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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무명 순교자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현양동산
지번주소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 1486(바다의 별 청소년 수련원 내) 
도로주소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고비고개로741번길 107
전화번호 (032)932-6354
팩스번호 (032)932-6307
홈페이지 http://ilmanwe.or.kr/
관련기관 바다의 별 청소년 수련원    
관련주소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고비고개로741번길 107
성인자료실
제목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 순교자의 십자가 길 11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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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5-19 조회수779 추천수0 첨부파일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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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한국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의 순교자의 십자가 길 모습입니다. 위로의 문을 지나면서 한국 교회사의 중요한 15가지 사건을 묵상할 수 있도록 매 처마다 순교자의 삶과 교회사의 발자취를 묵상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2013년 3월에 찍은 사진입니다.

  

작품 해설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자랑이신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은 비록 그 삶과 증거의 모습은 달랐지만 뛰어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시의 신자들에게나 우리 신앙 후손들에게도 든든한 배경이 되시는 분들입니다. 모진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벽처럼 두 분 신부님은 한국교회의 버팀목이십니다.

   

제11처 ‘피의 순교자’ 김대건 신부,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

  

김대건 신부(金大建, 안드레아, 1822-1846)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충남 당진군)에서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과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36년, 16세 때 조선인 사제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모방신부의 눈에 띄어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최양업(토마)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하였다. 1844년 12월에 창춘(長春) 인근 조바자츠(小八家子) 성당에서 최양업과 함께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은 이듬해인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하이 연안의 긴가함(金家巷) 성당에서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을 받았다.

   

1845년 페레올 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김대건 신부는 상하이를 떠나 목선 라파엘호를 타고 천신만고 끝에 10월 12일 충청도 금강 황산포(현 강경) 인근 나바위에 상륙하였다. 모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최초의 방인 사제로서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선교사들의 입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해로를 개척하던 중 순위도에서 체포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해주 감영에서 문초를 받았는데, 사건의 중대성으로 말미암아 서울로 압송되어 포도청에 갇히게 되었다. 무려 40여 차례의 신문을 받는 동안 김 신부의 탁월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한 일부 대신들은, 김 신부를 배교시켜 필요한 인재로 이용하려고 하였지만 김 신부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마침내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받고, 사제생활 1년 1개월 만인 1846년 9월 16일에 한강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형으로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최양업 신부(崔良業, 1821-1861)

  

충청도 홍주(洪州) 다락골(지금의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출생하였다. 마카오 유학을 마치고 부제의 신분으로 네 차례나 조선에 입국하려다 실패하고 중국 상하이 서가회(徐家匯) 대성당에서 1849년 4월 15일, 예수회 소속 강남 대목구장인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로 수품되었다. 사제가 되기 위해 고향을 떠난 지 13년만의 영광스런 일이었다. 그해 만주를 거쳐 조선에 입국하였다.

  

1850년 초 조선에는 최양업 신부를 비롯한 세 명의 성직자가 있었다. 그러나 전국의 1만여 명 교우들을 돌보는 것은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12년간 전국의 가장 힘든 산골 구석만을 찾아다니면서 오직 천주의 사업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했다. 그는 하루에 80리 내지 100리를 걸었고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에 다른 공소로 떠나곤 하였다. 어떤 때는 한 달 동안 나흘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자신을 돌보지 않는 사목활동을 하던 중, 1861년 6월 경상도 문경(聞慶) 새재에서 과로로 장티푸스를 이기지 못한 채 쓰러져 배티에서 요양 중 보름만인 1861년 6월 15일에 선종 하였다. 당시 나이 41세였다. 이런 헌신적인 사목활동을 수행한 최양업 신부를 일컬어 ‘땀의 순교자’라 기꺼이 부르게 되었다.

  

(잠시 묵상합니다.)

(주모경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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