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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성모당 봉헌 100주년의 해9: 봉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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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9-07 조회수967 추천수0

[성모당 봉헌 100주년의 해(1918~2018)] 봉헌

 

 

이번 호에 여러분이 보시는 사진은 1978년에 있었던 대구대교구 재봉헌식입니다. 1978년은 성모당 봉헌 6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성모당 봉헌 60주년을 맞아 교구에서는 하느님께서 교구에 베푼 모든 은혜에 대한 감사로 ‘대구대교구 재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이 봉헌식에는 파티마의 성모님을 성모당에 모신 가운데, 교구 주보성인이 모셔진 성모당에서 거행되었습니다.

 

교구 내 성직자, 수도자들과 각 본당 레지오 단원 등 5천여 명의 신자가 참석했고, 교구장 서정길 대주교의 교구 재봉헌 기도문 낭독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과 성모님의 보호하심에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시간이었을 겁니다. 이제 다음달이면 성모당 봉헌 백주년을 맞이합니다. 또한 9월은 순교자 성월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성모당 봉헌 백주년을 준비해 나가야 할까요?

 

올해 여름은 정말 무더웠습니다. 기록적인 폭염이라는 말이 연신 TV에서 나왔습니다. 아마도 성모당에서는 비오듯 흐르는 땀을 뒤로한 채 매일매일 봉헌하는 미사가 힘겨울 정도였을 겁니다. 제가 성모당에서 소임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땀이 비오듯 하는 무더운 7월과 8월에 성모당에서 야외미사를 주례하면서 선선한 바람이 불기를 그렇게나 원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덧 9월 순교자 성월이 되면, 점점 신자들이 성모당에 많이 찾아옵니다. 특히나 이즈음에는 추석도 있습니다.

 

지금은 작년 11월 19일에 시작한 평신도 희년의 폐막(2018년 11월 11일)이 얼마 남지 않은 때입니다. 성모당에서 소임을 할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오셨습니다. 특히 2016년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자비의 특별 희년을 선포하셨기에 더 많은 분들이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오셨습니다.

 

보통 본당에서는 사순시기나 대림시기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고해성사를 보는데, 아마도 판공성사 때문일 것 입니다. 하지만 성모당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성모당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성사를 보는 때는 5월과 11월입니다. 아마도 성모 성월, 그리고 위령 성월이라서 그럴 겁니다. 그러다 보니 고해성사를 보는 내용도 본당과는 조금 다르고, 고해성사를 준비하는 신자들의 마음가짐도 조금 다릅니다.

 

또 성모당에는 매년 전대사가 주어지는 날(1월 1일, 2월 11일, 3월 25일, 8월 5일, 8월 15일, 10월 13일, 12월 8일)이 있습니다. 이때가 되면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고해성사를 봅니다. 작년 8월 15일이었습니다. 보통 8월 15일은 의무대축일이기도 하고, 본당에도 미사가 있어 성모당의 미사에는 그리 많은 신자들이 오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본당에는 에어컨이라도 있지만 성모당은 뜨거운 땡볕 아래서 미사를 해야 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모당 앞에 있는 자그마한 식당에 미리 예약을 했습니다. 매년 성모 승천 대축일이면 성모당 봉사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곤 했지만 그날따라 미사에 참여한

 

모든 신자분들이 간단하게라도 식사를 할 수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대축일이기도 했고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 미사에 참례한다고 고생했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몰라 동기 신부에게 함께 미사를 하자고 청했습니다. 매년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이 성모당의 미사에 참여했지만 그날따라 왠지 모르게 그러고 싶었습니다.

 

미사 전 한 시간 가량 동기 신부와 함께 고해성사를 줬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서, 조그마한 식당에 서 편하게 식사를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나서, 제의를 벗고 나왔습니다. 고해실에는 미사 전보다 더 많은 신자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동기 신부의 눈빛을 봤습니다. 어떻게 그냥 식사를 하러 가겠습니까? 그렇게 많은 신자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외면할 신부는 없었을 것입니다. 저와 동기 신부 두 명이서 고해성사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11시 45분부터 시작된 고해성사는 12시 반, 오후 1시가 다 되어도 끝이 날 줄 몰랐습니다. 거의 1시 반이 다 된 시간에 그 신부와 저는 고해실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성모당 봉사회장이 저에게 귀띔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어서, 뒤에는 신자들에게 죄송하다고 하고는 돌려 보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성모당의 미사에 참여하시는 분들 중에는 매번 눈에 띄는 신자들이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성모당 미사에 참여하러 정기적으로 오시는 분들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습니다. 어쩌다가 한 번 성모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 성모님께 청원할 것이 있어서, 성모당을 구경하러 왔다가 미사에 참여하고 싶어서 오시는 분들입니다.

 

반면에 때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주교회의에서 나온 성지순례 책자를 아실 겁니다. 한 번은 성모당 앞 도로에 대형 버스가 몇 대나 정차해 있었습니다. 곧이어 버스에서 신자들이 우르르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오신 것인지 물었습니다. 대구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신자들이었는데, 단체로 성지순례 중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먼 곳이라 아침부터 온다고 고생했을 거라 생각했고, 성모당에 올라와서 기도도 하고, 시간이 되면 미사에 참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성모당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면서 기다렸습니다. 미사 때가 다되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신자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러 올라오지도 않았는데, 혹시나 성직자묘지와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구경하러 갔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사가 시작되었지만 끝내 그분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봉사자에게 “혹시나 그분들 못봤습니까?”라고 물으니 “도장만 찍고 갔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떠오른 생각이 ‘그 먼 곳에서 와서 도장만 찍을 거면 왜 왔을까?’였습니다. 성지순례를 간다면 이곳저곳 많은 곳을 돌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정말 그곳에서 잠시라도 기도하고, 그곳의 의미도 생각하고 그렇게 다니는 것이 올바른 성지순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제 9월이니 또 많은 사람들이 성모당에 순례를 올겁니다. 날씨도 선선하고, 지난 여름에 못 갔던 성모당에 기도도 하러 갈겁니다. 또한 9월은 순교자 성월이 기도 합니다. 9월 순교자 성월 때마다 우리는 ‘순교영성을 살자.’, ‘순교자의 삶을 본받자.’ 라고 말을 합니다.

 

사실 드라마, 영화를 보면 항상 주인공이 있습니다. 모든 일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일어납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주연이 있고, 조연이 있고, 단역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연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한국교회의 주인공, 한국천주교회 역사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김대건 신부님, 주문모 신부님, 아니면 브뤼기에르 주교님이 주인공일까요? 아니면 순교자의 피는 교회가 자라게 하는 거름이라고 하듯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무수한 순교자들이 주인공일까요? 도대체 누가 한국천주교회의 주인공일까요? 전 이 물음 앞에서 늘 깊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 우리의 생명, 우리의 모든 것들 …. 우리 삶의 나날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나날이 함께 어우러져 우리 역시 한국천주교회의 역사 안에 한 획을 그을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글로 쓰여지든 쓰여지지 않았든 간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는 목소리는 영원히 남을 겁니다.

 

여러분은 한국천주교회 역사의 주인공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에는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이승훈이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을 때도 함께 계셨고, 윤유일의 서한, 황사영의 백서, 신미년 서한, 유진길 서한과 같은 글들이 쓰여질 때도 함께 계셨습니다. 또 주문모 신부를 비롯해서 브뤼기에르, 김대건, 모방, 샤스탕, 앵베르 주교님과 같은 성직자들이 숨을 헐떡이면서 조선의 국경을 넘어올 때도 함께 계셨습니다.

 

박해를 맞아 순교자들이 고통과 괴로움에 울부짖을 때, 그리고 그들이 무서움에 떨 때도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삶이 그리워, 고통에 못이겨 가톨릭교회를, 하느님을 모른다고 배교했던 그곳에서도 함께 피눈물을 흘리면서 고통에 동참하셨고,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세 명의 신학생이 중국으로 신학공부를 하러 갈 때도, 최방제가 열병에 걸려 죽어갈 때도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나날에도 성령이신 하느님께서 함께하실 것입니다.

 

성모당 봉헌 백주년을 준비하면서 참 많은 행사도 있고, 각자 기도 지향을 가지고 기도도 할 겁니다. 저는 그러한 것에 조그마한 것을 첨가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곧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나날, 그리고 성령께서 함께하심을 믿는 것, 그것을 통해서 매일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합니다. 늘 성령이신 하느님과 함께, 성령의 하느님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이 되길 기도 드립니다.

 

[월간빛, 2018년 9월호, 이찬우 타대오 신부(대구대교구 사료실 담당 겸 관덕정순교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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