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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체칠리아(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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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유 체칠리아 (柳 Cecilia)
축일 9월 20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과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761-1839년
같은이름 세실리아, 쎄실리아, 유 세실리아, 유 소사, 유 조이, 유세실리아, 유소사, 유조이, 유체칠리아, 카이킬리아, 케킬리아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한국 교회사 속 여성: 신학생의 어머니 유 체칠리아 성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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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6-25 조회수332 추천수0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헌종(교구 설정기)] 신학생의 어머니 유 체칠리아 성녀

 

 

박해에도 끊이지 않은 사제 성소

 

파리외방전교회는 전교를 하고, 그 지역 사제를 양성하여 그들이 교구 살림을 맡게 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선교사들은 사제 양성에 최선을 다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부터 신학교 설립과 신학생 선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조선 교구가 설정된 이후 박해기 내내 신학생 교육이 국내, 국외에서 끊이지 않았다. 먼저,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을 도우려고 온 유 파치피코 신부가 신학생들을 선발하였다. 모방 신부가 입국하여 더욱 성장 가능성이 높은 학생들로 다시 선발했고, 세 학생을 마카오로 보냈다. 그들은 기해박해로 국내에서 사제의 맥이 끊어진 때에 해외에서 성장하였다. 이렇게 자란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들어왔다.

 

한편, 국내에서도 신학생 양성이 이어졌다. 선교사들은 박해 속에서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대로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김대건 등이 마카오에서 유학하는 동안, 앵베르 주교는 국내에서 신학생을 선발하여 라틴어 수업을 면제하고 속성으로 서품하려고 했다. 주교는 중국에서 한문으로 간행한 신학 서적으로 정하상, 이민우, 이재의, 최형 등을 직접 가르쳤다. 그러나 주교의 순교로 이 교육은 무산되었다.

 

또한 페레올 주교 시절, 다블뤼 신부도 다섯 명의 어린 학생을 데리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라틴어와 한문을 가르쳤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입국하는 기회를 타서 외국으로 유학도 보냈다. 1854년 쟝수(Jansou, 楊) 신부가 타고 온 배로 임신생, 김요한, 이만돌이 유학을 떠났다. 이들은 1855년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가 열리자 귀국해서 배움을 계속했다. 배론 신학교에도 10여 년간 학생들이 총 10여 명 있었다. 그러나 병인박해로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후에도 박해를 피해 조선을 탈출한 선교사들과 조선 입국을 기다리던 선교사들이 중국 요동 지역 차쿠에서 조선인 신학생들을 교육시켰다. 그리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을 때까지 다시 스물한 명의 신학생이 페낭에서 공부하였다. 심지어 김대건 부제도 조선에 입국하여 주교를 모시러 갈 배를 준비하는 석 달 동안 학생 두 명을 선발하여 신학 교육을 시켰다. 또 그는 두 명의 후보도 선발해 놓았다.

 

그러므로 박해 시기에도 신학생의 모친이 여럿 있었다. 그중 정하상의 모친 유 체칠리아는 아들이 자신 앞에서 공부했고, 또 아들의 활동을 도울 수 있었으며, 아들을 따라 순교한 어머니이다.

 

 

신학생 정하상

 

정하상(1795-1839년)은 아버지 정약종이 신유박해로 순교할 때 여섯 살이었다. 그러나 그는 잘 자라서 교회 재건에 매진했다. 이 무렵 교회를 이끌어 갈 만한 지도자가 없었으므로 젊은 정하상이 모든 일을 도맡다시피 했다. 그는 유진길, 조신철, 이경언, 현석문 등 동료의 도움을 받아가며 21년간 조선 교회 밀사로 활동했다.

 

마침내 교회 재건과 성직자 영입이 이루어졌다. 정하상은 교구 설정, 선교사 네 명의 입국, 신학생들 출국에 중심 역할을 했다. 1837년 앵베르 주교 입국 뒤부터는 주교의 복사로 활동하며 교우촌을 순방하고 신자들을 돌보았으며, 동시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라틴어와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1839년 박해로 체포되어 세 명의 선교사가 새남터에서 순교한 다음 날(9월 22일),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 치명했다.

 

아들이 참수되고 두 달 뒤인 11월 23일 모친 체칠리아는 서울 포도청 감옥에서 옥사했다. 노인들은 법으로 참수를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심한 고문과 형벌을 견디다 그 여독으로 옥사했다. 한 달 뒤 정정혜가 아버지, 오빠 둘이 순교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했다. 가족 전원이 40년간의 수고를 순교로 보상받았다. 이 공로 뒤에는 어머니의 신앙과 헌신이 있다.

 

 

유 체칠리아의 신앙과 순교

 

체칠리아는 전주 유씨로 유항명과 한양 조씨 사이의 3남 3녀 중 막내였다. 그는 강원도 횡성군의 학골에서 태어났고, 용인에서 살 때 정약종과 혼인했다. 전처의 아들이 있는 후취 자리였다. 그는 남편에게서 천주교를 배웠는데 처음 가졌던 열심을 꾸준히 보존했다. 그러나 신유박해로 가정이 풍비박산되었다. 1801년 2월 26일(음) 남편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고, 맏아들 정철상도 두 달쯤 뒤 같은 형장에서 순교했다.

 

체칠리아는 맏며느리와 손주, 열두 살짜리 딸과 여섯 살짜리 정하상, 그 두 살 밑의 정정혜를 거느린 가장이 되었다. 가산이 적몰되고 분원의 집도 파괴되어 체칠리아는 가족들을 데리고 시아주버니 댁인 마재로 갔다. 그들은 이곳에서 집안의 비난과 핍박을 견디며 살았다. 그러는 동안 며느리와 손주, 맏딸이 죽었다. 지쳐 있던 어느 날, 남편이 꿈에 나타나 말했다. “나는 천국에 방이 여덟 개 있는 집을 지었소, 그중 다섯은 찼는데 나머지 세 방은 아직 빈 채요. 열심을 잊지 마오.”

 

체칠리아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식들의 교리 교육에 철저했다. 그는 정하상이 좀 더 넓게 배워야 할 필요가 있게 되자 무산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조동섬을 찾아가게 했다. 조동섬은 체칠리아의 외가 팔촌 오라버니였다. 한편, 조동섬의 종손자인 조숙은 그 외조부가 체칠리아의 사촌으로 체칠리아는 조숙 모친의 당고모였다. 곧 전주 유씨와 한양 조씨가 겹사돈이 된 사례로, 인척으로 얽힌 이들이 뭉쳐 교회에 큰일을 일궜다. 조동섬은 정하상이 학문과 소명에 눈뜨게 했고, 조숙과 권 데레사 부부는 정하상의 중국 왕래를 도왔다.

 

정하상은 장성하여 교회 일로 서울에 떨어져 살고, 정정혜가 침선과 방적으로 생계를 도모했다. 북경 주교가 “노모와 수정하는 누이를 외교 지방에 둠이 불가하다.”고 할 정도였다. 이후 체칠리아와 딸은 경기도 용문이나 충청도 등으로 옮겨 가며 생활하였다.

 

이런 생활고 말고도 체칠리아는 아들이 북경으로 떠날 때마다 마지막 보는듯한 아픔을 느꼈다. 이후 정하상이 신부와 주교의 복사일을 보게 되자, 체칠리아는 아들을 따라다니며 주교 댁 집안일을 보살폈다. 나이가 너무 많아진 뒤로는 줄곧 신심 생활에만 몰두했다. 그는 열심히 수계하며 밤낮으로 기도문을 외우고 절식을 통해 극기했다. 1839년 박해 때 조카가 체칠리아를 피신시키고자 했으나, 그는 아들과 함께 순교하기를 택했다.

 

체칠리아의 삶은 드러나지 않은 많은 다른 신학생의 어머니를 보여 준다. 신학생이 나올 수 있었던 집안 배경, 신앙, 생활의 고단함, 순교까지, 다른 어머니들도 꼭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 교수. 대구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 위원,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위원이며,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 연구원이다.

 

[경향잡지, 2020년 5월호,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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