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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슬라오(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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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스타니슬라오 (Stanislaus)
축일 4월 1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크라쿠프(Krakow)
활동연도 1030-1079년
같은이름 스따니슬라오, 스따니슬라우스, 스타니슬라우스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세례자 요한의 도플갱어 성 스타니슬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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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5-06 조회수676 추천수0

STORY 10 교부와 성인 이야기

 

 

세례자 요한의 도플갱어 성 스타니슬라오(1030-1079) 1편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임종 순간, 그의 곁에는 40년간 한결같이 지근에서 비서로 봉직한 스타니슬라오 추기경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이 추기경의 주보성인이자 폴란드의 주보성인인 성 스타니슬라오는 폴란드 첫 번째 성인입니다. 지난 4월 11일이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이었습니다.

 

폴란드는 최근에도 미사 참여자의 수가 꾸준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또한 사제서품자들이 선종하는 사제들보다 그 수가 많아 사제성소가 여전히 증가 내지 안정 추세에 있습니다. 폴란드에서 966년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후 가톨릭교회는 종교 · 문화 ·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폴란드 국민들에게 가톨릭 신앙은 자신들의 정체성 그 자체였기 때문에, 지금도 폴란드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교회 신자입니다. 2012년 통계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74퍼센트가 부활 판공성사에 참여하고자 했다 합니다. 이는 점점 더 고해성사를 부담스러워하는 한국 가톨릭교회 신자들의 현실과 대조적입니다.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융성의 계기라기보다는 결과에 더 가깝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주교직을 원치 않았던 성 스타니슬라오는 1072년 교황 알렉산더 2세에게 순명하여 크라코프의 주교가 됩니다. 주교가 된 후에도 거친 삼베옷을 평생 걸쳐 입고, 세속 재물을 멀리하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데에 전념합니다. 성인은 교회 정신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이들을 따끔히 혼내며 올바른 길로 가도록 이끌었습니다.

 

당시 폴란드의 왕이었던 볼레슬라오 2세는 유능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전쟁을 직접 치르면서 폭력과 범죄에 젖어든 인물로, 헤로데 왕과 유사하게 도덕적 문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의 신하들은 물론이요 폴란드 교회의 지도자들도 그의 서슬 시퍼런 행태 때문에 감히 직언하지 못했습니다. 성 스타니슬라오만이 세례자 요한처럼 수시로 왕을 찾아가 왕의 잘못을 가감 없이 지적했습니다. 그는 왕이 자신이 범한 죄와 그 범죄의 결과들이 위중함을 성찰하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왕은 일단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모습을 통해 교정의 의지를 보이곤 하였지만 그런 태도가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날 아름답기로 이름난 한 귀부인을 왕이 강제 납치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폭군을 자처하며 인륜을 저버린 그의 행위는 폴란드 귀족들의 분노를 크게 샀지만, 그 누구도 왕에게 감히 맞서지 못하였습니다. 주교들조차 왕의 심기를 건드릴까 싶어 침묵하였습니다. 다른 모든 이의 침묵 속에서도 성 스타니슬라오는 오랜 기도 끝에 왕을 대면한 자리에서 반인륜의 범죄를 또다시 저지른다면 그를 교회의 처벌, 즉 파문에 처하겠다고 강력하게 경고하기에 이릅니다. [2018년 4월 29일 부활 제5주일(이민의 날)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11 교부와 성인 이야기

 

 

세례자 요한의 도플갱어 성 스타니슬라오(1030-1079) 2편

 

폴란드 왕 볼레슬라오 2세는 성 스타니슬라오 파문 경고에 맞대응하여 그에게 심한 모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럼에도 성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할 말을 다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왕에게 성인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던 중 왕은 성인이 계약서 없이 두 명의 증인들만 배석시킨 채 베드로라는 신자에게서 구입한 토지가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됩니다. 베드로는 3년 전 세상을 떠났기에 왕은 그의 자손들에게 토지반환소송을 하라고 부추깁니다. 한편으로 왕은 증인들을 협박하여 위증토록 하였습니다. 왕을 재판장으로 한 법정에서 토지대금을 지급하였다는 성인의 주장은 부정되었습니다. 유죄선고 직전에 순간적인 영감을 얻은 성인은 재판관들에게 사흘간의 말미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는 사흘 안에 죽은 베드로를 법정에 증인으로 세우겠다고 하였습니다. 왕을 비롯한 재판부의 비웃음 속에 그의 요청은 수용됩니다.

 

성 스타니슬라오는 사흘간 밤낮으로 단식하고 기도하였습니다. 3일째 되던 날 성인은 무덤으로 가서 목장(주교지팡이)을 시신에 댄 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일어날 것을 명합니다. 베드로는 죽음에서 깨어났고, 성인이 그를 산 채로 법정에 세우자 모두가 아연실색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앞서 위증한 두 명의 증인들이 배석한 자리에서 성인이 자신에게 토지대금을 지급하였음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는 동시에 자신의 자손들을 꾸짖으며 참회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을 마친 후에 베드로는 자신의 무덤으로 돌아가며 성인에게 자신이 연옥에서 빨리 벗어나도록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이 사건 이후에 왕은 더욱 깊은 타락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왕의 회개를 위한 성인의 기도와 권고가 모두 무위에 그치게 되자, 성인은 다른 주교들의 의견을 물어 마침내 왕을 파문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더욱 분노가 치민 왕은 부하들에게 성인을 살해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들이 미사 집전 중이던 성인을 붙잡으려 하는 순간 그들은 알지 못할 힘에 압도되어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왕은 직접 칼을 들어 성인의 목을 치기에 이릅니다. 화가 풀리지 않은 왕은 성인의 시신을 잔혹하게 훼손한 뒤, 그 시신을 새와 짐승들의 먹이가 되도록 들판에 던져버리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이 때 네 마리의 독수리가 이틀간에 걸쳐 성인의 시신을 지켰고 밤에는 시신에서 찬란한 광채가 났다고 전해집니다. 사제들과 신자들은 성인의 시신을 수습하여 교회 안에 매장하였습니다.

 

볼레슬라오 왕은 이 일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 의해 파문되어 마침내 퇴위되기에 이릅니다. 그는 방황 끝에 참회하여 로마에서 교황으로부터 사면 받게 됩니다. 이후로 그는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하여 무명의 평수사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2018년 5월 6일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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