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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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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다윗 (David)
축일 12월 2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 예언자, 구약인물
활동지역 이스라엘(Israel)
활동연도 +10세기BC
같은이름 다비드, 데이비드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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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8-04 조회수116 추천수0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다윗 (1)

 

 

“그는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운 잘생긴 아이였다.”(1사무 16,12) “그는 비파를 잘 탈 뿐만 아니라 힘센 장사이며 전사로서, 말도 잘하고 풍채도 좋은 데다 주님께서 그와 함께 하십니다.”(16,18) 이사이의 여덟 아들 중 막내(16,10-11; 17,12-14), ‘양을 치다가 이끌려 나와 이스라엘을 돌보는 일’(시편 78,11)을 맡게 된 이, 그 이름처럼 하느님과 사람들의 ‘사랑받는 이’, 다윗, 위대한 임금을 만날 차례가 되었습니다.

 

다윗의 어린 시절과 관련된 일화 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골리앗을 쳐 이긴 사건’(1사무 17장)일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필리스티아인들이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상대 진영에서 골리앗이라는 투사 하나가 나옵니다. ‘키는 여섯 암마 이상(약 3m)이고 오천 세켈(57kg정도)이나 나가는 갑옷으로 중무장하고 창날만도 육백 세켈(7kg 정도) 되는 거대한 창을 든’(4-7절) 이 거인 앞에서 이스라엘은 무서워 어쩔 줄 모르고(11절) 달아나기까지 했습니다(24절).

 

이 싸움판에 어린 다윗이 들어섭니다. 골리앗의 모욕적인 말을 듣고 두려워 떨기만 하는 군사들에게 그가 묻습니다. “할례도 받지 않은 저 필리스티아 사람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전열을 모욕한단 말입니까?”(26절)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전열’, 곧 하느님께 속한 군대로 묘사하는 이 말이 온 진영에 퍼져나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울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그를 불러 어린 소년 다윗을 만류합니다. “너는 마주 나가 싸우지 못한다.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전사였고, 너는 아직도 소년이 아니냐?”(33절) 지극히 상식적인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이 싸우러 나가겠다고 우깁니다. 골리앗을 물리치겠다는 소년 다윗의 용기는 어디서 왔을까요? 그것은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저를 빼내 주신 주님께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의 손에서 저를 빼내 주실 것입니다.”(37절)

 

그런데 우스꽝스런 장면이 연출됩니다. 다윗에게 사울의 투구와 갑옷, 칼이 주어집니다. 소년 다윗은 ‘제대로 걷지도 못 합니다.’(39절) 상상해 보십시오. 아이가 어른, 그것도 사울이라는 거대한 사람의 장비들을 걸치고 있는 모습은 코미디에나 나올 법한 장면입니다. 다윗은 결국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평소에 하던 대로 ‘막대기와 돌, 그리고 팔매질을 할 끈’(40절)만 들고 적장의 앞으로 나아갑니다.

 

골리앗의 앞에 선 다윗은 모두가 들으라고 외칩니다. ‘나는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다는 것을, 주님은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하겠다.’(45-47절) 그리고 ‘날쌔게 달려가 팔매질을 해서 돌 하나를 골리앗에게 던집니다. 돌은 정확하게 골리앗의 이마로 날아가고, 이 거대한 장수는 쓰러집니다.’(48-49절) 필리스티아인들은 달아나고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다윗의 이 용기는 어디서 왔을까요? ‘볼이 불그레하고 용모가 아름다운’(42절) 이 소년을 과감하게 뛰어나가 모두가 ‘무서워 떠는’(11절.24절) 골리앗에게 도전하게 한 이 힘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믿음’이라는 말로 담기에는 부족해 보입니다. 그에게 ‘주님께서 나를 저 자의 손에서 빼내 주실 것이다.’(37절)라는 굳센 믿음을 심어준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논리적인 신학적 증명도, 놀라운 신비체험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요? 다윗이 사울 임금 앞에서 하는 말을 들어봅시다. 여기에 힌트가 있습니다. ‘사자든 곰이든 양을 물어 가면 저는 뒤쫓아 가서 그 입에서 새끼 양을 빼내고, 저에게 덤벼들면 턱수염을 잡아 휘어잡고 내리쳤습니다.’(34-36절)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겪은 일, 바로 자신의 체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에 대한 체험, 그것이 그의 믿음의 근원이며, 용기의 원천입니다. 설명하거나 보여줄 수 없지만, ‘체험에서 오는 믿음’, 몸으로 겪으며 마음에 깊이 새겨진 이 믿음으로 다윗은 나아갔고, 승리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체험의 신앙’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성의 시대를 거쳐 정보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구호를 ‘아는 것이 신앙이다.’라는 말로 바꾼 소리에 어느새 끌려가고 있습니다. 특정한 지식을 많이 쌓아야 깊이 있는 신앙처럼 생각하는 이들까지 등장해 교회와 사회를 어지럽힙니다. 한편, 어떤 이들은 신비체험만을 강조합니다. 동영상이나 특별한 메시지를 받았다는 사람의 이야기들이 전화기와 인터넷을 통해 떠돌고 사람들을 유인합니다. 그러나 지식도 동영상도 메시지도, 그냥 호기심을 채워줄 뿐이지, 믿음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나서는 용기 있는 믿음으로 인도해주지 못합니다. 삶 속에서 얻은 ‘주님의 손길에 대한 체험’만이 주님께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것은 특별한 순간,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통상적인 만남, 별다를 것 없는 시간들과 늘 지나고 머무는 곳에서 겪는 일들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 안에서 ‘주님의 손길’을 발견하는 이들은 그 무엇도 꺾을 수 없는 강력한 신앙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체험의 신앙’이며, 언제 어디서든 당당하고 용기 있게 주님을 고백하게 하는 힘입니다. 소년 다윗이 그러했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랬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빗대어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다윗은 약한 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체험의 믿음으로 무장한 이’로서 ‘문명의 무기로 무장한 이’를 물리친 ‘힘센 장사이며 전사’(1사무 16,18)입니다. 지식이 아니라 주님을 찾아야 믿음으로 굳건해질 수 있으며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2018년 8월 5일 연중 제18주일 의정부주보 5-6면,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선교사목국 성서사목부 담당)]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다윗 (2)

 

 

신화와 전설 속의 영웅들은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놀라운 지위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역경을 딛고, 수많은 싸움을 거쳐야 비로소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깨닫게 되고 모든 이들이 우러러보는 자리를 얻게 됩니다.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명성을 얻기 시작했지만, 그것이 그대로 임금의 자리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임금 사울의 시기와 암살의 위협을 시작으로 홀로 굳건히 설 수 있을 때까지 여러 위험을 뛰어넘어야 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1사무 17장)은 다윗이라는 인물을 알리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18,7; 21,12; 29,5) 백성들의 찬사는 곧장 사울의 시기를 불러왔습니다(18,6-9). 사울은 처음에는 다윗을 사적으로 은밀하게 죽이려 합니다. 둘만 있을 때 다윗에게 창을 던지거나(18,10-12; 19,9-10), 전쟁터의 맨 앞에 나가게 하여 적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하려 합니다(18,17-29; 2사무 11장에서 다윗이 밧 세바의 남편 우리야에게 했던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다윗은 더 많은 승리를 거두며 성장합니다.

 

사울은 이제 공개적으로 그를 죽이겠다고 선언합니다(1사무 19,1). 사울의 전령들이 다윗의 집 앞에서 그를 체포하려 했지만, 다윗은 아내 미칼의 재치로 달아나 목숨을 건집니다(19,11-17). 다윗이 사무엘에게로 달아났다는 것을 안 사울이 그를 잡으려 전령들을 세 번이나 보내고 자신이 직접 나서기까지 하지만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황홀경에 빠져드는 바람에 다윗을 쫓지 못합니다. 사울은 도망자 다윗을 도왔다는 이유로 놉의 사제들과 주민들을 학살하며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자신의 의지를 확고하게 드러냅니다(21,1-10; 11,6-23). 다윗은 결국 필리스티아로 달아납니다(19,18-24; 21,11-16). 이민족의 세력권 안으로 달아난 다윗은 이제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무리를 형성하고 점차 힘을 키워 나갑니다(22,1-5).

 

그래도 다윗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의 추적은 집요하게 이어집니다. 숨바꼭질 같은 추격전이 벌어지고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사울에게 포위되어 거의 잡힐 뻔했습니다(23,14-15.19-28). 그러나 주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23,14).

 

그런데 ‘갈림 바위’에서 사울이 다윗의 추적을 포기해야 한 사건 이후로 둘의 자리는 역전됩니다. 이제 다윗이 사울의 목숨을 위협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것을 ‘다윗이 사울의 목숨을 살려주다.’라는 소제목을 달고 1사무 24장과 26장 두 번에 걸쳐 전해주고 있습니다.

 

1사무 24장의 이야기는 다윗 일행이 숨어든 동굴 안으로 사울이 들어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다리를 쪼그리고 앉아 급한 일을 처리하고 있는 사울의 등 뒤, 어두운 곳에 다윗과 그 부하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부하들이 말합니다. ‘지금이 바로 저 원수를 칠 기회다. 이는 주님의 뜻이다.’ 그러나 다윗은 거부합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이(meshiah 임금을 가리키는 말)에게 손을 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며 사울의 옷자락만을 몰래 자릅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사울이 길을 나서자 다윗이 쫓아나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왜 다른 이들의 소리에 끌려가느냐? 오해다. 나는 이렇게 당신을 해칠 수 있었음에도 아무런 일도 벌이지 않았다.’ 결백을 주장하는 그는 ‘주님의 판단’(24,13.16)에 자신을 내맡깁니다. 사울은 ‘네가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다.’(18절)라며 다윗을 치켜세우고는 예언의 말을 합니다. “이제야 나는 너야말로 반드시 임금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너의 손에서 일어날 것이다.”(21절) 사울과 다윗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더 이상의 추적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죽자(25,1), 사울은 다시 다윗을 잡으러 나섭니다(26장). 이번에는 삼천 명의 선발된 병사들을 대동하고 와서 다윗이 숨은 곳 가까이에 진을 칩니다. 다윗은 밤의 어둠을 틈타 사울의 막사 안으로 침투합니다. 사울과 그 수하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 채 곤히 잠들어 있습니다. 다윗의 부하가 또다시 개입합니다. ‘기회다. 사울을 죽이자.’ 그러나 다윗은 “주님께서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이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셨다.”며 사울의 창과 물병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리고 다시 사울을 불러 나오게 합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어찌하여 저를 쫓으십니까? 저를 주님 앞에서 내쫓아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십니까? 저는 한 마리 산새나 벼룩 같은 이일 뿐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그에게 축복의 말을 건넵니다. “내 아들 다윗아, 복을 받아라. 너는 하고자 하는 일을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것이다.”(26,25)

 

여기서 눈에 띄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의 부하들의 목소리입니다. ‘하늘이 준 기회다. 사울을 치자.’ 그런데 다윗을 충동질하는 이 소리들은 그의 곁에 있지만, 동굴 깊숙한 곳에서(24,4), 또한 한밤중(26,7)의 사울의 막사에서 들려온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컴컴함 속에서 그 소리들이 울리고 있습니다. 다른 이를 공격하고 복수하고 갚아주자는 소리는 어두움에서 오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소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기에’, 그는 저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바깥으로 나와, 곧 밝은 곳, 공개된 곳으로 나와 자신을 드러내며 ‘주님’을 찾으며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오해를 풀게 하고, 자신을 공격하는 추격자의 힘을 빼버렸으며, 마침내 ‘임금의 지위’에 대한 예언과 ‘축복’의 말을 이끌어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서도 많은 어둠의 소리들이 소란을 피웁니다. 세상의 많은 이들도 이러한 목소리를 전달합니다. ‘다시는 사람들이 너를 얕잡아 보지 않도록 강하게 나가라.’ ‘소리치는 이에게 더 큰 소리로 외쳐라.’ ‘바보냐? 왜 가만히 있느냐!’ 그럴 때, 우리는 밝은 곳, 주님께서 계신 곳, 주님께서 부르시는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괴롭히는 이들이 힘을 잃습니다. 그래야 어둠의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소리를 따를 수 있습니다. 그래야, 시커먼 어둠이 이끄는 곳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좋고 훌륭한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018년 8월 12일 연중 제19주일 의정부주보 5-6면,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선교사목국 성서사목부 담당)]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다윗 (3)

 

 

다윗은 자신을 쫓는 사울을 피해 달아나 치클락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그러다 사울이 죽자 헤브론으로 가서 유다 지파의 임금이 됩니다(2사무 2,1-7). 다른 지파들의 연합체인 이스라엘은 사울의 아들 이스 보셋을 임금으로 세우지만 곧 그는 살해되고 맙니다(2사무 2,8-11; 4,1,12). 다윗은 마침내 온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워지고(5,1-5) 예루살렘을 점령한 다음(5,6-12) 계약 궤를 그리로 옮겨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합니다(6,1-23). 이제 그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이민족을 물리치고 영토를 확장하며, 왕정 체제를 굳혀갑니다(8장, 10장). 이제 모든 것이 자리를 잡고 모든 것이 다 잘 풀려나가는 듯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권력의 맛에 취했나 봅니다. 1사무 8장에서 사무엘이 경고했던 임금의 폐해가 현실화합니다. ‘임금이 너의 아들, 딸, 재산, 종들까지 가져갈 것이다.’ 오늘 우리는 구약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 이야기를 살펴보려 합니다(11,1-12,31).

 

이 이야기는 ‘라빠’라는 성읍을 점령하기 위한 전투를 테두리로 하고 있습니다(11,1; 12.26-31). 이스라엘의 전군이 출전했고(11,1.11) ‘계약 궤’까지 나갔다고 하니, 이는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 때와 같이 ‘주님의 (이름으로 싸우는) 전쟁’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미 뭔가 사달이 날 것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전장에 나가 있을 때, 다윗은 한가로이 왕궁의 옥상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고는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전투에 나간 병사의 아내입니다. 남의 부인이라는 것을 알고도 다윗은 그 여인을 불러들이고 잠자리를 같이합니다. 집으로 돌아간 여인은 임신을 하고 이를 알립니다(11,2-5).

 

그러자 다윗은 남편 우리야를 예루살렘으로 부릅니다. 자신의 ‘은밀한’(12,12) 범죄를 숨기기 위해 우리야에게 집으로 가라고 명합니다. 그러나 우리야는 집으로 가지 않고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밤을 보냅니다. 다윗은 그를 불러 왜 집으로 가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우리야가 대답합니다. “계약 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초막에 머무르고, 제 상관 요압 장군님과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의 신하들이 땅바닥에서 야영하고 있는데, 제가 어찌 제 집에 내려가 먹고 마시며 제 아내와 함께 잘 수 있겠습니까? … 저는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11,11) 당대의 풍습에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은 금욕을 통해 자신을 정화했습니다(1사무 21,6). 전투란 단순한 인간적 싸움이 아니라 ‘주님의 전쟁’ - 주님께서 직접 싸워주시는 곳, 곧 주님이 계신 곳에 가는 것이라는 이해 때문입니다. 우리야는 히타이트 사람, 곧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임금 다윗보다 더 ‘주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역시나 우리야는 그날 밤도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세 번째로 우리야를 불러 술을 먹입니다. 그러나 우리야는 충직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취중에도 집으로 가지 않습니다(6-13절).

 

초조해진 다윗은 더 악랄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를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야의 손에(!) 그를 전장에서 죽게 만들라는 편지를 들려 전투 지휘관인 요압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우리야는 치열한 전투의 공방 속에서 장렬한 죽음을 맞습니다. 다윗은 여인을 취하고 아들을 얻습니다. 이제 다윗은 자신의 범죄를 은밀하게 잘 정리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습니다. 그가 벌인 일들은 이미 여럿이 알거나 눈치챘습니다. 밧세바를 궁전으로 불러온 사람만이 아닙니다. 우리야의 죽음을 알리는 전령도 조금은 이상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우리야를 치열한 전투 현장으로 밀어 넣어 죽게 한 요압은 이 사건의 내막을 알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다윗에게 보내는 전령에게 하는 말(11,18-24)이 이를 보여줍니다. 다윗이 어떻게 반응할지, 그리고 그의 화를 가라앉힐 말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야도 죽었습니다.’ 이 한 마디가 전투에서의 패배 소식을 듣고 분노하는 임금에게서 ‘격려의 말’(25절)을 끌어냅니다. 이들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 계셨습니다. “다윗이 한 짓이 주님의 눈에 거슬렸다.”(11,27)

 

예언자 나탄이 불쑥 궁전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야기 하나를 꺼냅니다. ‘많은 가축을 가지고 있던 부자가 암양 한 마리를 딸처럼 키우는 가난한 이의 양을 잡아먹었습니다.’ 다윗은 분노합니다. ‘그런 자는 죽어 마땅하다.’ 그러자 나탄의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12,1-7) “어찌하여 너는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주님이 보기에 악한 짓을 저질렀느냐?”(9절) 주님의 책벌이 예고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다.”(10절) 다윗은 즉시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주님께서 임금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임금님께서는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13절)

 

그러나 그에 따른 벌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불륜의 아이는 죽습니다. 또한 아들 압살롬이 다른 아들 암논을 살해하는 사건(13,23-37)이 일어나고, 압살롬이 반란(15,1-18,17)을 일으켜 도망자의 삶을 다시 살아야 했습니다. 다윗은 이제 점차 쇠퇴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읽다보면 ‘이 간교하고 양심도 없는 임금을 하느님은 어찌 그대로 두시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다윗을 마지막에 용서하시는 말씀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회개하는 모든 이를 용서하시는 자비로운 분이라는 것과 악에서도 선을 끄집어내시는 분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모든 상식과 이해를 넘어서는 분이라는 것을! [2018년 8월 19일 연중 제20주일 의정부주보 5-6면,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선교사목국 성서사목부 담당)]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다윗 (4)

 

 

사무엘기가 전하는 다윗의 모습은 다양합니다. 비파를 연주하는 미소년, 골리앗을 때려잡는 용감한 목동, 싸움터의 맨 앞에서 싸우는 장수, 자신의 억울함을 눈물로 호소하는 비참한 이, 부하들을 이끌고 약탈을 하며 살아가는 두목, 주님의 궤 앞에서 춤을 추는 열정의 신앙인, 백성을 다스리는 임금, 뻔뻔한 죄인,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뉘우치며 회개하는 인간, 긍정적인 면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면까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사무엘기에는 왕정에 대한 부정적 비판의 입장과 긍정적인 입장 두 가지가 있습니다. 다윗에 대한 평가들도 이러한 입장에 따라 여러 모습을 보입니다. 부정적인 입장에서 볼 때, 왕정은 임금이신 주님의 통치를 반대하는 것입니다(1 사무 8,6-8; 10,18.19). 임금의 권한을 말하는 사무엘 8장에 따르면 임금은 자작농들의 수입을 빼앗아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사무엘이 판관으로서 필리스티아인들을 크게 물리치는 장면(1사무 7,2-17)도 주님의 영이 함께 하는 판관만 있으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임금이 필요하지 않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와 사통한 것과 우리야를 죽게 했다는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임금은 해악을 끼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솔로몬의 즉위와 관련된 이야기(1열왕 1,11-53)에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왕정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에서 볼 때, 임금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세우신 이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임금으로 세웠다거나, 백성들이 모인 자리에서 제비(하느님의 선택)를 통해 그가 뽑혔다는 이야기(1사무 10,17-24), 그에게 부정적이었던 이들이 야베스 구출 사건을 계기로 적극적으로 그의 즉위를 추진하는 모습(11,1-15) 등은 사울을 임금으로 세우는 과정이 주님의 뜻(1사무 9,16.17; 10,22; 11,6.7)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는 다윗에게서도 반복됩니다. 다윗은 주님이 선택한 임금(16,12)이며, ‘주님의 영이 줄곧 그에게 머문 이’(16,13)입니다. 그는 비파로 악령을 물리치기도 했습니다(16,14-23;18,10). 다윗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을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이’라는 이유로 살려줍니다(1사무 24장, 26장). 무리를 형성한 다윗이 약탈을 하며 살아가는 산적 두목 같이 되었을 때도, 이를 긍정적으로 묘사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핍박하던 필리스티아인들을 공격하고 그들을 약탈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구했다는 것입니다(23,1-5; 30,1-31). 다윗이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탄의 아들인 므피보셋에게 호의를 베풀었거나(2사무 9장), 압살롬의 반란으로 달아나던 자신을 저주하는 시므이를 내버려두었다(2사무 16,5-14)는 이야기들은 그의 관용과 주님의 뜻을 찾고 따르는 충실함(2사무 15,25-26)을 드러나게 합니다.

 

이러한 입장들은 역사적인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임금들이 다스리던 시절에는 임금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임금에게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하고 바빌론으로 유배를 갔을 때, 새로운 입장이 나타났습니다. 임금들이 제대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파괴되고 땅마저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있던 이들은 왕정에 대해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배가 끝나고 돌아온 이들은 새로운 희망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다윗과 같은 임금이 올 것이며 그때에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새롭게 해주실 것이라는 바람을 키워갔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변천 속에서 과거에 대한 평가와 미래의 희망, 두 가지가 함께 발전하면서 이 긍정과 부정 두 입장이 함께 전해져 오게 된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후대에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정리한 역대기는 다윗의 부정행위와 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1역대 16,37-42; 23,1-26,28은 다윗이 성전의 직무와 직제를 편성했다고 하고, 1역대 28,11-18은 성전의 기본 설계도 그의 작업이라고 하며, 성전이 비록 솔로몬에 의해 지어졌지만, 그 모든 기본은 다윗의 업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성전의 토대를 만든 다윗은 위대한 임금이라는 생각에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것은 삭제해 버린 듯합니다.

 

유다 전통은 다윗을 시편의 저자라고 합니다. 시편 3-41; 51-72; 101-103; 108-110; 138-145는 머리말에 ‘다윗’의 이름을 달고 있고, 이 시편들의 저자가 다윗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몇몇 시편들은 다윗이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을 청하며 바친 기도라며 구체적인 상황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우리가 연도로 바치는 시편 51편(하느님, 자비하시니)은 머리글에 “그가 밧 세바와 정을 통한 뒤 예언자 나탄이 그를 찾아왔을 때”(51,1)라 하고, 63편(하느님, 당신을 찾습니다)은 “그가 유다 광야에 있을 때”(63,1)라며 그 상황을 설명합니다.

 

2사무 23,1은 ‘이스라엘의 노래들을 지은 이’라 하고, 2사무 1,17.19-27; 3,33-34는 사울과 요나탄, 아브네르의 죽음 앞에서 다윗이 애가를 지어 불렀다고 합니다. 1사무 16,16-23; 18,10는 비파 연주가로 소개하고, 느헤 12,36; 아모 6,5는 악기 발명가라고 하며 그가 음악에 뛰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역대 15-16; 23,5; 에즈 3,10는 성전 전례를 체계적으로 자리 잡게 한 이라고 추켜세웁니다.

 

다양한 재능을 지닌 뛰어난 이, 다윗, 그의 생애는 널뛰기하듯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다시 깊은 구렁까지 떨어졌다가 올라오기까지 그 굴곡만큼 다채로웠습니다. 그러한 삶의 과정은 그의 혈통이나 배경이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선택, 곧 주님의 은총(카리스마)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 주님의 선택은 그의 잘잘못에 따라 이어지거나 거두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로 질책의 말이 주어지지만, 주님의 선택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에게 머물렀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선택은 단 한 번이지만 영원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선택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무상의 선물,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2018년 9월 2일 연중 제22주일 의정부주보 7-8면,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선교사목국 성서사목부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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