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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 신리 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다블뤼 주교의 생생한 흔적이 남은 주교관을 바라보며
지번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신리 62-3 
도로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평야6로 135
전화번호 (041)363-1359
팩스번호 (041)363-7200
홈페이지 http://www.sinri.or.kr
전자메일 master@sinri.or.kr
문화정보 충청남도 기념물 제176호(신리 다블뤼 주교 유적지)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땅에 쓰여진 신앙 이야기: 신리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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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9-14 조회수414 추천수1

[땅에 쓰여진 신앙 이야기] 신리 성지 (1)

 

 

- 성 다블뤼 주교관. 1865년부터 신리에는 제5대 조선교구장 성 다블뤼 주교가 거주했으며, 프랑스 선교사들과 선교 물품의 입국로가 되었다.

 

 

조선시대의 충청도 서북부 지역 즉 지금의 당진, 서산, 예산, 홍성, 청양을 일컫는 내포라는 지명은 ‘안쪽에 자리 잡은 갯가’를 의미한다. 이 내포지방은 삽교천과 무한천 두 물줄기가 평야와 어우러져 자궁모양을 하고 있는데, 조선 시대에 수용된 천주교의 모태로서 ‘신앙의 못자리’ 역할을 하였던 지역이다.

 

내포 천주교회의 역사는 1784년 여사울 출신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 서울에서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존창이 전한 천주교 신앙을 내포주민들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생활 속에서 그 믿음을 실천하면서 내포지역의 천주교는 다른 어느 곳보다 빠르고 깊고 넓게 퍼져나갔으며, 조선 시대 내내 확고한 신앙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다. 이처럼 내포 지역에 천주교가 왕성하게 전파된 데에는 개방된 종교적 심성, 신분적·제도적 차별이라는 동질성, 외부 문물의 쉬운 유입과 이를 해석해 줄 실학자들의 포진 등의 이유가 큰 역할을 하였다.

 

- 성당 벽면에는 순교자들의 부활을 주제로 예수 그리스도가 강복하는 모습과 다섯 성인의 대형 부조상이 설치되어 있다.

 

 

신리 성지가 위치한 충남 당진군 합덕읍 신리는 내포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지금은 평야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지만, 조선 시대에는 밀물 때 배가 드나들었던 곳이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 1784년 이후 신리에도 천주교 신앙이 전해지게 되었다. 이 시기 신리에 정착해 살고 있던 밀양 손씨 집안을 중심으로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1866년 무렵에는 마을 주민의 대부분인 400여 명이 천주교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신리는 바닷길을 통해 외부와 접촉하기 쉬운 조건을 갖추고 있었고, 내포의 다른 교우촌들과 쉽게 연결된다는 이점이 있었기에 조선 천주교회의 중요한 거점 지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865년부터 신리에는 제5대 조선교구장 성 다블뤼 주교가 거주했으며, 프랑스 선교사들과 선교 물품의 입국로가 되었다. [2020년 9월 13일 연중 제24주일 대전주보 4면, 사진=대전가톨릭사진가회]

 

 

[땅에 쓰여진 신앙 이야기] 신리 성지 (2)

 

 

- 신리 성지 순교기념미술관.

 

 

기록에 따르면 신리의 첫 순교자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손경서 안드레아이다. 이후 1866년 흥선 대원군의 명에 의해 시작된 병인박해로 인해 한양, 수원, 홍주, 해미, 보령 갈매못, 공주 등에서 40여 명이 순교하였다. 이들 중 1866년 3월 30일, 성 손자선 토마스는 공주에서, 성 다블뤼 주교, 성 오메트르 신부, 성 위앵 신부, 성 황석두 루카는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의 길에 이르게 되는데, 후에 이 다섯 분은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1868년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에 의해 남원군 도굴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때 천주교 신자들이 이를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큰 박해가 다시 일어나게 된다. 이 박해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거나 피난을 떠나게 되고, 신리를 포함한 내포지역 교우촌 전체는 붕괴될 만큼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신리를 떠나 뿔뿔이 흩어지게 된 신자들은 순교자들에 대해 증언할 형편이 못될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다. 결국, 여러 차례에 걸친 박해로 인해 신리 교우촌은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단 한 명의 신자도 살지 않는 비신자 마을로 변하게 되었다. 박해가 끝난 후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신리에는 오랫동안 신자들이 터를 잡지 못했다. 오랜 박해를 기억하는 주민들이 천주교 신자들의 유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리는 조선 시대 내포 교회의 중심이었고, 수많은 순교자들과 선조 신앙인들의 땅으로서 신자들에게는 신앙을 회복해야 하는 소중한 장소로 기억되고 있었다. 1892년 프랑스 선교사 퀴를리에 신부가 양촌에 지금의 합덕 성당을 세우고 난 뒤, 1823년 신리에 공소가 설립되게 되었다. 1927년 신리 신자들은 성 다블뤼 주교가 지냈던 성 손자선 토마스의 집을 매입하여 공소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집은 처음 지을 때 사용했던 대들보, 서까래, 주춧돌, 상량문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성인들의 손길과 신앙을 느낄 수 있다.

 

- 순교기록화는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식을 시작으로 강경 포구 상륙, 신리 성지에서의 사목 활동, 박해와 순교에 이르기까지 1점당 1000호에 가까운 대형 장지에 우리나라 전통 채색기법으로 섬세하고 장중하게 그려냈다.

 

 

현재 신리성지는 과거 선조 신앙인들이 살았던 장소를 현대적으로 잘 표현한 순교자 기념 공원과 야외에서 다섯 성인들과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야외 경당이 조성되어 있다. 특별히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순교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미술관에는 일랑 이종상 화백이 봉헌한 다섯 성인의 영정화와 13점(1000호)의 순교 기록화가 전시되어 있다.

 

※ 충남 당진시 합덕읍 평야6로 135/ http://www.sinri.or.kr

 

[2020년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대전주보 4면, 사진 : 대전가톨릭사진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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