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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모당 봉헌 100주년의 해10: 어머니 성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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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10-11 조회수622 추천수0

[성모당 봉헌 100주년의 해(1918~2018)] 어머니 성모당

 

 

올해 10월 13일은 성모당을 봉헌한 지 꼭 백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10월호에는 성모당에 대해 글을 써야 하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이었습니다. 성모당에 대해 신기한 것, 재미있는 것, 자주 접하지 못한 것을 보여줘야 하나? 라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드망즈 주교님은 ‘성모당을 왜 지었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교구 역사로 이야기하면 드망즈 주교가 허원했기에 그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가장 쉽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였을까, 고민을 해봅니다.

 

2월호에서도 언급했듯이 드망즈 주교님은 성모당을 짓기 위해서, 아니 자신이 허원한 사업을 이루기 위해서 정말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어머니’라는 단어입니다. 어머니라는 단어는 참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실 제게도 ‘어머니’라는 단어는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이기도 하지만 제일 사랑스러운 단어이기도 합니다.

 

저는 어릴 때 토끼를 좋아해서 토끼와 자주 놀았습니다. 어느 날 밥을 먹는데 처음 보는 고기가 올라왔습니다. 저는 뭔지도 모른 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러다 하도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다두야! 토끼 고기야~!’ 저는 그 말을 듣고 제가 먹고 있는 숟가락을 던져 버렸습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밥상을 엎어 버렸다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때 어머니께 심하게 혼났습니다. 저는 울면서 ‘왜 토끼를 잡아먹었어~!’ 라고 떼를 썼고, 그런 저를 보고 어머니는 숟가락을 뺏고는 ‘밥 먹기 싫으면 나가~! 며칠 굶어야지 밥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25를 겪었던 부모님 세대는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밥을 굶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어린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집에서 키우던 토끼를 잡아먹다니, 그래서 어머니께 좋은 말로 거역했고, 나쁜 말로 대들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도 집에서 키우던 동물이 종종 상에 오르곤 했습니다. 한 번은 집에서 키우던 멍멍이가 식탁에 올라왔습니다. 그때 동생은 펑펑 울었습니다. 그렇게나 좋아하고 그렇게나 귀엽게 키우던 개인데, 우리는 부모님이 하는 행동을 이해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집에서 키우는 개, 사람과 친구인 개를 먹을 수 있단 말이야!’ 맞습니다. 하지만 6.25를 겪었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에서 개는 친구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목숨이었습니다. 사람도 죽어 나가는데, 옆집에 있는 친구가 먹을 것이 없어서 고생하는데 집에서 키우는 개와 고양이를 가만히 둘 수 없었습니다. 먹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부모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즘도 집에 가면 어머니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자주하십니다. 신학생 때는 “신학교 힘들면 지금이라도 당장 나오거라!”, “지금 너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사람, 아니 나 때문에 신학교에 다닌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그만두어라!” 저를 위해서 가장 많은 기도를 해주시는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 힘들었습니다.

 

신부가 된 요즘에는 이런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여자 조심해라. 미사 할 때 신자들에게 잘 대해라. 강론준비 좀 잘하고, 목소리는 그게 뭐냐! 항상 웃고 다녀라. 아프지 말고 몸조심해라. 혹시 어디 아픈 데는 없냐? 혹시 돈 필요 없냐? 돈이 필요하면 이야기해라! 살 좀 빼고, 동생봐라! 누나봐라! 너처럼 살찐 사람이 어디 있냐? 살찌면 신자들이 싫어한다. 제발 살 좀 빼라.”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다 컸다고 생각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제가 아직 어린아이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알지만 그래도 가끔은 ‘너무 하시는 것 아냐?’ 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어머니라는 단어는 쉽고도 어려운 단어이고, 이해하는데 오랜 세월이 걸리지만 이해하고 나면 포근한 단어입니다. 아마도 드망즈 주교님도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초대 교구장으로 대구에 부임을 해서 해야 할 일은 산더미인데 교구 재정은 넉넉하지도 않고, 가난한 재정을 두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거듭하다가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찾았을 겁니다. 그리고는 어머니에게 떼를 씁니다. ‘어머니, 알아서 다 해주이소!’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성모당을 교구민들을 위한 기도의 장소로 만듭니다. 성모당에 성모님을 모셨지만, 그 장소는 성모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장소로 만듭니다. 우선 『드망즈 주교 일기』에 나오는 내용을 발췌해 보겠습니다.

 

옆의 사진은 『드망즈 주교 일기』 원본입니다. 드망즈 주교님은 1918년 10월 13일자 일기 첫 부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봉헌 동굴의 낙성식(落成式)이 더할 수 없이 성공적이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영광과 감사….” 이 부분에만 드망즈 주교님이 성모님께 감사를 드렸을까? 사실 『드망즈 주교 일기』를 살펴보면 성모 어머니께 수없이 드린 청원과 감사가 있습니다.

 

1917년 10월 11일, 나는 특히 루르드의 성모님을 생각하고 있다. 마귀가 오랫동안 조용하게 있을 수 없는 한은 언제나 그러했고, 또 언제나 그러할 것인데, 요는 전투를 하는 며칠 동안만이라도 주님께 일임하고 최선을 다해 행동하는 데 있으며 우리는 교회 안에서 계속되는 전투에 도전해야만 한다. 그리고 아무런 걱정도 없이 대사건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1917년 10월 26일, 루르드의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정말로 방법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이 건축(신학교 2차 공사를 말한다)을 위해 아마 방법을 사용하실 것인데, 신학교의 개학을 중지하지 않으려면 이 같은 방법이 필요하다.

 

1917년 10월 27일, 환자(투르뇌 신부를 말한다.)는 그의 정신을 되찾았을지도 모르는데, 왜냐하면 그는 대구 루르드 성모께 기원을 했었기 때문이다.

 

1917년 12월 31일, 나의 교구장 부임 7주년이 끝났다. 교구가 탄생한 지 정확히 6년 반이다.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올해, 그러나 내게 좋은 한 해였다. 참으로 갈수록 나는 하느님께 감사할 이유를 갖게 된다. 그분은 나를 응석받이로 대해 주시고 계시니 불평이나 의심 때문에 그분께 감사할 줄 모른다면 나의 죄가 얼마나 클 것인가! 오! 천주여, 나를 그렇게 지켜 주시고 더욱더 온전히 어머니의 손 안에 내맡겨진 어린이의 단순함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해주소서. 천주님께서 나를 그렇게 대해 주시고 또 루르드의 성모님도 그렇게 대해 주시기를!

 

1918년 1월 13일, 로베르 신부는 아직 부족한 2,400원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계산성당의 증축공사 대금을 마련하지 못했는데, 겨우 마련했다는 의미이다.) 루르드의 성모님의 놀라운 힘이 역력하다.」

 

이렇듯 『드망즈 주교 일기』의 일부분만을 살펴봐도 드망즈 주교님이 성모님께 한 수많은 청원과 감사가 나옵니다. 또한 어쩌면 쉽게 지나갈 일들도 성모님의 보호하심과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성모당 봉헌 당시의 기록들 중에 남아 있는 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여기에 나오는 모든 자료들은 대구대교구 사무처 사료실 자료로, 1918년 10월 13일 행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전 9시부터 행사가 진행되었는데, 오전 9시에 성모동굴의 축복식과 아베 마리아의 노래가 불려졌고, 신자들이 성모당을 찾아와서 기도하기를 청하는 사목서한을 낭독한 후, 미사가 있었고, 이후 루르드 찬가와 테데움이 불려지는 가운데 성체강복이 거행되었습니다.

 

오후에는 4시 반부터 공동기도 순서가 있었습니다. 우선 4시 반에는 한국 신자들의 기도가, 5시 반부터는 일본인 신자들의 기도가, 6시 반부터는 다시 교구장 주교가 함께하는 기도시간이었습니다. 6시 반부터 하는 기도시간은 1911년 허원서 낭독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허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허원 문서와 함께 허원이 실현된 것에 대한 문서까지 함께 성모당 동굴의 성모님 발치 앞에 둡니다.」

 

아래에 있는 사진이 당시에 낭독되었던 허원문과 허원성취문입니다.

 

 

 

또한 당시 신자들에게 회람형식으로 보내졌고, 성모당 봉헌 당일, 드망즈 주교님이 신자들에게 읽었던 글은 아래와 같습니다. 좀 길지만, 현대문으로 고쳐서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에게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아마도 독자분들께서 이 글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교황의 강복으로 대구교구장 플로리아노(드망즈 주교를 일컫는 말입니다.)는 조선 남부지방(당시 대구교구의 관할지역은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충청도 일부분이라 대구교구 관할지역 전체를 의미합니다.)의 모든 신자 남녀들에게 강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곳곳에 계시고 아니 계신 데가 없으므로 어느 곳에서든지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은혜를 받을 것이나, 하느님께서 특별히 강복하신 지역이 있어 그 지역에 가서 기도하면 은총을 받기가 더 쉽고 더 많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의 시작때부터 신자들은 그런 곳에 가서 참배하는 것이 특별히 좋은 기도로 여겼습니다. 이런 강복을 받은 지역 중에 유명한 곳이 있으니, 로마 미사경본에도 기록되어 있는 곳입니다.

 

1858년 프랑스 루르드의 갸브 강 물가에 마사비엘이라 하는 굴에 성모님께서 벨라뎃다라는 15세 된 소녀에게 발현하십니다. 벨라뎃다에게 발현하신 성모님은 젊은 부인이고, 눈과 같이 흰옷을 입고, 흰 수건, 청색 띠를 하고 손은 합장을, 오른 팔에는 은색 묵주를 드리우고 양발 위에는 금해당화 꽃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발현 때(2월 11일) 부인이 벨라뎃다에게 성호경을 잘 긋는 방법을 가르치고 묵주기도를 외우게 했습니다. 그리고 부인도 같이 묵주를 움직이시되 입으로는 성모경을 외우지 아니하였고, 그 후 발현 때마다 그와 같이 했습니다.

 

그 이튿날 벨라뎃다가 부인이 성모님인 줄 생각했으나, 혹시 마귀가 사람을 속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성수병을 가지고 굴에 가서는 부인이 발현할 때 성수를 뿌리는데 부인이 은근히 웃으시고 더 사랑하시는 눈으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발현할 때 벨라뎃다에게 15일 동안 오라고 하시고 이후에도 많은 말씀을 하시는데,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땅에 친구(親口)하며 보속하기를 권면하시고 신부들에게 가서 여기에 성당을 지어 교우들이 많이 오게 하라 하시며 기적의 샘을 나게 하여 벨라뎃다로 하여금 그 물을 마시게 하고 그 물에 세수하게 하셨습니다.

 

15일 동안 벨라뎃다가 여러 번 부인에게 당신 성명을 가르쳐 주시기를 청했으나, 부인은 은근히 웃기만 하시고 대답하지 않으시다가 마침 성모 영보 축일(현재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이라 한다.), 곧 3월 25일에 벨라뎃다가 다시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니 부인이 손을 합장하고 눈을 하늘에 올리시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원죄없이 잉태함이노라.” 하셨습니다.

 

이때부터 루르드 굴에 참배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기적이 많은 것을 보고 그 지방 주교는 조사한 후, 굴에 예절을 허락하시고 굴 가까이 성당 짓기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날부터 그곳은 성모의 보좌(寶座)와 같이 되었으니 그곳에 가서 성모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영혼과 육신의 은혜를 많이 받는 고로, 허원하기 위하여나 그저 성모를 공경하기 위하여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각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미국 먼 지방에서도 참배하러 오는 사람이 무수히 많았고, 기적의 물은 만국에 가져가서 그 물로 병이 나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주교와 신부들이 각자 자기들이 맡은 교우들과 한 마음으로 와서 참배할 뿐 아니라 로마에서 추기경도 많이 오시고 여러 교황께서도 루르드 성모를 특별히 공경하시는 뜻으로 비오 9세 교황과 레오 13세 교황께서도 루르드에 참배하는 교우들에게 은사를 많이 주시고 비오 10세 교황께서는 루르드 발현하신 날을 기념일로 정하여 만국에서 미사를 지내게 하시고 만국 주교와 신부, 부제와 차부제에게 2월 11일 루르드 발현하신 날을 기억하는 경본을 외우게 하시고 미사 드리는 주교, 신부들에게 그 첨례미사를 지내기를 명령하셨습니다. 현재 교황님이신 베네딕토 15세께서도 교황품에 오르기 전에 루르드굴에 와서 참배하시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건대 루르드에 참배하는 교우들은 은혜를 많이 받으나 먼 나라에 사는 교우들은 참배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각국 주교, 신부들이 여러 지방에 루르드 굴과 같은 굴을 만들어 교우들이 그 굴을 보고 성모께서 참 루르드에 주신 은혜를 생각하여 열심히 성모를 공경하고 기도하면 루르드에 참배하는 교우와 같은 특별한 은혜를 받기를 바랐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 교우들의 믿음을 보시고 루르드와 같은 은혜를 주시고 기적으로 병의 나음을 주신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본 주교는 교황님의 분부에 따라 조선 남방 교구 주교로 올 때 교구 사업이 많기는 하나, 재정이 없는 것을 보고 대구에 온 후, 첫 주일이 되는 1911년 7월 2일 성모왕고첨례(동정 성모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로 현재는 5월 31일이다.)에 루르드 성모님을 조선 남방 교구의 주보로 삼아 허원했는데, ‘성모님께서 주교관과 신학교와 주교좌 성당의 증축에 필요한 재정을 보내주시면 주교관 내에 제일 높고 좋은 곳에 루르드 굴과 같은 굴을 지어 남방 모든 교우들이 이곳에 참배하도록 권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허원을 발한 지 7년이 되고 그동안 4년이나 난리 때문에(제1차 세계대전을 의미한다.) 외국의 원조를 받기 더 어려웠으나 성모님께서는 본 주교가 구한 것을 주실 뿐만 아니라 다른 은총까지 더 많이 주셨으니, 오늘은 그 허원을 채우는 날입니다.

 

첫 번째는 대구의 루르드 굴과 성모상을 축성하니, 대구 남산동에 주교관과 신학교, 명도회관과 수녀원이 있는 곳 중에서 제일 좋은 자리에 루르드의 굴을 지었습니다. 이 굴은 프랑스 루르드에서 도면을 받아 지었으므로 그 굴과 바위 모양은 루르드 굴과 같고, 그 굴은 벽돌당 안에 있는데, 그 벽돌당은 교황 레오 13세께서 로마 교황청에 루르드 굴을 지을 때에 그 굴을 놓기 위해 지으신 벽돌당과 비슷하게 했고, 성모상은 벨라뎃다가 말한 대로 성모님께서 당신 이름을 가르쳐 주실 때에 계신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는 대구 루르드 굴에 남녀 교우들이 참배하도록 권면합니다. 교우들이 참배할 때에는 세 가지 이유로 할 것입니다. 한 가지는 성모님을 그저 공경하고 사랑하고 감사하는 뜻에서 참배할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영혼이나 육신의 은혜를 얻고자 하여 굴 앞에서 구하면 기구의 특별한 효험이 있을 줄 믿는 뜻으로 참배할 것이며, 마지막 한 가지는 영혼이나 육신의 은혜 얻기를 원하는데 성모님께서 그 원함을 얻게 하시면 굴에 참배하기를 미리 허원하고 은혜를 받은 후에 허원을 채우기 위하여 참배할 것입니다.

 

남방 남녀 교우들은 이 세상에서 성모님을 열심히 공경함으로써 영혼과 육신의 은혜를 많이 받으시고, 천국에 가서는 성모의 석상이 아니라 벨라뎃다와 같이 성모님을 친히 뵙고 성모님과 영원히 천국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아멘.」

 

강생 후 1918년 10월 13일 대구대목구장 안세화 주교

 

 

조금 길기도 한데요, 드망즈 주교님은 효유서(曉諭書)라고 하는 위의 글을 쓰면서 루르드 동굴의 연원, 그리고 대구에 성모당을 만들게 된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신자들이 성모당에 와서 기도를 자주 하길 권고하고 있습니다.

 

제가 드망즈 주교님이라면 성모당을 다 짓고 난 뒤에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제게 다이아몬드 반지가 있다면 아마도 자랑하고 싶을 겁니다. 누군가가 봐주기를 바랄 겁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대구에 중요한 인물들이 방문하면 늘 성모당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1924년 마르오 자르티니 교황사절이 대구에 방문합니다. 아래에 있는 사진이 그 당시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을 보면 여러 가지 재미있는 걸 발견할 수 있는데요,컬러사진 같지만 컬러사진이 아니라 채색화라고 해서 흑백사진에 한 땀 한 땀 색을 넣은 사진입니다. 제일 중앙에 지워진 부분은 원래 일장기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기에 태극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일장기가 그려져 있었던 거고, 그것을 후대에 지우려고 했던 겁니다. 그 옆의 사진이 원본입니다. 우리에게 흑백사진보다 컬러사진이 더 익숙하지만 어딘지 어색한 채색화 사진, 하지만 지금 보는 이 사진 속의 인물들이 단체 사진을 찍는다고 사진사를 다 바라보고 있는게 참 신기하게 보입니다. 저 많은 사람들이 사진사를 바라보다니요. 요즘이라면 아마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진에 익숙한 요즘, 각자가 가진 휴대폰으로 셀카봉을 들고 사진을 찍는데 익숙한 우리에게 사진 하나하나의 소중함과 사진 자체의 신기함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저곳에서 사진에 찍힌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남아서 우리에게까지 보여질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진이 하나 더 있습니다. 드망즈 주교 서품 은경축 및 교구 설정 25주년 기념식이 있던 1936년 6월 11일의 사진입니다. 성모당에서 드망즈 주교님을 중심으로 신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이 사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진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진을 볼 때마다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1947년 초대 주한 교황사절 파트리시오 신부가 방문했을 때도, 1954년 제2대 교황대사 퀸란 주교가 방문했을 때도 성모당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위의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1984년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도 성모당을 방문했습니다. 드망즈 주교님이 루르드의 동굴을 본따서 대구에 성모당을 만든 뒤에 참 많은 성직자들이 방문했고, 그들보다 더 많은 신자들이 성모당을 방문했습니다. 드망즈 주교님이 바랐듯이 성모당은 신자들이 기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열려있고,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서려있는 장소입니다.

 

10월은 묵주 기도 성월입니다. 10월 13일 성모당 봉헌 축일뿐만 아니라 묵주 기도 성월에 드망즈 주교님의 요청처럼 성모당으로 기도하러 가시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월간빛, 2018년 10월호, 이찬우 타대오 신부(대구대교구 사료실 담당 겸 관덕정순교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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