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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기 바오로(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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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이도기 바오로 (李道起 Paul)
축일 5월 29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도공,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743-1798년
같은이름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이 바오로, 이바오로, 파울로, 파울루스,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이도기 바오로의 옥중에서의 삶과 신앙의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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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9-16 조회수385 추천수0

이도기(바오로)의 옥중에서의 삶과 신앙의 증거 (1)

 

 

옛날 조선시대 천주교 신자들은 무엇 때문에 죽었을까요? 초창기 한국 교회는 선각자들이 새로운 문물을 접하며 알게된 천주교를 신학문으로 받아들이며 시작되었습니다(여기에서 말하는 선각자(先覺者)는 앞서서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 그러나 선각자들은 거기에 구원의 신비가 담긴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기에 자기들의 생각과 오랜 전통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 교회를 떠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힘없는 사람들만 교회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 남아있는 신자들은 자신들이 살던 마을에서 살지 못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살면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사제를 모셔 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습니다. 그 놀라운 노력의 결실로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에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가 임명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방’ 신부가 들어오고, ‘샤스탕’ 신부가 들어오고, 또 제2대 조선교구장으로 ‘앵베르’ 주교도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기쁨을 누릴 만도 한데 이것을 깡그리 무너뜨리는 박해가 일어납니다. 1830년대 후반 기해박해 때는 정치 세력의 주도권이 안동 김씨에서 풍양 조씨로 옮겨 가면서 자기들의 세력을 확고히 거머쥐기 위해 상대를 견제합니다. 그 견제 방법이 사학을 탄압한다는 명분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다가 죽이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새로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천주교 탄압을 공식적으로 시작합니다. “당신 천주교 신자지?” 하면서 무조건 잡아다가 고문과 매질을 하며 옥에 가두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박해가 시작되어 무수한 순교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을 나라에 대해서 원망을 품은 사람들, 또 세상을 변혁시키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산속에 무리를 지어 숨어 사는 불순분자들이라고 부르면서 천주교 탄압이 자연스레 이루어졌습니다. 이때부터 교회가 자꾸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처럼 정치적 싸움에서 정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천주교 신자들이 잡혀가서 희생을 당하고 순교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간혹, 한국의 천주교 박해를 당파 싸움의 결과라고 혼동하기도 하였습니다. 박해의 정치적 배경이 당파 싸움인 것은 사실이지만, 천주교 신자들이 죽은 이유는 분명 신앙 때문입니다.

 

이 시기 많은 순교자들 중에 이도기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1743년 충청도 청양에서 태어난 이도기는 본래 글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천주교의 덕행만은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이 50이 되던 해에 가족들에게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집을 떠나련다. 내가 만약 다시 돌아온다면 지금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다.”라며 떠납니다.

 

이도기는 서울로 와서 김범우 등과 만나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고 ‘바오로’라는 본명으로 영세 입교하였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1년 만에 돌아갑니다. [2018년 9월 9일 연중 제23주일 가톨릭제주 4면, 김종근 요셉(정난주본당)]

 

 

이도기(바오로)의 옥중에서의 삶과 신앙의 증거 (2)

 

 

과연 그의 모습은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사는 게 기쁨에 넘쳐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할 때 진실되고 소박하며 간절한 모습으로 말합니다. 그러면서 천주교 교리를 전합니다.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한창 박해가 가해질 때입니다. 1797년 이도기(바오로)의 나이 54세가 되었을 때, 정사박해가 일어나, 공주 부윤이 그를 잡아들여 문초를 합니다.

 

지금부터 이도기(바오로)의 옥중에서의 삶과 신앙의 증거 내용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관장은 이도기(바오로)에게 매질과 갖은 문초를 하면서 “네가 천학을 한다던데 그게 사실이냐?” 그렇다고 대답하면 “너는 어찌하여 사학을 하게 되었느냐?”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이도기(바오로)는 “나는 사학을 한 적이 없고 앞에 말한 대로 천학을 했다.”고 분명히 밝히죠. 그러면 관장이 조목조목 따집니다. 논어와 맹자에 있는 성현의 가르침을 얘기하면서 효와 충의 문제를 묻습니다. 이도기(바오로)는 십계명과 칠극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명쾌하게 대답합니다. 심문하는 공주 부윤이 말문이 막히니까 “예의가 없다, 무례하다”며 매질을 하며 하옥시키라고 명령하죠.

 

그날 저녁에 관장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화도 나고 자존심도 상하지만 이도기(바오로)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여 벌줄 생각이 별로 없지만 국법을 어길 수는 없었습니다. 관장이 곰곰이 생각 끝에 이도기(바오로)를 살려줄 방법으로 포졸을 불러 적당히 일러줍니다. 포졸이 눈치를 채고 옥문을 잠그지 않고 못 본 척하고 돌아서 있습니다. 한참 후에 확인해보니 이도기(바오로)는 옥중에 점잖게 앉아 있었습니다. 포졸은 저 사람이 옥문이 열려있는 줄 모르는가 보다 하고 한참 후에 “이쯤되면 충분히 도망쳤겠지” 하고 다시 한번 확인해 보니 아직도 그냥 버티고 앉아 있었습니다. 포졸이 이도기(바오로)에게 “아이고, 이 답답한 친구야. 당신이 천주교를 믿는지 어쩐지 모르지만, 사람이 세상을 살려면 눈치가 있어야지.” 하며 비웃습니다.

 

그때 이도기(바오로)는 조용히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이보시오, 당신은 죄수를 지킴으로써 국록을 먹지 않소. 당신은 죄수나 잘 지키시오.” 그러자 포졸이 “아따 그 양반, 눈치코치 없는 사람이 말은 잘하네. 그렇게 버티고 앉아 잘난 척 하다간 매 맞아 죽기 딱 알맞지.” 그때 이도기(바오로)가 또 말합니다. “내가 매 맞아 죽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내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 하고 말합니다. 포졸이 어이가 없어 할 말이 없습니다. 이때부터 갖은 매질과 고문이 다시 이어집니다. 그 방법은 억장이 무너져 말로 다 못할 정도입니다. 그래도 이도기(바오로)는 아무 소리 없이 지극히 온화한 모습으로 옥중에서 견디어 냅니다. [2018년 9월 16일 연중 제24주일 가톨릭제주 4면, 김종근 요셉(정난주본당)]

 

 

이도기(바오로)의 옥중에서의 삶과 신앙의 증거 (3)

 

 

조선시대 옥중 생활은 인권이고 뭐고 없을뿐더러, 옥 바닥은 맨 흙이고, 바람 막을 벽도 없거니와, 나무 창살로 겨울 추위가 그대로 느껴집니다. 그나마 겨우 굶어 죽지 않을 만큼 나오는 음식은 중간에서 관리들이 차례로 떼먹습니다. 그러니 죄수한테 음식이 갈 리가 없지요. 먹을 걸 잘 안 주니 옥중에서 거의 굶어 죽습니다. 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가족들이 음식을 넣어 주기도 하는데, 이도기(바오로)의 부인도 남편이 굶어 죽지 않도록 사식을 넣어 주고 갈아입을 옷도 넣어 줍니다.

 

어느 날 이도기(바오로)가 부인을 불러서 말합니다. “부인, 나 때문에 번거로움이 많소. 이제 괘념 말고 면회 오지 마시오.” 부인이 매우 난감해 합니다. 남편이 면회 오지 말란다고 굶어 죽을 걸 뻔히 알면서 면회 가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남편 몰래 살짝 와서 먹을 걸 계속 넣어 주죠. 이도기(바오로)는 자기 부인이 오지 말라고 해도 계속 오는 걸 압니다.

 

어느 날, 이도기(바오로)가 다시 부인을 불러 옷자락을 들춰서 상처를 보여 줍니다. 먼저 맞은 상처는 썩어가고, 새로 생긴 상처는 피가 흐르며, 뼈가 으깨져서 그 살갗 속이 나와 있어 차마 볼 수 없는 그 상처를 보여 주면서 말합니다. “부인, 보시오. 나도 사람인데 이 상처가 어찌 아프지 않겠소. 그러나, 내가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만큼은 고통을 잊을 수 있소. 그런데 부인이 오시면, 나 또한 사랑하는 내 아내를 바라보지 않을 수 있겠소. 내가 당신을 바라보면 아내를 보는 기쁨을 누리지만 이 상처의 고통은 이겨낼 수 없으니 이제는 면회 오지 마시오.” 부인은 그때서야 남편이 왜 면회 오지 말라고 하는지 알아듣고 면회 가지 않습니다.

 

한 달여 날이 지난 뒤에 포졸이 이도기(바오로) 부인에게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줍니다. 부인이 남편의 소식을 듣고 슬피 울 때, 그 포졸이 부인을 위로하는 말들 중에 이런 말이 들어 있습니다. “부인, 슬퍼하지 마시오. 당신 남편이 죽던 그 밤에 찬란한 빛이 당신 남편의 시신에 어리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천주교 신자가 아닌 포졸이 그 아름다운 모습을 증언하게 됩니다. 이들은 분명히 증거자가 아니겠습니까? 이게 바로 거룩한 체험이고 은총의 체험입니다.

 

저는 이 내용을 정리하면서 이도기(바오로)를 비롯하여 순교하신 분들이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이 세상의 어떤 고통도 잊을 수 있는 이러한 신앙, 이러한 증거가 한국 교회 역사를 이끌고 가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순교자 성월을 보내며, 우리 신앙의 밑거름이신 순교자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의 신앙과 순교 정신을 본받고자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2018년 9월 23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가톨릭제주 4면, 김종근 요셉(정난주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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