어 공격을 했습니다. 그건 그리스도교와 유대주의, 즉 인본주의와의 전쟁이 아니라, 그냥 마귀들의 전쟁인 것입니다.

왜 역사에 이러한 아이러니들이 그려져 있을까요? 그리스도교가 이 세상에서 겨자나무가 되려 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야, 역사를 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게 교회의 모습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교회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는 공동체입니다. 겨자씨란 말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어떻게 그러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고도 정신을 못 차리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헤겔이 인간이 역사를 통하여 배울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절대 역사를 통하여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그렇게 미련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에서 번영하고 성공하고 착한 척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세상은 우릴 못 알아 봐야 합니다. 성도는 세상에게 예수를 믿으면 저렇게 되는구나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겨자씨처럼 안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슨 세상에 영향을 줍니까?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죽었고 세상도 우리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갈라6:4) 그런데 서로에 대해 죽은 자들이 어떻게 예수를 믿으면 저렇게 착하게 변하는구나, 예수를 믿으면 저렇게 부자가 되는 것이구나라는 평가를 받습니까? 세상은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얻는 유익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천국이 겨자씨인 것입니다.

 

(1요한 3:1~2) 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 때 비로소 그 화려하고 위대한 정체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은닉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세상에게 눈알을 뽑히면서도, 그 장래의 희망 때문에, 눈이 먼 채로 밧줄 위에서 공중으로 뛰어 오르는 장생이와 공길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왕의 세계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 합니다. 그 내 안의 왕의 세계에 십자가 지신 예수가 광대의 세계로, 천국으로 침노하셔서 라는 존재의 악한 실체를 폭로시키십니다. 그리고는 결국 그 천국의 세력에 의해 의 세계가 완전히 점령을 당하고 는 새로운 하늘의 나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해체되어지고 부인되어지는 내 안의 전쟁을 치르며, 내가 또 세상 속에 침투되는 천국으로, 작은 예수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어줍지 않은 겨자나무의 삶을 추구하다가 찍혀 불에 던지우는 비참한 종말을 맞지 마시고 겨자씨처럼 은닉되어 있는 듯 없는 듯 작은 자로 살다가 제 역할 다 마치고 천국에 영광스럽게 입성하는 진짜 천국의 삶을 잘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높이 날아오를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잘 견뎌내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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