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심리학자가 만난 교회의 별들: 호연지기의 리더십, 김대건 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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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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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8-10-11 | 조회수936 | 추천수0 | |
[심리학자가 만난 교회의 별들] 호연지기의 리더십, 김대건 신부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증조부부터 시작된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마카오로 떠나 우여곡절 끝에 사제 서품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와 26세의 나이에 아깝게 순교하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짧게 기억하는 김대건 신부의 일생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서간 속에는 신앙 깊은 순교자의 순명하는 태도보다는 박해와 억압으로 시간을 낭비한 19세기 조선이라는 나라와 역사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새로운 땅을 실현하겠다는 의지와 포부를 가진 젊고 당당한 리더십이 더 많이 담겨 있는 것 같다.
김대건 신부는 하급관리였지만 천주교를 믿어 10년 동안 수형생활을 하다 옥사한 증조부 김진후의 자손으로 1821년 충남 당진 솔뫼에서 태어났다. 증조부가 며느리의 신앙생활에 감화받아 신자가 되었다 하니, 가부장제적인 조선에서 무척이나 시대를 앞서간 가문이 아닐 수 없다. 할아버지, 작은할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순교한 신앙 깊은 집안이라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천주교인들이 모여 살던 용인 골배마실로 이주한다. 1836년 교우촌을 방문한 파리외방전교회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장차 훌륭한 신부가 될 재목으로 발탁된다. 그 후 한양에서 기본적인 라틴어와 교리 등을 공부하고서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만주, 요동을 거쳐 6개월 만에 마카오에 도착한다.
프랑스에서 온 선교사 신부들에게 신학, 철학, 역사, 지리, 라틴어, 불어 등을 배우면서 김대건 신부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계인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고, 교회사와 세계사를 배우면서 세상이 보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바뀌고 있다는 열린 관점도 지니게 된다. 마카오를 점령하고 있던 포르투갈의 정치적 환경이 불안해지자,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필리핀 마닐라로 이동한다. 1842년 신학생 신분의 김대건은 프랑스의 에리곤호 선장의 요청으로 일종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항해 조건이 악화되자 중국의 주산으로 임시 기착한다. 당시 난징조약 체결 현장을 보는 등 견문을 넓힌 김대건 신부는 1844년 부제가 되자 조선으로 잠시 돌아왔지만, 곧 다시 인천에서 배를 마련해서 험난한 항로를 거쳐 상하이로 가서 마침내 사제 서품을 받게 된다.
다른 기록이 없으니 확인할 길은 없지만, 서간문으로만 볼 때 최소 8회 이상 새로운 항로를 여행한 셈이다. 김대건 신부의 사촌 김지식을 고조할아버지로 둔 대전교구 김용태 신부에 의하면 마카오에서 공부할 때는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성바오로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며 기도했다고 한다. 자신을 단련시키는 데 엄격하였기에 가능한 여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순교한 증조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를 닮게 해달라는 기도가 주효했던 것일까. 신앙심만 깊은 것이 아니라 학문과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박식하고 재능이 많은데다 어떤 위험한 일이 생겨도 호연지기를 보였던 담대한 분이라 전해진다. 그의 라틴어 서간들에는 풍랑이나 질병 기아 등 무수한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오히려 주변사람들을 다독이면서 강력한 리더십과 인내심을 발휘하는 김대건 신부의 성격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상하이에서 영국 영사를 만났을 때도 전혀 기죽지 않아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신기해한다는 일화가 서간문에도 언급되었으니 전하는 말에 신빙성이 더해진다. 헌종실록에도 외국어를 여러 개 할 수 있어서 놀랍다는 김대건 신부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중국어는 물론 마카오와 필리핀에 살았으니 간단한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또 영국 영사와 대화를 했다고 하니 영어까지 구사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당시 국제도시였던 마카오에서 공부한 김대건 신부의 뛰어난 지적 능력과 새로운 문물에 대한 수용 능력이나 관찰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또 후에 지도를 제작해서 헌종에게 바칠 정도의 그림 솜씨와 지리학 지식도 갖추었다. 또한 서양사람 못지않은 훤칠한 키와 외모였다고 한다. 새로운 문물을 받아 흡수하는 문필가의 섬세한 관찰력과 감수성이 녹아 있는 서간문들은 한 편의 소설처럼 읽힌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근대의 최초 외국 유학생으로 유길준을 꼽지만, 연대로 보면 김대건 신부가 훨씬 앞서 있다. 부제를 거쳐 정식 사제가 되었으니 외국에서 유럽식 신학대학을 졸업한 셈이다. 또 제주도, 인천, 마카오와 필리핀 상하이, 주산, 만주 등을 오가며 선교사들이 입국할 수 있는 뱃길을 개척하였으니 근대적 의미의 항해사이기도 했고, 세계지도를 본인의 그림 솜씨와 라틴어 실력으로 만들었으니 화가이며 지리학자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김해 김 씨의 자손이며, 신앙심이 깊은 증조부 김진후 비오와 둘째 할아버지 김종한 안드레아를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한, 한국의 전통정신과 문화를 이어가려고 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조정은 뛰어난 르네상스 맨인 김대건 신부의 뜻을 펼칠 수 없게 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실패한 권력이었다. 옹졸한 파벌 싸움에서 시작된 천주교 박해의 와중에 스물여섯 살 김대건 신부는 그의 특별함을 알아본 권력층의 배교 회유도 마다하고 끝내 순교한다. 교회사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자랑스러운 순교였지만, 세속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뛰어난 능력과 과감한 행동파였던 김대건 신부를 형장으로 내몰았으니 조상에 대한 원망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선진국들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가던 19세기, 조선의 왕실과 양반들은 종교를 탄압하면서 김대건 신부와 같은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는 빼어난 인재들을 살육했고 결국 그들은 양반사회라는 솥단지에 갇혀 서서히 몰락했다.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천주교와 자생적으로 생긴 동학을 억압하느라 모든 국가 재정은 파탄이 나고 결국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를 넘기게 되었으니, 전쟁과 가난과 억압의 20세기로 꼬여버린 이유다. 조선은 천주교를 박해하면서 발전된 서양문물을 직접 받아들일 모든 통로를 차단시켜버려 세계사의 흐름에서 뒤처진다. 김대건 신부의 순교는 단순한 종교적인 사건을 넘어 한국사와 세계사에서 매우 중요한 갈림길이었던 셈이다. 김대건 신부의 삶과 죽음은, 새롭게 다시 태어나고자 했지만 뜻을 접어야 했던 근대 한국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에게 천주교란 단순한 종교적 차원을 넘어보다 평등하고 자유롭고 합리적인 새로운 세계로 열린 큰 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가족과 조상을 섬김에 소홀하지 않고 새로움과 낡음, 외부와 내부를 조화롭게 지니고 가고 싶었던 젊은이의 이상적인 삶의 방식이기도 했다. 가문에 대한 긍지는 공부를 가르쳐주는 사제 스승들에게 그토록 깍듯하고 예의 바를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한편 낯선 외국에서의 외롭고 힘든 공부는 오히려 가난과 불평등으로 신음하는 한국인에 대한 애정을 더 심화시켜주기도 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자존감이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혹은 자기와 다른 남들은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비뚤어진 이들, 또 발전된 선진국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로 자국은 물론 후진국을 멸시하는 이들과 얼마나 많이 다른가. 전통을 사랑하고 지켜가면서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고,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 약한 이들을 감싸고 사랑했던 김대건 신부님이 지금 이 땅에 오시면 뭐라 하실까. 참으로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불평불만과 패배적인 염세주의에 빠져 있는 21세기 한국인들에게 과연 무슨 말씀을 하실지 상상해보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새로운 문물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의연하고 당당하며 여유로웠던 김대건 신부의 젊은 시절을 따라가다보니, 소심하고 치졸한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우리 모습들이 자꾸 겹쳐진다. 나 자신을 포함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김대건 신부의 시대에 비해 물질은 풍요로울지 모르지만 점점 더 이기적이고 좁은 시각에 갇혀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 이나미 - 신경정신과 전문의. 미국 융 연구소와 뉴욕 유니언 신학대학원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 서울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이자 인권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행복한 부모가 세상을 바꾼다』 『운명에서 희망으로』 『성경으로 배우는 심리학』 『한국에서 심리학자로 살아보니』 등 다수가 있다.
* 이 글을 통해 이나미 박사는 평생 인간정신의 근본을 찾으며 종교적 심성을 탐구한 융의 분석심리학을 바탕으로 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의 삶과 사상을 살펴보고 그들이 터득한 신앙과 삶의 지혜 속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8년 10월호, 이나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