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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 죽림동 주교좌성당 · 순교성지(교구 순교자 묘역)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6·25 전쟁 때 순교한 성직자와 교구 사제들의 안식처
지번주소 강원도 춘천시 죽림동 38 
도로주소 강원도 춘천시 약사고개길 21
전화번호 (033)254-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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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정보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54호(성당)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춘천 죽림동주교좌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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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6-30 조회수20 추천수0

춘천 죽림동주교좌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개최


교구 초석 다진 두 교구장의 사목활동 재조명

 

 

- 춘천교구 죽림동주교좌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6월 21일 열린 ‘구인란 토마스, 박 토마스 주교의 사목활동’ 주제 학술 심포지엄.

 

 

‘교세 확장’과 ‘사랑 실천’, ‘가정·생명 사목.’ 춘천교구(이하 교구) 초석을 닦고 성장시킨 초대교구장 구인란(토마스 퀸란) 주교와 제2대 교구장 박 토마스 주교의 핵심 사목 활동은 이 세 가지였다. 이 같은 사실은 6월 21일 오후 2시 강원도 춘천 죽림동주교좌성당에서 열린 ‘구인란 토마스, 박 토마스 주교의 사목활동’ 주제 학술 심포지엄에서 발표됐다. 올해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교구 죽림동주교좌본당(주임 홍기선 신부)이 마련한 이번 심포지엄은 교구 교회사연구소(소장 김주영 신부)가 주관했다.

 

이날 수원가톨릭대학교 여진천 신부(원주교구)는 구 주교 사목 활동의 핵심은 “‘교세 증가’와 ‘이웃 돕기 사업’이었다”고 설명했다. 구 주교의 활발한 사목으로 본당과 신자 수가 많이 늘었으며 원주교구가 분할했고, 이웃을 위한 사랑 실천으로 주민 복지를 증진시켰다는 의미다. 실제 춘천대목구장 시절인 1958년 구 주교는 대목구 활성화에 힘썼고 그 후 신자 수가 1952년 8619명과 비교해 1958년 2만4281명, 1963년 4만2821명 등으로 크게 증가했다. 의료·교육 활동에서도 1956년 춘천 골롬반 의원, 1961년 삼척 성 요셉 의원, 1964년 강릉 갈바리 의원을 개원하고 1964년 3월 춘천 성심여자대학 문을 여는 등 도움이 필요한 주민들을 위해 지원했다.

 

박 주교 사목 활동에 대해 발제한 교구 교회사연구소 이원희(요세피나) 상임 연구원은 박 주교가 “다른 어떤 사업보다 ‘행복한 가정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밝혔다. 가정을 지키는 것을 교회의 가장 큰 일로 여기고 정부의 인구 억제 정책을 심히 우려하면서 생명 수호 운동을 일관되게 강조·실천했다는 뜻이다. 실제 가정 성화를 위해 박 주교는 모든 신자 부부들이 혼인 생활 재교육을 받도록 했고, 자연 피임법 보급을 위해 교육자를 양성·파견했다. 미혼모 지원을 위해 1979년 춘천에 착한 목자 수녀회를 초대해 미혼모의 집을 운영하도록 했고, 재임 기간 내내 주교회의 가정 사목 담당 주교로서 전국 모든 교구에 이러한 운동을 확산시키려 했다. 자신의 교구장 수품 25주년 때도 행사 대신 가정 성화, 생명 수호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교구 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신호철 신부는 “외국인 성직자가 국가 시책에 반해 공개적으로 성·낙태·피임·생명 등을 언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개의치 않고 사목 방향을 꾸준히 설파하며 발전시켜 나갔다”며 “주교님 이후 이 사목적 유산이 왜 지켜지지 않았는가”하는 데에 “반드시 평가·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구 교회사연구소장 김주영 신부는 “두 주교님 사목 활동을 돌아보면서 우리도 삶 속에서 두 분처럼 잘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해 주시길 바란다”고 기도했다.

 

 

※ 구인란 주교와 박 토마스 주교

 

1896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구인란 주교는 1918년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에 입회해, 1920년 2월 2일 사제품을 받았다. 1938년 11월 14일 춘천에 부임했고, 춘천지목구장 대리와 제2·4대 지목구장, 초대 대목구장, 초대 교구장 등을 역임했다. 죽림동주교좌본당 제6대 주임을 지냈고, 1970년 12월 31일 선종해 현재 죽림동주교좌성당 뒤편 성직자 묘지에 안장돼 있다.

 

1925년 아일랜드 출생인 박 토마스 주교는 1944년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에 입회했다. 1950년 12월 21일 사제품을 받았고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교회법을 전공했다. 1954년 교회법 박사 학위를 땄고, 당시 한국 교회에선 흔치 않은 박사 학위를 받은 신부라 하여 ‘박사 신부’로 불리다 ‘박’씨 성을 가지게 됐다. 1956년 원주교구(당시 춘천대목구) 횡성본당 보좌로 활동하며 춘천교구와 연을 맺었고, 춘천대목구 총대리 등을 역임했다. 1963년 교구 상서국장, 1965년 교구 총대리 겸 상서국장으로 구 주교를 도와 교구 발전 토대를 마련했고, 1966년 2월 12일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1994년 은퇴 후 본국으로 돌아간 박 주교는 그해 10월 30일 선종했다. [가톨릭신문, 2020년 6월 28일, 이소영 기자]

 

 

춘천교구 초석 닦고 성장시킨 ‘신앙의 아버지들’


춘천 죽림동주교좌본당 설립 100주년 학술 심포지엄 개최… 구인란 · 박토마스 주교 발자취 돌아봐

 

 

춘천교구 제2ㆍ4대 교구장 구인란(Thomas F. Quinlan, 1896~1970) 주교와 제5대 교구장 박토마스(Thomas Stewart, 1925~1994) 주교는 한국 교회는 물론, 춘천교구의 설립과 기틀을 굳건히 하는 데에 나란히 헌신한 주역이다.

 

춘천교구 죽림동주교좌본당(주임 홍기선 신부)은 올해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21일 교구 교회사연구소(소장 김주영 신부) 주관으로 기념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두 교구장 주교가 교구에 남긴 발자취를 돌아봤다.

 

같은 아일랜드 출신의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였던 구 주교와 박 주교는 각각 일제 치하의 설움과 한국전쟁의 고통을 견디고, 교구가 신앙적 기틀을 갖추고 성장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구인란 주교 - 한국전쟁 후 폐허가 된 성당 재건축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신자들이 있는 이곳입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춘천에서만 6만여 명이 피란길에 올랐지만, 당시 춘천지목구장 구인란 몬시뇰은 피신을 한사코 거절했다. 신자들을 위해서였다. 춘천이 지목구로 설정된 지 10년 만에 급작스레 터진 전쟁에다, 새로 짓기 시작한 죽림동성당도 1년 만에 포탄에 무너진 상황이었다. 거기다 1945년 3·8선 설치로 지목구민의 3분의 1인 3000여 명을 북녘에 두게 되는 위기까지 맞았다. 춘천에 남았다가 포로로 잡힌 구 몬시뇰은 고산과 중강진, 평양 등지로 3년 넘게 ‘죽음의 행진’에 끌려다니는 신세가 됐다. 물 한 모금조차 먹기 힘든 극한의 상황 속에도 구 몬시뇰은 죽어가는 사람들이 “놀랄 만큼 이기심이 없는 영웅적인 사람”으로 기억했을 정도로 한국인들을 성심껏 챙겼고, 수용소에서도 몰래 수도자, 신자들과 고통 속에 묵주기도를 함께 바친 인자한 아버지였다.

 

석방 후 1955년 주교품을 받고, 춘천대목구장으로 복귀한 구 주교는 1958년 이후 교구의 기틀을 다시 다잡기 시작했다. 가장 시급한 성당 건축을 위해 구 주교는 지목구장 시절부터 골롬반회 본부 등의 도움을 얻어 성전 건립에 힘썼다. 특히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죽림동성당을 1956년 다시 재건했으며, 성전 건축으로 신자와 지역민들에게 ‘하느님의 보호’ 아래에 있다는 인식을 전파했다. 죽림동을 비롯해 원동ㆍ임당동ㆍ횡성ㆍ성내동성당 등 그가 건립한 성당과 공소만 40여 곳에 달했고, 30여 년 교구장 재직 동안 교세를 성장시키며 1965년 원주교구를 분리시켰다. 성 골롬반 의원과 춘천 성심여대 등을 건립하며 의료 및 교육 사업에도 힘썼다.

 

구 주교의 업적을 발표한 여진천(수원가톨릭대 교수) 신부는 이날 발제에서 “수년 동안 이뤄놓은 사목 상의 성공은 구 주교의 성덕과 열성, 아버지다운 격려와 지도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전했다.

 

 

박토마스 주교 - 행복한 가정운동 추진 · 낙태 심각성 알려

 

구 주교의 뒤를 이어 1966년부터 춘천교구장을 맡은 박토마스 주교는 전교 회장 및 교리교사 자격시험 실시부터 이웃 종교와의 화합, 학교법인 상지학원 설립 등으로 도내 학교 교육에까지 힘을 쏟았다. 또 한국인 사제 양성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해, 그가 교구장이 된 이후 약 10년 사이 교구 한국인 사제 수가 23명으로 늘었다.

 

박 주교가 가정 복음화와 생명 존중 사상을 널리 전하고자 시작한 ‘행복한 가정 운동’은 정부가 추진하던 인구 억제 정책에도 영향을 줬고, 한국 사회에 만연했던 인공 유산과 무분별한 낙태 행위에 경종을 울리기도 했다. 이는 1987년 전국 교구 가운데 처음으로 ‘가정사목부’가 설치되는 계기로 이어졌다. 이 밖에도 교구 복음화 운동을 비롯해 1982년 춘천교구에서 처음 열린 ‘한국 천주교 선교 200주년 기념 전국 신앙대회’ 등을 성황리에 개최하는 등 교구 공동체가 크게 성장하는 기틀을 구축했다. 박 주교는 주말마다 성당을 방문해 주일 미사를 주례하며 신자들과 대화하고, 본당 사목위원과 신심 단체장, 교리교사들이 활발히 활동하도록 끊임없이 격려했다.

 

이원희(요셉피나)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상임연구원은 “박 주교님은 공업화되어 가는 한국 사회에 생명의 존엄성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실천하는 등 변동의 시기를 겪던 교회 안에 큰 역할을 수행하셨다”며 “지역사회 원조는 물론, 재임하던 시기 동안 총 53명의 한국인 사제를 양성했다”고 전했다.

 

이에 앞서 죽림동주교좌본당은 은총의 100년 본당 역사를 담은 「죽림동 예수성심 주교좌본당 100년사」를 발간하고, 19일 발간 기념 미사를 봉헌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6월 28일,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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