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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이 루갈다(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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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이순이 루갈다 (李順伊 Lutgarda)
축일 5월 29일
성인구분 복녀
신분 양반, 동정 부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782-1802년
같은이름 누갈다, 누갈따, 루갈따, 루트가르다, 루트가르디스, 룻가르다, 룻가르디스, 이 루갈다, 이루갈다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한국 교회사 속 여성: 동정 부부 - 유중철 · 이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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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11-26 조회수19 추천수0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순조(교회 재건기)] 동정 부부 (1) 유중철 · 이순이

 

 

신유박해 뒤 폐허에서 교회를 재건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신자들 생활에서 교우촌, 동정, 대소재 지키기 등이 주목된다. 한국 교회는 일찍부터 동정 생활을 추구했다. 신자들은, 육체에 갇혀 세속에 살면서 동정을 지키는 이는 본성이 동정인 천사보다 우월하다고 배웠다(「칠극」 참조). 동정으로 맑은 영혼(지혜)을 지니고 애덕을 실천하는 힘을 얻고자 했다. ‘잠시나마 천사로 가장한 인간들’이 되기를 원하는 이가 많았다.

 

그런데 당시 사회가 ‘동정 생활’을 인정하지 않아서 신자들은 동정을 지키는 삶의 방편을 고안했다. 신유박해 순교자 윤점혜와 정순매 등은 머리에 쪽을 찌고 과부라 했다. 이런 과정에서 동정 부부가 탄생했다.

 

초기 신자들이 읽었던 「칠극」에도 그 예가 있다. 부모에 의해 강제로 출가한 성녀 체칠리아는 남편을 설득하여 동정을 지켰다. 또 수도자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이 부모의 명에 의해 혼인했는데, 첫날 신부를 교화하여 남매처럼 10년을 살았다. 그리고는 각자 헤어져 수도원에 입회하려고 찾아갔다. 우리가 다룰 부부도 부모가 돌아가신 뒤 헤어져서 애덕을 실천하자고 약속했었다.

 

 

숲정이에서 치명자 산까지

 

우리 교회에서는 ‘피 묻은 쌍백합’(동정 부부) 두 쌍이 알려져 있다. 첫 ‘쌍백합’은 주문모 신부가 맺어 준 전주의 유중철(1779-1801년)과 서울의 이순이(1782-1802년) 부부였다. 이순이는 1797년 가을에 혼인성사를 하고 전주 초남리로 들어갔다. 이들 부부는 신유박해 순교자가 되었다.

 

유중철이 1801년 봄 체포되어 전주옥에 갇혔다. 9월 중순에는 이순이를 비롯하여 다른 가족도 모두 체포되었다. 그리고 그해 11월 14일 유중철은 동생과 함께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그들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순이는 혹시라도 남편이 마지막 순간에 순교하지 못했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며칠 후 시신을 거두러 갔던 사람이 발견한 쪽지가 있었다. 유중철의 옷 속에서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고 이순이에게 쓴 글이 발견되었다. 이순이는 1802년 1월 31일 다른 가족 3명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되었다. 다른 가족들은 이미 처형되었거나 유배 가는 등 이리저리 흩어졌다.

 

유항검의 가족이 전멸된 뒤 가산은 물론, 마름과 노복마저 몰수되거나 유배를 떠났다. 당시 유항검과 연루된 신자가 200여 명이나 체포되었으니 그들을 도울 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그들의 삶의 지향이 울림이 있었는지, 누군가 이때 약 4개월에 걸쳐 각각 처형된 사람들을 김제군의 재남리 야산 비탈에 묻어 주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그 땅이 일본인 소유가 되어 묘를 파내겠다고 하자, 신자들이  전동성당  보두네  신부(Baudounet, 1859-1915년)에게 알렸다. 보두네 신부는 1914년 유항검을 비롯하여 식구 7명의 유해를 각각 옹기에 담아, 인적 사항을 기록한 백사발에 넣고 숯으로 채워, 전동성당이 마주 보이는 치명자 산에 모셨다.

 

보두네 신부는 유항검 등 순교자가 참수 치명한 풍남문 일대에 1908년부터 전동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1914년에 외형 공사를 마쳤다. 그리고 그는 전동 성당이 마주 보이는 곳에 묻히기를 원해서 치명자 산의 땅을 마련했다. 이로써 이 땅에 순교자들의 유해가 쉬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듬해 선종해서 순교자들 하단에 묻혔다.

 

그 뒤 전주교구는 시복 시성을 준비하면서 1993년에 이 봉분을 열어 유해를 확인하고 다시 새 백자 항아리에 담아 매장했다. 이렇게 유중철 일가 순교자들은 200년 동안 사람들에 의해 보전, 전수되고 확인되어 왔다.

 

 

동정 부부는 서로에게 걸림돌인가?

 

동정과 혼인은 서로 모순된다. 「칠극」에 “소금은 본디 물과 같으나 물과 섞으면 변하고, 따로 있으면 그 성질을 보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남녀가 정결하다 할지라도 가까이하면 변하는(더럽혀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혼자 동정을 지키기도 힘든데, 믿고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함께 있으면서 동정을 지키기는 더 힘들었을지 모른다.

 

이순이 부부는 4년을 동거하면서 오누이로 지냈다. 동정 서원을 깨뜨릴 뻔한 유혹을 10여 차례 겪었다. 특히 1800년 12월에는 심한 유혹을 느껴 ‘마음이 살얼음판 위를 걷거나 절벽 위에 서 있는 것처럼’ 곤경에 처했었다. 그러나 피나도록 간구하여 천주의 도우심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이 일이 있은 뒤 이들의 신뢰심은 오히려 더 철석같이 굳어졌고, 이들의 사랑과 성실은 태산처럼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곧 동정 부부도 어려움을 이겨내고 나면 서로에게 더 반석 같은 격려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얻은 힘으로 젊은 데도 이미 세속의 모든 허영을 가볍게 여길 줄 알았으며 애덕을 실천했다. 그야말로 하느님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의 결실을 맺는 동정 생활 본연의 목적을 실현해 냈다. 그리하여 ‘모든 순교자 가운데 우뚝 솟은 진주’가 되었다.

 

그래도 인간이 천사가 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무덤에서 나온, 이순이가 평생 지니고 있던 묵주에 달린 십자고상은 그 몸체가 다 닳아 문드러져 있었다. 끝없는 기도의 동반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순이의 옥중 편지

 

이순이는 옥중에서 어머니와 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초기 교회의 신입교우였고, 성사도 두세 번밖에 받지 못했지만, 그의 붓끝은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신심과 생활을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다블뤼 주교는 이 서한을 수집했고, 1874년 출간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이 서간의 전문이 실렸다. 그러나 한글로 된 원본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었다.

 

그런데 1955년 여름, 원본에 가까운 필사본이 나타났다. 1868년 경남도 울산에서 순교한 김종륜 복자가 친히 복사하여 소지했던 수택본이었다. 김종륜의 손자 김병옥이 필사본 「옥중서간」 1권과 「사후묵상」, 「신명초행」 등을 김구정에게 기증했다. 박해 시기 신자들이 이루갈다의 옥중 서간을 필사해서 읽었는데, 이 필사본은 결과적으로 순교자가 직접 필사해서 지니고 있던 편지가 되었다.

 

이 옥중 서간은 뒷날 김구정이 김진소 신부에게 헌정해서 현재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이 편지는 동정 부부가 육체적 절제로 얻은 영성, 또 동정 부부가 탄생하도록 도운 부모와 친지, 이웃들의 희생을 담아, 박해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신자들의 진정한 삶, 특히 남녀 상호 존중의 길을 비추고 있다.

 

*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 교수이며 대구 문화재 위원과 경북여성개발정책연구원 인사 위원을 맡고 있다.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회 위원이며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 연구원이다. 한국가톨릭아카데미 겸임 교수를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9년 11월호,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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