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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체성사] 밥이 되신 예수님 - 성체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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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호식 [ jpatrick ] 작성일2010-10-05

[알기 쉬운 교리상식] 밥이 되신 예수님 - 성체성사

 

 

가족 중에 신부가 있으면 편리한 점도 더러 있다. 집안에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 가족이 모여서 미사를 함께 봉헌할 수 있는 것도 프리미엄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오래 전 부제 때 형 신부와 함께 가족미사를 봉헌할 때의 일이다. 성찬의 전례를 시작하려는데 조카 두 녀석이 제대 앞으로 바짝 다가앉더니만 성작과 성반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었다. 성작을 들었다가 놓으니 그 안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잠시 후 호기심 어린 눈빛이 실망의 눈빛으로 바뀌고 뒤로 물러나 앉는다. 미사 후에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그중 큰아이의 답은 이랬다. “거짓말이야…. 그대로네 뭐.” 빵과 포도주가 왜 살과 피로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느냐는 거다. 당시 다섯 살짜리가 이해한 성체성사이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가지신 최후만찬을 기념하는 예식이다. 교회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켜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이 예식을 거행해 왔고 교회가 존속하는 한 이 예식은 계속될 것이다.

 

최후만찬은 유다인들의 식사순서대로 진행되었다. 예수께서는 만찬을 시작하시면서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그리고 식사가 끝날 무렵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내 피로 맺은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3-25 참조)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식사와 나눔이 분리되기는 하였지만 성체성사의 기본은 먹고 마시는 일, 즉 식사의 형태이다. 빵을 떼어 나누어 먹고  포도주 잔을 나누어 마시는 행위를 통하여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우리가 일치하는 것이 성체성사이다.

 

그런데 교회의 역사를 보면 먹고 마시는 행위보다 거룩하신 몸(聖體)이 강조되면서 영성체를 기피하던 시기도 있었다. ‘죄 많은 내가 어떻게 감히 지존하신 주님의 몸을  모실 수가 있는가?’하면서 영성체보다는 성체조배나 성체거동 같은 신심행위가 권유되었었다. 오죽했으면 ‘신자는 적어도 일 년에 한번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해야 한다.’는 교회법이 생겨났을까?

 

영성체를 회피하는 것은 제정자이신 예수님의 의도와 정반대의 태도이다. 대죄 중에 있는 자는 마땅히 고해성사 후에 영성체를 해야겠지만, 소죄 중에 있는 자에게는 치유의 성사이기도 하다. 우리는 영성체하기 전에 이런 기도를 한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주님과 멀어지는 것이 죄라면 주님과 일치하는 성체성사야말로 치유의 성사가 아니겠는가?

 

성체성사는 교회의 친교성(koinonia)을 잘 드러내 준다. 교회의 일치는 세례성사를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성체성사를 통해서 분명해진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6-17) 성체성사를 통하여 내가 개인적으로 주님과 일치하기도 하지만, 같은 예수님의 몸을 나누는 형제들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를 통하여 교회는 성장하고, 일치되고 성화된다.

 

성체성사는 우리의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자기희생의 삶, 자기 봉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이 된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 바오로 사도가 수도 없이 강조하기도 하였지만,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바를 새겨들어야겠다. 마태오나 마르코, 루카복음서가 전하는 최후만찬 기사는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 하지만 요한복음서에서는 같은 대목에서 성체성사 설정 부분이 빠져 있다. 그 대신에 만찬 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성체성사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주님의 전적인 자기희생의 성찬례가 형식에 그치지 않도록, 오히려 성체성사의 영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봉사의 모범을 보여 주셨고 성찬례에 참여하는 우리들도 그렇게 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주시고 나서 제자들에게도 서로 발을 씻어 주라고 하셨다. 성체성사의 삶을 산다는 것은 서로를 위한 희생의 삶이고 봉사의 삶이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예수님과 일치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명하신 삶을 살아야 한다. 요한복음서의 성찬례는 사랑의 “새 계명”으로 마무리된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어떻게 해서 빵이 예수님의 몸이 되고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가 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 일들은 신학자들에게 맡겨 두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실만 믿고 따르면 된다. 빵을 들고 당신 몸이라 하셨고, 포도주를 들고 당신 피라 하셨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이것을 계속 행하라고 하셨다.

 

우리가 음식을 바꾸면 체질이 변한다고 한다. 마음을 다하여 영성체를 자주 하다 보면 우리의 영적인 체질도 변할 것이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처럼 말이다.

 

[월간빛, 2010년 9월호,  하창호 가브리엘 신부(5대리구 사목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