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자료실

구분 성인명     축일 신분 지역명 검색
최경환 프란치스코(9.20)

최경환 프란치스코(9.20)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인쇄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최경환 프란치스코 (崔京煥 Francis)
축일 9월 2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회장,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05-1839년
같은이름 방지거, 최 프란치스코, 최프란치스코,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수리산 성지 최경환 프란치스코 회장의 순교신심과 영성
이전글 명화와 만나는 성인 이야기: 성 크리스토포로
다음글 명화와 만나는 성인 이야기: 불에 타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11-05 조회수125 추천수0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24) 수리산 성지 최경환 프란치스코 회장의 순교신심과 영성 (1)

 

 

최경환(1804~1839년) 프란치스코 성인은 기해박해 1년 전인 1838년에 수리산 교우촌에 입거하여 1년 만에 공소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수리산에 오기 전에 그의 출신지 충청도 홍주에서 시작하여 서울을 거쳐 강원도 김성, 부평의 접푸리 등지를 여러 해 떠돌아다녔다. 이와 같은 잦은 이주의 이유는 오직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이같은 신앙적 열정은 그의 부친 최인주(1767~1824년)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최경환 성인 가문에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최경환의 조부인 최한일, 최한기 형제가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1759~1801)의 전교를 받아들인 1787년 경부터였다. 최인주는 유난히도 순박했고 신앙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강해 가난한 친척들과 이웃들이 아직 청하기도 전에 미리 그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마련하여 아낌없이 자선을 베풀었다고 한다. 또 자식들에게는 이웃에게 무엇을 줄 때 거저 주고 보답을 바라지 말며, 항상 화목하게 지낼 것을 교훈으로 남겼다.

 

이러한 부모에게서 가르침을 물려받은 최경환 성인 역시 남다른 자선을 베풀었다. 자신은 늘 검소하게 살면서 자신에게 있는 재산은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생활화하였으며 특히 흉년이 들면 굶주리는 이웃들을 백방으로 도와주었다. 한 번은 생계가 어려워져 홍주에 있었던 몇 마지기의 논을 팔아서 귀가하는 길에 빚 때문에 길에서 서로 싸우는 사람들을 보고서는 곧바로 논을 팔은 돈을 꺼내어 채무를 대신 갚아주고 두 사람을 화해시켰다고 한다. 시장에서 과일을 살 때도 가장 못생기고 흠집이 많은 것만을 골라서 사왔다고 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왜 그렇게 엉뚱한 것들을 사가냐고 물으면, “제일 나쁜 물건을 사가는 사람이 없으면 불쌍한 장사꾼들은 어떻게 살아가겠느냐?”고 답했고, 그러면서도 과일을 추수할 때엔 가장 좋은 품질의 싱싱한 것들을 골라서 이웃들에게 먼저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최경환 성인이 남다른 자선과 애긍을 실천한 것은 그가 평소에 자주 읽고 묵상해온 천주교 서적 “칠극(七克)”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으며 자기희생을 전제로 하는 지극한 겸손에서 우러나온 행위였다. 최경환은 늘 교회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기에 힘썼으며 그것을 알고 깨달은 바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실천하는 참된 신앙인이었다. [2019년 11월 3일 연중 제31주일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25) 수리산 성지 최경환 프란치스코 회장의 순교신심과 영성 (2)

 

 

최경환 성인은 충청도 홍주에서 살 때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기 어렵자 혼자 몰래 집을 떠나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영위할 수 있는 곳으로 갔다. 최경환 성인의 집안 형제들도 그를 따라, 홍주의 넓은 집과 논밭을 팔고 서울과 강원도, 경기도 등지를 떠돌며 한곳에서 수년이나 수개월씩 머물다가 박해가 일어나거나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면,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곳으로 계속 옮겨 다녔다. 이처럼 자유롭고 열심한 신앙생활을 참으로 갈망했던 최경환 성인이었기에 성인이 그 가족과 함께 수리산 교우촌으로 찾아들자, 교우들은 그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최경환 성인은 평소에 열심히 성경을 읽었는데, 특히 박해가 크게 닥쳐올 기미가 보이자, 속히 피신하라는 주위의 권고도 뿌리치고 더욱 열심히 성경을 열심히 읽으면서 태연하게 기도와 신앙생활에 열중했다. 그 이유를 묻자 성인은 “군사가 전쟁에 대비하여 미리 병법서를 읽는 법인데, 하물며 천주교 박해라는 영적 전쟁터에 나가야 하는 몸으로 어찌 성경 말씀을 더욱 열심히 읽고 묵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러한 성인이었기에 수리산을 급습한 포졸들을 오히려 음식과 술로 잘 대접하고 그들을 따라 순순히 포도청으로 잡혀갔다. 최경환 성인은 그만을 믿고 함께 포도청으로 따라온 수많은 신자들이 매서운 매질과 살벌한 고문 앞에 속수무책으로 넘어지고 배반하는 과정을 보면서 마음 아파했다. 함께 간 40여 명의 수리산 교우들은 최경환, 이성례, 이 에메렌시아 이 3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결코 최경환 성인은 굴하지 않았다.

 

다블뤼 주교는 자신의 비망기에 최경환 성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음력 8월 5일 수리산 교우촌 회장 최경환은 그가 그토록 사랑하고 큰마음으로 섬겼던 하느님께로 돌아갔다. 아들인 최양업 신부를 외국에 보낸 죄인이라며 온갖 형벌을 가하여 그는 사지를 전혀 쓸 수 없게 되었다. 그 누가 보아도 그는 이 시기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증거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 그는 실제 본보기로 교우들의 힘을 북돋아 주었고 형리들 앞에서 천주교의 큰 영광이 되었다.”

 

최경환 성인은 몽둥이로 쳐서 죽이는 장살형으로 35세의 나이에 순교했다. [2019년 11월 10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Total 0 ]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