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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 대산(복자 구한선 타대오)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모진 매질에도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젊은 순교자를 모시고
지번주소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구혜리 246-3 
도로주소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대산중앙로 183
전화번호 (055)582-8041
팩스번호 (055)582-8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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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관 대산 성당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구한선 타대오의 순교정신이 깃든 대산성당: 순교복자성지가 성당 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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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9-23 조회수83 추천수0

[본당 순례] 구한선 타대오의 순교정신이 깃든 대산성당


순교복자성지가 성당 안으로

 

 

대산본당은 2016년 설정 40주년을 기점으로 대전환의 시기가 되었다. 구한선 타대오 순교복자성지를 이전하여 성당 경내로 모신 것이다.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 가등산에 위치한 성지는 묘역 앞에 들어선 공장들로 인해 심한 소음과 쇳가루 날림이라는 심각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 순례자들의 접근성이 떨어지고, 묘역이 훼손될 우려에 봉착하여 현재 성당부지 함안군 대산면 대산중앙로(구혜리)에 성지 이전을 추진하였다.

 

2016년 10월 복자의 유해를 대산성당에 모시고 새롭게 성지를 조성했다. 건물 내에는 순교자묘소가 있는 무덤경당을 마련했고, 유해 일부가 안치된 야외기념제단을 건축하고 어머니쉼터는 순례자들의 쉼과 안내센터를 겸하는 공간이 되었다. 오랜 숙고를 거듭하여 시골성당과 순교복자의 삶에 어울리는 조촐하지만 의미가 깊은 성지성당으로 거듭나고자 했다.

 

구한선 타대오 복자는 함안 미나리골 출신이다. 병인박해 직전 리델 신부의 복사로 거제도까지 가서 전교활동을 했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진주 인근에서 붙잡혀 감옥에서 혹독한 문초를 받았다.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주요 교리를 적어 전교했고, 늙은 어머니가 문밖에서 들을까봐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부모님에게 효도하라고 가르치므로 천주교를 신봉하였습니다.”라는 심문에 대한 대답은 그의 지극한 효심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산신자들의 자부심

 

1866년 23세의 나이로 순교한 복자 구한선 타대오의 신심과 효심이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깃들어 있는 것은 오래 전부터이다. 함안본당 관할 공소시절부터 순교자의 행적을 조금씩 찾고 알아갔다. 1959년 치명일기의 기록을 토대로 대산면 하기리 신씨들의 묘소 안에 있는 순교자묘소를 확인했다. 이 놀라운 발견으로 신자들은 줄곧 묘소를 찾아 기도하며 그의 정신을 귀하게 여기며 새겼다. 1976년에는 외교인인 남의 문중 묘역 안에 있던 묘지를 평림리 가등산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전 후 본격적인 성역화사업은 2002년부터 시작하였다. 그리고 2014년 8월, 대산의 순교자 구한선 타대오는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복되었다.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124위 시복식에 참가했던 신자들은 그 감동을 여전히 잊지 못한다. 방한한 교황께서 집전한 시복식에서 미나리골 젊은 순교자의 신앙이 높이 들어 올려졌다. 대산신자들은 순교자의 후손인 것이 영광스러웠고, 자신들도 들어 올려진 것을 느꼈다.

 

오랜 시간 동안 순교자의 흔적을 찾아 나섰던 시간과 역경 속에서 몇 차례 묘소를 이전해야만 했던 상황들은 이제 그들의 자부심이 되었다. 효심 가득한 구한선 타대오 복자성지를 품고 있는 대산성당이다.

 

 

묵은 역사, 가등공소와 동박골공소

 

대산 역사에서는 주목할 가등과 동박골이 있다. 첫째 가등공소는 대산성당의 모체가 되는 신앙공동체이다. 1850년대 즈음에 이 신앙공동체가 이미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가등공소가 있던 그 동네를 가등마을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거기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신자들이다. 오래 이어져 오는 가등마을은 보존되어야 할 ‘교우촌’이라고들 한다. 정찬문 안토니오 복자의 아내인 칠원 윤씨도 가등 출신이며, 윤봉문 요셉 복자의 부친인 윤사우 스타니슬라오는 가등마을 가까운 어딘가에 묻힌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둘째는 동박골 공동체이다. 아직도 대산성당이라고 하면 ‘동박골 기도산’에 대해 떠올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1980년대 초에 동박골에 모여 기도하는 이들이 생겨나다가, 전국에서 이 산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주거공간도 생겨났다. 그러면서 기도산에서 기도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났다. 또 사회적 문제도 시끄럽게 되어 교도권은 ‘동박골 기도산에서의 신앙 활동 금지 결정’을 내리기에 이른다. 20여 년간 이어졌던 동박골 공동체 문제는 대산신자들에게 큰 아픔이 되었지만, 치유의 과정 속에서 굳건해졌다. 동박골은 그 이전에 가등공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박골공소가 있었다. 문헌에 따르면 1885년경에 영산에서 이사한 정기문 요한이 전교하여 300여 명의 신자를 얻게 된 신앙공동체이다. 동박골공소는 가등공소가 생겨날 즈음인 1850년 전후에 피난교우들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순교자 구한선 타대오 성지와 함께 대산 역사에서 소중히 다루어져야 할 오래된 신앙의 발자취이다.

 

 

이젠 대산성지성당

 

함안본당 소속이었던 대산공소가 1976년 5월 8일 대산본당으로 승격되었으니 40년이 훌쩍 지났다. 초기 당시 본당신자는 농사짓는 사람들이 97% 정도나 되었으니 낮에는 신자들을 성당에서 만날 수가 없어, 본당 신부가 들판으로 나가야 했다. 거기서 신자들과 접촉하고 회장도 만나 의논할 일을 해결했다. 모내기철에는 못줄도 잡아주고 점심도 함께 나눴다. 주일미사를 하다가도 비가 오면 논에 물 대러 가야하는 실정이었다. 그래도 교적에 있는 신자수는 700명이 넘었다. 1981년 기준으로 보면 장암공소, 성당공소, 봉곡공소의 공소신자가 138명이었고 주일미사 참례하는 신자는 약 270명이었다.

 

1991년 1월 구혜리 성당이 완공되어, 박정일 미카엘 주교 집전으로 축성식도 거행되었다. 대산지역 신앙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던 평림리 가등마을에서 구혜리로 이전하는 과정에서는 많은 갈등을 빚기도 했다. 대산 지역은 낙후된 농촌이라 인구수가 계속 줄었고, 사목에 어려움도 많았으므로 새로운 도약을 다짐하고 새 성전에서 새롭게 출발했다. 그리고 2000년대 중반부터는 순교자 구한선 타대오의 시복이 추진되면서 주목받게 되었다. 신자들도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성지조성과 순교자현양대회와 순례자를 보살피는 일에 몰두하며 ‘순교영성’을 키워나갔다. 2014년 시복식으로 그 기운이 절정에 달했지만, 성지의 심각한 환경문제가 발생했고 이농현상으로 신자수도 더욱 줄어들어 침체된 국면이 계속되었다.

 

대산성당은 40주년을 맞아 ‘본당 재탄생’이란 기치를 내걸고 혼연일체가 되었다. 내적으로 성경읽기와 필사, 묵주기도 40만단 바치기, 미사에 맛들이기, 쉬는 교우 모셔오기 같은 목표를 실행했다. 역사의 증인들을 만나고 자료들을 찾아내고 모으고 정리하여 「대산본당40년사」도 발간했다. 무엇보다도 순교복자성지를 성당 경내로 이전하는 큰일을 해냈다. 본당과 성지가 합쳐진 대산성당은 전국에서 찾아오는 순례자의 발걸음으로 힘을 더하고 있다.

 

[2019년 9월 22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가톨릭마산 4-5면, 황광지 가타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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