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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도영 신부와 김대건 신부 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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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1-11 조회수26 추천수0
파일첨부 강도영 신부와 김대건 신부 현양.hwp [140288]  

강도영 신부와 김대건 신부 현양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1863~1929) 신부는 서울에서 태어나 1883년부터 1892년까지 페낭 신학교에 유학했으며, 귀국한 뒤에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편입하여 학업을 마치고 1896년 4월 26일 정규하 · 강성삼과 함께 세 번째 한국인 사제로 서품되었다. 동시에 ‘미리내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된 강도영 신부는, 1929년 3월 12일 선종할 때까지 33년 동안 미리내 본당에 재임하면서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고, 그곳에 있는 김대건 신부 기념 경당 옆에 안장되었다.

 

설립 당시 1896~1897년의 미리내 본당은 공소 35개소, 신자수 1,779명을 기록했다가 1912~1913년에는 공소 34개소, 신자수 3,043명으로 증가하였다. 1913년 5월 첫 자본당으로 ‘압고지 본당’을 분리하고, 1927년 9월 두 번째 자본당으로 ‘남곡리 본당’을 분리하였다. 이러한 교세확장과 더불어 1906년 여름에 강신부는 《사사성경》의 마태오 복음을 번역했으며, 1925년에는‘성체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그의 재임 기간 중에 미리내 본당 내에서 이기준 신부 등 모두 5명의 사제를 배출하였다.

 

강도영 신부의 사목활동은 지역 사회의 계몽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1907년 강도영 신부는 교회 교리학교와 애국계몽운동으로서의 개량서당 성격을 함께 지닌 ‘해성학원’을 설립했다. 또한 1923년 무렵부터는 본당 신자와 지역 주민들에게 양잠업을 장려하고, 다음해에는 ‘해성제사’와 양잠 학교인 ‘잠업전수소’를 설립함으로써 농촌 부흥 운동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강도영 신부는 미리내에 부임하면서부터 순교자 김대건 신부 현양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1921년에 김대건 신부 기념관 건립이 결정되자, 그 건립 장소가 미리내로 결정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27년에는 미리내에 기념 경당을 건립한다는 것이 확정되고, 다음해 7월에는 경당이 완공되어 1928년 9월 18일 라리보 주교에 의해 강복될 수 있었다. 이처럼 강 신부의 순교자 현양 정신과 노력을 바탕으로 건립된 ‘복자 김대건 신부 기념 경당’(주보 : 한국 치명자들의 모후)은 이후 김대건 신부의 본래 무덤이 있던 묘역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순례 장소로 자리 매김되어 왔으며, 현재의 미리내 성지가 있게 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Ⅰ. 머리말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1863~1929) 신부는 1896년에 사제로 서품된 이후 33년 동안 ‘미리내 본당’(현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의 초대 주임으로 재임하다가 선종한 뒤 그곳에 묻혔다. 사제로서의 모든 생애를 미리내 본당과 함께했으니, 이 본당의 설립과 이후의 정착 과정은 바로 강도영 신부의 일생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강도영 신부의 신앙과 생애는 물론 미리내 본당에 대해 직접 연구한 경우는 없었다. 이와 관련된 글들은 대부분 단편적인 것들이다.1) 다행인 것은 이러한 문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강도영 신부의 ‘미리내 본당 사목 보고서[라틴어 公翰]’가 최근에 번역 공개되었다는 점이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의〈뮈텔(G. Mutel, 閔德孝) 문서〉에 포함되어 있는 이 보고서들은 본 글의 작성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2)

 

본 연구에서는 먼저 강도영 신부의 신학교 생활과 서품 과정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강 신부가 미리내 본당에서 이룩한 여러 가지 업적들을 설명함으로써 그 생애의 일단을 조명해 보려고 하였다. 특히 후자에서는 강도영 신부의 선교 활동은 물론 미리내 성당 건립, 해성학원과 해성제사의 설립 등을 차례로 설명한 다음, 가장 두드러진 업적으로 손꼽히는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신부에 대한 공경 행위 즉 현양 활동과 기념 경당 건립에 대해 살펴보고자 했다.

 

 

Ⅱ. 강도영 신부의 페낭 유학과 서품

 

강도영 신부의 부모나 유년 시절에 대한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단지 1863년 8월 6일 서울에서 출생했고, 집안이 가난한 탓에 장성할 때까지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다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또 그의 집안이 천주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열심한 신자였던 고모 강 마리아의 영향이 컸으며, 그가 뒤늦게 천주교 교육 기관인 종현학당(鐘峴學堂)3)에 입학해서 정식으로 학업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한 것도 고모였다고 한다. 이 해가 1882년으로 그의 나이 만 19세 때였다.4) 다음에 설명한 것과 같이 그가 종현학당에 입학한 다음해에 신학생으로 선발된 사실에서 볼 때, 그는 그 이전부터 사제의 길에 뜻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강도영이 종현학당에서 수학한 기간은 아주 짧았다. 왜냐하면 다음해인 1883년 후반 무렵에 페낭(Penang, 彼南) 신학교5)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한국을 떠나기 때문이다. 그에 앞서 1882년에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공부하고 있던 이내수(李?秀, 아우구스티노), 강성삼(姜聖三, 라우렌시오)과 5명의 신학생이 교구장 블랑 주교의 명에 따라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떠남으로써 조선교구의 신학 교육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6)

 

강도영 신학생이 부산 · 나가사키 · 상해 · 홍콩을 거쳐 페낭 신학교에 도착한 시기는 1883년 12월 7일로 그의 나이 20세 때였다. 이때 그와 함께 유학을 떠난 신학생들은 김성학(金聖學, 알렉시오, 14세),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13세)과 전 요한(15세), 김 베드로(13세) 등 모두 5명이다.7) 강도영 신학생은 이후 1892년 6월 20일 페낭 신학교를 떠날 때까지 8년 6개월 동안 재학하면서 라틴어와 수사학 공부를 마치고 철학 과정을 밟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에 설명한 것처럼 그가 페낭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되어 삭발례(削髮禮)를 받은 사실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1892년 6월 20일 페낭 신학교를 출발한 강도영 신학생은 김성학, 김원영, 홍병철(洪秉喆, 루카), 김승연(金承淵, 아우구스티노), 최 바오로 등 5명과 함께 상해를 거쳐 7월 12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이어 7월 14일에는 명동 주교관으로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를 방문한 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갔으며,8) 6개월 뒤인 1893년 3월 18일에는 강성삼 등 5명과 함께 삭발례를 받고 신학반으로 올라갔다.9) 신학반 과정 도중에 그는 폐병으로 한동안 고생하기도 했다.10)

 

1895년 6월 8일 강도영은 정규하·강성삼과 함께 대품인 차부제품을, 12월 21일에는 부제품을 받았다. 그런 다음 1896년 4월 26일, 약현 성 요셉 성당(현 중림동 성당)에서 뮈텔 주교의 집전 아래 함께 사제로 서품되었으니,11) 당시 강도영 신부와 정규하 신부의 나이는 32세, 강성삼 신부의 나이는 27세였다. 이들 세 명이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신부에 이어 세 번째로 탄생한 한국인 사제들이요, 최초의 페낭 유학생 사제들이었다.

 

 

Ⅲ. 강도영 신부와 미리내 본당


1. 선교 활동과 사제 양성

 

뮈텔 주교는 1896년 4월 26일의 서품식 당일 ‘갓등이 본당’(현 왕림 본당, 현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의 2대 주임 알릭스(J. Alix, 韓若瑟) 신부의 사목 관할 구역을 분리해서 ‘미리내 본당’을 설립하였다. 경기도 한수 이남의 두 번째 본당이었다. 동시에 뮈텔 주교는 새 사제 강도영 신부를 미리내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했으며, 강 신부는 5월 20일 서울 주교관을 떠나 미리내에 부임하였다.12)

 

이에 앞서 미리내 교우촌은 박해 이후인 1883년 뮈텔 신부(1890년 제8대 조선교구장 주교로 서품됨)에 의해 다시 공소로 설정되는데, 당시의 신자수는 82명이었다.13) 그리고 강도영 신부가 미리내에 부임하기 이전인 1893년 12월 초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부이용(C. Bouillon, 任加彌) 신부가 미리내 공소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운 뒤 1894년 4월 14일 ‘부엉골 본당’(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 주임으로 임명되었다.14) 이어 1893~1894년에는 미리내 공소 신자들이 기존의 사제관 터에 경당(현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 성당 앞, 양성면 미산리 60번지)을 건립하고, 갓등이 본당 알릭스 신부의 집전 아래 ‘성 요셉’을 주보로 축복식을 가졌다.15) 또 1895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빌렘(J. Wihelm, 洪錫九) 신부가 이곳 사제관에서 머물렀다. 당시 빌렘 신부는 병을 얻은 알릭스 신부 대신 갓등이 본당의 사목을 임시로 맡아 경기도 일대에 있는 32개의 공소들을 순방했는데, 그가 방문한 신자수는 1,821명이었고, 그중 미리내 본 공소의 신자수는 177명이었다.16)

 

1896년 5월 20일 미리내에 부임한 강도영 신부는 이듬해 4월까지 첫 공소 순방을 마무리하였다. 당시 본당에 속한 공소들은 양지 · 죽산 · 이천 · 광주 · 용인 · 양성 일대에 흩어져 있었으며, 첫 해에 설정된 공소수는 미리내 본 공소를 포함하여 35개소, 총 신자수는 1,779명이었다. 이 중에서 공소 신자수가 100명 이상인 곳은 미리내(185명), 양지 은이(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 152명), 양지 상·하 배마실(현 양지면 남곡리, 117명), 죽산 모래실(현 용인시 원삼면 사암리, 135명), 양성 원댕이(현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 101명) 등이었다.17)

 

강도영 신부는 1904년부터 1905년 초까지 미리내 성당과 사제관을 ‘은이 공소’ 지역으로 이전할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은이가 본당의 사목 관할 구역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그곳에 정주한다면 38개 공소가 모두 50리 이내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18) 그곳에는 이미 1893~1894년에 신자들이 건립한 6칸짜리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경당’이 있었지만,19) 성당과 사제관을 위해서는 새 집이 필요하였다. 이에 강도영 신부는 은이에 성당을 건립하거나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할 집을 매입하기 위한 비용을 모금하기도 했지만, 적당한 집이 나오지 않은 탓에 이 계획은 취소되고 말았다.

 

1905년 무렵부터 강도영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본당 분할을 건의하였다. 미리내 본당의 신자수가 2,800명이 넘었기 때문이다.20) 이와 관련해서 그는 1906년에 용인 도사리골(현 용인시 포곡읍 삼계2리)과 광주 미륵댕이(현 광주시 도척면 유정리의 미륵동·새말) 중의 하나를 새 본당 중심지로 선정해 주도록 뮈텔 주교에게 요청했다. 또 미리내 이웃의 ‘하우현 본당’(현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1900년 3월 설립) 주임 샤플랭(O. Chapelain, 蔡) 신부가 신자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하우현을 떠나 귀국하자, 다시 한번 자신이 요청한 곳에 새 본당을 설립하고 선교사를 그곳으로 보내주도록 건의했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21) 1906년 여름에 강 신부는 뮈텔 주교의 명에 따라《사사성경》(四史聖經, 1910년 간행) 중에서 마태오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22)

 

1910년에는 광주‘시어골 공소’(현 광주시 도척면 상림리)의 신자들이 경당을 건립한 뒤 시어골이나 도사리골 공소로 사제를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였고, 이를 계기로 강도영 신부는 세 번째로 뮈텔 주교에게 미리내 본당의 분할을 건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음해 3월에도 용인 ‘압고지 공소’(현 용인시 포곡읍 前垈里)에서 새 사제가 거처하기에 적당한 가옥을 매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다시 본당 분할을 건의한 적이 있었다.23) 교구장 뮈텔 주교가 미리내 본당의 분할을 결정한 것은 이로부터 2년 뒤였다.

 

1913년 5월 17일 뮈텔 주교는 미리내 본당의 분리를 결정함과 동시에 그 자본당으로 용인 ‘압고지 본당’을 설립하고, 그날 사제로 서품된 정규량(鄭圭良, 레오)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24)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압고지는 강도영 신부가 새 본당 중심지로 천거했던 곳 중의 하나로, 용인 도사리골과 인접해 있었다. 이 압고지 본당의 분리 결과 미리내 본당 관할이던 광주 지역의 공소들은 물론 용인 지역의 일부 공소들이 새 본당으로 이관되고, 다음의 표에서 보는 것과 같이 미리내 본당의 교세는 크게 감소하였다.

 

1914년에는 하우현 본당의 페랭(Perrin) 신부가 1차 세계대전으로 소집되면서 미리내 본당의 강도영 신부와 갓등이 본당의 6대 주임 김원영 신부가 이곳 사목까지 나누어 맡아야만 했다. 그러다가 1917년에는 미리내 본당의 강도영 신부, 갓등이 본당의 김원영 신부, 압고지 본당의 정규량 신부가 합의하여 세 본당의 사목 관할 구역을 조정했으며, 이때 미리내 본당의 16개 공소가 갓등이 본당과 압고지 본당 관할로 각각 이관되고, 압고지 본당의 5개 공소는 미리내 본당 관할이 되었다.26) 위의 표에서 보는 것과 같이 1917~1918년 미리내 본당의 공소는 28개, 신자수는 2,411명이었다.

 

뮈텔 주교는 1924년 6월 부여 금사리 본당에 있던 박동헌(朴東憲, 마르코) 신부를 강도영 신부의 보좌로 임명했으며, 1927년 9월 14에는 미리내에서 ‘남곡리(南谷里) 본당’(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 양지 본당의 전신)을 분리 신설함과 동시에 박동헌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27) 그러나 이때의 분할로 인한 미리내 본당의 교세 변화는 알 수 없다.

 

한편 강도영 신부는 1924년 ‘성체회’설립 허가를 뮈텔 주교에게 요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그런 다음 1925년 2월 23일 공세리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준 뒤 성체를 거둬 와서 재의 수요일에 미리내 본당의‘성체회’를 설립하였다.28)

 

강도영 신부는 미리내 본당에 재임하는 동안 모두 5명의 본당 출신 사제를 탄생시켰다. 우선 1913년 5월 17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된 진천 출신의 이기준(李起俊, 토마스) 신부가 있는데, 그는 미리내로 이주해 살던 1896년에 강도영 신부가 선발하여 용산 신학교로 보냈었다.29) 이어 1918년 3월 16일에는 용인 출신 황정수(黃貞秀, 요셉) 신부가 서품되었고, 1921년 6월 12일에는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용인에서 신학교에 입학한 박정렬(朴貞烈, 바오로) 신부가, 1923년 5월 20일에는 은이의 김영근(金永根, 베드로) 신부가 미리내 본당 출신으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1925년 6월 6일에 서품된 김인상(金寅相, 야고보) 신부도 용인 남곡리 출신이다. 또 한 명의 남곡리 출신으로 1934년 3월 17일에 서품되는 오연희(吳然喜, 마티아)는 그때 용산 신학교에 재학중이었다.

 

 

2. 성당 신축과 해성학원 · 해성제사 설립

 

강도영 신부는 미리내 부임 직후 1894년에 건립된 기존의 성 요셉 경당을 성당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1904~1905년에는 한때 성당을 은이로 이전할 계획도 세웠었다. 그러나 미구에 이 계획은 포기되고, 강도영 신부는 미리내의 기존 성당 서쪽, 즉 현재의 위치에 새 성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미리내의 새 성당 공사는 1906년 말 중국 인부들의 감독 아래 시작되었고, 이를 위해 본당 신자들은 건축비를 모금했다.30) 또 강도영 신부는 1907년 1월 말에 성당 건축 관련 자료를 얻기 위해 서울을 다녀오기도 했으며, 같은 해 8월 5일에는 명동대성당 건축을 감독한 경험이 있는 명동 본당 주임 푸아넬(V. Poisnel, 朴道行) 신부가 미리내 성당 건축을 돌아보기도 하였다.31)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07년 8월에는 마침내 410평의 부지 위에 길이 28m, 폭 9m, 건평 약 80평의 자연석 석조 성당이 완공됨으로써 옛 성 요셉 성당과 함께 두 개의 성당이 있게 되었다.32)

 

성당 완공과 동시에 강도영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신축 성당에 십자가의 길을 세우도록 허가해 줄 것과 미리내에 와서 새 성당을 강복해 주도록 건의하였다.33) 그러나 뮈텔 주교가 미리내를 방문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미리내의 신축 성당은 강도영 신부가 직접 기존의 성당 주보인 ‘성 요셉’을 주보로 정하고 축성한 뒤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34) 이후 강도영 신부는 1909년 3월에 성당 종을 마련하고 다시 뮈텔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강복을 요청했지만, 이때도 주교의 방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35)

 

미리내 새 성당은 완공된 지 4년이 지난 1911년부터 붕괴될 위험에 노출되면서 강도영 신부의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 특히 강도영 신부가 피정차 상경해 있던 1907년 봄에 건축된 부분이 그러했다. 그래서 강도영 신부는 1911년 8월부터 보수 공사를 차례로 시작했는데, 이에 앞서 같은 해 7월에는 교구 당가로 재임하던 비에모(M. P. Villemot, 禹一模) 신부가 뮈텔 주교의 명에 따라 미리내 성당의 수리 방법을 알아보기 위해 미리내를 방문했다.36) 이후 강 신부는 뮈텔 주교의 경비 도움과 신자들의 봉헌을 바탕으로 1912년 여름 장마 전까지 보수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37) 미리내 성 요셉 성당의 현재 모습은 이때 비로소 완성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뮈텔 주교가 미리내 성당을 방문한 것은 1913년 3월 29일이었다. 이어 다음날인 3월 30일에 뮈텔 주교는 베드로와 데레사를 대부와 대모로 삼아 종을 축복했고, 31일에는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J. Ferreol, 高) 주교의 무덤(1853년 미리내에 안장됨)을 방문한 뒤 4월 1일에 상경하였다.38)

 

새 성당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07년에 미리내의 열심한 신자들은 강도영 신부의 지시에 따라 새 성당 왼쪽에 교사로 사용할 건물을 건립한 뒤, ‘바다의 별’을 주보로 삼은 ‘해성학원’(海星學院, 일명 해성서당)을 열었다.39) 1922년의 상황을 보면 동정녀들이 교사로 활동하면서 소년 · 소녀 신자들에게 기도와 문답, 한글 등을 가르쳤고, 강도영 신부가 이들의 의·식만 해결해 주는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해의 학생수는 소년반 30명, 소녀반 약 10명이었다.40)

 

이후 강 신부는 교리 학교의 유용성을 인정하고 각 공소에 교리 학교를 설립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22년 무렵에는 ‘학일리 공소’(현 용인시 원삼면 학일2리의 고초골)에도 해성학원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 남·녀 학교(소년반 20명, 소녀반 10명)가 설립되었으며, 1926~1927년 무렵에는 다른 공소의 교리 학교들도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41)

 

한편 해성학원 남자부(소년반)는 미리내 본당의 2대 주임 뤼카(F. Lucas, 陸加恩) 신부가 부임하는 1929년의 기록, 3대 주임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의 은경축 기록에도 나타난다.42) 이에 대해 훗날의 증언에서는,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해성학원이 언제부터인가 해성학교로 불리게 되었고, 인근에 거주하는 비신자 학생들도 이 학교를 다녔으며, 여러 명의 교사들이 정식으로 임명되어 천주교 교리뿐만 아니라 한글, 한문, 산술, 역사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0년 3월 31일 미곡공립심상소학교(현 양성면 노곡리의 미곡초등학교)가 설립 인가되면서 해성학교는 소학교 졸업생들을 위한 중등반으로 유지되다가 광복 이후 폐쇄되었다.43)

 

이렇게 볼 때, 해성학원은 교회 교리학교로서의 성격과 애국계몽운동의 역할을 한 개량서당으로서의 성격을 함께 지닌 형태로 출발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신자뿐만 아니라 비신자 소년 · 소녀들도 해성학원에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교리학교로서의 성격 대신 애국계몽운동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해성학교 시절까지도 교리 교육이 병행되었다는 점에서 미루어볼 때, 지역 사회 안에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는 역할은 꾸준히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강도영 신부는 일찍부터 지역 사회의 농업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공소 순방 중에는 언제나 다른 지역의 농사 결과를 지켜보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리내 지역의 농민들에게 수확 성과가 예상되는 작물이나 과수 재배를 권장하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나무로 만든 자[尺]를 나누어주면서 감자를 심는 간격을 개선해서 수확을 올리도록 하는 등 ’농법 개량 사업도 전개하였다.44) 그러다가 1923년 무렵부터 미리내 성당 인근에 뽕나무를 심고, 신자들에게 담배 농사 대신 양잠을 장려했으며, 이러한 의견에 따라 양잠에 종사하는 신자들이 점차 많아지게 되었다.45) 1921년에 일제 총독부가 연초 전매령을 발표하면서 담배 농사로 인한 이익보다 양잠으로 인한 이익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46)

 

1924년 무렵, 강도영 신부는 복사 민영중으로 하여금 미리내 성당 인근에 ‘해성제사’47)와 기숙사를 건립하도록 하고, 양잠 학교 즉 ‘잠업전수소’도 설립하였다. 이후 안성군에서는 군의 보조금으로 매년 학생 10명과 교사 1명을 선발하여 이곳에서 양잠 기술을 익히도록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강도영 신부는 1925년에 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차용한 돈을 양잠업에 이용해서 수익을 올렸는데, 이때 미리내 신자들뿐만 아니라 본당 내 다른 공소의 신자들도 양잠을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48)

 

강 신부가 실천한 양잠 보급 활동과 해성제사 · 잠업전수소 운영은 신자들뿐만 아니라 인근 비신자들에게도 경제적인 도움을 줌으로써 미리내 본당의 사목에 유익했던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49) 따라서 해성학원이 지역 주민들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이었다고 한다면, 농법 개량 사업, 양잠 장려 활동, 해성제사와 잠업전수소의 운영은 강도영 신부가 전개한 농촌 부흥 운동의 일환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Ⅳ. 김대건 신부 현양 운동과 기념 경당 건립

 

강도영 신부는 1896년 5월 20일 미리내 본당에 부임하면서부터 페레올 주교와 순교자 김대건 신부의 묘소가 있는 곳에서 사목하게 된 사실을 영광으로 생각하였으니, 이는 그 자신이 1921년에 맞이한 사제 서품 은경축의 감사 답사에 잘 나타난다.50) 다시 말해 강도영 신부는 미리내에 부임하면서 순교자 김대건 신부에 대한 관심과 공경심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에 앞서 1846년 미리내에 조성된 김대건 신부의 무덤은 1882년 이후에 진행된 기해 · 병오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조사 수속(교구 재판) 판사 푸아넬 신부에 의해 1886년에 개봉된 적이 있었다.51) 이어 1901년 5월 20일에는 시복 판사 푸아넬 신부와 서기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신부가 미리내에 와서 안성 본당의 공베르(A. Gombert, 孔) 신부, 미리내 본당의 강도영 신부, 신자 30여 명이 참관한 가운데 김대건 신부 무덤을 발굴하였다. 그런 다음 횡대는 무덤 안에 다시 넣고 원상대로 봉분을 쌓았으며, 발굴된 유해는 강도영 신부의 사제관에 안치했다가 5월 23일 궤에 담아 무덤에서 나온 관과 함께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다.52) 이러한 과정에서 강도영 신부는 김대건 신부의 시복을 위한 자발적인 현양 운동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1921년 교황청에서는 김대건 신부가 포함된 기해·병오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한 추기경 회의의 첫 번째 단계인 전(前) 예비회의를 개최하였다. 또 서울에서는 1866년의 병인 순교자들에 대한 교회 재판(교황청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1년 4월 20일에는 한국 교회 최초로 한국인 사제 강도영 신부의 은경축이 미리내에서 있었고, 갓등이 본당의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이를 축하하는 ‘치명자 안드레아 김 신부 치명 성극’을 공연해 주었다. 《경향잡지》에서도 위의 사실들을 알리는 한편 치명 성극 대본을 연재함으로써 시복을 위한 자발적인 현양 운동을 유도하였다.53) 한편 강도영 신부는 이 해 용산 신학교에서 개최된 김대건 신부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사제와 신학생들 앞에서 특강을 하기도 했다.54)

 

1921년 5월 5~9일 사이에 개최된 한국인 사제 피정 때에는 김대건 신부 현양을 위한 기념관 건립이 결정되고, 이를 위한 기금 모금 운동 문제가 논의되었음이 분명하다. 이어 다음해 5월 15일에 시작된 한국인 사제들의 피정 때에는 다시 한번 이러한 문제들이 논의되면서 구체적으로‘어디에 기념관을 건립하느냐’하는 데 대해 의견 교환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55)

 

미리내에 있는 가경자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 사제의 옛 무덤에 기념관을 짓는 데 대해 황해도의 어떤 신부들은 ‘무엇 때문에 산골 구석 미리내에 (기념관을) 짓느냐, 용산(즉 순교지인 용산 새남터)에 지으면 참배하기 쉬우니 더 좋지 않겠느냐’고 제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반드시 미리내에 짓자는 것도 아니고, 작년에 이 일로 약조한 돈을 내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몇몇 신부들이 낸 돈은 당가(경리) 신부에게 맡겨놓았고, 미리내냐 용산이냐는 주교님의 뜻에 달렸다.’56)

 

위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기념관 건립 장소로는 용산의 새남터와 미리내 두 곳이 거론되었는데, 이 중에서 미리내에 기념관을 건립하자는 의견은 강도영 신부가 제기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강 신부는 건립 장소에 대한 최종 결정은 교구장 뮈텔 주교에 의해 내려져야 한다는 유보적인 입장도 피력했다. 이와 관련해서 훗날의 증언 기록에서는, 당시 강도영 신부가 “불과 몇 시간 동안 계시다가 치명하신 새남터보다는, 55년(1846~1901년)이라는 세월을 묻히고 살이 썩은 미리내에 경당을 세워야 합니다.… 고 주교님의 묘지도 이곳에 있으며, 그 당시 김 신부님의 시체를 모셔온 미리내 교우들의 열성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경당은 미리내에 세워야 합니다”57)라고 주장해서 뮈텔 주교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으로 설명한다.

 

강도영 신부는 이후에도 김대건 신부의 기념관이 미리내에 건립될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1923년에는 페레올 주교의 무덤과 김대건 신부의 무덤 자리가 있는 산(일명 ‘오두재’)을 신자 무덤, 즉 교회 공동 묘지로 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드브레 부주교에게 당부해서 결실을 얻기도 했다.58) 훗날의 상황 변화로 인해 훼손되지 않도록 하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결국 강 신부는 여러 사제들로부터 기념관 건립에 대한 호응을 얻어낼 수 있었고, 미리내 지역의 회장과 유지들도 1926년 9월 26일의 첫 ‘한국 치명 복자 79위 첨례’(현재의 순교자 성월) 때에는 경당 건립 기금을 모금하여 강 신부의 의지를 뒷받침해 주었다. 이어 강 신부는 1927년에 드브레 부주교로부터 허락을 받아 구체적으로 건축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59)

 

미리내 기념 경당 건축은 1928년 봄 오두재 부지(김대건 신부의 본래 무덤 자리 옆)의 정지 작업으로 시작되어 7월에 완공되었다. 그 규모는 길이가 8m(약 26척), 너비가 4m(약 13척)였으며, 건축 재료로는 양회가 사용되었다. 이때 복자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의 무덤 봉분도 양회로 쌓아올리고, 그 둘레에는 사제들의 무덤 경계임을 표시하기 위해 약 2m 높이의 담을 쌓았다고 한다. 그런 다음 강도영 신부는 같은 해 9월 18일 라리보(A. Larribeau, 元亨根, 1926년 서품) 부주교의 집전 아래 ‘한국 치명자들의 모후’를 주보로 기념 경당 강복식을 가졌다.60) 한편 그에 앞서 1921년 12월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미리내에 안장하는 데 공로가 컸던 이민식(빈첸시오)이 선종하여 김대건 신부 무덤 자리 옆에 안장되었으며, 강도영 신부도 1929년 3월 12일에 선종하여 같은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와 같이 미리내의 김대건 신부 기념 경당은 강도영 신부의 순교자 현양 정신과 노력을 바탕으로 완공될 수 있었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 기념 경당과 사제들의 무덤은 1929년 1월 3일 남곡리 본당의 청년과 어린이 70여 명이 이곳에 와서 순례 미사를 봉헌하는 등61) 건립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순례 장소로 자리 매김되어 왔다. 현 미리내 성지의 직접적인 기원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Ⅴ. 맺음말

 

강도영 신부는 서울에서 태어나 1883년부터 1892년까지 페낭 신학교에 유학했으며, 귀국한 뒤에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편입하여 학업을 마치고 1896년 4월 26일 정규하 · 강성삼과 함께 세 번째 한국인 사제로 서품되었다. 동시에 ‘미리내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된 강도영 신부는, 1929년 3월 12일 선종할 때까지 33년 동안 미리내 본당에 재임하면서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고, 그곳에 있는 김대건 신부 기념 경당 옆에 안장되었다.

 

강도영 신부 부임 초기인 1896~1897년의 미리내 본당 교세는 공소 35개소, 신자수 1,779명을 기록했다가 1912~1913년에는 공소 34개소, 신자수 3,043명으로 증가하였다. 그 동안 강 신부는 여러 차례 본당 분할을 교구장에게 요청했지만 실현되지 않았고, 1913년 5월 17일에서야 첫 자본당으로 ‘압고지 본당’이 분리 설립되었다. 그리고 1927년 9월 14일에는 두 번째 자본당으로 ‘남곡리 본당’이 분리 설립되었다. 한편 강 신부는 1906년 여름에 《사사성경》의 마태오 복음을 번역했으며, 1925년에는 ‘성체회’를 설립하였다. 강 신부 재임 기간 동안 미리내 본당에서는 이기준 · 황정수 · 박정렬 · 김영근 · 김인상 신부 등 모두 5명의 사제를 배출하였다.

 

강도영 신부는 1907년 8월 현재의 미리내 성 요셉 성당을 자연석으로 완공 축성하고, 1909년 3월에는 종을 마련하였다. 이 종은 4년 뒤인 1913년 3월 30일 뮈텔 주교에 의해 축복되었다.

 

그에 앞서 1907년에는 강도영 신부의 지시에 따라 교회 교리학교와 애국계몽운동으로서의 개량서당 성격을 함께 지닌 ‘해성학원’이 미리내 성당 옆에 건립되어 문을 열었고, 이 해성학원은 어느 때부터인가 해성학교로 불리면서 애국계몽운동으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해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광복 이후 폐쇄될 때까지 지역 사회 안에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는 역할도 하였다. 아울러 강 신부는 일찍부터 지역 사회 안에서 농법 개량 사업을 전개했으며, 1923년 무렵부터는 본당 신자와 지역 주민들에게 양잠업을 장려하고, 다음해에는 ‘해성제사’와 양잠 학교인 ‘잠업전수소’를 설립함으로써 농촌 부흥 운동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강도영 신부의 업적 중에서 전자의 해성학원이 애국계몽운동으로 평가될 수 있다면, 후자의 농법 개량과 양잠 사업은 농촌 부흥 운동의 일환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강도영 신부는 미리내에 부임하면서부터 순교자 김대건 신부 현양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1921년에 김대건 신부 기념관 건립이 결정되자, 그 건립 장소가 미리내로 결정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27년에는 미리내에 기념 경당을 건립한다는 것이 확정되고, 다음해 7월에는 경당이 완공되어 1928년 9월 18일 라리보 주교에 의해 강복될 수 있었다. 이처럼 강 신부의 순교자 현양 정신과 노력을 바탕으로 건립된 ‘복자 김대건 신부 기념 경당’(주보 : 한국 치명자들의 모후)은 이후 김대건 신부의 본래 무덤이 있던 묘역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순례 장소로 자리 매김되어 왔으며, 현재의 미리내 성지가 있게 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참고 문헌


사료

 

〈Listes des de Ryongsan〉,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필사본)

〈강도영 신부 서한집〉(뮈텔 주교 문서)

〈뮈텔 주교 일기〉,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미리내성지 소식지〉 19호, 2008. 7. 1, 강정근의 ‘김 신부님 경당’.

〈페낭 신학교 A. Volle 신부의 1982년 3월 17일자 한국 신학생 일람표 공한〉,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타자본)

《경향잡지》 1~35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영인본(1984년).

《본당별 교세통계표(서울 · 경기지역)》 1882~1911, 1912~1924, 1930~1937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전기 자료집 3)》, 한국교회사연구소, 1997.

증언 녹취자료2 〈미리내 성지(본당)과 해성학교 · 제사공장: 2008년 10월 30일, 오석근 · 장관근 증언〉

《교회사학》 5 자료편(2008.12)

 

연구논저

 

Fourer, La Coree, Martyri et Missionnaries, Nancy, 1895.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50년사 편찬위원회 편,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50년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2007.

오기선, 〈농촌 개혁의 선구자 강 말구 신부〉 《순교자들의 얼을 찾아서》 하, 한국천주교성지연구원, 1988

오기선, 《다시 태어나도 司祭의 길을》, 성황석두루가서원, 1985

오석근, 〈한국 제삼대 강말구(도영) 신부의 생애와 업적〉 《가톨릭청년》 15권 6호, 1961.

왕림본당사편찬위원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천주교 왕림(갓등이)교회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집(1)》, 천주교 왕림 교회, 1990.

이석원, 〈미리내 본당의 변모와 역사적 의의〉 《교회사학》 5, 수원교회사연구소, 2008.

정종득, 〈미리내 성지의 교회사적 의의〉 《교회사학》 5, 수원교회사연구소, 2008.

차기진, 〈박해기 수원 지역에서 활동한 성직자와 그 활동 지역〉 《교회사학》 2, 수원교회사연구소, 2005.

한국교회사연구소, 〈강도영 신부〉 《교회와 역사》 4, 한국교회사연구소,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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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석근, 〈한국 제삼대 강말구(도영) 신부의 생애와 업적〉 《가톨릭청년》 15권 6호, 1961 ; 〈강도영 신부〉 《교회와 역사》 4호, 1976. 2 ; 차기진, 〈미리내 본당〉 《한국 가톨릭대사전》 5. 1997, 2932~2934쪽.

 

2) 본 연구에서는 수원교구 미리내 성지와 수원교회사연구소의 도움으로 강도영 신부의 ‘미리내 본당 사목 보고서’를 입수해 활용할 수 있었다.

 

3) 종현학당(일명 종현서당)은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J. Blanc, 白圭三) 주교가 1882년 5월 무렵 인현동에 설립한 가톨릭 학교(College Catholique)인 인현학교(仁峴學校, 일명 韓漢學校)의 후신으로, 1883년 6월 21일 인현동에서 종현(현 명동)으로 이전되었다(차기진, 〈명동 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4, 1997, 2635쪽).

 

4) 〈말구 강 신부 별세〉 《경향잡지》 658호, 1929. 3 ; 오석근, 앞의 글, 41쪽.

 

5) 페낭 신학교는, 파리외방전교회에서 1665년 샴(Siam, 지금의 泰國)의 수도 아유티아(Ayuthia)에 설립했다가 훗날 인도의 폰디체리(Pondicherry)로 이전했던 ‘성 요셉 신학교’(College of St. Joseph Seminary)의 후신이다. 즉 1782년에 폐쇄된 폰디체리 신학교가 1808년 페낭 섬으로 이전 부활된 것이다. 페낭 신학교의 정식 명칭은 ‘포교지 신학교’(College General des Missions)였다. 그 자세한 내용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50년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50년사 편찬위원회 편,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2007), 84~85쪽을 참조.

 

6) 한국 신학생들이 처음 페낭 신학교에 입학해서 유학을 한 기간 즉 페낭 유학 제1기는 1866년의 병인박해로 신학 교육이 완전히 중단되기 이전인 1855~1862년이었다. 그러므로 1882년 이후 페낭 유학으로 재개된 신학 교육 시기는 페낭 유학 제2기가 된다(위의 책, 80~90쪽, 120~123쪽을 참조).

 

7)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페낭 신학교 A. Volle 신부의 1982년 3월 17일자 한국 신학생 일람표 공한〉(타자본) ;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Listes des Eleves du Seminaire de Ryongsan〉(필사본) ; Fourer, La Coree, Martyri et Missionnaries, Nancy, 1895, pp. 278~279.

 

8)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뮈텔 주교 일기〉, 1892년 7월 12~14일.

 

9) 〈뮈텔 주교 일기〉, 1893년 3월 18일. 이때 삭발례를 받은 5명의 신학생이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훗날의 서품식을 고려할 때 강성삼을 비롯하여 강도영, 정규하 등으로 추정된다.

 

10) 〈뮈텔 주교 일기〉, 1894년 1월 12일.

 

11) 〈뮈텔 주교 일기〉, 1895년 6월 8일, 12월 21일, 1896년 4월 26일.

 

12) 〈뮈텔 주교 일기〉, 1896년 4월 21일, 4월 26일, 5월 20일. 미리내 본당의 설립일은 정확히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피정 마지막 날(1896년의 피정은 4월 21일에 시작되었다), 즉 서품식 당일에 본당 설립을 발표하는 것이 통례였으므로 그 설립일을 4월 26일로 본 것이다. 당시 정규하 신부는 강원도 ‘풍수원 본당’의 2대 주임으로, 강성삼 신부는 신설 ‘절영도 본당’(현 부산 범일 본당의 전신)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13)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본당별 교세 통계표〉, 1883~1884년, 뮈텔 신부. 병인박해 이전인 1861~1863년에 미리내 공소는 칼레(N. Calais, 姜) 신부의 사목 관할 구역에 속해 있었으며, 1865년 이후에는 오메트르(P. Aumaitre, 吳) 신부가 이곳에서 생활하였다(차기진, 〈박해기 수원 지역에서 활동한 성직자와 그 활동 지역〉 《교회사학》 2호, 2005, 153쪽 ; 정종득, 〈미리내 성지의 교회사적 의의〉 《교회사학》 5호, 2008, 11쪽.

 

14) 〈뮈텔 주교 일기〉, 1893년 12월 22일, 1894년 4월 6일, 4월 14일.

 

15) 왕림본당사편찬위원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천주교 왕림(갓등이) 교회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집》 I, 천주교 왕림교회, 1990, 75쪽, ‘알릭스 신부의 1894년 3월 23일자 연말 보고서’.

 

16) 〈뮈텔 주교 일기〉, 1895년 10월 15일, 1896년 4월 15일 ; 〈본당별 교세 통계표〉, 1895~1896년, 미리내 빌렘 신부.

 

17)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본당별 교세 통계표〉, 1896~1897년, 미리내 강도영 신부.

 

18) 〈뮈텔 문서〉 1904-86, 강도영 신부의 1904년 4월 11일자 서한 ; 1905-2, 강도영 신부의 1905년 1월 3일자 서한 ; 1905-15, 강도영 신부의 1905년 1월 20일자 서한.

 

19) 왕림본당사편찬위원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앞의 책, 75쪽, ‘알릭스 신부의 1894년 3월 23일자 연말 보고서’.

 

20) 1904~1909년도의〈본당별 교세 통계표〉가 현존하지 않으므로 1905년경의 미리내 본당 교세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21) 〈뮈텔 문서〉 1906-4, 강도영 신부의 1906년 2월 2일자 서한 ; 1906-51, 강도영 신부의 1906년 2월 17일자 서한. 뮈텔 주교는 1906년 황해도 재령 본당에 재임하던 르각(C. Le Gac, 郭元良) 신부를 하우현 본당의 제2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22) 〈뮈텔 문서〉 1906-102 및 1906-103, 강도영 신부의 1906년 6월 22일자 서한 ; 1906-178, 강도영 신부의 1906년 9월 23일자 서한.

 

23) 〈뮈텔 문서〉 1910-135, 강도영 신부의 1910년 8월 25일자 서한 ; 1911-51, 강도영 신부의 1911년 3월 18일자 서한. 한편 강도영 신부는 1910년부터 성 베네딕토 수도회 입회를 희망했고, 1911년에는 교황의 윤허를 얻어 동 수도회에 입회할 수 있도록 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요청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뮈텔 문서〉 1911-98, 강도영 신부의 1911년 6월 25일자 서한).

 

24) 〈뮈텔 주교 일기〉, 1913년 5월 17일. 압고지 본당은 1930년에 폐쇄되고, 그 사목 관할 구역은 양지 남곡리 본당에 편입되었다.

 

25) 〈본당별 교세 통계표〉, 1912~1918년, 미리내 강도영 신부. 미리내 본당의 교세와 사목 관할 구역의 변모에 관해서는, 이석원, 〈미리내 본당의 변모와 역사적 의의〉 《교회사학》 5, 수원교회사연구소, 2008, 252~257쪽을 참조.

 

26) 〈뮈텔 문서〉 1914-241, 강도영 신부의 1914년 12월 29일자 서한 ; 1917-81, 강도영 신부의 1917년 9월 23일자 서한.

 

27) 《경향잡지》 543호, 1924. 6 ; 624호, 1927. 10 ; 김성희, 〈양지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9, 2005, 5956~5957쪽.

 

28) 〈뮈텔 문서〉 1924-11, 강도영 신부의 1924년 10월 25일자 서한 ; 1925-22, 강도영 신부의 1925년 2월 27일자 서한.

 

29) 〈뮈텔 문서〉 1899-244, 강도영 신부의 1899년 9월 21일자 서한.

 

30) 〈뮈텔 문서〉 1906-3, 강도영 신부의 1906년 12월 31일자 서한.

 

31) 〈뮈텔 주교 일기〉, 1907년 1월 23일, 8월 5일.

 

32) 〈뮈텔 문서〉 1907-106, 강도영 신부의 1907년 9월 1일자 서한 ; 1911-98-1, 강도영 신부가 작성한 1911년 6월 25일자의 ‘양성 미리내 성 요셉 성당의 현 상황’; 《경향잡지》 658호, 1929. 3. 위의 두 번째 기록은 강도영 신부가 1911년에 새 성당 보수를 위한 기금을 마련할 목적으로 프랑스 〈전교회지〉에 게재하기 위해 작성한 것인데, 여기에 새 성당의 규모가 명시되어 있다.

 

33) 〈뮈텔 문서〉 1907-105, 강도영 신부의 1907년 9월 1일자 서한 ; 1907-137, 강도영 신부의 1907년 9월 23일자 서한.

 

34) 〈뮈텔 문서〉 1909-71, 강도영 신부의 1909년 3월 21일자 서한 ; 1911-98-1, 강도영 신부가 작성한 1911년 6월 25일자의 ‘양성 미리내 성 요셉 성당의 현 상황’.

 

35) 〈뮈텔 문서〉 1909-71, 강도영 신부의 1909년 3월 21일자 서한.

 

36) 〈뮈텔 주교 일기〉, 1911년 7월 4일.

 

37) 〈뮈텔 문서〉 1911-98, 1911년 6월 25일자 서한 ; 1911-117, 1911년 8월 2일자 서한 ; 1911-137, 1911년 9월 7일자 서한 ; 1912-19, 1912년 1월 19일자 서한 ; 1912-69, 1912년 3월 30일자 서한 ; 1912-134, 1912년 9월 3일자 서한. 오기선 신부의 회고에 따르면, 뮈텔 주교는 “수단을 벗고 세속으로 떠나겠다”는 강도영 신부의 편지를 받은 뒤, 성당 상황을 파악하고 도와줄 방법을 알아보도록 하기 위해 비에모 신부를 미리내로 보냈다고 한다(오기선, 《다시 태어나도 司祭의 길을》, 성황석두루가서원, 1985, 158쪽).

 

38) 〈뮈텔 주교 일기〉, 1913년 3월 29일~4월 1일.

 

39) 〈뮈텔 문서〉 1911-98-1, 강도영 신부가 작성한 1911년 6월 25일자의 ‘양성 미리내 성 요셉 성당의 현 상황’.

 

40) 〈뮈텔 문서〉, 강도영 신부의 1922년 5월 연말 보고서.

 

41) 위와 같음 ; 〈뮈텔 문서〉, 강도영 신부의 1922년 5월 연말 보고서 ; 강도영 신부의 1926년(혹은 1927년) 연말 보고서. 후자의 보고서에는 연도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뮈텔 문서〉의 순서에서 볼 때 1926년 혹은 1927년으로 추정된다.

 

42) 《경향잡지》 660호, 1929. 4 ; 819호, 1935. 12.

 

43) 〈오석근 토마스(만70세)의 증언〉, 2008. 10. 30, 장소 : 양성면 미산3리 842번지, 대담자 : 원재연, 장광훈 ; 〈장광훈 안토니오(만71세)의 증언〉, 2008. 10. 30, 장소 : 위와 같음, 대담자 : 원재연, 오석근 ; 수원교회사연구소, 〈미리내 이덕우(마르코)의 증언 정리본〉, 2008. 10. 30. 미곡공립심상소학교는 강도영 신부의 복사를 지낸 민영중(서울대교구 민병덕 신부의 조부)이 설립했다고 한다.

 

44) 오석근, 앞의 글, 45쪽.

 

45) 〈뮈텔 문서〉 1823-168, 강도영 신부의 1923년 1월 27일자 서한. 이 해 봄철에 강도영 신부는 양잠 일을 하는 신자들을 위해 성령 강림 대축일의 파공 관면을 드브레(E. Devred, 兪世俊) 부주교(1921년 서품)에게 요청하기도 했다.

 

46) 〈뮈텔 문서〉, 강도영 신부의 1922년 5월 연말 보고서 ; 1923-172, 강도영 신부의 1923년 12월 26일자 서한.

 

47) 오기선, 〈농촌 개혁의 선구자 강 말구 신부〉 《순교자들의 얼을 찾아서》 하, 한국천주교성지연구원, 1988, 677쪽.

 

48) 〈뮈텔 문서〉 1925-25, 강도영 신부의 1925년 7월 19일자 서한 ; 1925-27, 강도영 신부의 1925년 8월 서한 ; 1925-28, 강도영 신부의 1925년 9월 8일자 서한.

 

49) 〈뮈텔 문서〉, 강도영 신부의 1928년 연말 보고서 ; 《경향잡지》 658호, 1929. 3.

 

50) 《경향잡지》 468호, 1921. 4, ‘말구 강 신부주의 은경축’.

 

51) 《경향잡지》 1241호, 1971. 8. 푸아넬 신부는 이때 무덤의 봉분만을 헤치고 횡대까지만 확인한 뒤 원상태로 복구하였다.

 

52) 위와 같음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전기 자료집 3)》, 동 연구소, 1997, 250~265쪽.

 

53) 《경향잡지》 468호, 1921. 4 ; 477호, 1921. 9. ‘김대건 신부 치명 성극’의 대본은 드브레 주교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재임 시절에 라틴어로 저술한 것을 김원영 신부가 한글로 옮긴 것이다.

 

54) 오석근, 앞의 글, 47쪽.

 

55) 1921~1922년의 한국인 사제 피정 날짜는 〈뮈텔 주교 일기〉, 1921년 5월 5~9일, 1922년 5월 15~22일을 참조.

 

56) 〈뮈텔 문서〉 1922-75, 강도영 신부의 1922년 5월 30일자 서한.

 

57) 오석근, 앞의 글, 47쪽 ; 〈미리내성지 소식지〉 19호, 2008. 7. 1, 강정근의 ‘김 신부님 경당’.

 

58) 〈뮈텔 문서〉 1923-170, 강도영 신부의 1923년 8월 15일자 서한 ; 1923-171, 강도영 신부의 1923년 10월 15일자 서한 ; 오석근, 앞의 글, 48쪽.

 

59) 《경향잡지》 613호, 1927. 5 ; 오석근, 앞의 글, 49쪽.

 

60) 《경향잡지》 645호, 1928. 9. 본래는 강복식을 김대건 신부 순교일인 9월 16일에 거행하려고 했으나, 이 날이 주일인 탓에 사제들의 참석이 어려울 것 같으므로 연기된 것이라고 한다.

 

61) 《경향잡지》 653호, 1929. 1.

 

[학술지 교회사학 vol 5, 2008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장)]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99923&Page=20&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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