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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 여사울 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가 살던 곳
지번주소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122-4 
도로주소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여사울길 22
전화번호 (041)332-7860
팩스번호 (041)335-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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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메일 csy3212@hanmail.net
문화정보 충청남도 기념물 제177호(여사울 이존창 생가터)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땅에 쓰여진 신앙 이야기: 여사울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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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10-03 조회수131 추천수0

[땅에 쓰여진 신앙 이야기] 여사울 성지 (1)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순교자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고향

 

 

내포의 사도 이존창 생가터(충남 기념물 제177호).

 

 

충남 예산군 신암면에 위치한 여사울 성지는 충청도의 첫 천주교 신자이자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순교자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고향이며, 그가 천주교를 받아들여 전교 활동을 펼친 곳이다. 여사울을 중심으로 내포지방에 복음이 전해지고, 또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기에 이곳을 ‘신앙의 못자리’라고도 부른다. 여사울은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 형제 성인을 배출한 곳이고,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와 그의 아들 복자 김희성 프란치스코의 고향이기도 하다. 당시 여사울은 아래 지방(청주, 홍주, 홍산, 대흥, 보령 등지)에서 서울로 가려면 이곳에서 배를 타고 아산만을 건너야 하는 통행로였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부자들이 많이 살아 온통 집들이 기와집뿐이어서 마치 서울과 비슷하다 하여 ‘如서울’이라 불렸던 것이 여사울로 되었다고 한다.

 

순교자 이존창 루도비코는 1759년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권철신(암브로시오)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1784년 한국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권철신의 동생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을 통해 입교했다. 1786년 이래 약 2년 동안 지속된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에서 이승훈이 주교가 되고 10인의 신부 중 이존창도 신부로 활동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가족은 물론 내포 지방 일대에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훗날 ‘내포의 사도’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그는 가성직제도가 교리에 어긋남을 깨닫고 신부 영입을 위해 윤유일, 지황 등에게 여비를 주어 중국 북경을 찾게 하여 마침내 주문모 신부를 맞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여사울을 중심으로 내포지방에 복음이 전해지고, 또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기에 이곳을 ‘신앙의 못자리’라고도 부른다.

 

 

그에게 닥친 첫 번째 시련은 1791년의 신해박해였다. 이 박해로 최초의 순교자들이 탄생할 무렵, 이존창 또한 그의 명성 때문에 이내 체포되어 공주 감영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형벌과 회유가 번갈아 계속되면서 그의 마음이 흔들리게 되었고, 마침내 천주교를 요술이라고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는 석방된 후 천주교의 모든 가르침을 다시 지키기 시작하였고, 본분을 잊지 않기 위해 1791년 말 홍산 땅으로 이주를 결심하였다. 1794년 드디어 기다리던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을 때, 1795년 4월 계동 최인길의 집으로 찾아가 주문모 신부를 만나 함께 지방 교우촌 순회에 나섰다. 주문모 신부의 교우촌 순회는 이존창과 유관검이 보호와 안내를 맡았다. 당시 주문모 신부는 이존창에게 “그렇게 많은 죄를 범하고, 자격도 없이 성사를 행한 데다가 배교함으로써 신자들에게 나쁜 표양을 보였으니 어떻게 보속을 하겠는가. 순교만이 그대가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될 것이오.”라고 말했다. 이후로 이존창은 끊임없이 순교할 준비를 하였다. [2020년 10월 4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대전주보 4면, 사진 : 대전가톨릭사진가회]

 

 

[땅에 쓰여진 신앙 이야기] 여사울 성지 (2)

 

 

-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기념 성당.

 

 

1795년 말에 이존창 루도비코는 다시 체포되어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생활을 하던 중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로 이송되어 의금부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했지만,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다. 해음정법(고향으로 보내 처형하여 그곳 사람들의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의 명에 따라 공주로 이송되었고, 4월 9일 정약종(丁若鍾)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아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참수되었다. 이때 그의 목은 여섯 번째 칼질을 받고서야 떨어졌는데, 친척들이 그의 시체를 거둘 때는 머리가 목에 단단히 붙어 있었고, 단지 실낱같은 흉터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가 수차례 배교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회심하여 열성적으로 신앙을 살았던 평신도였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가경자’ 최양업 신부는 편지에 이렇게 남겼다. “이존창의 집안이 처음에는 모르고서 가짜 사제를 냈으나 나중에는 진짜 사제를 내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집안의 딸들에게서 두 명의 사제가 탄생되었습니다. 그의 딸 이 멜라니아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조모이고, 저의 모친 이 마리아는 이존창의 사촌누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입니다.” 이렇게 그가 한국 교회의 전교 활동과 성장에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두 분도 여사울 출신이다. 바로 김광옥 안드레아와 그의 아들 김희성 프란치스코이다.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는 대흥봉수산에서 순교한 복자 김정득 베드로와 함께 ‘의좋은 순교자’로 알려져 있다. 김 안드레아는 여사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그 지방의 면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50세쯤 되었을 때, 같은 마을의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되었다. 본래 훌륭한 자질을 갖고 있었지만, 지나치게 사나운 성질을 지닌 그가 입교함에 이웃들은 몹시 놀랐다. 그러나 열심한 신앙생활로 자신의 한계를 잘 극복한 김 안드레아는 1801년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수 차례의 신문을 받고 청주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고향에서 참수하라.’는 판결에 따라 복자 김정득 베드로와 함께 고향길을 향하던 그는 갈림길에 서서 서로 손을 마주잡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 고향에 도착한 이튿날 예산 형장에서 칼날에 목숨을 바친 그는 60세 가량이었다. [2020년 10월 11일 연중 제28주일 대전주보 4면, 사진 : 대전가톨릭사진가회]

 

 

[땅에 쓰여진 신앙 이야기] 여사울 성지 (3)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의 아들 김희성 프란치스코는 1765년 여사울에서 태어났다. 1801년 부친이 순교하자 그 모범을 따르겠다는 의지로 그의 신앙은 더욱 굳건해져 갔다. 이후 모든 재물을 버리고 경상도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하던 그는 1815년 3월, 을해박해로 안동 관아를 거쳐 대구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관원들이 놀랄 정도로 항구한 신앙을 보여주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오랫동안 옥중생활을 하고 1816년 12월 19일, 당시 나이 51세로 대구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여사울 출신으로 대표적인 순교성인은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 형제이다. 이들의 조부는 복자 홍낙민 루카로 1786년 가성직제도 안에서 사제로 활동하였고, 1791년 신해박해 때, 정조 임금의 권유로 배교하였지만,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보례와 고해성사를 받고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1795년 배교자 한영익의 밀고로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을 알게 되고 체포하려다 놓치게 되자 을묘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때, 홍낙민 루카도 연루되어 두 번째 배교를 했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로 다시 체포되었을 때, 그는 “저는 천주교 신앙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억지로 사악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10년 동안 이를 멀리하였으니 죄를 받아 마땅합니다. 이제는 천주교를 버릴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지도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모든 배교를 철회하고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다. 아버지의 순교 후 아들 홍기영 루카는 가족을 데리고 충청도 내포의 여사울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여사울에서 성장한 성 홍병주 베드로와 성 홍영주 바오로 형제는 회장으로 임명되어 열심한 신앙생활로 교우들을 꾸준히 보살펴 사람들의 눈을 끌었다. 그들의 일상은 남을 가르치는 것과 격려와 병자 간호와 그밖의 자선사업에 골고루 바쳐졌다. 선교사들은 그들의 정성과 헌신에 감격하여 여러 차례 아주 중요한 일을 그들에게 맡겼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들은 선교사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일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순교자의 자손답게 혹독한 신문을 받으면서도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한 두 형제는 형조로 이송되어 그곳에서도 배교의 유혹과 형벌을 받았다. 어떠한 형벌에도 굴복하지 않는 그들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1840년 1월 31일 성 홍병주 베드로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 후 그 이튿날 동생 성 홍영주 바오로가 당고개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조선 법률에 형제나 부자를 함께 처형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생인 홍 바오로의 사형 집행일을 하루 늦추었던 것이다. 이들 형제는 1984년 5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2020년 10월 18일 연중 제29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 대전주보 4면, 사진 : 대전가톨릭사진가회] 

 

※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여사울길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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