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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례성사]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세례의 예표: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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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호식 [ jpatrick ] 작성일2018-05-07

[빛과 소금]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세례의 예표 : 물 1(생명)

 

 

천지창조 때부터 물은 “생명과 풍요의 원천”(가톨릭교회교리서 1218항)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원의에 따라 물을 지배하시고 질서 있게 분배하시면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이 물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생명체의 주인이심을 드러내신다. 이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피조물에 ‘생명’의 힘을 불어넣어 주시며 축복하신다(창세 1,1-2,4; 시편 104,3-18. 25-30; 에제 31,4).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물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권능으로 홍해 바다라는 물을 건넘으로써 해방된다. 구원의 은총을 받은 이 백성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향한 여정을 메마른 광야에서부터 시작한다. 메마른 광야 생활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실 물이다. 그러나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 중의 광야에는 물도 없었으며 그나마 물이 있어도 마실 수가 없었다. 광야에서의 물 부족은 죽음과 직결된 문제가 되었다; “우리와 우리 자식들과 가축들을 목말라 죽게 하려고 그랬소?”(탈출 17,3).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가온 목마름에 의한 죽음의 두려움은 원래 자신들이 살아온 이집트 노예 생활로 회귀하려는 마음을 품기에 충분하였고, 급기야 모세에게 물을 내놓으라고 불평을 터트리기 시작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의 목마름에 대한 불만 토로는 마실 물이 부족하다는 단순한 갈증에서부터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결국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탈출 17,7)라는 하느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 더 나아가서는 자신들을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키신 하느님의 구원 행위까지도 의심까지 하여 그분을 시험하고자 하는 중대한 죄를 짓게 되는 원초를 제공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광야라는 목마른 땅에서 고통 받는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 쓴물을 단물로 바꿔주시고 바위에서 물을 샘솟게 하시어 갈증을 해소해 주셨다(탈출 15,22-27; 16,1-36; 17,1-7). 이 물은 단순한 목마름의 해소를 위한 물이 아니라 죽음의 문턱 앞에 놓여 있는 당신의 백성을 살리시는 ‘생명’의 물이다. 더 나아가서 이 물은 본래의 이집트 노예 생활로 다시 돌아가려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한 하느님의 축복이며 구원의 상징이다; “내가 목마른 땅에 물을, 메마른 곳에 시냇물을 부어 주리라. 너의 후손들에게 나의 영을, 너의 새싹들에게 나의 복을 부어 주리라‘(이사 44,3).

 

40년의 기나긴 광야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에 들어서기 바로 직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극복해야할 또 다른 커다란 장벽인 요르단강을 만난다. 하느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하여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이 요르단강에 들어가 서 있으라는 명령을 내리신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하자 위에서 내려오던 물은 멈추어 섰고, 강 언덕까지 차 있던 물은 마른 땅이 되어 백성들 모두가 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받을 딛게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바다를 건너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사건은 세례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해방‘과 ’새 백성‘을 상징하며, 요르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사건은 세례를 통하여 참여할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예고함으로써 세례의 예표라고 할 수 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21-2항). 우리 신앙인은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백성이 되어 약속된 하느님 나라에서 받을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광야라는 삶의 여정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세례로 인하여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광야에서 주어지는 배고픔과 목마름을 이기지 못하고 불평하며 이집트의 노예 생활로 다시 회귀하려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광야는 그리 척박하지 않다. 왜냐하면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물‘을 주시며, 그 물을 취함으로써 약속된 땅인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2018년 5월 6일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인천주보 4면, 송태일 안셀모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장)]

 

 

[빛과 소금]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세례의 예표 : 물 2(죽음)

 

 

물은 하느님의 축복과 구원이라는 의미 안에서 ‘생명과 풍요의 원천’이라는 기능뿐만 아니라, 창조된 피조물의 타락으로 인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는 하느님의 심판 도구이기도 하다. 특히 인류의 타락은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하느님으로 하여금 후회하시게 만들었다. 그 결과 하느님께서는 홍수를 일으켜 세상의 모든 숨 쉬는 살덩어리들을 멸망시키기로 결심하신다. 그분께서는 물로써 모든 생명체를 쓸어버리시고 ‘죽음’으로 몰아넣으셨지만, 노아가 만든 방주에 머문 생명체는 하느님의 심판에서 벗어나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창세 6,5-8,19). 이 사건에서 나타나는 물은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 도구로써 작용을 하지만, 그 내막의 의미는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아가는 노아를 구원해주심으로써 피조물인 인류에게 어떻게 살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에 대한 답이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노아와 “다시는 홍수로 모든 살덩어리들을 멸망”시키지 않을 것임을 계약으로 맺으신다. 그 이유는 홍수로 인한 심판으로 죄로 물든 창조물들이 없어지고, 이후부터는 새로운 생명체가 살아가는 ‘재창조’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창세 9,1)

 

탈출기 14장은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 뒤를 쫓는 파라오 군사들의 모습을 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에 완강히 저항하던 파라오는 자신의 맏아들을 포함하여 이집트인들의 맏아들과 맏배가 죽는 재앙이 닥치자 이스라엘 백성의 요구 사항을 들어준다. 그러나 이집트 땅에서 탈출한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외적으로는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홍해와 자신들을 뒤쫓고 있는 파라오의 군대라는 두 가지 장벽에 직면한다. 내적으로는,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두 장애물로 인한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다시 이집트로 되돌아가 그들을 섬기고자 하는 그릇된 마음을 갖게 된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물을 지배하시는 권능을 펼치시어 홍해를 가르시어 당신 백성을 무사히 건너가게 하신 반면에 이집트인들을 바다 한가운데로 쳐넣으시어 죽게 하심으로써 장벽들을 모두 해소해주셨다. 이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다시 ‘주님을 경외하고 믿음’(탈출 14,31)을 지니게 됨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던 내부적 문제까지도 해결해주셨다. 이 사건에서 바닷물은 완강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한 파라오와 그의 군사들을 ‘죽음’으로 심판한 하느님의 도구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바닷물은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된, 해방을 이루어주는 구원의 도구이다.

 

인류의 타락으로 인하여 홍수가 일어나자 노아의 방주에 들어간 생명체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음을 맞이하는 하느님의 심판이 내려진다. 하지만 이 홍수에 대해서는 “죄를 씻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세례”를 구약성경에서 미리 보여주었으며, 노아의 방주를 통하여 ‘물로 구원’(1베드 3,20)을 받았기에 이 방주는 “세례를 통한 구원의 예표”라고 할 수 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19항). 노아와 그의 아들들을 통한 하느님의 ‘재창조’는 세례를 통해서 이루어질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백성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또한 파라오 밑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넘으로써 해방된 이 사건은 “세례로 이루어지는 해방을 예고”하고 있다. 홍해라는 ‘물’을 건넘으로써 해방된 이 백성은 약속된 땅으로 들어갈 준비를 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참여할 “세례 받은 새 백성의 예표”라고 할 수 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21항).

 

홍해를 건너기 전에 여러 장벽에 직면하여 옛 노예 상태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현재의 삶 안에서 죄를 지은 상태로 회귀하려는 우리들의 또 다른 내/외적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의 방주가 주는 메시지는 우리들의 삶 안에서 저지르는 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재창조’(회개)의 기회를 받아들여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새로운 백성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2018년 5월 13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인천주보 4면, 송태일 안셀모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장)]

 

 

[빛과 소금]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세례의 예표 : 물 3(정화와 재생)

 

 

노아 시대에 일어난 홍수는 타락한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임에도 불구하고 그 본래의 의미는 ‘노아의 방주’를 통한 ‘재창조’라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이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홍해바다를 건너는 사건 안에서의 ‘물’ 역시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는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들에서 드러나는 ‘물’의 역할은 죄의 노예생활로 죽음의 상황에 처한 인간을 ‘정화’하여 새롭게 태어나도록(재생)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다른 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에서 물은 정화의식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우선 대사제를 비롯하여 사제직을 수행하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만나기 전에 물로 손과 발을 씻어야 한다(탈출 30,19-20; 40,12. 30-32). 특히 대사제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백성이 저지른 부정과 죄를 벗기 위한 속죄일에 속죄 제물과 번제물을 바치러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몸을 물로 씻어야 한다(레위 16장). 일반 백성의 경우 동물의 주검이 몸에 닿았을 때 자신의 옷과 몸을 물로 씻어야 정결해진다(레위 11,39-40; 17,15-16). 또한 악성 피부병 환자가 정화되려는 경우(레위 14,1-9)와 성관계를 하여 부정한 경우에는 물로 몸을 씻어야 할 뿐만 아니라 사제를 통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해야 한다(레위 15장). 이처럼 정결과 부정에 대한 다양한 규정을 정함으로써 부정한 사람이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 물로 씻는 정화예식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정화의 물’(민수 19장)로 몸을 씻는 예식은 누구든지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의식이다. 이 예식을 행하는 목적은 거룩하신 하느님과 같이 ‘거룩한 사람’(레위 19,2), ‘하느님의 사람’(에제 16,4-9)이 되도록 하여 ‘공동체로의 일원’으로 다시 회복(재생)시키는 것이다.

 

2열왕 2,19-22에서 예언자 엘리사는 나쁜 물에 소금을 뿌려 땅의 생산력을 되살리는 하느님의 기적을 행한다. 또한 5장에서는 엘리사가 아람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의 나병을 치유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예언자는 나병 치유를 위해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나아만에게 전한다. 우여곡절 끝에 아람 군대 장수는 강에 일곱 번 몸을 담금으로서 어린아이 살과 같은 새살이 돋아 깨끗해진다. 이 사건에서 중요한 점은 물이 신체의 병을 깨끗하게 정화시키고 새살이 돋게 하는 재생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마음까지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2열왕 5,15)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병이나 피부병의 원인을 하느님과 공동체에 저지른 부정한 죄에서 찾았다. 각종 피부병에 걸린 사람들을 공동체로부터 격리시킨 이유는 전염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공동체에 저지른 죄의 보속에 더 커다란 의미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피부병의 치유는 죄의 정화(용서)와 더불어 공동체 일원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재생의 의미가 있다. 피부병뿐만 아니라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없는 부정한 죄를 지은 백성들은 정결한 ‘물’을 통하여 부정함을 없애고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날 수 있다(에제 36,16-38). 성전에서 솟아 흐르는 이 물은 강이 되고 바다가 되어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되살아나게 될 것이다(에제 47,1-12).

 

이처럼 구약성경 안에서 ‘물’은 하느님께서 죄로 인하여 죽음의 위험에 처한 당신 백성을 되살리시는 구원의 상징이다. 또한 물은 부정함을 정결함으로 바꾸어 하느님 백성이라는 공동체 일원으로 재탄생시키는 도구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하느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2018년 5월 20일 성령 강림 대축일 인천주보 4면, 송태일 안셀모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