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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안드레아(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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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김대건 안드레아 (金大建 Andrew)
축일 7월 5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21-1846년
같은이름 김 안드레아, 김안드레아, 안드레아스, 앙드레, 앤드루, 앤드류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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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1-11 조회수184 추천수0
파일첨부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에 대한 연구.hwp [137728]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에 대한 연구

 

 

김대건 신부는 자기 집안의 유서 깊은 신앙과 순교 전통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자신이 조선 교회의 일원이라는 데 대해서도 자부심을 가졌다. 그는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내내 복통과 두통과 요통을 앓아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불리한 여러 조건들을 모두 극복하고 나중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매스트르(Maistre) 신부와 함께 세실(Cecille) 함장이 지휘하는 에리곤(l’Erigone)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하려고 시도하기도 하고, 육로로 국경을 넘어 조선에 입국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견문을 넓히고 또한 1839년 기해박해 이후 단절되었던 조선 교회와의 연락망을 복원하였다. 그는 1845년 1월에 육로로 국경을 넘어 조선에 입국한 뒤 배를 1척 구입하여 선교사들을 맞이하러 상해로 갔다. 그는 이 공로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8월 17일 상해의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Ferreol)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런 다음 그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Daveuluy) 신부를 배로 조선에 입국시켰다. 그는 선교사를 입국시킬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고 1846년 5월 14일에 마포를 출발하여 백령도로 향했다. 그는 백령도 부근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는 백 척 가량의 중국 산동 지방 어선을 발견하였다. 이 중국 어선들은 매년 음력 3월 초순에 이곳으로 와서 고기를 잡은 뒤 5월 하순에 돌아간다. 그는 이 중국 어선들을 이용하여 선교사들을 영접하고 편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임무를 마치기 직전인 6월 5일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9월 16일 순교하였다. 하지만 그가 탐사한 백령도 부근을 통한 입국로는 1856년 이후 선교사들의 주된 입국로로 활용되었다. 선교사들은 중국 어선을 타고 백령도 부근에 와서 조선 배로 갈아타고 조선의 해변에 상륙하였다.

 

 

Ⅰ. 머리말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성인은 우리나라 순교자들 중에서도 가장 추앙을 많이 받고 있다. 많은 신자들이 세례명을 지을 때, 김대건 성인을 자신의 수호자로 택해, 본명을 ‘대건 안드레아’로 짓고 있고, 많은 성당들이 김대건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으며, 한국성직자들도 김대건 성인을 자신들의 수호자로 삼고 있다. 또한 김대건 성인의 고향인 솔뫼와 한때 살았던 한덕동과 골배마실, 첫 사목지인 은이 등도 모두 사적지로 꾸며졌으며, 순교했던 새남터와 유해가 안장되었던 미리내도 성지로 가꾸어졌다. 아울러 성인의 생애는 여러 문학작품, 영화, 연극, 판소리 등으로 다양하게 다루어져 왔고, 성인의 유해는 상해(上海)에 있는 김가항(金家港) 성당을 비롯하여 독일, 오스트리아 등 세계 각국에 널리 분배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그런데 김대건 성인을 제대로 공경하고 현양하려면 그에 대해 올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해 올바로 알려면 그에 대한 연구가 폭넓고 깊이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현양과 연구가 병행되어야 서로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1) 그러나 그에 대한 공경과 현양의 정도만큼 그에 대한 연구는 다양하고 심도 있게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것 같다. 특히 그의 활동과 업적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2)

 

이에 본 연구에서는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우선 그의 가문의 유서 깊은 신앙 및 순교 전통과 교회에 대해 그가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아보고, 다음으로 마카오 신학교 생활의 어려움과 그 극복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 다음 선교사와의 입국 시도와 동북방 입국로 개척, 해로를 통한 선교사 영입과 사제 수품, 백령도 부근을 통한 입국로 개척과 그 활용 등에 대해 세밀히 연구해 보기로 한다. 이러한 연구가 김대건 신부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Ⅱ. 가문의 신앙 및 순교 전통과 교회에 대한 의식

 

김대건 신부 집안의 신앙과 순교 전통은 남다른 데가 있다. 그의 집안은 한국천주교회가 탄생된 지 얼마 안 되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의 집안에서 맨 처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의 종조부인 김종현(金淙鉉, 즉 希顔)이었다. 이후 김종현의 가르침을 받아 그의 동생들인 김택현(金澤鉉, 즉 宗元) · 김한현(金漢鉉, 즉 宗漢, 안드레아) · 김희현(金僖鉉, 루도비코)이 입교하였으며, 또한 그의 아버지인 김운조(金運祚, 즉 震厚, 비오)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김대건 신부의 집안이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가까이 살고 있던 내포의 사도로 유명한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의 전도를 통해서였다. 특히 김대건 신부의 조부인 김택현이 이존창의 딸 멜라니아와 혼인함으로써 김대건 신부 집안의 신앙은 더욱 무르익게 되었다.3)

 

이렇게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김대건 신부의 집안 사람들은 거듭되는 모진 박해 속에서도 대대로 신앙을 이어갔으며,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하였다. 그의 집안의 순교자들은 모두 10명에 달한다. 최초의 순교자는 그의 증조부인 김운조이다. 김운조는 1791년 신해박해 이후 붙잡혔다가 풀려나기를 거듭하다가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해미에서 10년 동안 옥고를 치른 끝에 1814년 10월 20일(음력) 76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이어 김대건 신부의 종조부인 김한현이 솔뫼에서 경상도 영양의 우련밭으로 피해 살다가 여기서 1815년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1816년 11월 8일(음력) 대구 감영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고, 당고모부인 손영욱(요셉, 김한현 사위, 김 데레사 남편)이 1817년에 체포되어 해미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1824년에 순교하였으며, 아버지인 김제린(金濟麟, 즉 濟俊, 이냐시오)이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8월 19일(음력)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또한 당고모인 김 데레사(김한현의 딸, 손영욱 부인)가 역시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그해 12월 5일(음력) 포도청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며, 김대건 신부 자신이 1846년 병오박해 때 체포되어 그해 7월 26일(양력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아울러 김대건 신부의 당숙인 김제항(金濟恒, 즉 明集 또는 明執, 루도비코)과 재당숙인 김제교(金濟敎, 즉 俊明)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공주에서 순교하였으며, 사촌인 김 베드로(김제철의 아들)가 1867년에 체포되어 공주에서 순교하였고, 역시 사촌인 김 프란치스코(김 베드로 동생)가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해미에서 순교하였다.4)

 

김대건 신부는 이러한 자기 집안의 유서 깊은 신앙과 순교 전통에 대해 남다른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그가 신학교 스승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 끝부분에서 자신을 ‘김해 김 안드레아’ 또는 ‘김해 김 조선인 부제’라고 표현하여 ‘김해’라는 본관을 특별히 밝히고 있는 점이다. 이처럼 본관을 특별히 밝히고 있는 편지는 현재 남아 있는 19통 가운데 9통이나 된다. 이 밖에도‘김 안드레아’, ‘조선인 김 안드레아’, ‘조선인 학생 김 안드레아’, ‘안드레아’, ‘탁덕 김 안드레아’ 등으로 자신을 다양하게 표현했는데, 이러한 다양한 표현들은 나름대로 의미를 담아서 표현한 것으로 보아진다.

 

그러면 김대건 신부가 신학교 스승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 끝부분에서 ‘김해’라는 본관을 특별히 밝힌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그것은 자신이 김해김씨 후손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면 김해김씨 후손의 어떤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일까? 우선 순위도에서 붙잡힐 때와 해주 감영에서 심문을 받을 때 자신의 신분을 양반이라고 강조했던 것과 같이 자신이 김해김씨 양반의 후손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순위도에서 붙잡힐 때와 해주 감영에서 심문을 받을 때 자신의 신분을 양반이라고 강조했던 것은 지체 높은 양반의 배는 함부로 징발하지 못하고 또한 지체 높은 양반에 대해서는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용하여 당면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것이었을 따름이다. 그의 집안은 이미 몰락하여 잔반으로 전락한 상태였기 때문에 양반 신분을 내세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양반의 후손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김대건 신부가 김해김씨 후손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내세운 것은 그의 집안의 유서 깊은 신앙 및 순교 전통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앞에서 알아보았듯이 그의 집안은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이미 그의 집안에서는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사람이 그의 아버지를 포함하여 5명이나 나왔다. 이러한 그의 집안의 유서 깊은 신앙 및 순교 전통은 교회 안에서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할 수 있고 또한 신학교 스승 신부들도 역시 영광스럽게 여길 수 있으므로 그들에게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신학교 스승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의 끝부분에서 ‘김해’라는 본관을 특별히 밝힌 것은 자기 집안의 유서 깊은 신앙과 순교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길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가문의 훌륭한 전통을 계승하여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인물이 되겠다고 스승 신부들에게 다짐하는 표현이었다고 생각된다.

 

김대건 신부가 자기 집안의 유서 깊은 신앙과 순교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긴 점과 관련해서는 그가 순위도에서 체포되었을 당시 그의 소지품에서 순교자의 유해와 유품이 나왔던 점도 주목을 끈다. 황해도 관찰사 김정집(金鼎集)이 1846년 5월 20일 임금에게 보고한 글에 보면, 압수한 김대건 신부의 소지품에서 한글로 된 작은 천주교 서적 1권과 몸에 차는 붉은 비단 주머니 1개가 발견되었는데, 주머니 안에는 성모와 아기 예수상이 그려진 비단 조각과 예수 성심상이 그려진 비단 조각이 하나씩 들어 있었고, 또 남색 명주 한 조각이 있었으며, 또 반이 삭았으나 길지 않았던 흔적이 있는 두발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5) 여기서 ‘반이 삭았으나 길지 않았던 흔적이 있는 두발’은 순교자의 유해로 생각된다. 그리고 남색 명주 한 조각도 순교자의 유품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압수된 김대건 신부의 소지품에서 나온 순교자 유해와 남색 명주 한 조각이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그가 1485년 4월 7일 리브와(Libois)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병풍, 조선지도, 빗, 붓, 돗자리 등과 함께 신부님들의 유해가 들어 있는 누런 주머니 세 개를 보낸 것으로 되어 있는데,6) 여기서 말한 ‘신부님들의 유해가 들어 있는 누런 주머니 세 개’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와 모방(Maubant, 羅伯多祿) ·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신부의 유해가 각기 들어 있는 주머니로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김대건 신부의 소지품에서 나온 유해와 남색 명주 한 조각은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서양 선교사들의 유해와 유품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앞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김대건 신부는 신학교 스승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의 끝부분에서‘김해’라는 본관을 특별히 밝혀 자기 집안의 유서 깊은 신앙과 순교 전통을 자랑스럽게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고틀랑(Gotteland) 신부는 1845년 7월 8일 예수회 장상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대건 신부가 선교사들을 영접하러 상해로 갈 때 그의 아버지를 비롯해서 조상 3명의 순교자들의 보호가 있었다고 언급하였는데,7) 이러한 고틀랑 신부의 말은 그가 상해에 도착하여 보낸 그의 편지를 보고 언급한 것이었다.8)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 특히 김대건 신부가 선교사들을 영접하러 상해로 갈 때 그의 아버지를 비롯해서 조상 3명의 순교자들의 보호가 있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소지품에서 나온 유해와 남색 명주 한 조각은 그의 집안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그는 집안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며 공경하면서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간구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한편 김대건 신부는 조선 교회에 대해서도 남다른 의식을 갖고 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이 가는 것은 그가 신학교 스승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 끝부분에서 자신을 ‘조선인 김 안드레아’, ‘김해 김 조선인 부제’, ‘조선인 학생 김 안드레아’ 등으로 표현하여 ‘조선인’이라는 점을 강조한 점이다. 이처럼 ‘조선인’이라고 특별히 밝히고 있는 편지는 현재 남아 있는 19통 가운데 모두 4통이다. 이 ‘조선인’이라는 표현도 ‘김해’라는 표현처럼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면 김대건 신부가 신학교의 스승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 끝부분에서 자신을 ‘조선인’이라고 특별히 밝힌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그가 부제로 입국하여 상해로의 출항을 준비하면서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이재의(李在誼, 토마스) 등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1839년에 순교한 몇몇 주요한 순교자들의 행적’뿐만 아니라 ‘조선 교회 창립에 관한 개요’와 ‘1839년 기해박해의 진상’도 서술한 점이다. 특히 그는 ‘조선 교회 창립에 관한 개요’에서 선교사들의 전도도 없이 한역서학서를 통해 천주교를 자발적으로 수용하여 1784년에 교회를 창립한 사실 등을 서술하였다.9) 또한 그는 동북방 입국로를 탐험하고 그 결과를 페레올(Ferreol, 高) 주교에게 보고하면서, 조선교회를 수호하는 천사에게 경의를 표하고 조선 순교자들의 기도에 의탁하면서 두만강을 건너 달단 지방으로 돌아왔다고 언급하여 조선 순교자들에 대한 공경심을 드러냈다.10) 아울러 그는 중국에 있을 때 조선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포졸들에게 자수한 것은 올바르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고 비난하는 말과 조선 신자들이 선교사들을 경멸하고 저버렸다고 비난하는 말을 몇몇 주목할 만한 사람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는데, 부제로 입국하여 그러한 문제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 뒤, 그러한 비난은 선교사들과 조선 신자들이 처해 있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했던 잘못된 말이라고 적극 해명하였다.11) 이러한 조선 순교자들이나 조선 교회에 대한 그의 남다른 의식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신학교 스승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 끝부분에서 자신을 ‘조선인’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자신이 조선 순교자들의 후예 내지는 조선 교회의 아들인 것을 자랑스럽게 밝힌 것이라고 생각된다.

 

 

Ⅲ. 마카오 신학교 생활의 어려움과 그 극복

 

김대건은 1836년 초에 입국한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김대건은 가장 늦게 신학생으로 선발된 탓에 1836년 7월 11일에야 서울의 모방 신부 댁에 도착하여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였다.12) 최양업이 2월 6일에, 최방제가 3월 14일에 서울의 모방 신부 댁에 도착하여 라틴어 공부를 시작했으니까13) 김대건은 두 사람보다 4개월 내지는 5개월 늦게 라틴어 공부를 시작한 셈이다. 이렇게 늦게 합류한 탓으로 김대건은 자연히 라틴어 공부가 부진하였다. 이 때문에 모방 신부는 김대건을 다른 2명과 함께 유학을 보내기가 주저되었지만, 앞으로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어 김대건을 다른 2명과 함께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대표부가 있는 마카오로 보내 공부시키기로 결정하였다.14)

 

김대건을 비롯한 세 신학생들은 1836년 12월 2일(음력 10월 25일), 조선 포교지의 장상들에게 순명하고 복종할 것과, 조선 포교지의 장상들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다른 회에 들어가지 않을 것 등을 서약한 뒤,15) 다음날 중국으로 귀환하는 유방제(劉方濟, 중국 이름 余恒德, 파치피코) 신부와, 안내자들인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등의 인도를 받으며 의주 변문으로 떠났다.16) 이때 조선인 신자들은 의주 변문에서 새로 입국하는 샤스탕 신부를 맞아들여 서울로 돌아왔고,17) 세 신학생들은 샤스탕 신부를 안내한 2명의 중국인 안내자들을 따라, 8개월 동안 요동과 만주와 중국을 걸어서 횡단한 끝에, 다음해 6월 7일(음력 5월 5일) 마카오에 도착했다.18)

 

김대건을 비롯한 세 신학생들은 파리 외방전교회가 동양인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운영하는 페낭 신학교에 갈 수도 있었지만, 당시 이 신학교 안에 파벌과 교만과 비판 정신 같은 부패 정신이 유행하고 있어서 면학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19) 그래서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은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에 조선 신학교를 임시로 세워 교육을 실시했다.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대표부에 머물고 있는 프랑 선교사들이 돌아가면서 담당했다. 신학생들은 르그레즈와(Legregeois) 신부, 칼레리(Callery) 신부, 리브와 신부, 데플레슈(Desfleches) 신부,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 베르뇌(Berneux, 張敬一) 신부, 페레올 주교 등에게 라틴어, 프랑스어, 성가, 교리, 철학, 신학 등을 배웠다. 이들 가운데 르그레즈와 신부와 리브와 신부는 차례로 마카오 대표를 맡았던 분들이고, 칼레리 신부는 신학교 교장 신부였으며, 매스트르 신부와 베르뇌 신부 및 페레올 주교는 뒤에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사로 활동하였다.20)

 

김대건을 비롯한 세 신학생들 가운데 교수 신부들로부터 가장 촉망을 받은 신학생은 최방제였다. 그는 세 명의 신학생들 중에서 믿음이 가장 강했고, 신심도 가장 깊었으며, 라틴어 공부도 제일 잘했기 때문에 교수 신부들은 그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걸었다.21) 그러나 최방제는 마카오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한 지 6개월도 채 못 되어 위열병에 걸려 1837년 11월 27일 사망하고 말았으며, 이러한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교수 신부들을 깊은 슬픔에 잠기게 했다.22)

 

동료를 잃은 슬픔을 떨치고 신학교 공부를 계속하던 김대건과 최양업 두 신학생은 아편의 거래로 광동과 마카오에서 소요가 일어나 안전이 위협을 받게 되자 1839년 4월부터 11월까지 여섯 달 반 동안 마닐라의 롤롬보이 수도원으로 옮겨 학업을 계속했다.23) 롤롬보이에 머무는 동안에 김대건과 최양업 두 신학생은 조선의 밀사들인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과 조신철이 1839년 3월에 북경에서 보낸 한 통의 편지를 받고 당시 조선 교회의 소식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24) 소요가 잠잠해진 뒤 다시 마카오로 돌아온 두 신학생은 1841년 11월 철학과정을 마치고 신학과정에 들어갔다.25)

 

마카오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최양업은 몸도 아주 건강하였고,26) 조선 교회를 위해 유익한 몸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며,27) 판단도 좋다는 평을 교수 신부에게 들었다.28) 그러나 김대건 신학생은 교수 신부들에게 그러한 믿음을 전혀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늘 복통과 두통과 요통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학생들은 공부하는 틈틈이 대표부의 여러 잡일도 했는데,29) 김대건은 마카오에서 칠면조 집의 대들보들을 들어 올린 뒤부터 허리에 고통을 느꼈다.30) 또한 그는 자주 꽃병들을 양팔로 잡고 가슴 위로 날랐으며, 또 자주 고통을 느꼈고, 또 때로는 가슴이 붓기까지 했으며, 또 소화가 아주 잘 안 되었다.31) 그래서 그는 의사이기도 한 칼레리 신부에게 증세를 이야기 했으나 칼레리 신부는 발육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다.32) 아울러 그는 스스로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거머리를 가슴에 붙이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가슴에 흠집이 일곱 군데나 남게 되었다.33)

 

김대건 신학생은 마닐라의 롤롬보이 수도원으로 옮겨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자주 복통과 두통과 요통을 앓았다. 그래서 리브와 신부의 주선으로 트와네트(Toinette) 신부에게 진찰을 받고 그의 처방대로 약을 지어 먹었으나 효과가 없었다.34) 이렇게 김대건이 늘 복통과 두통과 요통을 앓게 되자 리브와 신부는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9년 8월 11일 편지에서 김대건의 장래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었다.

 

두 교우(유진길과 조신철 : 필자 주)가 사용한 표현으로 미루어 그들은 조선 젊은이들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기대가 어긋나지 않을까, 적어도 부분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토마스는 계속해서 유리한 상태에 있고, 천주님께서 그의 건강을 허락해 주신다면 조선 포교지를 위해 유익한 몸이 될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불쌍한 안드레아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늘 위병과 두통과 요통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머리털만 보더라도 그의 큰 두통을 짐작하게 합니다. 지금 그의 머리털은 회색이고 희고 노랗고 거의 모든 색깔입니다. 저는 일찍이 이렇게 추한 머리털을 보지 못했습니다. 뿐더러 그는 판단이 늘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데플레슈 신부는 난처해하고 있습니다. 안드레아와 토마스 사이에 균형이 도무지 없기 때문입니다.35)

 

리브와 신부는 최양업에 대해서는 계속 유리한 상태에 있으므로 장차 조선 교회를 위해 유익한 몸이 될 것으로 확신했으나 김대건에 대해서는 늘 복통과 두통과 요통을 앓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판단이 늘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장차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걱정을 토로하였다. 또한 매스트르 신부도 그의 문체에 대해 어떤 때는 상당히 잘 쓰고 또 어떤 때는 상당히 잘 쓰지 못한다고 지적했다.36) 또한 그가 자주적이고 경솔하다고도 지적했고,37) 그의 행동이 주의 깊지 못하다고도 했다.38)

 

김대건은 1839년 9월 하순 무렵부터 건강이 차츰 나아지기는 했으나39) 여전히 몸이 아파 고생했다. 그래서 1842년에 프랑스 함대 에리곤(l’Erigone)호의 세실(Cecille) 함장이 중국어 통역을 맡아줄 조선인 신학생 1명을 달라고 부탁하자 매스트르 신부는 건강이 좋지 못한 김대건을 통역관으로 추천했는데,40) 에리곤호에서 보다 나은 치료를 받게 하려고 배려한 것이었다.41) 에리곤호의 의사는 김대건 신학생의 병이 큰 감기를 소홀히 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약을 지어주었는데 그 효과가 아주 좋게 나타나자 이에 고무된 매스트르 신부는 김대건이 에리곤호에서 치료를 더 잘 받아 완쾌되기를 기대했다.42)

 

김대건은 1842년 3월 8일까지 여전히 건강히 좋지 않았으나43) 1843년 3월 초부터 체질이 튼튼해져서 그간 중단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던 신학 공부를 다시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44) 아울러 그는 뚱뚱하고 크며 참된 빛에 눈을 열기 시작하였다.45) 그리하여 그는 끝내 여러 불리한 조건들을 모두 극복하고 장차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기에 이르게 된다.46)

 

 

Ⅳ. 선교사와의 입국시도와 동북방 입국로 개척


1. 매스트르 신부와 에리곤호를 이용한 입국시도

 

1842년에 이르러 김대건은 6년간의 마카오 생활을 정리하고 매스트르 신부와 입국을 시도하면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마카오를 떠나게 된다. 즉 영국과 중국이 벌인 아편전쟁이 끝날 무렵인 1842년 2월, 프랑스 함대의 세실 함장이 마카오 대표부를 찾아와, 조선으로 가서 조선 국왕과 통상조약을 맺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조선인 신학생 한 명을 통역관으로 달라고 요청하였다.47) 그러자 1839년부터 몇 년째 조선 교회로부터 소식이 끊겼기 때문에 대표부 신부들은 조선 포교지에 관한 확실한 정보를 수집하고, 또 그 포교지를 돌보도록 선교사를 입국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 그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여 신학생 1명을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주기로 하였다.48) 이때 매스트르 신부가 통역관으로 김대건 신학생을 지목함에 따라 그는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세실 함장이 이끄는 에리곤호를 타고 조선 입국을 시도하게 되었다.49)

 

김대건 일행이 탄 에리곤호는 1842년 2월 15일 마카오를 출항하여 2월 20일 마닐라에 입항하였다.50) 이때 김대건 일행은 배에서 내려 대주교 댁에 가서 주교관에서 묵기도 하고 성 요한 라테란(Saint Jean de Latran) 학교에 가서 지내기도 하였으며, 그곳 영사와 총독의 환대도 받았다.51) 에리곤호는 마닐라에서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장만해 가지고52) 다시 출항하여 대만(臺灣) 섬에 도착하였으며, 이때 김대건 신학생은 대만 섬의 산림 · 경치 · 토지 등과 그곳 주민들의 방언에 대해 관찰할 수 있었다.53)

 

에리곤호는 다시 대만 섬을 떠나 며칠 지나서 항주만(杭州灣) 앞바다에 있는 주산도(舟山島)에 입항하였으며, 여기서 약 2달 간 머무르는 동안 김대건은 주산 시내를 구경하기도 하고 라자리스트회 신부들을 만나보기 위해 주산 시내에 몇 차례 드나들기도 하면서 그곳 원주민과 이들을 위압적으로 대하는 중국인의 모습 등을 살펴보았다.54)

 

에리곤호는 영국인들이 남경(南京)을 탐험하기 위해 출발하자 다시 그들을 따라 주산을 출항하여 양자강(楊子江) 하구를 거쳐 오송구(吳淞口)에 도착하였으며, 이때 김대건 신학생은 양자강 중간에 있는 숭명(崇明)이라는 상당히 큰 섬과 영국군의 공격을 받아 파괴된 보산(寶山)과 오송구 두 도시도 살펴보았다.55) 또한 오송구에서 지루하게 여러 날을 보낸 뒤 중국 배 한 척을 빌려 양자강을 거슬러 남경으로 향하는 세실 함장 일행을 따라 그도 통역관으로 함께 갔다. 그들 일행은 도중에 진강부(鎭江府)에 들려 하루 동안 도보로 시가지를 걸어 다니면서 구경했는데, 이때 김대건 신학생은 영국군의 공격을 받아 폐허가 된 시가지의 모습도 살펴보았고 또한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눈앞에 당도한 영국군의 병력과 위협에 중국인들이 벌벌 떨면서 영국군에게 사람을 보내 강화를 요청한 상황에 대해서도 자세히 파악하게 되었다.56)

 

김대건은 다시 세실 함장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 남경에 도착하여 8월 29일 영국과 청나라 간에 남경조약(南京條約)을 체결하는 장면을 참관하였으며, 중국이 영국에게 배상금 2천백만원을 지불하고 6개 항구에서 영국과의 통상을 승인한다는 등의 조약 내용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게 되었고, 세실 함장 일행이 강화조약에 조인한 4명의 중국인 고관들을 만나는 자리에도 통역관으로 참석하였다. 그리고 장교들을 따라 높이가 2백 척이나 되는 보인사(寶印寺)의 탑을 비롯하여 남경 시가 전체를 관광한 뒤 오송구로 돌아왔다.57)

 

이때 김대건과 매스트르 신부는 예정한 대로 에리곤호로 조선에 들어가기를 희망했으나 세실 함장이 함선 안에 환자가 많고, 자기의 여행 예정 기간이 짧다는 이유로, 조선으로 가는 항해를 망설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을 향하여 항해하더라도 항해 중에 어디서든지 역풍을 만나면 곧바로 마닐라로 뱃머리를 돌릴 것이라고 밝힘에 따라 김대건과 매스트르 신부는 9월 11일 에리곤호에서 내렸다.58) 이로써 에리곤호를 이용한 조선 입국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에리곤호를 타고 여행하는 동안에 김대건은 경유하는 여러 나라의 문물을 둘러보면서 견문을 넓힐 수가 있었으며, 또한 청나라가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남경조약을 맺게 되는 상황도 자세히 살필 수가 있었다. 아울러 프랑스어 회화를 익혀 약간 할 줄 알게 되었고, 통역관으로 활동하면서 중국 사람들이 영국 사람들을 두려워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으며,59) 또한 중국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상대하는 방법도 자연히 터득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훗날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고 페레올 주교 등을 영입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2. 매스트르 신부와 변문을 통한 입국 시도

 

에리곤호에서 내린 김대건과 매스트르 신부는 마카오를 떠나 북상하던 최양업과 브뤼니에르(de la Bruniere, 寶) 신부 일행과 합류하여 함께 1842년 10월 2일 산동(山東) 대목구장이며 강남(江南) 직할서리구장인 베시(Besi) 주교의 주선으로 중국 신자의 배를 타고 북쪽으로 향하여 10월 23일 요동(遼東)의 남단 태장하(太莊河)에 도착하였다.60) 여기서 다시 최양업은 브뤼니에르 신부와 함께 개주(蓋州) 부근에 있는 양관(陽關) 교우촌으로 갔고, 김대건은 인근의 백가점(白家店) 교우촌으로 가서 머물면서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봉황성(鳳凰城)의 책문을 통해 조선에 입국할 기회를 기다렸다.61)

 

조선으로 출발할 날과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김대건과 매스트르 신부는 요동 대목구장인 베롤(Verolles) 주교가 연락원을 책문(柵門)에 파견하여 조선의 다른 종교를 믿는 상인들에게서 알아낸 박해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그것은 2명의 외국인과 유진길 등 3백 명의 조선인이 함께 붙잡혀 다 같이 사형을 받았다는 불길한 소식이었다.62) 이러한 상황에서 김대건과 매스트르 신부는 12월 20일 거지로 가장하여 조선으로 출발할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였다.63) 이러한 그들의 계획에 대해 연락원들과 다른 여러 사람들이 무모하고 극히 위험한 일이라고 단언하면서 반대했으나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조선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기만 하다면 어떠한 위험도 무릅쓰고자 하였다.64) 그러나 베롤 주교가 전혀 현명하지 못한 방법이라고 배척하자 매스트르 신부는 김대건에게 조선의 상황을 정탐하고 입국 가능성을 알아보게 하였다.65)

 

이에 김대건은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입국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보기 위하여 1842년 12월 23일 책문으로 떠났다. 나흘 만에 책문에 도착한 그는 12월 27일 책문에서 멀지 않은 곳을 지나다가 길에서 북경(北京)으로 들어가는 조선 사신 일행을 만났다. 그 일행 중에는 김 프란치스코라는 밀사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서로 알아보지 못했는데, 김대건이 용기를 내서 대충 짐작이 가는 사람에게 다가가 접촉한 결과 기적적으로 서로 만날 수 있었으며, 그를 통해 1839년 기해박해 등 조선 교회의 상황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즉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모두 붙잡혀 순교하였고, 대부분의 지도급 신자들을 포함하여, 2백여 명의 신자들이 붙잡혀 처형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기 아버지 김제준과 최양업의 부모가 순교하였다는 소식도 들었고, 자기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의탁할 곳이 없는 비참한 몸으로, 신자들 집을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또한 근래에는 박해가 멎어서 신자들이 조금 안정을 누리고 있지만, 사제가 없어서 마치 목자 없는 양떼처럼 탄식하며 방황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었다. 아울러 1839년에는 박해 때문에 무서워서 감히 교회의 소식을 북경에 전할 생각도 못했고, 1840년에는 밀사를 보냈으나 도중에서 객사하였으며, 1841년에는 밀사를 파견하여 책문까지 갔으나 중국인 안내자를 만나지 못하고 그대로 되돌아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66)

 

김대건은 김 프란치스코에게 매스트르 신부를 조선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책문으로 되돌아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의심을 받게 되고 박해를 받을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대답하면서, 다른 신자들과 함께 만반의 준비를 갖출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라고 충고했다. 아울러 김대건이 어느 누구라도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느냐고도 묻자 그는 국경을 통과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하면서 오직 유일한 방법은 가난한 나무꾼 행세로만 입국할 수 있을 듯싶다고 일러주었다.67) 그리고 그는 몰래 지니고 온, 앵베르 주교가 체포되기 직전까지 쓴 보고서와 모방 신부의 보고서, 모방과 샤스탕 신부의 편지들을 김대건에게 건네주었다.68)

 

그러나 매스트르 신부는 여름에 프랑스 배 한 척이 조선 해안에 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김대건에게 바로 그해에 입국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였다.69) 이러한 매스트르 신부의 지시에 절대 순명하고자 하는 마음과 목자 없는 양떼처럼 탄식하며 방황하고 있는 조선 신자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으로 김대건은 매스트르 신부를 사신 일행이 조선으로 돌아가는 2월쯤에 인도하고자 하여 교우들을 만나면 곧 알리라고 한 매스트르 신부의 지시도 무시한 채 12월 29일 혼자서 나무꾼 차림으로 입국하는 모험을 감행했다.70) 그는 하느님의 자비와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의 보호하심을 굳게 믿고 기지를 발휘하여 의주 변문을 무사히 통과한 뒤 밤새도록 대략 백리를 걸었다. 그는 동이 틀 무렵에 너무나 추워서 몸을 녹이려고 어떤 조그마한 주막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그의 차림새를 살펴보고 또 말소리를 들어보고는 외국 사람으로 의심하여 가는 방향을 정탐하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안내자 없이는 무사히 서울까지 갈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발길을 중국 쪽으로 돌렸으며, 추위와 굶주림으로 모진 고생을 한 끝에 4일째 되는 날 저녁에야 무사히 압록강을 건너 책문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지낸 뒤 1843년 1월 6일 백가점으로 되돌아왔다.71)

 

요컨대 김대건은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1842년 2월에 봉황성의 책문을 통해 조선에 입국하려고 모험을 감행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과정에서 기지를 발휘해 1839년 기해박해 이후 두절된 조선교회와의 연락망을 기적적으로 복원하는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유능한 밀사들이 모두 순교한 당시의 상황에서 그가 연락망을 복원한 것은 조선 교회를 위해 매우 중대한 일이었다. 또한 그는 조선 밀사들의 도움과 치밀한 준비 없이 용기와 열정만 가지고서는 조선에 입국할 수 없다는 중요한 교훈도 깨달았다. 이러한 교훈을 바탕으로 그는 1843년 3월과 9월에 조선 입국을 탐색하기 위해 책문으로 나가 조선 교회의 밀사와 접촉하였지만,72) 앞서와 같이 무리하게 입국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3. 동북방 입국로 개척

 

1839년 기해박해 이후 의주 변문에 대한 정부의 감시가 대폭 강화되어 이곳을 통해 입국하는 것이 어렵게 되자 선교사들은 경원을 통해 입국하는 동북방 입국로의 개척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 동북방 입국로에 대해서는 앵베르 주교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8년 12월 3일자 편지에서 처음으로 관심을 보였다. 이 앵베르 주교의 편지는 마카오의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 서만자(西灣子) 교우촌에 보관되어 있다가 나중에 페레올 신부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페레올 신부는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40년 8월 1일자 편지에서, 앵베르 주교가 조선 북쪽으로 가서 변문을 통하는 것보다 더 쉽고 덜 위험한 연락망이 있는지를 알아보라고 지시했다고 소개하면서 자기가 그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언급하였다.73) 또한 리브와 신부도 파리 본부의 지도자에게 보낸 1842년 2월 12일자 편지에서, 북쪽으로 또 다른 안전한 통로가 있는데 들어가기는 어렵지만 그 길이 더 안전할 것이라고 한다고 언급하였다.74)

 

또한 이 동북방 입국로에 대한 탐험이 1843년에 이르러 조선 신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즉, 그들은 1843년 음력 5월에 조선의 북쪽 길에 대한 탐험을 하고 돌아왔으며, 그 결과 동북방 입국로가 가기는 상당히 쉽지만 국경에서 교우들이 있는 데까지 2천리 길이라 매우 멀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동북방 입국로에 대한 정보를 1843년 음력 9월에 매스트르 신부의 첫 번째 편지에 대한 회답을 보내면서 그 안에서 자세히 보고하였으며, 겨울에 북쪽으로 선교사를 맞이하러 가겠다고 약속하였다.75) 그들은 실제로 그해 겨울에 선교사를 입국시키기 위해 북쪽으로 사람을 보냈으며, 안내자들은 20일을 여행한 끝에 국경에 도착하여 한 달을 기다렸다.76) 그러나 페레올 주교가 반대하는 바람에 이 동북방 입국로를 이용해 조선에 입국하고자 했던 매스트르 신부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77)

 

그러면 앵베르 주교의 1839년 편지를 통해 동북방 입국로에 대해 일찍부터 알고 있던 페레올 주교가 매스트르 신부의 동북방 입국로를 이용한 입국을 막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페레올 주교도 물론 조선 신자들이 북쪽 길을 위험이 덜한 것으로 지적한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방 출신인 두 사람이 그 지방을 탐색하고 돌아와서 그쪽으로 선교사를 입국시키는 것이 실현될 수 있으나 한두 번에 그칠 것이라고 말한 것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울러 중국쪽에서 동북방 국경까지 가려면 맹수밖에 없는 황야를 지나야 하고 밤에는 천막에서 지내야 하며 살림살이를 가지고 다녀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므로 그의 입장에서는 동북방 입국로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교사가 무사히 동북방 국경까지 갈 수 있는지 중국쪽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78)

 

이러한 판단에 따라 페레올 주교는 이미 끓어오르는 열정으로 혼자서 의주 변문을 통해 입국하는 모험을 감행한 적이 있는 김대건을 파견하여 동북방 입국로의 중국쪽 상황을 탐험하게 하였다. 이러한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김대건은 1844년 2월 5일, 훈춘(琿春)에서 두만강을 건너 경원으로 입국하는 북방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훈춘으로 출발했다. 소팔가자(小八家子)에서 장춘(長春), 길림(吉林), 영고탑(寧古塔) 등을 거쳐 훈춘에 이르는 거리는 2천리나 된다. 그 사이에는 광활한 만주 벌판과 여러 개의 강과 사막과 겨울 동안에 80명 이상의 행인과 백 마리 이상의 소와 말이 맹수한테 잡혀 먹히는 울창한 산림지역이 가로놓여 있다. 그는 하느님의 섭리를 굳게 믿고 이처럼 멀고 험난한 길을 한 달 만에 가로질러 무사히 훈춘의 홍시개 촌락에 도착하였다.79)

 

중국 상인들과 교역이 이루어지는 경원의 국제시장은 일반 백성들을 위해서는 2년에 한 번씩 한나절밖에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봉천 · 길림 · 영고탑 · 훈춘의 관장들을 위해서는 해마다 5일 동안 교역을 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는데, 관장들은 각기 장교 5명씩을 거느리고 또 장교는 각기 5명씩의 중요한 상인들을 데리고 교역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교역은 조선 군인들의 엄중한 감시 하에 이루어졌다. 김대건은 홍시개에서 8일을 기다린 뒤 경원에서 교역이 개시되는 3월 8일(음 1월 21일) 많은 중국인들 틈에 끼여 경원으로 들어가 미리 도착하여 한 달 이상을 기다리고 있던 한씨 성을 가진 사람 등 4명의 조선 신자들과 접촉했다.80)

 

이때 조선 신자들은 조선 교회가 비교적 평온하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런 다음 훈춘보다 책문을 통해 선교사들이 입국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훈춘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오면, 국경을 넘어오는 위험 외에도, 함경도 전체를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81) 그는 동북방 입국로의 개척이 여의치 않음을 확인한 뒤, 조선 교회를 수호하는 천사에게 경의를 표하고 조선 순교자들의 기도에 의탁하면서 두만강을 건너 무사히 4월에 소팔가자로 돌아왔다.82) 그리고 지나가게 될 지방에 대한 실정을 파악하라고 한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직접 관찰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 얻은 자료를 토대로 경원까지 다녀온 여행기를 한문으로 작성하여 페레올 주교에게 보고했는데, 거기에는 그가 지나가면서 관찰한 각 지역의 지리 · 물산 · 인심 · 신앙 · 풍습 · 역사, 경원에서 열리는 중국인과의 교역, 입국로로 이용하기 어려운 점 등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83)

 

이와 같이 김대건이 개척한 동북방 입국로는 중국 쪽 길과 조선 쪽 길 모두 위험이 따르는 것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페레올 주교는 이를 이용한 조선 입국을 포기하였다.84) 그러나 매스트르 신부는 여전히 동북방 입국로에 대한 미련을 갖고 계속해서 이를 이용해 조선에 입국하고자 했다. 즉, 그는 1845년 겨울에 동북방 입국로를 이용하여 조선에 입국하기를 희망하였으며,85) 페레올 주교도 그에게 음력 정월에 북쪽 국경으로 오라고 연락을 취했다.86) 이에 따라 1846년 1월 말께 그는 최양업 부제와 함께 김대건이 정찰한 길을 따라 훈춘의 홍시개 촌락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17일을 여행한 끝에 조선 국경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에 도착하여 경원에서 교역이 열리기를 10일 동안 기다리다가 교역이 열리기 바로 전날 훈춘의 장교에게 붙잡혀 조선 입국에 실패하고 이틀 만에 석방되어 요동으로 돌아왔다.87)

 

요컨대 김대건이 개척한 동북방 입국로는 결국 선교사의 입국로로 활용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동북방 입국로 개척을 통해 김대건은 견문을 더욱 넓힐 수가 있었고 또한 어려운 고비들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지혜를 더욱 풍부하게 갖출 수가 있었다. 그리고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절대 순명하여 위험하고 어려운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함에 따라 그의 신임을 크게 얻게 되었다.

 

 

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영입과 사제 수품

 

1844년 12월 10일경에 김대건과 최양업 두 신학생은 소정의 신학과정을 마치고 삭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았다.88) 페레올 주교는 동북방 입국로보다 위험이 덜한 책문을 통해 조선 입국을 추진하면서 두 부제 가운데 동북방 입국로를 성공적으로 개척한 김대건 부제를 데리고 가고자 하였다.89)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부제와 함께 조선 밀사와 약속한 날짜에 조선으로 입국하기 위하여 1845년 1월 1일 책문으로 갔으며, 약속한 주막에서 조선 밀사들을 만났다. 그러나 밀사 일곱 명 중 세 명만이 의주 변문을 통과하여 책문에 도착했기 때문에 페레올 주교의 입국은 연기하고 김대건 부제만 입국시키기로 의견을 모았다.90) 이미 1843년 2월부터 조선의 배와 중국 강남의 배들이 매년 바다 한 가운데에서 밀무역을 한다는 정보를 확보하고서 해로를 통한 선교사 입국로를 개척하려는 구상을 마음속에 품고 있던91) 페레올 주교는 해로를 통해 입국하기로 마음을 먹고서 이때 김대건 부제에게 입국에 성공하면 배 한 척을 마련하여 상해로 자기를 맞이하러 오라고 지시하였다.92)

 

김대건 부제는 안내자들의 도움으로 1월 1일 무사히 의주 변문을 통과하여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자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신자 몇 명 외에는 자기 어머니를 포함하여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게 한 채 선교사들을 영접하러 갈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그는 입국 과정에서 심한 굶주림과 추위를 겪은 탓으로 며칠이 지나자 몸이 심하게 아파 의원의 치료를 받으며 보름 넘게 알아 누워 있어야 했다.93)

 

김대건 부제는 병이 다 나은 뒤에도 몸이 허약하여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으나 허약한 몸으로 선교사들을 영접할 준비를 진행하였다.94) 그는 선교사들이 장차 거주할 집을 서울 석정동(돌우물골)에 마련하였으며, 상해로 선교사들을 영접하러 갈 배도 구입하였다.95) 또한 컴퍼스, 먹 없이 글씨를 쓸 수 있는 검은색 철필, 세계지도, 특히 황해와 중국과 조선의 해변을 자세히 그린 지도, 눈을 보호하는 중국식 녹색 안경 등을 보내주도록 마카오의 리브와 신부에게 부탁하였다.96) 아울러 선교사들이 해로로 입국할 때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제작한 〈조선전도〉, 여덟 폭의 병풍, 신부님들의 유해가 들어 있는 누런 주머니 세 개97) 등을 마카오의 리브와 신부에게 보냈다.98)

 

그런 다음 김대건 부제는 4월 30일 11명의 신자와 예비신자들을 사공으로 삼아 한 번도 바다에 나가본 적이 없는 작은 배를 몰고 제물포를 출발하여 상해로 향했다. 11명의 신자와 예비신자들 가운데는 4명만 사공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바다를 구경도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루가 지난 뒤부터 비를 동반한 폭풍우를 3일 동안 계속 만나 배가 거의 침몰할 지경이었기 때문에 종선도 떼어 버리고 돛대도 베어버리고 식량도 버려야만 했다. 그들은 3일 동안 먹지 못하여 극도로 탈진하였고, 살아날 가망이 없음을 보고 절망하여 서글피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김대건 부제가 성모님의 기적 상본을 내보이면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모님이 여기 계시니 겁내지 말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99)

 

얼마 후에 거센 물결에 키가 부러져 떠내려갔고 배는 폭풍과 파도에 까불리며 넓은 바다로 떠밀려갔다. 그들은 어찌할 방도가 없어서 오직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게만 의탁하고 누워 잠을 청했는데, 나중에 깨어 보니 비도 그치고 파도도 약해져 있어서 다시 기운을 차려 나무를 수습해 돛대와 키를 만들어 항해한 결과 닷새 뒤에 강남성 해안에 도달하였다. 여기서 돈을 받기로 하고 그들을 상해로 끌어다 주던 배가 폭풍을 만나 파선하여 선장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으나 그들은 무사히 5월 28일 오송을 거쳐 6월 4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오송과 상해에서 중국 관리들이 그들을 조사하려 했으나, 김대건 부제가 에리곤호를 타고 여행하면서 닦은 불어 회화 실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영국 주둔군 장교들을 방문해 도움을 요청하며 그들과 친밀함을 과시하고 또한 페레올 주교의 부탁을 받은 영국 영사가 도와준 결과 까다로운 조사를 면하게 되었다.100)

 

이와 같이 김대건 부제 일행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사를 영입하기 위해 배를 타고 상해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감동한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부제에게 사제품을 주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김대건 부제는 마침내 8월 17일 상해 푸동 지역에 있는 김가항 성당에서 11명의 조선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첫 미사를 8월 24일 다블뤼(Daveuluy, 安敦伊) 신부의 복사를 받으며 횡당(橫堂) 신학교에서 드렸다.101) 이처럼 김대건 신부가 한국인으로서 맨 먼저 사제품을 받게 된 것은 하느님의 섭리와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게 의탁한 채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두절된 조선 교회와의 연락망을 복원할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고 배를 몰아 그들을 영접하러 온 용기와 지혜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이 점은 매스트르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대건 신부의 사제수품에 대해, “그는 그의 자주성과 경솔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헌신의 확실한 표를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강남으로 그의 주교를 영입하러 오기 위해 미지의 항해에서 모든 위험을 무릅씀으로써 조선 포교지에 큰 봉사를 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언급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102)

 

김대건 신부 일행은 타고 온 작은 배를 수리한 다음,103)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태우고, 8월 31일 상해를 출발하여 조선으로 향했다.104) 그들은 자신들이 타고 있는 작은 배를 여행자의 주보인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을 따서 라파엘(Raphael)호라고 불렀다. 그들은 라파엘호를 밧줄로 중국 배에 묶고 산동으로 향하다가 오래지 않아 폭풍우를 만나는 바람에 키가 부러지고 돛이 찢어졌으며 중국 배에 붙들어 매었던 밧줄이 끊어져 성난 파도에 떠밀려가고 말았다. 그들은 남아 있는 돛대도 위험하여 도끼로 잘라버린 다음 선실로 들어가 기도를 드린 뒤 잠이 들었는데, 그 다음날이 되자 폭풍우가 가라앉았다. 용기를 되찾은 그들은 돛대를 건져서 다시 세우고 키도 새로 만들고 돛도 기워 수리했다. 그들은 9월 28일 제주도에 도착한 뒤 다시 10월 12일 충남 강경 황산 포구 나바위에 무사히 닻을 내렸다.105) 이로써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조선에 맞아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Ⅵ. 백령도 부근을 통한 선교사 입국로 개척과 그 활용

 

김대건 신부는 나바위에 상륙한 뒤 1845년 11월 서울에 도착하여 서울과 용인 일대에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서해를 통한 선교사 입국로를 새로 개척하라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를 받고 1846년 5월 14일 마포를 출발하여 백령도로 향하였다.

 

이와 같이 김대건 신부가 서해를 통한 입국로를 새로 개척하러 나가게 된 것은 기해박해 이후 정부의 변문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어 육로를 통한 선교사의 입국이 거의 불가능하게 됨에 따라 해로를 통한 입국만이 유일한 희망이 되었는데, 상해에서 배를 타고 오는 입국로는 위험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1842년부터 조선 입국을 계속 시도하고 있는 매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를 영입할 수 있는 입국로를 시급히 개척할 필요가 있었다.

 

김대건 신부는 마포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산과 물길들을 가는 곳마다 그렸다. 그러나 강화도 앞바다에 이르러 그린 것을 펴 놓고 살피다가 회오리바람 때문에 잃어버렸다. 그는 다시 강화도에서부터 지나는 곳마다 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106) 이처럼 그가 지나는 곳마다의 산과 물길들을 그린 것은 선교사들의 서해를 통한 입국에 필요한 정밀 지도를 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이해된다.

 

김대건 신부는 연평도와 순위도를 거쳐 소강, 마합, 터진목, 소청, 대청 등 여러 섬을 지니 백령도 근처에 가서 닻을 내렸다. 거기에는 백 척 가량의 중국 산동 어선이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그는 이 중국 어선들이 고기를 잡으러 해마다 음력 3월 초순에 이곳으로 모이고 5월 하순에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이 중국 어선들의 중개를 조심스럽게 잘 이용하기만 하면 선교사들을 영접하고 서로 편지를 전달하기에 매우 유리할 것으로 생각하였다.107)

 

조선의 포졸들이 해안의 높은 곳과 산꼭대기에서 중국 어선들을 감시하기 위해 보초를 서고 있었지만 근처 섬에 사는 조선 사람들이 호기심에 끌려 중국 배를 구경하려고 모여들었다. 김대건 신부도 밤중에 중국 배를 찾아가서 그 배의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에게 페레올 주교의 편지와 자기가 베르뇌 · 매스트르 · 리브와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 및 중국 신자 두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이들 편지에 황해도 해안의 섬과 바위와 그 밖에 주의해야 할 것들에 대한 설명과 함께 조선지도 2장을 동봉하였다.108)

 

그런데 뒤에 임성룡이 붙잡혀 진술한 내용에 의하면, 김대건 신부는 5월 28일(음 5월 4일) 옹진 마합포에서 1차로 중국 배에 편지를 전하였고, 다시 5월 29일 장연 목동에서 중국 배에 편지를 전하였다.109) 그리고 뒤에 황해 감사가 이 편지들을 회수하여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옹진 마합포에서 전한 편지는 상해로 보낸 것이었는데, 거기에는 지도 1장과 라틴어 편지 6장이 포함되어 있었으며,110) 장연 목동에서 전한 편지는 상해와 태장하로 보낸 것이었는데, 상해로 보내는 하나의 봉투에는 지도 1장, 한문 편지 2장, 라틴어 편지 2장이 들어 있었고, 태장하로 보내는 다른 하나의 봉투에는 지도 1장, 한문 편지 1장, 라틴어 편지 1장이 들어 있었으며, 태장하로 보내는 또 다른 하나의 봉투에는 한문 편지 2장이 들어 있었다.111) 그러니까 김대건 신부가 중국 배를 이용해 부치려고 했던 조선지도는 2장이 아니라 모두 3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조선지도는 산 이름이 한글로 표기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112) 그가 전에 제작한 〈조선전도〉와 다른 지도임이 분명하다. 아마도 선교사들이 서해를 통해 입국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보강한 새로운 지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6월 5일 배를 징발하는 문제로 그곳 관장과 시비가 벌어져 김대건 신부와 사공들이 붙잡혀 옥에 갇히고 심문 과정에서 사공들이 중국 배에 편지를 전한 사실을 실토함에 따라 중국 배에 전했던 편지와 지도들도 모두 회수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김대건 신부는 결국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게 되었다. 하지만 김대건 신부는 음력 3월 초순부터 5월 하순까지 백령도 근처에 와서 고기잡이를 하는 중국 산동 어선들을 이용하여 선교사들을 영접하고 편지를 전달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내용을 담은 서해 입국로에 대한 탐사 결과를 옥중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편지로 자세히 보고함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였다.113)

 

하지만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가 목숨을 바쳐 개척한 백령도 부근을 통한 입국로를 즉각 선교사 영입에 활용하려 하지 않았다. 즉 그는 1846년 11월 5일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매스트르 신부에게 마카오로 가서 조선 해안으로 오는 전함의 기회를 기다리라고 편지를 보냈다고 언급하면서 매스트르 신부를 영입할 방법으로 봄에 어선 한 척을 사서 몇몇 교우에게 맡겨 서양 배와 연락을 취하게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114) 이러한 제안에 따라 매스트르 신부는 최양업 부제와 함께 1847년 라피에르(Lapierre) 함장이 이끄는 글로와르(la Gloire)호를 타고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1847년 8월 10일 신치도 뒷바다에서 좌초되어 8월 12일 고군산군도에 상륙하였다가 회항함으로써 입국에 실패하였다.115)

 

이에 따라 매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는 마침내 김대건 신부가 개척한 백령도 부근을 통한 입국로를 이용해서 조선에 입국하고자 하였다. 즉, 매스트르 신부는 1848년 9월 8일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더 좋은 기회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는 상해에 음력 3월까지 있으면서 페레올 주교가 정한 만남의 장소인 백령도까지 산책이나 하러 갈까 한다고 계획을 밝혔다. 아울러 김대건 신부가 보낸 조선지도를 한 장 복사해서 보내달라고 부탁하면서 그 지도가 조선의 섬과 해안들을 인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116) 그리고 계획대로 매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신부는 1849년에 중국 배를 타고 백령도로 가서 섬들을 탐험하였으나 페레올 주교가 약속한 배도 만나지 못하였고, 산동 어선들도 만나지 못하였다. 그는 백령도 근처에 가서 고기잡이를 하는 어선들에 관한 정보를 산동에서 두 번이나 알아보았으나 조선 해안으로 가는 배들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백령도로 가는 산동 배들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는 않았다.117)

 

매스트르 신부가 백령도 부근을 통한 입국에 실패한 것은 아마도 시기를 제대로 맞추지 않았던 때문인 것 같다. 이 점은 페레올 주교가 1849년 11월 8일 마카오의 리브와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매스트르 신부를 1851년에 입국시키기 위해 계획하고 있는 새로운 시도를 밝히면서,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되니까 시기를 잘 유념해 두라고 부탁했던 것으로 보아 짐작할 수 있다. 페레올 주교가 밝힌 새로운 시도는 다음과 같다. 강남(중국)에서 교우의 배를 한 척 빌려서 1851년 음력 3월 중에 백령도 근처로 오라는 것이다. 이때 조선인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인들에게도 주의를 끌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어선을 타고 와야 하는데, 만약 어선을 구할 수 없다면 일반적인 배를 사용해도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도 배 한 척을 약속 장소로 보내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틀랑 신부나 도움을 주려는 다른 사람과 협력하여 배의 장비를 갖출 방도들을 마련하는 임무를 맡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118) 백령도 부근을 통한 선교사 입국로가 좀 더 구체적으로 체계화되어 감을 볼 수 있다.

 

페레올 주교는 1851년에 이르러 새로 확보한 정보를 바탕으로 백령도 부근을 통한 선교사 입국로의 체계를 좀 더 보완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1851년 12월 20일 마카오의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상해에서는 조선 근해로 오려고 하는 배를 발견할 수 없으므로 산동쪽으로 방향을 돌릴 필요가 있다고 그는 지적하였다. 그가 이렇게 지적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백령도 부근에 와서 고기를 잡거나 교역을 하는 중국인들이 산동 북쪽에 위치한 도시인 등주부(登州府: 현재의 중국 행정구역상으로는 蓬萊市)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선으로 파견되는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출발지를 이 도시로 삼아서, 그곳에 교우들이 있는지 알아보고, 그곳 교회 당국자와 연락하여 그에게 보호와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준비되고 출발 시기가 정해지면 자기가 배를 한 척 보내어 그들과 만날 수 있도록 미리 자기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런 다음 산동 사람들은 음력 2월 말이나 혹은 3월 초에 조선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탄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이 지시 사항들을 조선으로 파견되는 선교사들에게 알려주면서 충고를 하여 그들을 도와주도록 당부한 다음 유럽 사람들은 바다로만 들어올 수 있다고 덧붙였다.119) 이로써 김대건 신부가 개척한 백령도 부근을 통한 선교사 입국로는 페레올 주교의 노력으로 선교사들이 중국 어선을 타고 백령도 부근에 와서 조선 배로 갈아타고 조선의 해변에 상륙하는 방식으로 완성되었다.

 

페레올 주교가 백령도 부근을 통해서 입국시키려고 추진했던 것과 달리 매스트르 신부는 1852년 8월 고군산군도 해역을 거쳐 조선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 이후에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거의 모두 백령도 부근을 통해서 조선에 입국하였다. 즉, 베르뇌 ·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 프티니콜라(Petinicolas, 朴德老) 신부는 중국 배를 타고 황해도 장연 부근에 도착하여 1856년 3월 23일 부활절 밤에 신자들의 배로 갈아타고 4일간의 연안 항해를 한 끝에 한강을 통해서 서울로 들어왔다. 페롱(Feron, 權) 신부도 1857년 3월 28일경 이와 유사한 경로로 입국하였다. 그 뒤 1861년 4월 6일 입국한 랑드르(Landre, 洪) · 조안노(Joanno, 吳) · 리델(Ridel, 李福明) · 칼레(Calais, 姜) 신부와 1863년 6월 말 입국한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와 1865년 6월 초에 입국한 브르트니에르(Breteniere, 白) · 도리(Dorie, 金) · 볼리외(Beaulieu, 徐沒禮) · 위앵(Huin, 閔) 신부도 중국 배를 타고 백령도 부근으로 추정되는 무인도인 메린도에 도착하여 조선 신자들의 배로 갈아타고 한강 유역이나 충청도 내포 지역의 연안으로 상륙하였다.120) 1854년 3월에 매스트르 신부와 비슷한 경로로 입국한 장수(Jansou, 楊) 신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백령도 해역을 통해서 입국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백령도 부근을 통한 입국로는 서신 교환을 위한 길로도 이용되었는데, 중국 배를 타고 온 선교사를 조선 신자의 배로 옮겨 태우면서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기도 하였다.121) 이렇게 볼 때 김대건 신부의 백령도 부근을 통한 선교사 입국로 개척은 한국천주교회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Ⅶ. 맺음말

 

이제까지 필자는 그 동안 소홀하게 다루어 온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에 대해 여러모로 깊이 있게 살펴보았다. 이제 이 글을 통하여 알아본 몇 가지 사실들을 요약함으로써 맺음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김대건 신부는 자기 집안의 유서 깊은 신앙과 순교 전통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여길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가문의 훌륭한 전통을 계승하여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인물이 되고자 스스로 다짐했으며, 또한 집안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며 공경하면서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를 간구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조선 순교자들의 후예 내지는 조선 교회의 아들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김대건은 신학생으로 늦게 선발되는 바람에 라틴어 공부가 처음부터 부진하였다. 그리고 마카오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내내 복통과 두통과 요통을 알아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교수 신부들이 그의 장래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불리한 여러 조건들을 모두 극복하고 장차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기에 이르렀다.

 

김대건은 신학과정을 공부하면서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세실 함장이 지휘하는 에리곤호를 타고 조선 입국을 시도했다. 도중에 세실 함장이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에리곤 호를 이용한 입국에 실패했지만 에리곤호를 타고 여행하는 동안에 여러 나라의 문물을 둘러보면서 견문을 넓힐 수 있었으며, 불어 회화를 익혀 중국어 통역관으로 활동하면서 중국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상대하는 방법도 터득하였다. 또한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책문을 통한 조선 입국을 시도하여 1839년 기해박해 이후 두절되었던 조선 교회와의 연락망을 기적적으로 복원하는 중요한 성과를 거뒀다. 아울러 훈춘을 통해 경원으로 입국하는 동북방 입국로를 개척하는 위험하고 어려운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페레올 주교의 신임을 크게 얻게 되었다.

 

김대건은 1844년 12월 10일경에 부제품에 오른 뒤 1845년 1월에 페레올 주교와 함께 책문을 통한 입국을 시도하였다가 조선 정부의 감시가 심하여 혼자만 입국하였다. 이때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부제에게 입국한 뒤에 배 한 척을 마련하여 상해로 맞이하러 오라고 지시하였다. 이러한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그는 배를 준비하여 4월에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사들을 영접하러 상해로 갔다. 이에 크게 감동한 페레올 주교가 그에게 사제품을 주기로 결정함에 따라 그는 8월 17일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이처럼 한국인으로서 맨 먼저 사제품을 받게 된 것은 그가 두절된 조선 교회와의 연락망을 복원할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고 배를 몰아 그들을 영접하러 온 용기와 지혜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배에 태우고 제주도를 거쳐 강경 황산포구 나바위에 상륙함으로써 그들을 조선에 맞아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11월에 서울에 도착하여 서울과 용인 일대에서 사목활동을 하던 중 서해를 통한 선교사 입국로를 새로 개척하라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를 받고 1846년 5월 14일 마포를 출발하여 백령도로 향하였다. 그는 백령도 근처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는 백 척 가량의 중국 산동 어선을 발견하였으며, 이 중국 어선들이 음력 3월 초순에 이곳으로 모이고 5월 하순에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 중국 어선들을 이용하여 선교사들을 영접하고 편지를 전달하면 매우 유리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6월 5일 배를 징발하는 문제로 그곳 관장과 시비가 벌어져 그와 사공들이 체포되었으며, 그는 끝내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무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하지만 그는 탐사한 결과를 옥중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편지로 자세히 보고함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였다.

 

이렇게 김대건 신부가 개척한 백령도 부근을 통한 선교사 입국로는 뒤에 페레올 주교가 보완하였으며, 선교사들이 중국 어선을 타고 백령도 부근에 와서 조선 배로 갈아타고 조선의 해변에 상륙하는 방식으로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1856년 3월 이후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거의 모두 이 백령도 부근을 통한 입국로를 이용하여 조선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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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崔奭祐, 〈성 김대건 신부에 대한 연구와 현양의 의의〉 《교회사 연구》 12, 1997, p.24

 

2)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에 관한 주요 연구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崔奭祐, 〈金大建의 『朝鮮全圖』〉 《韓國文化의 諸問題》, 국제문화재단출판부, 1981 ; 《韓國敎會史의 探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車基眞, 〈金大建 신부의 활동과 업적〉 《교회사 연구》 12, 1997 ; 文知愛, 〈김대건 신부의 조선 입국과 체포〉,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5 ; 金奎成, 〈1840年代 프랑스 宣敎師들의 朝鮮 入國試圖와 西海 海路〉,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8.

 

3) 李元淳, 〈김대건 家門의 信仰 來歷과 殉敎 傳統〉 《敎會史 硏究》 12, 1997, pp.68~90.

4) 金眞召, 〈성 김대건 신부 家門의 보충 資料〉 《교회와 역사》 108(1984, 6), pp.21~22 및 이원순, 앞의 논문, pp.90~96.

 

5) 《日省錄》 헌종 12년(1846, 병오) 5월 20일 및 21일, 〈황해 감사 金鼎集이 올린 보고〉 및 〈황해 감사 金鼎集이 김대건 등을 문초하여 올린 보고〉; 《성 김대선 신부의 체포와 순교》, p.25 및 pp.33~35.

 

6) 〈1845. 4. 7. 김대건 신학생이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12번 째 편지)〉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김대건 신부의 편지 모음)》, 바오로딸, 1997, pp.104~105.

 

7) 〈1845. 7. 8. 고틀랑 신부가 예수회 장상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p.253.

 

8) 김대건 신부는 1845년 6월 4일에 상해에 도착한 후 예수회의 고틀랑 신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열다섯 번째 편지는 현재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 p.107).

 

9)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이 빈들에 당신의 영광이》, pp.139~196.

10) 〈1844. 12. 15. 김대건 신학생이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편지(9번째 편지)〉 《이 빈들에 당신의 영광이》, p.68.

11) 〈1845. 4. 6. 김대건 부제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11번째 편지)〉 《이 빈들에 당신의 영광이》, pp.94~97.

12) 〈1836. 12. 3. 모방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45.

13) 위와 같음.

14) 위와 같음.

15) 위와 같은 편지, p.43.

16) 〈1836. 12. 30. 샤스탕 신부가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51.

17) 위와 같음.

 

18) 〈1837. 6. 13. 마카오 부대표 바랑탱 신부가 파리 신학교 지도자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53 및 〈칼레리 신부가 파리 지도자 뒤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85.

 

19) 〈1837. 6. 13. 바랑탱 신부가 파리 신학교 지도자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55.

20) 마카오의 조선인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친 선교사들과 교육 내용에 대해서는, 차기진, 앞의 논문, pp.108~110.

21) 〈칼레리 신부가 파리 지도자 뒤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p.81~85.

22) 〈칼레리 신부가 파리 지도자 뒤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p.83~87.

23) 차기진, 앞의 논문, pp.106~107.

24) 〈1839. 8. 11. 리브와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p.127~131.

25) 〈김대건 신부 연보〉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21.

26) 〈1839. 6. 23. 리브와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121.

27) 〈1839. 8. 11. 리브와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131.

28) 〈1842. 4. 1. 리브와 신부가 파리 본부의 지도자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175.

 

29) 매스트르 신부가 1841년 11월 17일에 파리 신학교 교장 알브랑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대표부에서 공부하는 신학생들을 위해 건의한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신학생들은 대표부의 지하실과 주방일, 매일 경비의 장부를 만들고, 각 포교지에 필요한 돈을 추리고 계산하고, 보낼 물건들을 준비하는 등의 잡일을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1841. 11. 17. 매스트르 신부가 파리 신학교 교장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153).

 

30) 〈1839. 5. 16. 리브와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109.

31) 〈1839. 6. 23. 리브와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123.

32) 〈1839. 5. 16. 리브와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109.

33) 〈1846. 8. 26.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편지(20번째 편지〉 《이 빈들에 당신의 영광이》, p.129.

34) 〈1839. 5. 16. 리브와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109.

35) 〈1839. 8. 11. 리브와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131.

36) 〈1846. 1. 19. 매스트르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293.

37) 위와 같음.

38) 〈1845. 5. 25. 매스트르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243.

39) 〈1839. 9. 29. 리브와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137.

40) 〈1842. 2. 12. 리브와 신부가 파리 본부의 지도자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p.161~165.

41) 〈김대건 신부의 순교 행적〉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 한국교회사연구소, 1997, p.179.

42) 〈1842. 2. 12. 리브와 신부가 파리 본부의 지도자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p.165~166.

43) 〈1842. 3. 8. 매스트르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171.

44) 〈1843. 3. 1. 매스트르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211.

45) 〈1843. 11. 21. 매스트르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223.

 

46) 이와 같이 김대건 신부가 마카오에서 신학교 생활을 하면서 여러 약점을 극복하여 자신을 인간적으로 완성해 나간 점에 대해서는, 崔奭祐, 〈성 김대건 신부에 대한 연구와 현양의 의의〉, p.25, 車基眞, 앞의 논문, p.103, 文知愛, 앞의 논문, pp.9~12에서도 지적한 바가 있다.

 

47) 〈1842. 2. 12. 리브와 신부가 파리 본부의 지도자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161.

48) 〈1842. 2. 11. 리브와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157.

49) 〈1842. 2. 12. 리브와 신부가 파리 본부의 지도자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166.

50) 〈1842. 2. 28. 매스트르 신부가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167.

51) 〈1842. 3. 8. 매스트르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171.

52) 〈1842. 2. 28. 김대건 신학생이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1번째 편지)〉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 p.33.

53) 〈1842. 12. 9. 김대건 신학생이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4번째 편지)〉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 p.39.

54) 위와 같음.

55) 위와 같음.

 

56) 〈1842. 9. 김대건 신학생이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3번째 편지)〉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 pp.36~38 및 〈1842. 12. 9. 김대건 신학생이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4번째 편지)〉《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 pp.40~41.

 

57) 〈1842. 9. 김대건 신학생이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3번째 편지)〉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 pp.36~38 및 〈1842. 12. 9. 김대건 신학생이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4번째 편지)〉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 pp.41~43.

 

58) 〈1842. 12. 9. 김대건 신학생이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4번째 편지)〉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 p.44 및 〈1842. 10. 2. 매스트르 신부가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191.

 

59) 〈1842. 12. 9. 김대건 신학생이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 p.49.

 

60) 〈1842. 12. 21. 김대건 신학생이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5번째 편지)〉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 p.50 및 〈김대건 신부 연보〉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21.

 

61) 〈1842. 12. 21. 김대건 신학생이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5번째 편지)〉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 pp.51~52.

62) 〈1842. 12. 9. 김대건 신학생이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4번째 편지)〉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 pp.46~47.

63) 위와 같은 편지, pp.47~48.

64) 위와 같음.

65) 〈1843. 3. 7. 매스트르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215.

 

66) 〈1843. 1. 15. 김대건 신학생이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6번째 편지)〉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 pp.54~55 및 〈1843. 2. 16. 김대건 신학생이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7번째 편지)〉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 pp.60~63.

 

67) 〈1843. 1. 15. 김대건 신학생이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6번째 편지)〉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 p.56 및 〈1843. 2. 16. 김대건 신학생이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7번째 편지)〉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 pp.61~63.

 

68) 〈1843. 3. 7. 매스트르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p.215~217.

69) 〈1843. 3. 7. 매스트르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219.

 

70) 〈1843. 3. 1. 매스트르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209 및 〈1843. 1. 15. 김대건 신학생이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6번째 편지)〉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 pp.56~57.

 

71) 〈1843. 1. 15. 김대건 신학생이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6번째 편지)〉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 pp.57~59.

72) 〈1844. 5. 17. 김대건 신학생이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8번째 편지)〉,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 p.67.

73) 조현범, 〈중국 체류시기 페레올 주교의 행적과 활동〉 《교회사학》 5, 수원교회사연구소, 2008, pp.92~96.

74) 〈1842. 2. 12. 리브와 신부가 파리 본부의 지도자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161.

75) 〈1843. 11. 21. 매스트르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p.221~223.

76) 〈1844. 3. 28. 매스트르 신부가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231.

 

77) 위와 같은 편지, p.231 및 〈1846. 1. 19. 매스트르 신부가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295.

 

78) 〈1844. 1. 20. 페레올 주교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227.

79) 〈1844. 12. 15. 김대건 부제가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편지(9번째 편지)〉 《이 빈들에 당신의 영광이》, pp.69~77.

80) 위와 같은 편지, pp.77~86.

81) 위와 같은 편지, p.87.

 

82) 이와 같이 동북방 입국로를 여의치 않은 것으로 결론지은 점에 대해서는, 車基眞, 앞의 논문, p.120 ; 金奎成, 앞의 논문, pp.16~17에서도 지적하였다.

 

83) 위와 같은 편지, pp.69~88.

84) 〈1844. 5. 18. 페레올 주교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233.

 

85) 〈1845. 5. 25. 매스트르 신부가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241 및 〈1845. 5. 25. 매스트르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243.

 

86) 〈1846. 1. 19. 페레올 주교가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295.

87) Ch. Dallet 저, 安應烈 · 崔奭祐 역주, 《韓國天主敎會史》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pp.97~99.

88) 차기진, 앞의 논문, p.112.

89) 〈1844. 5. 18. 페레올 주교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231.

90) 〈1845. 5. 25. 페레올 주교가 리용과 파리의 전교회 본부에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245.

91) 金奎成, 앞의 논문, p. 12 및 조현범, 앞의 논문, p.97.

92) 〈1845. 7. 8. 고틀랑 신부가 예수회 장상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251.

93) 〈1845. 3. 27. 김대건 부제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10번째 편지)〉 《이 빈들에 당신의 영광이》, pp.89~92.

94) 위와 같은 편지, p.92.

95) 차기진, 앞의 논문, p.113.

96) 〈1845. 3. 27. 김대건 부제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10번째 편지)〉 《이 빈들에 당신의 영광이》, pp.92~93.

 

97) 이 세 개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유해는 기해박해 때 순교한 앵베르 주교의 유해 및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의 유해로 생각된다.

 

98) 〈1845. 4. 7. 김대건 부제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12번째 편지)〉 《이 빈들에 당신의 영광이》, pp.104~105.

99) 〈1845. 7. 23. 김대건 부제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16번째 편지)〉 《이 빈들에 당신의 영광이》, pp.108~109.

100) 위와 같은 편지, pp.109~113 및 〈김대건 신부 연보〉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24.

101) 〈1845. 7. 8. 고틀랑 신부가 예수회 장상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261.

102) 〈1846. 1. 19. 매스트르 신부가 그르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293.

103) 〈1845. 7. 23. 김대건 부제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16번째 편지)〉 《이 빈들에 당신의 영광이》, p.114.

104) 〈1845. 10. 29. 페레올 주교가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273.

105) 위와 같은 편지, pp.275~285. 

 

106) 《日省錄》 헌종 12년(1846, 병오) 5월 26일, 〈5월 20일 선주 임성룡 첫 번째 심문〉;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 p.43.

 

107) 〈1846. 8. 26.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편지(20번째 편지)〉 《이 빈들에 당신의 영광이》, pp.124~125.

108) 위와 같은 편지, p.125

 

109) 《日省錄》 헌종 12년(1846, 병오) 5월 26일, 〈5월 20일 선주 임성룡 두 번째 심문〉;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 p.55.

 

110) 《日省錄》 헌종 12년(1846, 병오) 5월 29일, 〈황해 감사 김정집이 천주교 죄인 김대건이 중국 배에 전한 편지를 찾아내 급히 올린 보고〉;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 p.75.

 

111) 《日省錄》 헌종 12년(1846, 병오) 윤5월 4일, 〈김대건이 장연 목동포에서 중국 배에 전한 편지를 또 찾아내서 올린 보고〉;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 pp.107~109.

 

112) 《日省錄》 헌종 12년(1946, 병오) 5월 30일, 〈임금이 중희당에 나가 차대한 내용〉;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 p.77.

 

113) 〈1846. 8. 26.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편지(20번째 편지)〉 《이 빈들에 당신의 영광이》, pp.124~129.

114) 〈1846. 11. 5. 페레올 주교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 p.177.

 

115)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 활동의 배경〉 《최양업 신부의 선교 활동과 천주가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3, p.24.

 

116) 〈1848. 9. 8. 매스트르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303.

117) 〈1849. 5. 15. 매스트르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p.303.

118) 〈1849. 11. 8. 페레올 주교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A-MEP: Vol. 579. f. 248. ; 조현범, 앞의 논문, pp.102~104.

119) 〈1851. 12. 20. 페레올 주교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A-MEP: Vol. 579. f. 255. ; 조현범, 앞의 논문, p.57.

120) 조현범,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pp.178~179 및 김규성, 앞의 논문, pp.28~30.

121) 金奎成, 앞의 논문, pp.33~34

 

[학술지 교회사학 vol 5, 2008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서종태(호남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99922&Page=20&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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