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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 남종삼 요한 묘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남상교, 성 남종삼, 남규희 3대 순교자들의 안식처
지번주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 산 22-2(의령 남씨 가족묘) 
전화번호 (031)855-1225
홈페이지 http://cafe.daum.net/songchuchurch
관련기관 송추 성당    
관련주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호국로 477-31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남종삼 성인의 묘갈명에 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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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1-07 조회수138 추천수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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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남종삼 성인의 묘갈명(墓碣銘)에 대한 소고(小考)

 

 

순교자 성월인 지난 9월 20일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 산22-2 남종삼(南鍾三, 요한, 1817-1866) 성인 가족 묘역에서 성인의 묘비 제막식이 열렸다. 이날 제막 미사에는 남종삼 성인의 증손 남재현(인천교구) 신부와 외증손 최우주(서울대교구) 신부 등 후손들과 교구 사제 및 신자 150여 명이 참석해 성인의 삶과 신앙을 기억했다. 이날의 행사는 교계 방송과 신문에 간단하게 보도되었다. 하지만 묘비가 세워졌다는 사실 이외에 묘갈명(묘비명)을 누가 썼는지, 어떤 내용이 기록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소개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의 생애를 후세에 전하는 묘갈명

 

묘비는 죽은 사람의 성명, 신분, 출생 · 사망 · 장례 연월일, 자손 관계 기록, 행적 등을 돌에 새겨 무덤의 표지로 삼고, 죽은 사람의 업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세운다. 보통은 네모난 형태에 받침과 몸통, 덮개돌(가첨석[加?石])이라고도 한다)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윗머리가 둥글고 덮개돌이 없는 것은 묘갈(墓碣)이라 하고, 윗머리에 지붕 모양의 네모진 덮개돌을 얹은 것이 묘비(墓碑)라 한다. ‘묘갈’과 ‘묘비’는 본래 구분하여 사용하였으나 후대에 와서는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서로 통용한다.

 

 

1969년, 첫 묘갈명이 쓰이다

 

남종삼 성인의 첫 번째 묘갈명은 1969년에 지어졌다. 1966년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에 가족묘가 조성된 후이다. 박해 시기 순교자들의 유해는 ‘사학죄인’이었기에 제때 묘를 쓰기가 어려웠다. 남종삼 성인도 다르지 않았다. 성인은 1866년 3월 7일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되었으며, 그 목은 3일간 효시되었고 인근 밭에 버려졌다. 이후 박순집(朴順集) 등 몇몇 신자들에 의해 한밤중에 수습되어 서울 용산 와서현에 암장되었다. 그로부터 30여 년 뒤 조선대목구 8대 대목구장 뮈텔(Mutel) 주교에 의해 유해가 발굴되어, 1899년 10월에 용산 신학교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1900년에 다시 명동 주교좌성당 지하 묘소로 옮겨졌다가 1967년 10월에 절두산 기념성당 성해실에 모셔졌다. 그때 유해의 일부를 가족묘로 모셨다.1)

 

묘비는 1968년 10월 6일 바티칸에서의 시복식이 끝난 이듬해에 세워졌는데 그때 묘갈명을 쓴 이가 혜암(惠庵) 유홍렬(柳洪烈, 라우렌시오, 1911-1995) 박사이다.

 

《한국천주교회사》를 저술한 유홍렬 박사는 한국 천주교회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역사학자이다. 1960년에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66년에는 대한민국 학술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3년 한국사학회에서 발간한 《유홍렬 박사 고희 기념 논총》에 실린 저작 목록을 보면 단행본 26종, 논문 40편, 투고문은 410편이나 된다. 동시에 그는 뛰어난 교육 행정가이자 열심한 가톨릭평신도사도직 활동가였다. 고(故) 이원순 교수는 혜암 선생을 한국 천주교회사에 지대한 공적을 쌓은,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대가로 평가하면서 그의 공적을 세 가지로 요약한 바 있다. 첫째, 《한국천주교회사》의 저술이다. 둘째는 한국 천주교회사를 특수사 연구의 한 분야로 인식시켰다는 점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필생을 교회사 연구에 헌신하면서 학문의 깊이가 신앙생활로 드러나는 표양을 보였다는 점이다.

 

 

2018년, 성인의 묘갈명을 다시 짓다

 

올 5월에 당시 한국교회사연구소 부소장(현 소장 신부)이셨던 조한건 신부님이 의정부교구 순교자공경위원회가 남종삼 성인의 묘비를 새로 세우려 한다며, 묘갈명을 써줄 분이 있겠느냐고 물으셨다. 그러면서 “1969년에 세운 묘갈명이 어려운 한자로 되어 있어 성인의 묘소를 찾아온 순례객들이 성인의 천주 신앙을 제대로 읽어내기 어렵다. 그리고 성인이 되신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복자’라고 되어 있다. 이번에 묘비를 새로 세우면서 묘갈명도 한글로 새롭게 지어 성인의 묘소 앞에서 성인의 삶과 신앙을 제대로 알게 해주고 싶다.”는 위원장 이진원 신부님의 뜻도 전해 주셨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남종삼 성인의 묘갈명을 쓰려면 한시도 잘 알고 문학적인 격조도 있는 분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이 신부님이 판독하고 한글로 토를 단 묘갈명 파일을 전해받았다. 받은 한글 파일을 열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사실 그 파일을 받기 전에 남종삼 성인의 묘갈명을 지은 이가 누구인지 몰랐다. “西紀 一九六九年十月上浣 成均館大學校大學院長 文學博士 柳洪烈 謹識”(서기 일구육구년시월상완 성균관대학교대학원장 문학박사 유홍렬 근지)라는 글자를 읽으며 오소소한 소름이 돋았다. 새로 묘갈명을 부탁하려고 생각했던 분이 규운(圭雲) 하성래(河聲來, 아우구스티노) 박사님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놀랄 만한 인연이 숨겨져 있는데 첫 번째 묘갈명을 쓴 유홍렬 박사는 하성래 박사의 대부(代父)이다.

 

하성래 박사는 ‘천주가사’를 가사 문학의 한 장르로 세운 분이다. 오랫동안 대학에서 강의했고 수원교회사연구소 고문으로도 계셨다. 또한 거제로 유배된 유항검의 딸 ‘유섬이’를 찾아내 세상에 소개한 분이다.2) 필자는 2013년 12월, 《교회와 역사》에 연재하는 <나의 신앙과 삶>을 위해서 하성래 박사를 만나 구술 채록을 하였다. 그 내용 중에 하성래 박사가 어떻게 유홍렬 박사를 만나게 되었는지가 자세하게 나온다.

 

“…논문을 쓰기 위한 자료 조사를 하고 다닐 때 유홍렬 선생님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오기선 신부님 소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천주가사를 연구하려면 천주교 용어를 알아야 하는데 내가 유림 골수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논문을 쓰는 것이 참 답답했다. 천주교에 대해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천주교회 용어가 참 어려웠다. …논문을 쓰고 나서 유홍렬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당시 선생님은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이셨다. 선생님이 ‘이렇게 논문까지 쓰고 천주교 신자가 아닌 것이 말이 되냐’며 ‘세례는 언제 받을 거냐’고 물었다. 내가 순순히 ‘곧 받겠습니다’ 했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전화기를 잡고는 ‘지금 사는 곳이 어디지?’ 하더라. ‘가회동이요’ 했더니 바로 가회동 성당으로 전화를 했다. 이계광 신부님을 바꾸라 하더니 대뜸 ‘내가 사람 하나 보낼 테니 이마에 물 부어줘’ 그러셨다. 1975년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다. 오기선 신부님께 ‘세례명은 어떻게 할까요’ 했더니 ‘그건 대부가 정하는 거야’ 하셨다. 유 선생님께 물었더니 ‘자네는 학자니까 아우구스티노로 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물론 대부도 서 주셨다. 내 신앙 이야기를 하면서 유홍렬 선생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대부로서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신 분이다. 말 그대로 아버지 대신이셨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찾아 뵙고 의논드릴 수 있어 참말 의지가 되었다. 내가 대학 강단에 설 때 추천서도 써 주셨다.…”3)

 

살면서 스스로 계획하지 않았으나 과거의 일들이 엮어져 어떤 결과로 드러날 때 ‘모든 것이 그분의 계획안에 있구나’ 하는 생각을 절실하게 한다. 이번 일이 그랬다. 바로 하성래 박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남종삼 성인의 첫 번째 묘갈명을 대부님이신 유홍렬 박사님이 쓰셨다는 사실과 함께 이번에는 선생님께서 써 주셔야 할 운명이신 듯하다’고 말씀드렸던 거로 기억한다. 선생님은 흔쾌히 쓰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묘갈명을 지어 보내주셨다.

 

우리가 익명의 죽음이 아니라 순교자의 죽음을 기억하는 이유는 ‘순교 사건’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보려는 의지 때문이다. 그렇기에 순교자의 삶과 죽음을 보며 자신의 신앙과 삶을 성찰하고 죽음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두 편의 묘갈명이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말처럼 “신앙 선조들이 남긴 증언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해줄 것이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일깨워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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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때 남종삼 성인의 유해 일부는 바티칸 교황청 예부성성에도 보내졌다. 한편 한국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 내 성 남종삼 기념관과 갑곶순교성지에도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2곳의 유해는 성인의 후손인 남기윤(베네딕토) 씨가 큰고모인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남형우 수녀에게 인도받아 기증한 것으로, 척추 뼈 1점, 치아 4점, 슬개골 1점, 머리카락과 부위가 불명확한 부스러기 뼈 등이다. 인천교구는 2004년 8월 31일 유해 봉안예식을 갖고 성인의 유해를 임시로 주교관 경당 감실로 옮겨 모셨다. 유해 방부 처리 후 일부는 2004년 9월 7일 갑곶순교성지에 봉안하였고, 나머지는 2007년 10월 26일 축복식을 가진 성 남종삼 기념관에 모셨다.

 

2) 《교회와 역사》에 <거제로 유배된 유항검의 딸 섬이의 삶>(2014. 4월호)와 <유항검의 딸 유섬이의 묘를 찾다>(2014. 7월호)가 실렸다.

 

3) 《교회와 역사》 2014년 1,2월호에 연재하였다. 이후 ‘하성래 선생 팔순 기념 논총’에 게재하기 위해 2014년 3월 25일에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추가로 채록하였다. 《신앙의 노래, 역사의 향기 - 규운 하성래 선생 팔순 기념 논총》, 714-741쪽.

 

[교회와 역사, 2018년 11월호, 손란희 가밀라(한국교회사연구소 전시운영과장)]

 

 묘갈명 전문은 사진 파일을 참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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