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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6.07)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06-07 조회수9,385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7년 6월 7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제1독서 토빗 3,1-11ㄱ.16-17ㄱ

그 무렵 나 토빗은

 1 마음이 몹시 괴로워

탄식하며 울었다.

그리고 탄식 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2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당신께서 하신 일은 모두 의롭고,

당신의 길은 다 자비와 진리입니다.

당신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3 이제 주님, 저를 기억하시고,

저를 살펴보아 주소서.

저의 죄로, 저와 제 조상들이

 알지 못하고 저지른 잘못으로

저를 벌하지 마소서.

그들은 당신께 죄를 짓고,

4 당신의 계명들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저희를 약탈과

유배와 죽음에 넘기시고,

당신께서 저희를 흩으신

모든 민족들에게,

이야깃거리와 조롱거리와

우셋거리로 넘기셨습니다.
5 저의 죄에 따라

저를 다루실 적에 내리신,

당신의 그 많은 판결들은

다 참되십니다.

저희는 당신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고, 당신 앞에서

참되게 걷지 않았습니다.
6 이제 당신께서 좋으실

대로 저를 다루시고,

명령을 내리시어 제 목숨을

앗아 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가 이 땅에서

벗어나 흙이 되게 하소서.

저에게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

제가 당치 않은 모욕의 말을

 들어야 하고, 슬픔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주님, 명령을 내리시어

제가 이 곤궁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제가 이곳에서 벗어나

 영원한 곳으로 들게 하소서.

주님, 저에게서

당신의 얼굴을

돌리지 마소서.

살아서 많은 곤궁을 겪고

모욕의 말을 듣는 것보다,

죽는 것이 저에게는

더 낫습니다.”
7 바로 그날, 메디아의

엑바타나에 사는 라구엘의 딸

사라도 자기 아버지의 여종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서 모욕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8 사라는 일곱 남자에게

시집을 갔지만, 신부와 관련된

관습에 따라 신랑이 사라와

한 몸이 되기도 전에,

아스모대오스라는 악귀가

그 남편들을 죽여 버렸다.
그래서 그 여종이 사라에게

이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당신 남편들을 죽이는 자는

바로 당신이에요.

당신은 이미 일곱 남자에게

시집을 갔지만 그들 가운데에서

누구의 이름도 받지 못했어요.

9 그런데 당신 남편들이

죽었으면 죽었지

우리는 왜 때려요?

남편들이나 따라가시지.

그래야 우리가 당신의 아들이나

딸을 영영 보지 않게 되죠.”
10 그날 사라는 마음에

슬픔이 가득하여 울면서,

자기 아버지 집의 위층 방으로

올라가 목을 매려고 하였다.

그러나 생각을 다시 하고서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였다.

“사람들이 ‘당신에게는

사랑하는 외동딸밖에 없었는데

그 애가 불행을 못 이겨

목을 매고 말았구려.’ 하면서,

내 아버지를 모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만일

그렇게 되면 늙으신 아버지께서

나 때문에 슬퍼하시며 저승으로

내려가시게 되겠지.

목을 매는 것보다는,

평생 모욕하는 말을

듣지 않도록

죽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낫겠다.”

11 그러면서 사라는 창 쪽으로

양팔을 벌리고 기도하였다.
16 바로 그때에

그 두 사람의 기도가

 영광스러운 하느님

앞에 다다랐다.

17 그래서 라파엘이 두 사람을

고쳐 주도록 파견되었다.

복음 마르 12,18-27

그때에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해초가 많아서 고기를 잡는데

크게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아들은 “오늘 왜 이렇게

해초가 많은 거야?

도대체 고기를 잡을 수가 없네.”

라면서 투덜거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그렇게 투덜거릴

일은 아니지 않니?

조금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만약 바다에 해초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이 해초를 먹고 자라는

새우가 없어지겠지.

그리고 새우가 없으면,

 새우를 먹는 물고기도

 없어지지 않을까?”
분명히 고기를 잡는데

 큰 방해가 되는 해초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이 장애물이라고 할 수 있는

해초가 오히려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기를 기쁘게 잡지 못하는 것은

해초 때문이 아니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부정적인 생

각들을 많이 안고 살아갑니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내 뜻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가질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가장 큰 잘못은

‘나’ 자신이었을

경우가 더 많습니다.

스스로 갖게 되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더 큰 부정으로 이끕니다.

바로 부정적인 생각들이

올바른 판단을 갖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죽으면 그냥 끝나는 것이지,

다시 부활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자신들의 생각이

맞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일곱 형제 이야기를 합니다.

맏이부터 후사를 남기지 못해서

막내까지 차례로 형수를

맞이했는데도 자녀를

낫지 못했다면, 부활했을 때

 일곱 형제와 한 번씩 결혼한

이 여인은 누구의

아내냐는 것이지요.

 누구의 아내라고 딱 집어서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부활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인 것입니다.
과연 맞는 말일까요?

부활은 인간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 불가능한 일이

과연 있을까요?

특히 부활에 대한 언급은

성경 안에 이미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인정하지 않음은

결국 하느님의 능력도

믿지 않는 것이지요.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의 일을 인간적인

측면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교만과

착각이 그들을 더욱 더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말도 안 되는

자기주장을

펼치게 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들을 버리고

긍정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특히 하느님께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을 품을수록 점점 더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기적이란 없다고

믿고 사는 것과 어디에나

기적이 존재한다고

믿고 사는 것.

나는 후자의 삶을

선택하기로 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예수님과 사두가이들의 부활 논쟁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

(최천호)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은

수첩의 맨 앞에 적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은

가슴에 새기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그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더 많은 사람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눈을 크게 뜨고

보고 싶은 사람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눈을 감아야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내 생일이 기다려지지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의 생일이 기다려집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친구들과

어울려도 즐거울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나하고만 있어야 기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살피고

들여다보는 것으로 해서

자신의 옳고 그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정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느낌표지만,

사랑은 곁에 있을수록

확인하고픈 물음표입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의 차이를

생각해보는 글입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

어떤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제1독서의 토빗.

사진은 렘브란트의 토빗과 염소를 든 안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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