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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느 누가 땅에 쓴 글씨처럼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9-23 조회수1,492 추천수0 반대(0) 신고

      

 

어느 누가 땅에 쓴 글씨처럼 지워지지 않겠습니까?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오죠? 이 본문의 이야기를 구체적인 성경의 예를 들어 설명해 드릴게요. 그 간음한 여인을 누가 데려오는지 아세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데려오죠. 율법이 데리고 오는 거예요. 그리고는 예수님께 그 여인을 고소합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자로 서시고,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고소자로 등장하는 거죠. 고소(告訴)자들에 의하면, ‘이년은 뱀입니다.’라고 고소를 하는 거고, 성경은 참소(讒訴)하는 자가 뱀이라 그래요. 마귀! 옛 뱀이라고 한다 말이죠. 두 뱀이 등장하는 거요.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뱀 맞습니다.’라는 것을 고백을 하는 그 뱀을 구원하기 위해, 심판자가 뱀이 되어버린 그 이야기가, 여기에서 나오는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가 성전이에요. 이 이야기는 하느님나라! 그 성전에서의 최후의 심판의 작은 모형으로 그려지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두 종류의 뱀이 나오고, 그 뱀! 인생의 모습으로 성육신하여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늘의 아들이 뱀이 되어서 이 땅에 내려 오셨잖아요? 그 뱀의 이야기, 놋 뱀의 이야기, 구약으로 가면요, 그 그림과 아주 흡사한 그림이 나오는데, 먼저 거기로 갔다가 올게요. 그래야 이해가 쉽습니다. 즈가리야서도 역시 묵시록이에요.

 

(즈가리야 3:1-5) 1 또 야훼께서 대사제 여호수아가 야훼의 천사 앞에 서 있고 사탄이 그 오른편에 서서 그를 고발하는 것을 나에게 보여 주셨다. 2 야훼의 천사가 사탄을 나무랐다. '사탄아, 너 야훼께 책망받을 놈아! 예루살렘을 택하신 야훼께 책망받을 놈아! 이 사람은 불에서 꺼낸 나무토막이 아니냐.' 3 그 때 여호수아는 때묻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었다. 4천사가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일렀다. '저 때묻은 더러운 옷 대신에 좋은 옷을 입히고, '보아라! 내가 너의 죄를 벗겨 준다' 하고 선고하였다. 5 머리에는 깨끗한 관을 씌워 주어라.'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머리에 깨끗한 관을 씌워 주자, 야훼의 천사(예수그리스도)가 일어서서 ,

심판자이신 하느님 앞에, 더러운 죄인의 모습으로, 뱀의 모습으로,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서 있어요. 그리고 그 더러운 죄인인, 여호수아를 참소하는 사탄이, 그를 대적하며 여호수아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사탄이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여호수아를 참소하고 있었다는 건, 여호수아에 비해서 사탄의 옷이 훨씬 깨끗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더러운 옷을 참소할 수 있는 거니까. 그런데 하느님께서 사탄을 야단치세요. 뭐라 그러죠? ‘이 사람은 내가 방금 불에서 건진 자가 아니냐? 그래서 그슬린 거름이 남아 있어서 더러운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리고는 그 더러운 걸 벗기라고 하는데, 그 밑에서 그 더러운 옷을, ‘()’라고 한단 말이에요.

이런 거죠. 요한묵시록으로 가면, 성도가 불에서, 환난에서 나오는데, 흰 옷을 입고 있죠. 그 이야기인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환난에서 나왔는데, 그가 하얀 옷을 만들어 입고 역사 속에서 올라 온 게 아니라, 여전히 더러운 옷을, 환난을 통과하여, 결국 나는 이런 더러운 자가 맞네요.’라는 모습으로 올라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환난은, 여러분들에게 죄를 덜 짓게 하는 도구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자기부인의 도구, ‘나는 이런 죽은 흙, 이런 죄인 맞네요.’라는 자리로 내려가도록 주어진 게, 환난인 거예요. 그게 불이라고요. 그게 역사란 말예요. 그래서 역사를 계시록이 환난(患難)이라고 이야기하는 거고, 환난에서 올라오는 자라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올라왔더니, 하느님 앞에 참소(讒訴)하는 자가 서 있어요. ‘쟤 보세요. 저렇게 더러운 옷을 입고 왔는데, 이제 어떻게 하느님나라에 삽니까?’ 그랬어요. 그 때 하느님이, ‘내가 역사 속에서 환난의 불을 통과하게 하여, 저가 저런 모습으로 여기 왔다. 쟤 봐라, 아무 말 못하고 있지 않니? 자기가 죄인인 줄 안단다. 자기 옷 더러운 거 알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지 않니?’ 내가 의도한 거라는 거예요. 하느님이요. 내가 지금 건져냈다는 거예요. 당연히 더러워야 된다는 것이죠.

그러더니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그 옷 벗겨라!’ 그래요. 그리고는 하느님이 의 흰 옷을, 예복을 입혀주시는 걸, 구원(救援)이라 그래요. 거기서 찬송이 터지는 거예요. 할렐루야! 찬송이. ‘나는 알아요. 하느님 앞에 도저히 칭찬받을 수 없는 자라는 걸 내가 안다니깐요.’ 역사라는 환난을 통과하여 자기가 부인되어져서, ‘나는 그렇게 하느님의 은혜가 없으면 도저히 죄인 중에 죄인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안다고요.’ 그렇게 하느님 자리에 올라갔는데, 하느님이 예수의 의()의 옷으로 갈아입혀주는 거, 그래서 평생, 영원히 찬송하게 하는 걸, 구원이라 그래요. 이 모습을 묵시록에서 한 번 찾아볼 게요.

 

(요한묵시록 7:13-14) 13 그 때 그 원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어른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했더니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들었습니다.

보세요. 그들이 흰 옷을 입긴 입었는데, 어린 양의 피에 씻어서, 흰 옷을 입은 거예요. 그들이 노력하여 하얀 옷으로 갈아입은 게 아녜요.

(요한묵시록 19:7-8) 7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자. 어린 양의 혼인 날이 되었다. 그분의 신부는 몸단장을 끝냈고, 8 하느님의 허락으로 빛나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게 되었다. 이 고운 모시옷은 성도들의 올바른 행위이다.'

보세요. 하느님이, 성도에게 요구하는 행실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만들어 오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만든 의 옷으로 입혀 주는 걸,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 그래요. 하느님이 요구하는 건, 바로 그 옳은 행실이라 말입니다. 즈가리야서에서는 그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여호수아 옆에 야훼의 사자, 예수가 서 있었죠? 요한묵시록에서는 어린 양의 피가 등장한다 말입니다. 예수를 증명하는 거예요. 성경, 역사, 인생 모두가 다 예수를 증명해요.

그래서 예수로 비롯되고, 예수로 말미암고, 예수께로 돌아간다, 그러는 거요. 우린 예수를 위하여 창조됐다니까요. 하느님의 사랑을 확증하기 위해 창조된 거라니까요. 여러분의 구원, 여러분의 천국, 만약 그게 여러분 신앙의 목적이라면, 그건 신자가 아녜요. 그게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목적지인 줄 아셨죠? 내 구원! 내 천국! 그게 비열하고, 야비하고, 더러운 진짜 기복주의인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도대체 어떤 게 하느님의 일입니까? 어떤 게 성도가 해야 할 올바른 행실입니까?’ 그랬을 때, 하느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다, 행실이다, ‘에르곤이라고 이야기 한 거예요. 그게 일이다. 그게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행실이다.’ 예수 믿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를 닮아서 천국 가는 게 아니라, 예수 믿어서 천국 가는 거예요. 여러분이 예수 닮는다는 건, 우리가 그냥 예수님을 스승의 자리, 사람의 자리로 끌어내리는 거라니까요. 잘 이해해야 돼요. 예수를 믿어야 돼요. 예수는 하느님이기 때문에. 예수를 본받겠다고 하는 건, ‘예수님은 사람입니다.’라고 주장하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여호와의 증인들 욕할 필요 없어요. 그들과 똑같은 얘기를 한 거예요. 사실은요!

그렇게 우리의 , 더러운 옷에 불과하며, 그 옷을 입고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갈 수가 없는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우리의 의(), 최고의 의는 더러운 똥걸레라고 그러잖아요? 이사야가! 그게 우리가 입고 가는 거리니까요. 하느님 앞에!

그런데 그걸 찢어발기는 거예요. 그게 창세기의 무화과 잎사귀로 만든 치마란 말예요. 고걸 찢어발기는 게 역사라니까요. 그걸 벗기시고, 무상으로 당신의 피로 만든, ‘()’의 흰옷을 입혀주시는 걸 구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짐승의 가죽으로 바꿔주는 거예요. 창세기에서. 그걸 구원이라고 하고, 그러한 예수님 절대 의존자로서의 성도의 고백이 일어나는 고 현장을, 성경이 어린 양의 혼인잔치라고 하는 거예요.

저는 당신만 의지하겠습니다. 저는 당신 안에서, 이브가 아담 안에서 나왔잖아요? 당신 안에서, 당신의 수고로 창조된 것이 맞습니다.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 없이는 존재도 아닙니다.’ 요걸 창세기에서 혼인(婚姻)이라고 하잖아요? 남자가 부모를 떠나, 둘이 연합하여 혼인을 한다고 하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란 말예요. 고걸 혼인잔치라고 한단 말예요. 묵시록에서! 흰 옷을 입혀주는 그것을. 그렇다면 요한복음 8장의 그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가 뭐겠어요? 지금 즈기리야서, 묵시록 다 찾아 봤는데 예수님과 간음한 여자, 교회의 혼인잔치 이야기인 거예요.

 

열두 살 먹은 혼인 적령기의 소녀, 회당장 야이로의 딸 소생사건과, 열두 해 혈루증 앓던 여인의 이야기가 공히 신랑과 신부의 이야기였음을 말씀드렸죠? 단식이라는 율법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공격하던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신랑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신랑인 내가 왔는데, 너희들은 신랑인 나를 못 알아보니까, 여전히 그렇게 단식, 율법지킴, 이런 걸로 그렇게 힘들게, 신랑을 기다리고 있구나. 아냐 신랑은 그렇게 너희들이 열심을 부려서 차지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신랑이 와서 너희들을 살리고 택하는 거란다. 이걸 가르쳐주는 거예요. 거기에 이 두 여인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두 이야기는, 공히 예수의 신부 이야기란 말예요. 예수님이 의()의 흰 옷으로, 그 여자들에게 입히는 거. 두 여자 공히.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그 여인은, 12년 동안 남자를 한 번도 못 만져 봤고, 이 열두 살 먹은 여자 애는 열두 살 되기까지 남자와 가까이 있으면 안 돼요. 12살이 되어야 결혼적령기란 말예요. 그런데 이 둘 다, 12년 만에 처음 붙든 남자의 손이, 예수의 손이었다니까요. 이게 예수와 이 죄인들의 혼인잔치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여인들이 어떤 여인들이었냐 하면? 열두 해 동안, 뱀처럼 땅에 피만 쏟던 여자였단 말입니다. 부정한 여자! 심지어 죽어 있던 여자! 그 여자를 예수님이 가서, 신랑이 가서 살려내어, 옷을 입히는 거예요. 고걸 구원이라 한다 말입니다.

역시 부정하고 더러운 여자, 죽은 여자가 등장하고, 그 여자들을 율법으로 참소하는 바리새인들이 등장하잖아요? 그리고 이 여자들의 편을 들어주는 예수, 심판관인 예수가 등장하는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것도! 마찬가지예요. 더럽고 추악한 옷을 입은 간음한 죄인이, 여자가, 신랑이신 예수님 앞에 서요. 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일부러 남자는 빼 버린 거예요. 남자는 어디 갔냐고요? 둘 다 돌에 맞아 죽어야 되는데, 남자는 빼고 여자만 왔단 말이에요.

 

하느님이 뭔가 교회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지금! 참소자들은 기세등등하게, 그 더러운 여자에게 돌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어요. 뱀이 한 마리가 온 거예요. 저 뱀! 우리 인간의 보편적 자존심과 가치를 깎아 먹는 저 뱀. 저걸 죽여야 되는 거요. 그래야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자존심이 올라가니까. 참소자! 요게 진짜 뱀이죠? 참소하는 자! 항상 뱀은, 마귀는 참소하는 자니까. 등장한단 말이죠?

주님께서 땅에 뭔가를 쓰시죠. 하느님께서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역사를 도화지 삼아, 땅에, 흙에, 뭔가를 쓰신 사건이 성경에 딱 세 번 나오죠? 첫 번째 사건이, 십계명 돌 판에 하느님이 직접 쓰신 사건이고! 두 번째가 다니엘서 5장의 벨사살 왕 폐위사건! ‘메네메네데겔 우바르신하느님이 쓰신 것. 세 번째가 여기란 말예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하느님이 땅에 뭐가를 땅에 쓰실 때는, 항상 인간들의 죄가 폭로되고 심판이 일어납니다.  하느님께서 십계명 돌판에 계명을 쓰시자, 시내 산 아래에서 이스라엘의 실체가 폭로되죠? 하느님께서 십계명에다 율법, 말씀을 쓰시는 거요. 말씀이 떨어지면, 인간이 죄인임이 폭로가 돼요. 그래서 골수와 혼과 영혼까지 쪼갠다고 하는 거요. 죄인임이 폭로된다는 뜻이에요. ‘아니 골수 안에까지 죄가 들어있어?’ 이 이야기라 말입니다.

 

하느님이 율법! 말씀을 쓰시자, 그 아래 인간들이 하느님을 섬긴다고 했던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했던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게 하느님이다!’ 하고 잔치를 벌이고 있는 거요. 이게 우상 섬기는 거죠. 여기에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뭐죠?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그러니까 내가 신이 되어서, 자기를 위해 살고 있던 뱀들이, 하느님을 섬긴다고 사기를 치고 있었던 거죠. 땅에다가 율법, 말씀을 쓰시자, 그들의 실체가 폭로가 되고, 심판이 일어나서 삼천 명이 죽어버리는 거요. 역사의 실체, 인생의 실체가 확 폭로되는 거란 말입니다.

다니엘서 5장의 하느님 친필사건은 뭡니까? 벨사살 왕이, 하느님의 성전을 모독하고 그 집기들을 가져다가, 자기의 쾌락과 행복을 위해, 그 집기들을, 성전을, 사용하는 거요. 술 담아 먹고 그러죠? 세상 왕이 하느님을, 하느님의 성전을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는 그림이라고요. 요걸 우상 섬김이라 그래요.

그렇게 죄가 폭로되자, 하느님이 내려와서 쓰신 거죠. ‘메네메네데겔 우바르신’ ‘하느님의 저울에 달아보니, 너는 죽어야 할 자가 맞구나!’ 하고 그날 죽습니다. 심판이 일어나는 거죠. 인간의 실체가, 역사의 실체가 폭로되는 거죠. 이 땅에서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실체가 폭로되고, 심판이 일어나는 거요. ? 하느님이 땅에, 흙에 뭔가를 쓰시면, 말씀을 쓰시면, 말씀이 땅에 떨어지면, 왜 이 역사가 죄로 폭로되고, 심판이 일어날까? 이게 성경에 이미 예고되어 있는 거요.

 

(예레미야 17:13) 13 이스라엘의 희망은 야훼께 있습니다. 주님을 저버리고 어느 누가 부끄러운 꼴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맑은 물이 솟는 샘 야훼를 저버리고 어느 누가 땅에 쓴 글씨처럼 지워지지 않겠습니까?

생수의 근원이신 야훼를 전적으로 의뢰하지 않고 야훼를 떠난 자들, 거부하는 자들! 그들은 흙에 기록이 된다, 그러죠? 요건 순식간에 사라지는 신기루라는 거요. 흙에 뭘 쓰면, 바람이 한 번 불면 확 사라지잖아요? 이 땅에 기록하는 게 다 그런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땅에 뭔가 기록한다는 건, 너희들은 이걸 잘 지켜서, 내 맘에 쏙 드는 자가 될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땅에다 헛된 건물 쌓는 거다, 헛된 건축하고 있는 거다를 보여주는 의미인 거예요. 인간들이 땅에다 자기 이름 새기기의 삶을 역사로 살아내는데, 그거 자체가 다 헛것이란 뜻이에요.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께 가까이 가는 자는, 땅에다 뭐 쓰지 않는다는 거요. 그걸 밝혀내는 게, 하느님의 말씀의 역할이라니까요.

 

생수의 근원이신 야훼를 버린 자들은, 그들의 이름을, 흙에 기록하려고, 땅에 기록하려고 하는 삶을 살게 되는데, 그게 바로 죄()이며, 그게 바로 저주받을, 심판받을 자들의 삶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께서 흙에 뭔가를 기록하면 죄인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거예요. 인간들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서, 이 역사에 자기들의 이름을 구축하려고 해도, 그건 일순간에 무너질 허망(虛妄)한 것이며,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렇게 역사를 구축(構築)하려고 하는 역사의 건축자들이 바로, 죄인이라는 걸 똑바로 알라는 거예요. 그래서 건축자들은, 생수이신 예수를, 울타리 밖으로 자꾸 던지는 비유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간음한 여인의 사건에서도, 예수님께서 흙에 뭘 쓰시자마자, 인간들이 전부 죄인으로 폭로되죠? 간음한 여인뿐만 아니라, 그를 참소하던 자들 까지도! 죄 없는 자가 쳐라!’했더니, 다 죄인으로 폭로되는 거예요. 하느님이 뭘 쓰시면 그렇게 죄가 폭로(暴露)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요한복음 8장 바로 앞에 뭐가 있어요? 7장에 무슨 이야기가 있냐고요? 초막절 이야기가 그려져 있잖아요? 거기에서 초막절 율례를 행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나오죠. 초막절 율례는, 성전에다 큰 초를 세워놓고, 물을 계속 갖다 붓는, 그 율법! 율례를 행해야 돼요. 그 때 예수님이 그걸 막아서고 내가 생수니까, 나에게 와서 마셔라!’라고 이야기한다고요. 그래놓고 요 이야기가 붙어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생수인 나에게 오라 했는데, 아무도 안 왔단 말이에요. 그 때 생수를 떠난 자들이 어떻게 되는 가를 보여주기 위해, 간음한 여인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붙어 있는 거예요. 거기에!

보세요. 요걸 한 번 형상화시켜 보자고요. 내가 생수라고 외치셨던 예수님이, 흙에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쓰시는 모습! 요건 생수가 지금 흙과 섞이는 모습이죠? 마치 소경이 눈을 뜰 때, 예수님의 침, 생수가 흙에 이겨져 그의 환부에 발라짐으로, 그가 낫는 그런 그림인 거예요. 요건 민수기의 말씀을 형상화하여 그려내고 있는 거거든요. 민수기에 보면 간음한 여자를 다루는 이야기가 나오죠? 그런데 어떻게 다뤄요? 티끌, 흙을 물에다 섞어서, 거기에 두루마리의 말씀을 풀어요. 그러니까 거기에 생수이신, 말씀이신 예수에, 흙이 섞여져서 여자에게 먹여지면, 이 여자가 간음한 여자일 땐 붓게 돼요. 그러니까 그건, 흙이 물에 섞이면, 반드시 죄인 됨이 폭로가 된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신약으로 넘어오면, 그렇게 폭로가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예수에 의해, 죽어야 할 그 여자, 간음한 여자가 살아 올라오는 거예요. 어떻게? 물이, 생수가 흙에게 주어져, 이가 산자가 되고, 생수가 흙에, 생기가, 콧김! ‘메샤흐’, 여호와가 르와흐로 생기가 되어 그에게 부어지고, 이가 살아나고, 이 흙이, 저주의 흙이 예수께로 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살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서, 흙을 이겨 환부에 바르자, 그게 예수님 것이 되고, 마태복음 8장에 나오잖아요? ‘예수님이 모든 질병을 짊어 지셨다, 가져가셨다.’ 그런단 말예요. 이사야서 53장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서, 그 일이 일어난 거, 요걸 구원이라 한다 말입니다.

다시 요한복음으로 돌아오면,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도망가죠?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 ‘아이고, 용서해 주세요.’라고, 그 심판자에게 용서를 구해야 되는데, ‘조놈 앞에서만 사라지면, 여전히 나는 뱀 아닌 것처럼 위장하여 살 수 있어!’하고 도망가는 거요. 인간들은 양심을 가지고도 자기의 자존심을 챙기는데 쓰더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 양심에 가책을 받아 목매달아 죽은 인간 하나 있잖아요? 유다! 하느님이 그 유다보고 뭐라고 불렀어요? ‘마귀!’라 그랬어요. 마귀는 뭐? 옛 뱀, 뱀이란 말예요. 뱀들은 자기 양심을 가지고도, 자기의 자존심, 자기의 영광, 가치를 챙기는데 사용하더라를 보여주는 게, 고 뱀! 유다라는 뱀! 여기에 있는 요 간음한 여자, 안으로 들어간 (?), 율법으로 참소하던 바리새인! 율법학자들이 뱀이라는 뜻이에요.

 

간음한 여자를 참소하려고 데리고 왔는데, 예수님은 이거 다 죄인이네.’ 그랬다니까요. ‘자정운동을 하는 자들이나, 이거 뭐야? 다 죄인이네이 이야기란 말이에요. 거기에서 누가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느냐가 관건이라니까요. 이게 구원! 어린 양의 혼인잔치란 말입니다.

그렇게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양심으로도 나의 가치를 챙기겠다는 그들과 반대로, 어디로 갈 데가 없는 여자가 거기에 나와요. 이 여자는 자 지금 당장 지옥 보내도 아무 할 말이 없어요.’라는 그 여자예요. 자타가 공인한 죄인, 확증된 죄인! 이 여자는 나갈 수가 없어요. 나가자마자 죽어요. 예수님 앞에서 한 발이라도 떠나면, 아무나 때려서 죽여도 돼요. 율법이었으니까. 그게! 그러니까 그 여자는 예수님 앞을 떠날 수가 없어요. 난 여전히 죄인인데, 저들이 죽이면 어떻게요?’ 무서웠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땅에다가, 흙에다가 다시 뭘 쓰시죠?

(요한복음 8:8-9) 8 다시 몸을 굽혀 계속해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 버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는 그 한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예수님께서 다시 땅에 뭔 가를 쓰시자, 그 예수에 의해 구원을 받는, 진짜 죄인이 누군지가 선명하게 드러나죠. 이건 시내 산에서 내려온 첫 번째 돌 판에 의해서, 이 역사의 죄가 폭로되고, 두 번째 돌 판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살아나는, 바로 그 형국인 거예요. 그래서 다시예요. 다시 쓰는 거예요. 하느님이! 이스라엘이 첫 번째 돌 판에 의해서 죽어야 할 죄인임이 폭로가 되고, 하느님의 진노가 쏟아지죠. 이게 구약이에요. ‘다 죽는다. 너희들!’ 구약. 하느님이 첫 번째 쓰신 말씀, 율법이란 말예요.

그런데 그 첫 번째와 두 번째 돌 판 사이에 누가 끼어들어요? 모세가 끼어들죠, 중보자로 모세가 끼어들죠? ‘하느님 나를 죽이세요. 나를 하느님의 생명책에서 지우세요.’ 재미있죠? 하느님이 땅에다가, 금방 지워질 인간의 죄를 폭로할 뭘 기록하는데, 묵시 속에서 완료된 또 다른 책이 등장한다고요. 이거는 인간들이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고, 그 어떤 노력과 수고로도 열 수 없는 책이에요. 예수님이 봉함해서 갖고 있는 책이에요. 묵시록에 보면! 그 책을 모세가 이야기한다니까요. 자기가 어떻게 알고, 자기 이름이 적혀 있는 걸 아느냐고요? 이미 창세전에 자기 이름이 적혀 있는 걸 알아요. ‘내 이름을 지워주세요.’ 그런다니까요. 차라리!

 

(출애굽기 32:31-33) 31 모세가 야훼께 되돌아 가서 아뢰었다. '비옵니다. 이 백성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32 하지만 이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만일 용서해 주지 않으시려거든 당신께서 손수 쓰신 기록에서 제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 33 야훼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는 누구든지 그의 이름을 나의 기록()에서 지워 버린다.

예레미야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생명수이신 하느님을 떠난 자들을 흙에 기록한다고 했는데, 하늘의 묵시 속에 기록된 하늘의 백성들이 있다는 거요. 그래서 다니엘서나, 요한묵시록이나, 이런 곳에 이 책이 계속 등장하는 거요. 생명책이! 이 책은 이미 묵시 속에서 완료되어 있는 책이라, 인간들이 그 어떤 노력으로도 가감할 수 없어요. 더 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어요. 그러니. 이 땅에 기록된 인간들의 역사와, 인간들의 이름은, 마지막 순간 다 불태워 버릴 것이지만, 하느님의 오른 손에 들려 있는 그 책에 기록된 이름은, 이미 창세전에 완료가 되어 봉함이 되어 있게 되는 거요. 그 책은 은혜의 책이고, 자비의 책이고, 창조의 책이에요. 그래서 인간과 역사의 그 어떤 노력과 수고도 그 책의 내용에 영향을 미칠 수가 없어요. 그리고는 두 번째 돌 판이 내려오는 거예요. 그런데 두 번째 돌 판도, 하느님이 쓰신 거고, 똑같이 율법이 기록이 되어 있어요. 역시 이걸로도 인간들은 죽어야 할 자가 맞다는 것이 폭로가 되어야 돼. 그런데 그 중간에 중보자! 그 중보자의 은혜로 이미 완료된 어떤 자들이 등장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 생명책이!

 

그러니까 이 두 번째 돌 판을 이스라엘이 법궤 안에 넣어놓고, 그 돌 판을 볼 때마다 뭘 생각해야 돼요? ! 여전히 우린 요 율법 때문에, 하느님이 흙에 쓴 거 때문에 죄인으로 폭로되어 죽어야 되는 거 맞는데, 내가 왜 살아 있지? ! 모세가 목숨을 담보로 하여 날 살려달라 그랬지!’라고 중보자를 기억하는 용도요. 요게 신약이라고요.

사람들은 구약은 율법이니까 우리가 안 지켜도 되는 거, 신약은 이제 성령 받고 은혜 받았으니까 다 지켜야 되는 거, 그래서 그걸 지킨 만큼 상 받는 거. 요렇게 이해하고 있다니까요. 아니 신약도 역시 예수를 믿는 거예요. 믿는데 사용되는 거예요. 신약 역시! 하느님이 다시 쓰시면, 그 때에 예수 없으면 죽어요.’라는 요 사람! 요 사람들이 살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썼는데, 그 여자 하나 살아나는 거예요. 나머지는? ‘우리 나가서 열심히 연극하면서 착헤게 살자!’ 그러고 다 나갔다니까요. 바리새인들이! 그러니까 오늘날 성화주의가 성경을 어떻게 표피적으로 보고 있는지 잘 보란 말이에요. 한 발 더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거기에서! 그래야 진짜 십자가가 있는 거라니까요, 거기서. 바리새인처럼 보고 있는 거예요 성경을 지금.

 

그러니까 우리는 구약이든, 신약이든,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 없으면, ‘우리는 그냥 뱀 새끼로 저주 받아 죽는 게 맞습니다.’ 이거 배우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 믿어 천국 가는 거라니까요. 그래서 결국 모세가 광야에서 죽잖아요? 이스라엘은 그 모세의 시체를 밟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가 신약시대에 예수의 십자가 딛고, 내가 길이라고 했으니까, 예수의 죽음을 밟고, 천국에 들어가는 거와 마찬가지라니까요. 그러니까 이 역사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증명하고 확증하는 곳이지, 인간들의 열심과 변화와 성숙을 증명하고 자랑하는 장이 아닌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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