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쓰여진 신앙 이야기] 홍주 순교성지 (1)
복자 원(元)시장 베드로(1732-1793) · 복자 방(方) 프란치스코(?-1799) 충남 홍성군 홍성읍에 자리한 홍주 순교성지는 기록상으로만 신해박해(1791)부터 병인박해(1866) 때까지 총 212명의 신앙 선조들이 목숨 바쳐 순교한 전국 두 번째로 순교자가 많이 탄생한 곳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분까지 포함한다면 1,000여 명이 넘게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홍주 순교성지는 목사의 동헌, 교수형터(감옥), 홍주진영, 저잣거리, 참수터, 생매장터 등 6곳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심문과 고문, 죽음의 형장까지 순교자들의 신앙의 길을 깊이 묵상할 수 있는 곳이다.
특별히 충청도의 첫 순교자인 복자 원(元)시장 베드로(1732-1793)가 이곳 홍주 옥터에서 순교했다. 복자 원 베드로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지 몇 해가 지난 1788-1789년경에 사촌 형 원시보 야고보와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입교 후에는 자신의 것을 나누고 베풀며 끊임없이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여 하루 동안 무려 30가구나 하느님을 믿게 되었다. 신해박해 때 옥중 세례를 받고 추운 겨울 끼얹은 물이 얼음덩어리가 되어 숨을 거둘 때에 “저를 위하여 온몸에 매를 맞고, 제 구원을 위해 가시관을 쓰신 예수여,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얼고 있는 이 몸을 봉헌합니다.”라고 기도하며 목숨을 다하였다. 그때가 1793년 1월 28일로 그의 나이 61세였다. 복자 방(方)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면천의 ‘여’고을 태생으로 감사의 비장(裨將)을 지낸 사람이었기에 교우들 사이에는 ‘방 비장’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고향 인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는 누구보다도 빨리 이를 받아들였다. 교리를 실천하는 데 비상한 열심을 가졌던 프란치스코는 교우 중에서도 단연 뛰어나게 되었다. 1798년 정사박해 때 홍주에서 체포되어 6개월 동안 많은 형벌을 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식사를 받고 슬퍼하는 두 명의 동료에게,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것도 천주의 은혜이지만, 관장이 이렇게 후한 대우를 해 주는 것도 섭리의 은혜인데, 어째서 슬퍼만 하오. 그것은 마귀의 유혹이오. 만일 우리가 천당을 얻을 이렇게도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나중에 또 어떤 기회를 기대할 수 있겠소.” 하며 함께 옥고를 치른 후 홍주 읍내에서 1799년 1월 21일에 순교하였다. [2021년 1월 3일 주님 공현 대축일 대전주보 4면]?
[땅에 쓰여진 신앙 이야기] 홍주 순교성지 (2)
복자 박취득 라우렌시오(1769-1799) · 복자 황일광 시몬(1757-1802) 1769년 충청도 홍주의 면천에서 태어난 복자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는 고향 인근에 전파된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한양으로 올라가 지황(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족과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1797년 정사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지게 되어 피신하였지만, 아버지가 대신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면천 관아에 자수하였다. 심문 중에도 “인생이란 사라져 버리는 이슬과 같은 것이 아닙니까? 인생은 나그넷길이요, 죽음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라며 천주교를 전하였다.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주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또 옷이 벗겨진 채로 진흙 구덩이에 갇혀 밤새껏 추위와 비바람으로 고통을 받은 적도 있었다. 바로 이 무렵에 그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옥에 갇힌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천주의 은총을 얻을 수 있는지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잠결에 ‘십자가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였습니다. 이 발현은 약간 희미하기는 하였지만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박 라우렌시오는 곤장을 1,400대나 맞았으며, 8일 동안 물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하였지만 죽지 않았다. 이에 옥졸이 새끼줄로 그의 목을 졸라 결국 순교하였다. 이때가 1799년 4월 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약 30세가량이었다.
1757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황일광(黃日光) 시몬은 천한 신분 출신으로 어린 시절 몹시 어렵게 생활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그에게 이러한 생활을 보상해 주기 위해 놀랄 만한 지능과 열렬한 마음과 매우 명랑하고 솔직한 성격을 주셨다. 1792년 무렵, 황 시몬은 홍산 땅으로 이주하여 살던 중에 우연히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가 교리를 배우게 되었다. 그는 천주교 신앙을 접하자마자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동생 황차돌과 함께 고향을 떠나 멀리 경상도 땅으로 가서 살았다. 교우들은 시몬의 사회적 신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를 애덕으로 감싸주었다. 양반 집에서까지도 그는 다른 교우들과 똑같이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그는 농담조로 이렇게 이야기하곤 하였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황일광 시몬은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옥으로 끌려 갔다. 이후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며 황 시몬은 다리 하나가 부러져 으스러지도록 잔인하게 매질을 당해야만 하였다. 사형 판결을 받음과 동시에 조정에서는 ‘황일광을 고향으로 보내 참수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시몬은 고향인 홍주로 이송되었다. 그는 홍주에 도착하는 즉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는데, 이때가 1802년 1월 30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2021년 1월 17일 연중 제2주일 대전주보 4면, 사진=대전가톨릭사진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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