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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 멍에목 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복자와 순교자들의 고향이자 최양업 신부의 사목 순방지
지번주소 충청북도 보은군 구병리 298 
도로주소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구병길 6
전화번호 (043)543-0691
팩스번호 (043)543-0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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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앙의 땅: 청주교구 멍에목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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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12-02 조회수213 추천수0

[신앙의 땅] 청주교구 멍에목 성지


복자 · 순교자 배출한 교우촌

 

 

청주교구(교구장 장봉훈 주교)는 2016년 8월12일자로 교회사적 의미를 반영, 여러 차례 답사를 거쳐 멍에목 교우촌을 성지로 지정하고, 박진성 프란치스코 신부를 초대 성지 전담 신부로 임명하였다. 성지에서 미사를 봉헌할 상황이 되지 않아 보은성당에서 교구 신부님들과 많은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2016년 9월20일 멍에목 성지 설정 첫 미사 및 부임식 미사를 봉헌하였다.

 

모든 일정이 끝난 후 멍에목 성지를 가려다가 아쉽게 발길을 돌렸었는데 지난 토요일 순교자 현양비를 참배하고 레지오 단원들과 함께 따스한 봄 햇살을 받으며 보은 멍에목 성지로 출발하였다. 성지 개발 예정지인데다 안내 표지판도 없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 동네 어르신께 여쭤보니 소나무 숲을 지나면 된다고 하셔서 겨우 성지 예정지를 볼 수 있었다.

 

현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의 멍에목은 ‘멍어목이’라고도 하며, 윗멍에목(속리산면 구병리)과 아래멍에목(속리산면 삼가리)으로 나뉜다. 19세기에 처음 마을이 형성된 곳은 윗멍에목이다. 윗멍에목 마을은 2001년 행정자치부에 의해 메밀꽃 축제를 여는 ‘구병 아름마을’로 조성되었으며, 마을 뒤편의 구병산(876m) 중턱에는 한국의 3대 풍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구병산풍혈이 있다. 충북의 알프스라고 하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전승에 따르면, 멍에목은 정감록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마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승은 잘못된 것으로, 멍에목은 천주교 박해 때 신자들에 의해 ‘비밀 신앙 공동체인 교우촌으로 일구어진 마을’이다.

 

 

1827년 정해박해 때 복자 박경화 · 박사의 부자 순교

 

교회사의 기록에 ‘멍에목’이 나타난 것은 1827년의 정해박해 때였다. 이 박해 때 상주 포교들이 앵무당(현 상주시 화남면 평온리 앵무동) 교우촌에 살던 복자 안군심(리카르도)과 김사건(안드레아), ‘상주 멍에목’ 즉 ‘보은 멍에목’에 살던 복자 박경화(바오로)와 박사의(안드레아) 부자를 체포하였다. 이들은 먼저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상주와 대구 감영에서의 형벌은 혹독하였으나, 어느 누구도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이후 박경화(바오로)는 형벌로 인한 장독 때문에 옥중에서 순교하였고, 안군심(리카르도)도 1835년에 옥사하였다. 그리고 김사건(안드레아)과 박사의(안드레아)는 오랫동안의 옥살이 끝에 1839년 대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이 다시 멍에목에 모여 살게 된 것은 박해의 위협이 사라진 뒤였다. 그러나 1866년의 병인박해로 인해 평화는 깨지고 말았다. 박해가 일어나자 공주 땅에 살던 복자 김종륜(루카)이 이곳으로 피신해 와서 생활하다가 울산 죽령기(현 울산시 상북면 이천리)로 이주하였다. 박경화 · 박사의 부자와 김종륜은 2014년 8월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집전 아래 시복되었다.

 

1867년 10월에는 청주 포교들이 금봉(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월용리) 마을을 습격하여 멍에목 회장 최용운(암브로시오)의 처남인 맹인 전 야고보를 체포하였다. 이어 다음해에는 서울 포교들이 멍에목 교우촌을 급습하여 여 요한과 최조이 부부, 안 루카, 여규신, 최운흥 등을 체포하였다. 그런 다음 상주 장재동(현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의 장자동)에 피신해 있던 멍에목의 최용운 회장마저 체포하였다.

 

1867년 청주에서 순교한 전 야고보는 맹인이라고 해서 석방해 주려고 하자 “제가 비록 눈으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맹인이지만, 마음으로는 한 결 같이 천주를 받들어 공경하고 있습니다.” 라고 신앙을 증거하였다. 또 1868년의 순교자 최용운 회장은 갖은 문초와 형벌 속에서도 교우들의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권면하면서 신앙을 굳게 지키고 함께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

 

최용운(암브로시오) 회장과 처남 전 야고보는 최양업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순교한 사실이 기록에 나타나는 유일한 ‘하느님의 종’들이다.

 

 

최양업 신부가 성사 주고 미사 봉헌한 사목지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1851년 10월 15일자서한’에 따르면, 이 해에 멍에목 교우촌의 집들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모든 아픔을 신앙 안에서 받아들였고, 함께 힘을 모아 교우촌을 재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최양업 신부는 교우촌 순방 도중에 멍에목 신자들을 방문하여 성사를 주고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리고 예비 신자였던 양반 출신 조 바오로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멍에목 신자들은 조 바오로 동생의 위협과 횡포에 시달려야만 하였고, 어렵게 지은 공소 집을 허물고 애써 가꾼 통토를 잠시 버려야만 하였다.

 

보은 멍에목은 복자 박경화 · 박사의 부자가 거주하던 교우촌이요, 최양업 신부가 방문하여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한 공소였다. 그뿐만 아니라 1866년의 병인박해 이전까지 복자 김종륜, 순교자 최용운 회장과 안 루카, 여 요한 등이 비밀 신앙 공동체를 일구었던 천주교 성지다.

 

멍에목 성지에는 신앙 선조들의 믿음살이와 참 신앙이 짙게 배어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의 손길 아래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 신앙으로 인해 박해자들의 형벌 아래 죽어야만 하였다. 오늘의 후손들이 은총 안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터전을 닦아 주신 분들이다.

 

첫 미사 때 박진성 프란치스코 신부님께서 기쁨의 멍에가 될 수 있도록 하루에 한번 박진성 신부님을 위해 성모송 1번을 바쳐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멍에목 성지 개발 사업이 후원에 힘입어 주님의 뜻대로 성공적으로 조성되기를 기원한다.

 

◇ 멍에목 성지 후원 계좌

농협 301-0197-8500-41

우체국 300038-02-640906

예금주 : (재)청주교구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5월호, 유은정 마리아(청주 Re.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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