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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시메온(베르뇌 시메온)(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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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장 시메온(베르뇌 시메온) (張 Simeon(Berneux Simeon))
축일 9월 2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14-1866년
같은이름 시므온, 장경일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103위 성인 약전: 베르뇌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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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12-18 조회수110 추천수0

[103위 성인 약전] 성 베르뇌 장주교


배론에 신학당 건립

 

 

장 시메온 베르뇌 주교는 1814년 5월 14일 프랑스 망스(Mans) 교구에서 평범한 부모한테 태어났다. 부친은 대장간 일을 했는데 혁명이 일어나자 신앙생활을 멀리 하였다. 그러나 그의 모친은 신앙심이 깊은 부인으로서 갖은 사랑을 쏟아 아들을 가르쳤다. 그는 10세가 되었을 때 사제가 될 것을 결심하고 부모의 승낙을 얻어냈다.

 

그러나 그의 집이 너무 가난하여 많은 어려움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곳 본당의 보좌신부 후원으로 라틴어를 공부한 다음 그 도시에 있는 학교에 편입하고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몇몇의 정성어린 도움으로「망스」에서 면학을 계속했다. 이때 그는 소신학교에서 설교학을 연수했다. 1831년 그는 망스대신학교에 입학했으며 한때 건강 때문에 휴학했으나 다시 학업을 계속하여 1837년 5월 20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어 그는 신학교에서 교수생활과 지도신부의 역할을 담당하던 중 사도성직에 대한 강한 매력에 이끌려서 외국선교사의 길을 택하게 되었고 1839년 7월 15일에 그는 빠리외방선교회에 입회하게 되었다.

 

이어서 그는 그해 11월 28일 선교지 출발 명령을 받고 두 명의 젊은 사제와 함께 1840년 1월 15일 「빠리」를 떠나 그해 6월 26일에 「마닐라」에 도착하였다. 그 후 1841년 그는 조그만 중국 돛단배를 구해 타고 「통킹」으로 가는 도중에 베트남으로 가게 되었고 마침 그곳이 박해 중이라서 숨어있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베트남 감옥에서 갖은 고문을 다 받고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프랑스 함대 사령관의 특청으로 결국 1843년 3월 7일경에 석방되었다. 같은 달 17일 선교사들은 다시 상선을 구해 타고 이곳저곳 헤매다가 1843년 8월 23일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해 10월경에 그가 만주 주교로 물망에 오르게 되자 중국어 공부를 하면서 그 후 10여년간 갖은 열성으로 전교임무를 완수하면서 현명하게 교구를 이끌어 갔다.

 

그 후 1849년 요동땅에 박해가 일어나자 「상해」에 피신했다가 만주로 다시 돌아왔다.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으나 전교활동만은 지칠줄 모르고 열심히 이행하였다. 그 후 1854년 8월 5일에 교황 삐오 9세는 그를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고 페레올 주교의 후임으로 제4대 조선교구장에 임명함과 동시에 한국 입국을 명령하였다. 이에 그는 두 신부와 함께 두 달 동안 숨어서 조선 입국을 준비하던 끝에 다행히 조선 교우 홍봉주의 안내로 상복을 입고 미투리를 신고 중국에서 4일만에 1856년 서울에 입국하였다. 즉시 그는 교세를 정리하면서 포교활동을 시작할 수가 있었는데 이는 만주에서 오랜 사목활동과 중국어를 다 배웠기 때문이다.

 

즉 그는 입국하자마자 경기도에 산재해 있었던 60여 개의 공소를 상복을 입고 다녔다. 1년 후 1857년 한국 최초의 성직자회의를 열어서 기도서의 개편과 직무를 분담하였으며 11년간 한국에서 선교하였던 다블뤼 안 신부에게 부주교의 성성식을 거행했다. 이 성직자회의 결과 그는 1857년 8월 「장주교제우윤시서」를 발표하면서 그 당시 한국교회가 내외적으로 직면했던 여러가지 법규와 제도 등의 문제들을 규명하면서 한국교회 입장을 과시했다. 또한 배론에 신학생을 양성하기 위해 신학당을 세웠으며 교회서적이나 출판물을 대량 저술 정리, 출판하였다. 그리하여 교세가 날로 확장되었고 교우 수는 증가하였다.

 

1864년 철종이 승하하고 12세의 고종이 등극하면서 고종의 부친인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마침 동년에 국경 북쪽에 러시아 상선이 나타나서 통상을 요구했다. 이에 대원군은 장 베르뇌 주교에게 러시아를 물리치겠다고 제의를 해왔다. 물론 장 주교는 이러한 제의에 당시 국내외의 사정 때문에 동의할 수 없었고 또한 거절을 표명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와같은 여러가지 복잡한 사정으로 1866년초에 병인대박해가 시작되면서 그동안 활약했던 성직자들과 신자들 수천 명이 한꺼번에 학살되기 시작했다.

 

1866년 2월 23일 다섯 명의 포졸들이 주교댁을 급습하여 장 주교를 체포한 후 포도청으로 끌고갔다. 저녁때가 되자 재판장이 나와 장 주교를 문초하면서 천주교에 관한 그의 설명을 다 들은 후 다시 감옥에 가두게 하였다. 같은 달 27일 대원군과 형조 재판관들은 장 주교를 끌어내어 갖은 심문을 다하면서 발목과 무릎을 조여 주리를 틀고 나무걸상 형틀 뒤로 두 팔을 제쳐 매어 놓고서는 큰 곤장대로 매질을 가했다.

 

때를 같이하여 김 도리 신부와 서 볼리외 신부 그리고 백 유스뜨 마리아 브리뙤니에 신부 등도 체포되어 같은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이윽고 1866년 3월 6일 장 주교 일행은 참수사형선고를 받고 다음날 7일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묶인 채 감옥에서 끌려나와 수레에 실려 현장으로 향하였다. 장 주교는 『우리가 한국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고!』 하면서 기뻐하였다.

 

참으로 이들 얼굴에는 희색이 넘쳐 흘러 있었다. 사형장은 한강의 새남터 강변이었는데 이미 3천 명의 군졸들은 천막을 쳐놓고 죄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도착하자 둘씩 무릎을 꿇게 하고 양쪽 귀를 화살로 내리 꿴 다음 이들 얼굴에 백회를 뿌림으로써 모든 처형준비를 다 갖추었다. 한편 선교사들의 양팔은 어깨너머 뒤로 엇갈려 묶인 채 병졸들이 떠받고 있는 기둥에 매었다. 병졸들이 강변 주위를 한 바퀴 돈 다음 천막 앞에 멈추자 마침내 포도대장은 사형선언문을 선교사들에게 낭독하였다.

 

선언문의 낭독이 끝나자 칼을 든 병졸들이 날뛰고 소리를 외치며 돌다가 장 주교의 목을 칼로 내리쳤다. 장 주교의 목이 두 번째로 내려친 칼날에 떨어지니 한 병졸이 그 머리를 포도대장 앞에 갖다 보인 다음 높이 군문효수로 매달았다.

 

그런데 당시 증인들에 의하면 장 주교는 처형되는 순간 얼굴에 의미있는 미소를 지었는데 이 미소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계속 되었다고 하였다. 이때 순교한 선교사들의 시체는 3일 후 교우들이 와서 그곳 부근인 와고개(瓦暑峴)에 정성껏 장례를 지냈다.

 

[가톨릭신문, 1985년 3월 17일, 김옥희 수녀(한국순교복자회, 오륜대순교자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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