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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뇌 시메온(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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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베르뇌 시메온 (Berneux Simeon)
축일 9월 2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14-1866년
같은이름 시므온, 장경일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우리 본당 주보성인: 베르뇌 시메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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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11-05 조회수28 추천수0

[우리 본당 주보성인] 베르뇌 시메온


박해 무릅쓰고 조선 복음화에 투신

 

 

베르뇌 시메온 성인은 조선대목구의 제4대 주교로, 박해를 무릅쓰고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헌신한 순교자다.

 

성인은 1814년 프랑스 망스에서 태어났다. 성인은 가난과 어려움을 딛고 우수한 성적으로 1837년 사제품을 받고 신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그러나 성인은 사제생활 속에서 선교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외국선교사의 길을 찾았고 1839년 파리외방선교회에 입회했다.

 

성인이 선교로 나선 것은 우리나라가 처음은 아니다. 성인은 1841년 조그만 중국 돛단배를 타고 베트남을 향했다가 체포돼 온갖 고문과 사형선고를 당했다가 석방되는 고초를 겼기도 했다. 또 1843년에는 중국에 입국해 중국어를 익히고 건강도 돌보지 않은 채 만주 등의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성인은 제4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됐고,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조선입국을 준비하다 1856년 한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성인은 빠르게 사목체계를 잡아, 교세를 정리하고 선교에 임할 수 있었다. 중국어를 익힌 만큼 언어와 문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인은 입국하자마자 경기도에 산재해 있던 60여 개의 공소를 방문했다. 사목방문 시에는 외국인으로서 신분을 숨기기 위해 상복을 입고 다녔다. 1년 후인 1857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성직자회의를 열었고, 이 결과를 바탕으로 1857년 8월 「장주교제우윤시서」를 발표해 당시 한국교회가 직면했던 여러 법규와 제도 등의 문제들을 밝히고 교회의 입장을 천명했다. 또 방인 신학생 양성을 위해 배론에 신학당을 세운 것도 성인의 공로다.

 

성인은 출판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교회의 가르침을 배우길 갈망하는 신자들에게 쉬운 한글로 된 출판물을 보급하기 위해서였다. 성인은 성 황석두(루카)의 도움을 받아 여러 교회서적을 한글로 저술했을 뿐만 아니라, 목판인쇄소를 마련하고 성 최형(베드로)에게 출판기계를 맡겨 교회 서적을 대량으로 생산해 보급했다. 최형 성인의 문초 기록에 따르면 최형 성인은 베르뇌 성인의 명에 따라 4권으로 구성된 「천주성교공과」를 3000여 벌, 「성찰기략」을 1000여 권 찍어냈다고 한다. 이런 성인의 노력으로 박해 중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수가 빠르게 증가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성인은 성 볼리외 신부, 성 도리 신부 등과 함께 체포됐다. 성인은 포도청에서 문초와 고문을 당한 뒤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때 성인은 동료 선교사들에게 “우리가 한국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하면서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성인은 1866년 3월 7일 서울 새남터에서 참수로 순교했다.

 

교구 내 본당 중에는 제1대리구 수지본당이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삼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9년 11월 3일,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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