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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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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축일 1월 2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신학자, 교회학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224/1225-1274년
같은이름 도마, 아퀴노, 토마스아퀴나스, 토머스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심리학자가 만난 교회의 별들: 광대한 학문적 성취를 넘어 하느님만으로 충분했던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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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7-11 조회수652 추천수0

[심리학자가 만난 교회의 별들] 광대한 학문적 성취를 넘어 하느님만으로 충분했던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혹은 토마스 데 아퀴노 Thomas de Aquino) 같은 위대한 철학자의 삶을 짧은 글에 요약한다는 것은 경박하다 못해 위험한 일이다. 사실상 서양의 근대 지성사회를 시작한 인물 중 하나이고 워낙 방대한 분야의 저서를 남겼기에 그의 저작 일부만 연구하면서 생을 바친 학자들이 역사상 차고 넘친다. 섣부른 언급이나 분석은 오히려 해로울 수도 있다. 해서, 이 글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체 삶이나 철학에 대한 조망이 아니라 심리학자가 보기에 특히 의미가 있으리라 여겨지는 작은 한 일부분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먼저 밝혀야 할 것 같다.

 

아퀴나스 성인(1225-1274)은 로마와 나폴리 사이 작은 도시 로카세카(Roccasecca)에서 왕족의 가계로 태어났다. 가문의 전통대로 베네딕토 수도회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이 불과 다섯 살이었고, 나폴리대학을 거쳐 파리대학에서 수학한다. 신학 공부를 본격 적으로 하면서 부모님의 뜻을 거슬러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했다. 이를 반대한 가족에게 끌려가 로카세카 성에 1년간 감금되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훌륭한 장상과 스승들을 만나는 행운도 다시 찾아온다. 어려서는 큰 체구에도 불구하고 워낙 겸손해서 ‘벙어리 황소’라는 별명으로 불린 적도 있다. 하지만 퀼른(Cologne)에서 만난 스승, 대 성 알베르토(Saint Albert the Great 혹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Albertus Magnus)는 아퀴나스가 세상을 바꾸어 놓을 사람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후에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넘어 평생 일종의 도반이 되어 함께 중세철학과 신학을 완성해서 근대의 문을 열게 된다. 말없이 공부만 하는 학생이었지만, 철학적인 논쟁을 시작하면 교수 이상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아쉽게도 52년이라는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저작들은 평범한 학자들이 수백 년 동안 연구해도 다 할 수 없는 깊이와 넓이를 갖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작 관련 논문을 제외한 주석서만도 수천 권 이상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엄청난 학자가 아닐까 싶다.

 

분석 심리학자 칼 융도 철학이나 신학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많은 신학자들 가운데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우선 아퀴나스가 신학의 입장에서 몸과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통합하느냐 하는 주제에 관한 것이 몸과 마음의 문제를 다룬 심리학자의 영역과 겹친다. 중세에는 신학의 핵심이 주로 플라톤, 혹은 신플라톤주의 영향 아래 있었다면 대 성 알베르토와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통합하려 했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플라톤이나 신플라톤 학자들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정념, 예술, 몸 등에 대해 훨씬 더 유연하고 포용적인 태도로 접근했기에 근대 이후 꽃핀 인본주의로 가는 철학적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퀴나스 성인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듯 몸과 마음, 또 철학과 신학을 송곳처럼 깔끔하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기보다 오히려 그 두 영역을 어떻게 하느님 안에서 하나로 통합하느냐를 고민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죽기 얼마 전, 동방정교회와 로마교회를 통일하려는 로드맵을 교황에게 사명으로 받고 긴 여행을 떠나려 했던 것도 그런 신학적 배경 때문이었던 것이다.

 

몸과 마음을 따로 접근하려는 행동주의, 과학주의, 실험심리학파 등의 양극화된 학문 세계에 반기를 들었던 칼 융이 영혼과 신체를 나누어 생각했던 신플라톤학파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깊이 공부했던 토마스 아퀴나스에 경도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의사로서 영혼에 비해 불완전한 신체를 경시하거나 학대하는 등 건강하지 않은 태도를 가진 이들을 많이 본 사람으로서 하느님 안에서 신체와 정신이 하나가 되는 것을 강조한 아퀴나스의 신학적 성취가 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 같다. 또 둘 다 몸집은 큰데 말이 없고 겸손해서 은근히 동료 학생들에게 따돌림 비슷한 것을 당했던 점, 천재적인 글과 말로 일찌감치 선생님들에게 견제를 당한 일화 등을 읽으면서 더 아퀴나스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아퀴나스의 아버지는 베네딕토 수도회를 고집했지만 본인이 이에 반항해서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한 점이나 아버지는 목사였지만 칼 융이 어느 종교에도 기울지 않고 불교나 힌두교, 가톨릭 등 타 종교에 더 개방적이었다는 점도 서로 비슷한 부분으로 다가온다.

 

당시 가장 중요한 신학계의 양대 산맥인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신비론에 더 경도되었다면, 도미니코 수도회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랍 철학을 배운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등이 시작한 전통으로 이성과 합리성이 신학과 만나는 지점을 제공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아퀴나스가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지 않았다면 이성과 합리성이 근간이 되는 서양지성사에도 큰 구멍이 나지 않았을까 싶다.

 

저명한 분석가이자 도미니코회 수사였던 빅터 화이트 신부(1902-1960)는 칼 융과 편지를 교류하면서 아퀴나스의 전통 위에 고유의 학문 영역을 넓혀가려고 했다. 융의 심리학 이론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통합한 아퀴나스의 신학적 토대가 없었다면 아주 다른 모습이었을 것도 같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혼이라는 뜻으로 아니마란 단어를 썼는데, 융이 이를 남성의 무의식에 있는 여성성이란 뜻의 아니마로 재해석했고, 여성의 무의식에 있는 남성성이란 뜻으로 아니무스를 쓰기 시작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성과 논리로는 말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지만 하느님과 만나는 공간인 영혼의 존재에 대해 깊이 천착했던 것처럼 융 역시 이성이나 논리 언어로 이해가 되는 영역인 의식과, 상징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영역을 무의식이라고 표현했다.

 

다만 아퀴나스는 이런 영혼의 세계를 하느님의 작품이며 오로지 하느님만이 관장한다고 단언했다면, 융은 무의식의 세계를 의식이 내려가 만남으로써 진정한 자기실현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융은 “욥에게 답함(Answer to Job)”이라는 논문으로 이러한 차이를 자세히 논증했는데, 이에 대해 오해한 교회는 격렬히 분노한다. 애꿎게도 융 분석 심리학을 공부했다는 이유로 화이트는 교수 자리에서 쫓겨나 유배처인 캘리포니아로 가게 된다. 자신과의 작업을 곡해해서 출판했다고 생각한 화이트는 융을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세대를 넘어선 둘의 우정은 금이 가고 만다. 나중에 융의 아내를 병문안 하면서 다시 만나긴 했지만, 화이트가 쉰 살도 못 되어 암으로 죽고 일 년 후 융도 노환으로 사망하면서 깊은 상처가 완전히 봉합되지는 못한 것 같다. 화이트와 융의 결별과 재회 그리고 불완전한 화해는 20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신과 신체 이론을 나름대로 다르게 받아들인 정신의학과 신학의 갈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애초에 심리학에 관심을 가졌던 화이트가 프로이트가 아니라 융을 선택한 것은 프로이트가 종교를 하나의 정신 증상으로 기술한 반면, 융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초월적인 존재와 종교의 신성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경험과학자적인 입장에서 들여다보려 했던 융과 신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려 했던 아퀴나스의 전통을 받아들여 마음을 이해하려고 했던 화이트 신부의 차이는 신학과 심리학 양쪽에서 앞으로도 계속 연구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죽기 몇 년 전부터 아퀴나스의 저작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다 마침내 환청과 환시를 듣게 된다. 밤낮 없이 공부하고 강의하고 책을 썼던 아퀴나스에게 하느님께서 나타나셔서 “너는 나를 위해 충분히 일했다. 무엇을 상으로 주었으면 좋겠느냐?” 하고 물어보셨다는 것이다. 이에 아퀴나스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하느님 당신이면 충분합니다.”라고 대답했고, 고해 신부에게 이 같은 체험을 말한다. 고해 신부는 그렇다면 더 열심히 공부를 하고 책을 쓰라고 주문했지만, 아퀴나스는 이 체험 이후 더 이상 저술 작업을 하지 않는다. 칼 융 역시 중년의 심장마비 체험, 프로이트와 그 제자들로부터 축출되고 동료 의사들 사이에서 고립되어 깊은 우울의 시기를 겪으면서 환시와 비슷한 체험을 했다. 이 경험이 사후 한참 뒤에 공개된, 겉표지가 붉어서 “레드북(Redbook)”이라 불리는 노트에 그대로 담긴다. 깊은 내면의 정신세계로 침잠했다가 선종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을 어쩌면 융도 닮고 싶어 했을지 모르겠다. 융이 중년의 고비를 레드북과 함께 넘겨 팔순을 넘어서까지 세속의 삶을 이어갔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쉰둘에 생을 마쳤다. 환시의 내용처럼, 할 일을 넘치게 다 한 그는 더 이상 세상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을지 모르겠다. 하느님 곁에 기쁘게 앉는 것 외에는 세상에 대한 미련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철학과 신학의 정신대로 신을 위한 자신의 공부와 저작에 대해 그가 받고 싶었던 보상은 오로지, 하느님 존재 그 자체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신과의 관계에서 삶과 죽음을 이해한 그의 존재론(ontology)의 실현이다. 아퀴나스의 자연철학, 신학, 논리학, 철학을 아우르는 광대한 학문적 성취도 결국 하느님을 향한 것이기에 그에게는 오로지 시편 한 구절이면 죽음의 여정에서 충분한 힘이 되지 않았을까.

 

인간의 본질을 깊이 탐색하지만 죽기 직전까지 회의하고 욕망으로 괴로운 고비를 견뎌야 하는 많은 철학자들에 비해 하느님의 품에 귀의해 행복하게 삶과 죽음을 완성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삶이 웅숭깊고 아름답다는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도 토마스 아퀴나스의 발치에도 가까이 가지 못한다는 점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이나미 - 신경정신과 전문의. 미국 융 연구소와 뉴욕 유니언 신학대학원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 서울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이자 인권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행복한 부모가 세상을 바꾼다』 『운명에서 희망으로』 『성경으로 배우는 심리학』 『한국에서 심리학자로 살아보니』 등 다수가 있다.

 

[생활성서, 2019년 7월호, 이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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